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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료

  • [활동가 기본교육-교재 1] 정당.정치론 : 민주주의에서 정당까지 (박상훈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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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교육연수원 : 활동가 기본교육 교재 1

민주주의 정당.정치론  <민주주의는 왜 좋은 정당을 필요로 하는가>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1. 불안정한 의견 위에 서 있는 민주주의
 
1) 인간이 만든 정치체제 가운데 민주주의만이 유일하게 ‘목적을 전제하지 않은 체제’로 불린다. 민주주의에서만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목적을 시민이 참여하는 공적 논의를 거쳐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민주주의란 시민 모두가 의견을 가질 권리를 향유하는 체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고 나선 사람은 플라톤이었다.
 
2) 플라톤은 대중의 불안정한 의견에 의존한다는 이유에서 민주주의를 나쁜 체제로 보았다.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빗대, 아테네 민주주의는 “철학자를 살해하는 죄”를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불안정한 의견이 아니라 확고한 진리 위에 체제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 그가 주창한 것은, 참된 진리를 파악 할 수 있는 ‘철학자 왕’ 내지 교육받은 소수 엘리트에 의한 지배였다. 민주주의자라면 플라톤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제기한 문제, 즉 ‘시민의 불완전한 의견에 기초를 둔 공적 결정의 체계가 과연 잘 작동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적절한 답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3) 무엇보다도 소수의 엘리트나 지식인들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그 어떤 참된 지식이나 실질적 가치가 있지 않음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냐 아니냐를 구분짓는 것은 공적 논의와 결정의 과정에 평등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절차적 조건’이 어떠냐에 달려 있다는 것, 민주주의의 출발은 거기에서부터다. 민주주의의 이상적 조건 역시 ‘내용’이나 ‘실질’에 있는 것이 아닌 ‘절차’에 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한, 민주주의를 해서 좋아지기보다는 서로가 생각하는 실질과 내용에 따라 분열과 상처만 심화될 뿐이다. 한마디로 말해 ‘절차적 민주주의’를 저열한 것으로 비판하면서 그보다 높은 수준의 ‘실질적 민주주의론’을 앞세우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오류가 아닐 수 없다.
 
4) 우리가 탐구해야 할 것은 어떤 조건에서 의견의 자유가 전체 이익 내지 공익적 결정과 양립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진보적인 정치학의 전통에서 그 핵심은 ‘사회적 힘의 균형’에 있다. 사회적 힘이란 집단(groups), 즉 조직화된 세력 내지 자율적 결사체를 가리킨다. 한마디로 말해, 시민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으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하며, 이들 시민집단 사이의 힘의 균형 위에서 민주정치가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건축물의 토대를 이루는 단단한 기반처럼 시민 개개인이 다양한 집단으로 결속되어 있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듯 복수의 공적 의견을 조직한 정당들이 경합할 때 민주주의는 그 이상에 가깝게 실천될 수 있다. 이런 이론적 기초 위에서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경제적 불평등 효과를 제어하고 노사를 포함한 주요 생산자 집단들 사이의 힘의 균형을 다루는 ‘경제 민주주의론’을 개척할 수 있다. 요컨대 현대 민주주의란 사회 집단과 정치 조직을 포함한 결사체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시민 참여와 정치적 의견 형성 과정으로 요약될 수 있다.
 
5) 이런 기준에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를 들여다보라. 그러면 국가와 개인 사이가 텅 빈 공간처럼 다가온다. 결사와 집단으로서의 시민 참여는 거의 없다. 국가와 개인 사이의 그 빈 공간을 누가 지배하는가? 주류 언론과 행정관료제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와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에서도, 국가와 개인 사이의 공허한 공간을 주도했던 권력은 이들이었다. 이들에 의해 사회적 의견이 주도되는 과정에서 시민 개개인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황은 늘 반복되었다. 언론과 행정이 유능하고 책임감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무능하고 무책임함에도 위기 때마다 이들의 존재가 더욱더 크게 부각될 수밖에 없는 것은, 시민 개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달리 의존할 수 있는 대안적 판단의 원천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대안적 정보와 의견을 공유할 다양한 중간집단에 결속되어 있는 시민의 규모가 형편없이 작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민은 행정권력과 언론권력에 욕하면서도 매달릴 수밖에 없다.
 
6) 사실이 더 많이 알려지고 투명하게 공개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옳고 정확한 사실은 어딘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 해석되고 판단되는 사회적 과정이 어떠냐 하는 데 있다. 민주주의도 일종의 정보처리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정보가 선별되고 교환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집단과 조직, 결사체들이 역할을 해야 하고, 시민 개개인 역시 이 과정에 결속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시민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의견을 통해, 좀 더 저렴한 비용으로 정보를 얻고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공적 판단을 가질 수 있고, 또 그래야 언론과 행정의 기능에 수동적인 소비자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다. 중대한 사안일수록 더욱 그렇다.
 
7) 사회적 힘의 균형을 말하기 이전에 국가와 개인 사이가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지금의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 한, 민주주의의 발전은 없다. 이런 민주주의에서 시민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욕할 자유뿐이다. 그러면 시민성은 더 사나워지고 사회는 더 분열될 수밖에 없다. 정당도 마찬가지다. 당내 조직화된 복수의 의견집단이 좋아야 하고 이들 사이의 경쟁이 민주적 효과를 가져야 발전한다.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해서 민주주의를 하게 되었다면, 그런 민주주의를 잘 다룰 방법을 익혀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죽고 살 일이 아니라, 좀 더 좋은 사회 속에서 개개인의 삶을 좀 더 보람 있게 영위해가기 위해 민주적 가치와 제도를 어떻게 더 잘 활용할지를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사회적, 집단적, 조직적 실력만큼 민주주의도 발전한다.
 
 
2. 평범한 보통의 시민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
 
1) 베버가 말했듯, 정치의 고향은 민주정이다. 정치 없는 민주정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민주정이 지향하는 최고의 이상은 공적인 문제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특정 시민 집단의 우월성이 인정되지 않는 것에 있었다. 자신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자유 시민 스스로가 최고의 심판관이며, 공적 결정 역시 그렇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에서 자치(self-rule/self-government)의 이상이 만들어졌다. 실제로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위험한 선택은 ‘보통의 시민들이 가진 불완전한 의견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 체제’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시대정신이나 민족공동체의 이상, 나아가 역사발전의 최종적 목적지를 알고 있다고 믿는 ‘완전한 사람들이 주도한 민주적으로 불완전한 체제’에서 가장 파괴적인 결정이 이뤄졌다. 따라서 민주주의 체제가 설령 다소 시끄럽고 때로 기대만큼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관용해야 할 이유가 있다.
 
2) 흔히들 민주주의를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갖는 "한계"와 동시에 "위대함"에 기초를 두는 정치체제라 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이뤄내는 비범한 성취"야말로 민주주의가 가진 최고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 사사로운 편견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자신과 가족의 안위에 연연한다 하더라도, 가난한 보통사람들 모두 평등한 시민권을 갖는 민주주의 체제가 그렇지 않은 체제보다 윤리적으로나 실제 결과에 있어서 우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3) 보통의 시민을 가르쳐서 민주주의를 좋게 하려는 열정이 과도하면 의도와는 달리 부작용이 클 때가 많다. 시민 교육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때로 좀 지나치다 싶을 때가 있다. 시민 일반을 대상으로 정의와 양심을 소리 높여 요구하는 사람들을 보면 특히 그렇다. 시민은 하나의 동질적 존재가 아니라 여러 집단으로 다양하게 나뉘어 움직인다. 각각의 시민 집단들이 처한 현실과 그들이 힘들어하는 이유도 서로 다르다. 보통의 시민들은 그런 구체적인 상황에서 각기 다른 이익과 요구를 갖고 살고 있기에, 사실 최고의 시민 교육은 그런 그들을 나눠서 조직하는 데 있다. 강의하고 강의 듣는 게 아니라 참여하고 조직하는 것, 민주주의 교육의 핵심은 늘 거기에 있다!
 
4) 스스로 조직하고 스스로 교육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까지가 공적 역할이고, 그 다음은 시민 집단 스스로 해야 한다. 정부가 모든 일을 다해주는 것? 그건 좋은 정치 비전이 될 수 없다. 각자의 삶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다만 그런 개인 삶이 가능하도록 공정한 사회 기반을 만들고 관리해 주는 것을 정부나 정치의 역할에 기대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서로 다른 개인, 서로 다른 시민 집단이 각자의 개성적 노력으로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서로가 달리 조직되고 달리 대표될 수밖에 없는 복수의 시민집단 속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화된 시민을 하나의 전체로 호명하면서 그들 앞에 서서 그들 모두를 대변하는 듯이 공허한 논설을 말하는 것을 시민 교육이라고 말한다면, 글쎄 솔직히 잘 모르겠다. 거기에 어떤 유익함이 있는지 말이다.
 
5) 평범한 보통 사람들보다 교육받은 중산층들이 더 편협하고 또 이데올로기에 더 취약하다. 편견과 고정관념, 허위의식에 더 잘 빠지는 것도 그들이다. 그들은 실제 삶의 경험된 현실보다 관념과 의식을 통해 사유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평범한 관점이 그 어떤 철학자나 개념 시민의 편향된 판단보다 훨씬 더 나을 때도 많다. 판단의 옮음을 독점할 수 있는 사람이나 집단이 있다고 믿을 수는 없다.
 
6) 오래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한 진보 정당에 가입한 뒤 지역 모임에 갔다 와서는 “자신이 거기에 끼면 뭔가 어색할 것 같아 그 뒤에는 모임에 나가는 걸 포기했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보수는 스스로를 보수라고 내세우지 않는 데 반해 진보 쪽 사람들은 진보적임을 앞세우는 일을 즐기는 것 같다.”라고 말했는데, 내가 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물론 그런 인상을 갖게 만드는 진보파가 다수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들 몇 안 되는 인사들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고 그들과 같이 일하려 하기보다, 그들을 가르치려 들면서 발언을 주도하려 드는 것이 문제다. 그들이 자신의 발언권을 고집하면서 때로 ‘평당원 민주주의’를 앞세우곤 했는데, 엄밀히 말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진보파 엘리트로서 스스로의 지적 허영을 과시하며 다수에게 자신의 의견을 부과 내지 강요하려는 독선에 가깝다. 발언권의 평등이 아니라 반대로 발언권을 독점하려는 그런 당원이 방치되는 정당은 성장하지 못한다. 보통의 일반 당원들이 작은 요구를 모아낼 기회를 억압하는 결과만 낳기 때문이다.
 
7) 진보적 이론을 앞세우고 그것만이 옳은 듯이 강변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어둡고 ‘자기 기만적’이다. 그런 ‘진보 사투리’가 지배하는 대화 속에서 ‘진보 우월주의’를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을 했으면 한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세계가 갖는 풍부함을 이해하고 그 곳에서 편안하고 익숙하게 대화할 수 있는 진보파가 나날이 늘어나기를 바란다. 말 많은 소수가 아무리 옳은 소리를 높이 낸다 해도 그것으로 달라지는 일은 별로 없다. 평균적 한계를 가진 보통의 여러 사람들 속에서 ‘작은 소리를 모아 굵고 깊은 소리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민주주의자다. 민주주의는 누가 뭐라 한들, ‘평범한 보통사람들에 의한, 그들을 위한, 그들의 정치체제’이다!
3. 시민과 대표의 협력체계로서 현대 민주주의
 
1) 민주 정치와 시민성 : 민주주의에 대한 흔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민주주의가 잘되고 안 되는 것의 책임을 시민에게서 찾는 데 있다. ‘정치의 수준은 그 나라 시민의 수준이 결정한다’라며 ‘시민들 수준이 이런데 뭘 더 바라느냐.’라는 힐난이 대표적이다. 시민을 야단치고 가르쳐서 민주주의를 좋게 하려는 접근이 과도하면 인간의 실제 현실 속에서 좌절하기 쉽다. 정치학은 ‘좋은 정치가 좋은 시민을 만든다.’는 자각에서 시작된 학문이다. 정치의 역할은 시민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확대하는 데 있다. 좋은 정치란 시민성의 질과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00년 전만 해도 스웨덴은 유럽에서 가장 못 살고, 학력 수준도 가장 낮은 나라였다. 문화라고 하면 거의 음주밖에 없는 정도였다. 그런 나라를 지금처럼 바꾼 것은 정치의 힘이었다. 정치의 힘을 통해 사회를 좋게 만드는 것에 비례해서 지금과 같은 시민성을 갖게 되었지, 처음부터 스웨덴의 시민성이 대단해서 오늘날의 스웨덴이 된 것이 아니다.
 
2) 대표와 엘리트 :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말할 때 고대 아테네민주주의의 이념과 원리를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 민주주의는 고대 민주주의와는 아주 다른 정치 체제이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여성과 노동자를 배제한 채 전체 인구의 8분의 1에서 9분의 1의 남성 중산층들에게만 시민권을 주었던 아테네 민주주의를 결코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2500년 전의 아테네 시민이 타임머신을 타고 와 지금의 민주주의를 본다면, ‘어떻게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떻게 시민을 대신해 정치와 행정, 법원을 운영하는 직업적 공직자들이 있을 수 있는가?’, ‘정치로부터 자율적인 시민사회는 무엇이고 또 여론 형성자의 역할을 대신하는 언론 엘리트와 사회운동 엘리트들의 권위는 대체 누가 부여했는가?’라며 이런 민주주의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이렇듯 현대 민주주의는 정말로 고대 민주주의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정치체제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민중의 지배가 아니라, 토머스 제퍼슨이 말했듯 ‘민중의 동의에 의한 대표들의 지배’라고 할 수 있고, ????절반의 인민주권????의 저자인 샤츠슈나이더가 말했듯 ‘선발된 대표와 대중이 협력하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대표의 질에 의존하는 체제라 하겠다. 따라서 일반 시민의 참여만이 아니라 좋은 정치 엘리트, 좋은 행정 엘리트, 좋은 법률 엘리트, 나아가 좋은 언론 엘리트, 기업 엘리트, 노조지도자, 교사, 시민운동 활동가 등등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 현대 민주주의이다.
 
3) 제도와 체계 : 현대 민주정은 여러 제도화된 기능과 역할의 체계 위에서 작동한다. 고대 민주정은 일종의 자족적 체제였다. 행정과 정치는 구분되지 않았다. 행정관도 추첨으로 선출되었고 연임은 할 수 없었으며 임기도 1년으로 짧았다. 당연히 전문 관료제도 없었고, 독립된 제도적 실체로서 국가도 없었다. 독립된 법원도 없었고, 정당도 없었고 시민사회도 없었다. 모든 것은 시민들 개개인이 돌아가면서 통치자, 행정관, 법관의 역할을 맡는, 일종의 일원체제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고대 민주주의에서는 시민이 참여하는 것만으로 체제가 작동했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그런 경우라면 시민의 각성과 깨어있음 그리고 참여를 강조하는 것으로 많은 정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고대 민주주의는 매우 작은 규모의 도시국가, 매우 동질적인 시민구성 위에서 작동했던 매우 특별한 체제라고 할 수 있다. 현대 민주주의는 이와는 다르다. 현대 민주정에서도 정치가들이 갖는 개성이나 자질, 리더십이 중요하다면 그때의 그것은 대규모의 복잡한 체계를 이해하고 움직이는 실력과 결합되어야 한다. 보통사람들의 의지와 이해관계, 열정을 정치적으로 조직하고 대표하고 투입해 공공 정책 결정과정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복잡한 제도와 절차의 체계를 익숙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
 
4) 국가와 관료제 : 행정이 전문직이자 독립된 직업이 된 것은 국가(state)의 등장 이후라 할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16세기 말 이후라 할 수 있다. 이때의 국가란 통치자와 피통치자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는, 제도화된 실체를 가리킨다. 국가는 일정한 입헌적 기초를 가지며, 시민은 물론 대통령과 같은 통치자조차도 충성을 바치는 최고의 주권 권력이자 특별한 윤리성을 가진 비인격적 실체라 할 수 있다. 그 이전까지 라틴어의 stato, 영어의 state, 독일어의 staat는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가리키는 단순한 개념이었고, 동양에서 국가(國家)란 사실상 왕조를 뜻하는 것이었을 뿐, 오늘날과 같은 의미는 아니었다. 국제관계에서 (영토) 국가 개념이 등장한 것은 17세기 중엽, 즉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근대 국가의 등장은 이원적 운동을 만들어냈는데, 하나가 ‘합리화’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화’였다. 합리화가 행정의 직업화를 가져왔다면 민주화는 정치의 직업화를 가져왔다. 과거에는 글을 읽을 수 있고 교육을 받은 귀족/양반이나 성직자가 왕이나 제후를 행정적으로 돕기는 했어도, 오늘날과 같은 전문 직업 행정 관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근대 국가의 발전은 곧 행정 관료제의 전문화와 합리화를 동반했는데, 그러면서 재정과 사법, 군사 분야의 행정을 독립된 업무이자 직업으로 갖는 국가 관료제가 거대한 규모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일정한 공적 선발제도에 의해 뽑히고, 일정한 견습 단계를 거치며, 파당적 요구에 따라 해임되지 않는 정년 직을 갖게 되었다. 인간이 만든 조직 가운데 현대 관료제만큼 크고 체계화되고 합리화된 기구는 없다. 오늘의 민주주의는 바로 이런 대규모의 국가 관료제가 있는 전제 위에서 실천되고 있는데, 이들을 지휘할 조직화된 능력 없이 민주주의가 그 가치에 가깝게 실천될 수는 없다.
 
5) 정치의 직업화와 정당 : 정치의 직업화는 정당의 등장과 병행되는 현상이었다. 이는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확대되었고 그러면서 국가의 모든 지위에 대한 문민 통치(civilian control)의 원칙을 만들어냈다. 행정 관료는 선출직 정치인을 통해 통제되었을 뿐 아니라, 정무직이라고 하는 정치 관료도 만들어졌다. 독립적 직업 관료와는 달리 이들은 파당적 필요나 요구에 따라 언제든 해임, 전보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물론 관료화 내지 독립적 행정직은 비단 국가 내지 정부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정당도 조직이 커지는 것에 비례해 합리화의 압박에 직면했고 관료화가 되었다. 이것은 단지 정당 조직이 커지는 것에 따른 결과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정당이 정부가 되면서, 정당 역시 하나의 통치조직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민주화는 (1) 최초 보통선거권 획득 운동에서 시작해, (2) 가난한 시민들도 정당을 만들어 자신들의 이익과 열정을 대표할 정치가 집단을 형성하는 대중정당 단계를 거쳐, (3) 자체적으로 정책 전문가와 유능한 정당 관료를 육성해 집권하는 정당정부(party government)를 향해 발전하게 되었다. 결국 직업으로서의 행정 관료제의 역할이 공익적 보람을 가질 뿐 아니라 사회를 위해 유능하고 책임 있는 역할을 하게 하는 데 있어서도 통치자 집단으로서 좋은 정당이 발휘하는 좋은 정치의 역할이 결정적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좋은 정당 정치가 없다면 사회로부터 멀어지려 하는 국가관료제를 민주적으로 지휘하고 통제할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4. 현대 민주주의의 실천 규범
 
1) 공익에 대한 경쟁적 헌신 : 현대의 다원화된 사회에서 공익 내지 공공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분명하게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익이나 공공선을 앞세워 실제로는 자신들의 사익이나 집단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위장하는 것이 더 나쁠 수 있다. 이런 판단이 실제의 정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당 정치의 모든 것은 아니다. 파당이나 이익집단과는 달리 정당들은 누가 더 공익을 더 잘 대변할 수 있느냐로 경쟁하는 공적 세력이고, 그런 역할을 잘할 수 있어야 시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고 집권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익집단이나 사회운동과는 달리) 정당은 사회, 경제, 문화, 교육, 국방 등 사회 전체의 공적 기능 모두에 대한 정책적 대안을 갖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는 유일한 인간 조직이다. 그렇기에 현대 다원사회에서조차 공익이나 공공선 나아가 공동체의 전체 이익이 무엇인지가 계속해서 정의돼야 하고, 이를 둘러싸고 정당들이 경쟁해야 민주주의는 의미를 갖는다. 공익에 헌신하고자 하는 열정과 소명의식 없는 정당들의 정치만으로 민주주의가 그 가치에 맞게 실천될 수는 없다. 지금 한국의 정당들은 공익적으로 더 강해지고, 조직적으로 더 튼튼해져야 한다.
 
2) 갈등의 절약과 싸움의 방법 : 인간의 정치에서 싸움과 갈등은 없앨 수 없다. 정치란 인간이 가진 적대와 싸움의 본능을 평화적으로 처리하는 기능을 한다. 정치의 이런 기능 없이 내전이나 무정부 상태를 피할 수 있는 사회는 없다. 인간사에서 공적 선택을 둘러싼 갈등은 제거될 수 없다. 모두가 동일한 의견을 갖도록 하거나 모두를 이타적 존재로 바꿀 수도 없다. 그렇기에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상대 파당을 최대로 욕보이는 것을 정치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의견을 달리하는 동료 시민에게 자기주장의 설득력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하는 데 있어 게으르거나 불성실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렇기에 반대편의 입장을 규정하는 데 있어 거부감을 최소화하는 주장을 개진하는 것이 정치적 싸움의 일차적 규범이 돼야 한다. 정말로 갈등을 절약하고 아껴 써야 한다. 자신이 반대하는 견해를 가진 상대 파당과 내가 속한 파당이 이해하고 있는 것 사이에 의미 있는 수렴 지점이 있는지를 찾으려는 노력이 먼저 있어야 하고, 아무리 합리적인 논의를 해도 차이가 남게 되고 그것이 오해나 편견 때문으로 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면, 그때는 이견을 가진 집단들과 조정을 추구해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고 그래서 민주주의다.
 
3) 개인과 전체의 병행발전 : 국회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국가 예산과 행정 절차를 이해하고 예산과 정책의 연계성을 다루는 문제에 익숙하게 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부처 관료들의 숨은 의도를 파악할 정도가 되려면 재선 국회의원 정도의 경험이 필요하다고도 말한다. 사람 좋다고 해서 좋은 정치가의 역할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가로서의 실력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통치와 관련된 지식을 축적하고 교육하고 체계화할 수 있는 조직의 뒷받침 없이 변화는 어렵다. 개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게 정치다. 조직(organization)은 살아 있는 ‘유기체적 기관’(organ)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말이고, 그 말처럼 유기적인 기능과 구조를 발전시켜야 좋은 효과를 낳는다. 그렇지 못한 기관에서는 비정상세포가 자랄 수밖에 없고 암의 성장과 전이처럼 조직을 망가뜨리는 결과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정당조직이 살아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결정적인 문제이다. 개인의 발전과 전체의 발전이 병행되는 정당 조직을 발전시키는 문제는 핵심 중의 핵심이다. 강한 정당 조직이 작동하지 않으면 의원 개개인의 영화(榮華)만 있을 뿐 가난한 보통사람들의 이해와 열정을 보호하기 어려운 것, 이것이야말로 현대 민주주의의 규범적 토대가 될 핵심 테제가 아닐 수 없다.
 
4) 다원적 정당체계 : 정당정치를 좋게 하는 문제와 관련해 민주주의 이론이 요청하는 평가적 기준은, ‘정당 체계(system)는 다원화되고, 정당 조직(organization)은 유기적이어야 한다’는 데 있다. 정당 체계란 ‘복수의 정당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경쟁과 연합의 패턴’을 가리키는 말이다. 양당제냐 다당제냐 하는 단순한 구분에서부터 일당우위제, 온건다당제, 양극화된 다당제, 제한다당제, 극단다당제 등등 더 세부적인 분류에 이르기까지, 몇 개의 정당들이 어느 정도의 계층적·이념적 대표의 범위를 갖고 상호작용하는가를 말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민주화 혹은 민주정치의 발전이란, 기존에는 협애한 범위에서만 허용되었던 대표의 범위를 사회의 다양한 요구에 상응하는 방향으로 확대하는 데 있다. 개방이나 다원화는 이 차원의 중심 가치라 할 수 있는데, 그런 이유에서 표와 의석 사이의 비례대표성은 높아져야 하고, 기존 정당 체계에서 소외된 사회적 요구들이 정당으로 조직될 수 있는 평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 독과점적 정치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다. 지금도 여전히 한국의 정당 체계는 이념적으로나 계층적으로 더 개방되고 다원화되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5) 강한 정당조직 : 정당 체계가 사회 ‘전체’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면, 정당 조직은 자신들이 대표하는 사회 ‘부분’의 모습을 닮아야 하는 것이 먼저다. 정당 조직의 차원이란 정당 내부에서 권력이 배분되고 작동하는 방식, 즉 조직 내 권위의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고 제도화되어야 하는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말한다. 리더십의 자율성은 얼마나 크고 작은지, 규칙 제정 능력은 어떻게 분산되어 있는지, 재원 형성과 인적 충원의 채널은 누가 통제하는지, 집합적 유인과 선별적 유인 사이의 갈등은 어떻게 조정되는지 등은 정당 조직에 대한 비교 연구에서 늘 초점이 되는 주제들이다. 예컨대 선출직 공직 후보가 조직에서 길러지는지 아니면 정당 밖에서 영입된 외부자로 채워지는지, 정당 운영을 당비로 하는지 아니면 국고지원에 의존하는 바가 큰지, 당원의 역할과 참여 범위는 어떤지 등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하나의 조직으로서 정당이 좋아진다는 것은, 이 여러 문제들이 절차적으로나 제도적으로뿐만 아니라 조직 문화와 규범의 측면에서 안정화됨을 말한다. 민주주의에서 정당이 갖는 미덕은 각기 다양한 수많은 사회적 요구를 몇 개의 단순한 대안으로 집약함으로써 공적 논의와 결정을 최적화하는 데 있다. 정당 조직이 약해지면 그런 집약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정당 조직이 약해지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겠다고 스스로 내건 가치와 정체성은 빈말이 되기 쉽다.
 
6) 지금 한국 민주주의가 필요로 하는 정치적 인간이 누구냐를 묻는다면, 자신의 정당 조직을 더 강하고 튼튼하게 결속시킬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단순화해서 답하고 싶다. 누가 강한 정당을 만들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한국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정치적 인간이 될 것이다. 정당조직은 강하고 정당체계는 다원적이어야 민주주의가 산다.
 
 
5. 정당 친화적인 사회 문화의 중요성
 
1) 현대 민주주의에서 가장 강력한 시민 권력의 조직체는 두말할 것 없이 정당(political party)이다. 정당으로 조직된 시민의 의지가 단단할수록, 그런 정당 간의 경쟁이 사회를 더 넓게 대표할수록, 행정 권력과 경제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시민 권력의 기반은 강해진다. 그럴 때만이 좀 더 균형 있는 공동체를 발전시킬 가능성은 커진다.
 
2) 조직을 싫어하고 정당을 싫어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효과가 평등하게 분배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태도일 때가 많다. 정치 역시 권력 다툼과 전략적 계산에 의해 지배되는 일이 많고 그 속에서 정당이 기능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정당이 중심이 되는 정치를 좋게 만들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를 그 가치에 맞게 실천하기는 어렵다. 오늘날 우리 민주주의의 문제는 ‘대의제 때문’이 아니라 대의제를 민주적 가치에 맞게 제대로 하지 못한 데 있고, ‘정당 때문’이 아니라 민주적 과업을 수행하기에는 지금 정당들이 제대로 조직되어 있지 못한 데 있다고 봐야 한다.
 
3) 민주주의가 어떤 사회적 효과를 낳느냐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은 ‘그 나라의 정당정치가 어떤가’에 달려 있다고 해서, 정당이면 다 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제도도 한계가 있고, 시대와 조건을 초월해 이상적 대안을 말할 수는 없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정당은 끼니에 비유될 수 있다. 민주주의 체제와 그렇지 않은 체제를 복수 정당 체계의 유무로 판단하듯이, 정당은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본질적인 기준이다. 아무리 운동이나 휴식, 명상, 영양제가 건강에 좋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끼니를 대신할 수 없듯이, 민주주의라면 그 어떤 것도 정당을 대신할 수는 없다. 혹자는 지금 정당들의 모습을 보고도 그러느냐고 항변할 수 있겠으나, 기존 정당을 좋게 만들거나 기존 정당보다 더 좋은 정당을 만들지 못한다면 달라질 것은 없다.
 
4) 복수의 정당으로 조직된 그 어떤 의견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되면, 사람들은 정치 전체를 대상화해 냉소적인 말을 쏟아 내기 쉽다. 정치 중립성을 내세우는 언론이나 지식인도 다를 바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심하다. 이견과 차이가 있어야 합의도 조정도 의미가 있다. 처음부터 국민적 합의나 전체 의사를 앞세워 내 주장의 옳음을 강변하면, 목소리는 커지고 갈등은 더 격화될 뿐이다. 민주주의란 의견이 다른 정당이 번갈아 집권하는 체제인데, 당적을 갖는 일을 모두가 회피하는 사회가 된다면 대체 무슨 재주로 민주주의를 좋게 만들 수 있을까? 모두가 당원이 될 이유는 없지만, 지금보다는 좀 더 자유롭게 당원이 되고 당 생활에서 참여의 보람을 찾는 일이 가능했으면 한다. 시민 모두가 초당적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민주주의자의 생각과 거리가 먼 일일뿐 아니라, 그런 사회가 실현된다면 필시 전체주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6. 다시, 갈등과 이견에 대하여
 
1) 많은 사람들이 갈등을 싫어하고 그래서 ‘갈등 극복’을 앞세우며 갈등 없는 사회를 지향한다. 실제로 나에게 이렇게 반론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당에 참여하고 결사체를 만드는 일은 갈등을 불러들이기 쉽다고 생각한다. 갈등을 없애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갈등을 조장하고 부추길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꺼려진다. 특정 입장이나 견해를 갖는 것이 사회를 더 분열시킬 수도 있다고 보는데, 그렇지 않은가?
 
안타깝지만, 인간의 정치에서 싸움과 갈등은 없앨 수 없다. 다만 줄이고 절약할 수는 있다. 갈등을 줄이고 절약하기 위한 접근이 민주주의라고 할 수도 있다. 갈등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존재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2) 현실주의 정치철학의 냉정한 관점에서 보면, 정치란 인간이 가진 싸움의 본능을 처리해 사회가 내전이나 무정부 상태로 퇴락하는 것을 막는 기능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를 ‘갈등을 둘러싼 갈등의 체계’라고 정의하고, 그것의 민주적 성격을 ‘갈등과 통합의 변증법’으로 이해하는 것은 분명 설득력이 있다.
 
3) 오늘날 세계적 비극의 진원지가 되고 있는 시리아를 생각해보자. 더 이상 정치가 기능하지 않게 되었을 때 결과는 내전과 대규모 난민 탈출이었다. 종교나 부족 내지 인종 갈등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치 않다. 그런 갈등은 다른 나라도 있기 때문이다. 갈등 그 자체만 보면 시리아와 덴마크는 차이가 없다. 중요한 것은 갈등을 다룰 구속력 있는 절차나 과정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다시말해 정치의 기능과 역할이 작동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에 있다. 정치가 사라지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된다는 토마스 홉스의 지적은, 시대와 지역을 가로질러 적용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사실이다. 정당도 마찬가지다. 갈등을 다룰 정치의 기능이 있느냐 없느냐 때문에 늘 문제인 것이지 갈등 그 자체에 문제인 것은 아니다.
 
4) 다시 강조하건대, 인간사에서 공적 선택을 둘러싼 갈등은 제거될 수 없다. 모두가 동일한 의견을 갖도록 하거나 모두를 이타적 존재로 바꿀 수도 없다. 인간들 사이의 불완전한 상호 이해는 인간의 정치가 갖는 고질적인 요소다. 그러나 그러한 불일치와 불완전한 이해는 그것에 맞추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할 조건이지 좋은 사회로의 길을 방해하는, 단지 극복돼야 할 장애물이 아니다. 갈등을 없앨 수는 없으나 줄일 수는 있다.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는 갈등조차도 다루기에 따라서는 조정 가능한 공통의 의제로 만들 수 있다. 차이를 없앨 수는 없어도 서로에게 구속력을 갖는 정당한 절차와 과정에 합의할 수는 있다.
 
5) 많은 사람이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상대를 대화 불능자로 규정하곤 한다. 때로 그것은 의견을 달리하는 동료 시민에게 자기주장의 설득력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하는 데 있어 게으르거나 불성실하다는 것을 의미할 때가 많다. 이른바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를 발전시키고자 했던 여러 정치철학자들이 강조하듯, 갈등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민주정치 역시 일정한 규범성을 필요로 한다. 우선 반대편의 입장을 규정하는 데 있어 거부감을 최소화하는 주장을 개진하는 것이다. 둘째로 자신이 반대하는 견해를 가진 상대 파당과 내가 속한 파당이 이해하고 있는 것 사이에 의미 있는 수렴 지점이 있는지를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셋째, 논의를 해도 문제가 남게 되고 그것이 오해의 산물로 볼 수 없는 차이 때문이라면 그때는 반대편과 조정과 타협을 해야 한다. 나의 완전한 승리와 상대의 완전한 절멸은 민주정치가 추구하는 규범이 될 수 없다.
 
6) 앞서 강조했듯, 현대 민주주의란 ‘갈등에 기반을 둔 갈등의 체제’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갈등이란 현대 민주주의를 움직이게 하는 엔진에 가까운 기능을 한다. 다만 민주주의는 갈등의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갈등의 수를 줄이고, 규모가 큰 갈등 속에서 작은 갈등들을 해결, 완화하는 것을 추구한다. 사소한 갈등들만 정치화되면 어찌 되겠는가? 중요한 갈등을 중심으로 사회를 넓게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 갈등을 사회화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정당이다. 사회 하층의 이익과 열정을 기반으로 하는 정당일수록 그처럼 갈등을 사회화하는 역할을 해야 민주주의가 좋아진다. 아무리 민주주의 정치체제라 할지라도 정당정치가 사회 갈등을 폭넓게 조직하고 동원하고 통합하지 못한다면 그때의 ‘시민 주권’은 온전한 것이 될 수 없다.
 
7) 물론 정당이 발전되어 있다 해도 사회 갈등을 공적 영역으로 전환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느 사회든 상층계급은 이를 막으려 하고, 그래서 공적 영역 및 정치?정당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동원하는 데 열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늘 정치?정치인?정당을 공격하고 비당파성에 찬사를 보낸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발전이란 이런 반정치주의의 도전을 넘어 일반 시민들도 정치에 평등하게 접근할 권리를 향유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당은 “다수의 동원에 적합한 특수한 형태의 정치조직”이다. 갈등에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위계화해 가장 큰 규모의 대중을 동원함으로써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다. 정당을 통해 갈등의 수를 줄이되 갈등의 규모는 사회화해서, 가장 바람직한 공익이 무엇인지를 정당들이 서로 달리 대표하게 하고, 그렇게 형성된 두 개 이상의 공익적 대안이 선거에서 경합하게 하는 것, 그것이 좋은 민주주의의 조건이다. 그렇지 않고 정당이 공직자를 선출하는 데 머무를 뿐 대안을 조직하고 정치가 무엇을 둘러싼 것인가를 결정할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면 시민은 온전한 주권자가 될 수 없다. 적극적으로 지지할 정당을 갖지 못한 시민이 많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나라의 민주주의가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 할 수 있다.
 
 
7. 좋은 정당 만들기를 위하여
 
1) 끝으로 좋은 정당을 만들고자 하는 긴 프로젝트를 생각하며 리더십과 정체성, 선거, 지역 등 몇 가지 중요 문제에 대한 의견을 말해보고 싶다.
 
2) 책임 있는 지도부의 역할은 중요하다. 정치는 의지와 뜻을 세워 일하는 세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떻게 좋은 정당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문제야말로 정치가 스스로 의지와 뜻을 세워 개척해 가야 할 과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지를 가진 정치가들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당내 지도부 체계는 가능한 단순하고 응집적이어야 한다. 당 대표를 여러 선출직 최고위원의 하나로 만들거나, 원내 대표를 포함해 당의 또 다른 선출직들에 의해 휘둘리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안정된 지도부라는 기초 위에서 다양한 대표 체계와 기능 체계가 작동할 수 있어야지, 이들이 모두 당대표를 견제할 비토 파워가 되게 하는 것은 곤란하다. 당은 신뢰를 제도화하는 조직이어야지, 서로 신뢰하지 않음을 제도화할 수는 없다.
 
3) 물론 무책임한 지도부 내지 당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정치를 하는 리더가 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당이란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하는 것이다. 폭군의 출현 가능성을 감수하고도 통치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정치다. 따라서 그럴 경우 폭군을 축출하고 무책임한 지도부, 자신을 위해 당을 희생시키는 리더를 대체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럴 가능성 자체를 없애기 위해 정치를 없애고 정당이 기능할 수 있는 조건을 없애서는 안 될 것이다.
 
4) 리더십은 민주정치의 중심 요소이다. 리더십(leadership)은 엘리트주의와 다르다. 엘리트주의(elitism)는 대중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지도적 행위를 뜻하는 반면, 다수의 남을 이끄는(lead) 것을 가리키는 리더십은 대중이 없다면 존재할 수도, 작동할 수도 없는 지도적 역할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엘리트주의의 경향이 커지면 대중의 역할을 수동적이 되거나 줄어든다. 반면 좋은 리더십이 없다면 대중은 모래알에 불과한 무기력한 존재가 된다. 가끔 리더십을 말하면서 ‘팔로어십(followship)’이라고 하는, 이상한 영어를 들먹이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리더십의 다른 얼굴은 팔로어십이라며, 리더십에 따르는 대중의 역할을 강조하는 일에 열심이다. 정치학에서 그런 이론, 그런 개념은 없다. 굳이 팔로어십에 대해 말한다면, 그건 대중의 주권보다는 지도자의 주권을 더 중시한다는 뜻이 된다. 리더십에서라면 대중이나 민중이 ‘갑’인 반면, 팔로어십에서는 그 반대로 지도자가 ‘갑’이 된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이와 유사한 현상이 있다면 그건, 스타십 내지 펜덤 정치다. 그러고 보니 팔로어십을 강조할수록 펜클럽 정치를 당연시하고, 리더십이 보여야 할 대중적 책임성과 헌신성은 가벼이 여기는 일이 많다. 그렇게 해서 민주정치가 잘 될 수 있을까? 리더십에 대한 민주주의 이론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5) 선거는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정당을 통해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 있다. 좋은 정당을 만드는 일이 최고의 선거 전략이자 선거 운동이라는 규범이 자리 잡아야 일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선거에서 승리해 권력을 독점하고자 하는 계파와 도당 내지 그 수장들의 놀이터로 정당이 전락되는 일을 피하기는 어렵다. 대선 후보를 빨리 내고 그들을 통해 정당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은, 스타십을 강조하는 상업 조직에서라면 모를까 정당에서는 좋은 주장이 될 수 없다. 그럴 경우 정당 조직은 후보가 되려는 개인 엘리트들의 허영심을 허용하고 또 그에 굴복하는 정신적 노예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 지금 우리 정당들은 ‘선거 정당’이어서 문제가 아니라, ‘정당 없는 선거’를 치르려는 정치엘리트들에게 농락당하고 있기에 미래가 안 보이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6) 정당의 정체성 없이 민주정치는 어림도 없다. 정당은 정체성과 경쟁성을 수단으로 지지 동원을 극대화하는 인간 조직이다. 그런데 한국의 정당은 한결 같이 경쟁성 내지 확장성만을 고려해 당의 정체성을 스스로 모호하게 만드는 일을 계속해 왔다. 한국의 정당체계는 좌측 영역은 무시된 우편향적 공간에 밀집해 있는데, 이는 두 가지 효과를 낳았다. 하나는 정치가 발휘해야 할 이념적/계층적 대표와 사회통합 기능은 계속해서 위축되어 왔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로 인해 스스로 어떤 정당인지를 말하는 노력은 안 해도 되는 대신 상대의 잘못 때문만 존재할 수 있는 기생체가 되었다는 점이다. 상대 정당이 얼마나 왜 나쁜가를 입증하는 것을 두고 경쟁하는 정당정치는 사회를 분열시키는 역할 이상 할 게 없다. 민주주의는 공익의 내용을 둘러싸고 시민집단이 서로 다른 정당으로 조직되어 경쟁하는 체제를 가리킨다. 그런 민주주의에서 부분(party)을 가리키는 정당들이(parties) 어떤 정체성을 갖는지를 중시함 없이 오로지 승리만을 위해 상대를 공격하는 것으로 정치가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조건에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집합적 에너지는 만들어지고 또 커질 수 있을까? 스스로 어떤 정치를 해서 어떤 사회공동체를 만들 것이냐를 두고 경쟁하는 정당정치가 되어야 하고, 이 문제에서 진보와 보수는 구분 가능한 다른 내용, 다른 비전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싸울 때 싸우더라도 차이가 분명하기에 조정도 타협도 가능하다. 집권당과 대통령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그들보다 더 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데 있다. 이것이 아니고 감정적 야유와 인격적 비난으로 시간과 열정을 소비하는 일은 유익한 효과는 거의 없는 반면, 해야 할 일과 준비를 경시하게 만들고 자신의 지지자들을 사납게 만드는 부정적인 효과만 키울 뿐이다.
 
7) 정당의 미래는 지역에 있다. 의원 개인이 중시되는 원내정당화 경향은 지금 한국정치에서 최고조에 와 있고, 이미 그 부작용이 심각하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상당한 합의도 있다. 우리보다 앞선 민주주의 국가들의 한결같은 경험은, 당의 대중정당적 기반이 약해지는 경향에 맞서 다음의 두 요소를 강화했음을 보여준다. 하나는 예비내각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이다. 예비내각이 정당 정부라는 상층 기반을 닦는 것이라면, 지역은 당의 하부 기반을 튼튼히 하는 길을 가리킨다. 지역이 중요하다는 것은, 단순히 그래야 한다는 규범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실질적 정당의 힘이고 이미 서구에서는 강력한 현실이다. 지방자치 선거는 전국 선거 못지않게 중요할 뿐 아니라, 어느 정당이든 당내 투표 권력은 점차 이들 지역의 힘에 의해 움직일 수밖에 없다. 야당도 이제 재선 단체장을 넘어, 삼선의 자치단체장과 지방 의원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이들은 이미 수적으로나 분포의 범위에 있어서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진보정당도 성장을 계속한다면 이런 방향으로의 진전이 불가피할 것이다. 지역의 역량과 열정은, 지금과 같이 의원 지역구에 한정되는 것을 넘어 광역시도당을 중심으로 조직될 수 있어야 한다. 예산과 인력 모두 그런 방향으로 분배될 수 있어야 한다. 향후 지방선거를 포함해 지역구 의원의 공천 역시 이 단위에서 결정될 수 있게 할 수 있는 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야 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려는 개인 정치가들의 ‘스스로를 위한 명사 정치’를 제어할 수 있고 당의 대중적, 지역적, 조직적 기반을 다져 갈 수 있다. 지역이야말로 미래 정당의 블루오션이다.
 
8) 정당은 교육기관이자 훈련장이다. 민주주의에서 정당의 기능은 미래 정부를 운영할 정치 엘리트들을 육성하는 훈련장이 되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지금의 정당들은 거리가 멀어도 너무나 멀다. 의원실 중심의 원내 정당은 사실, 2세기 전 영국의 명사정당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현대판 명사정치를 주도하는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정치를 하는 의원들이다. 의원실은 과거 대기업 ‘회장 비서실’ 못지않게 ‘개인 왕국의 집사들’로 채워져 있다.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 의원들은 원내대표를 통해 당과 연결될 수 있어야 하고, 당은 의원들을 상임위 및 정책 분야별도 조율된 노력을 하게 해야 한다. 정당의 조직적 역할로부터 자유로운 의원이 많아진다는 말은, 기실 정당 없는 정치를 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자신의 당사가 어딘지도 모르는 야당의원이나, 당 조직 내 주요 현안과 논란을 자신과 무관한 일로 여기는 의원들이 늘어나는 것은 민주정치를 위해서는 불행한 일이다.
 
9) 무엇보다도 국회의원 후보의 외부 영입은 앞으로 반드시 절제되어야 한다. 정당의 공직 후보, 정책 전문가, 정무 활동가, 홍보 활동가 모두 정당이 책임 있게 길러내야 하며, 당내에서 그들의 헌신에 따라 정상적으로 올라갈 수 있는 합리적 경력 사다리가 있어야 한다. 정당은 미래에 정부를 이끌 조직으로 발전해야 하고, 그렇기에 본질적으로 권력 기관이다. 권력 기관은 책임성의 윤리를 가져야 하는 인간 조직인데, 그들이 지금처럼 무질서하고 무책임하게 정치적 사익을 추구해도 좋은 방식으로 운영되게 방치된다면 민주주의는 그 가치를 잃는다. 정당, 제대로 운영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민주적 실천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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