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비전 토론

  • 사회비전 토론을 위한 발제문 2 : 민주주의




- 개요 - 

1. 복합 위기 시대, 민주주의의 위기 

○ 20세기 말-21세기 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대였을 뿐만 아니라 역사상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최전성기였다. 그런데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많은 나라에서 민주주의 정치는 기능 장애 상태이고,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복합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정치 위기의 근본 원인은 무엇이며, 대안의 방향은 무엇인가?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진단과 대응이 어떤 구체적인 형태를 띠어야 하는가? 

2.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 그리고 대안의 방향

○ 현재 민주주의 정치가 처한 혼란은 신자유주의 시기에 각 국의 정치가 거의 예외 없이 겪은 커다란 변화에서 비롯됐다. 첫째, 주류 좌우 정당이 정책적 차이를 찾기 힘들 정도로 신자유주의 사회경제 정책으로 수렴했다. 그래서 기성 정치세력 모두가 대중에게 위기의 공범으로 여겨지고 있다. 둘째, 이런 이념-정책적 수렴과 동시에 정치가 미디어 중심으로 변화해갔다. 그러면서 대중조직에 기반을 두던 전통적 좌파정당들이 노동조합 같은 오래 된 기반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 모든 변화에 따른 가장 커다란 패배자는 제도정치에서 대거 주변화되거나 배제된 노동계급의 여러 계층이다. 
○ 이렇게 정치에서 소외된 대중이 2010년대에 반란의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 포퓰리즘 흐름이다. 따라서 극우 포퓰리즘과 같은 병적 증상은 기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단순한 옹호만으로는 극복될 수 없다. 정치를 통해 복합 위기가 실제로 해소되어간다는 효능감을 대중이 느낄 수 있도록 새로운 민주주의의 경험들을 열어가야 한다. 
○ 새로운 민주주의 경험의 요체는 경제 생활이 민주주의 방식을 통해 새롭게 결정될 수 있다는 경험이다(경제 민주주의).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도 국가, 기업 외에 민주적-자발적인 결사체들(대표적으로 노동조합 등)이 민주주의의 한 주역으로 부상해야 한다(결사체 민주주의). 경제를 비롯한 사회 전 영역에, 이런 목소리와 세력이 참여하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대의 기구 ? 과정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기능 민주주의). 


3. 제6공화국 민주주의를 넘어

○ 제6공화국 성립 이후 30여 년에 걸쳐 굳어진 현재 한국 정치 질서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시민사회의 상당한 부분이 제도정치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되어 있고, 이 근본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정치의 다른 모든 구조가 결정된다. 둘째, 이렇게 시민사회와 괴리된 국회는 미국식 대통령제의 기계적 적용에 따라 통치 책임에서 면제된 채, 차기 대권을 둘러싼 양대 정당들만의 권력 투쟁 무대가 된다. 셋째,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열정과 관심의 유일한 집중점이 되는 대통령은 실상은 행정부-입법부의 대립을 이유로 선거 공약조차 이행하지 않는 ‘공허한 상징’이 되어 있다. 넷째, 국회-대통령이 극장식 정치에 몰두하는 동안 실제 통치를 하는 것은 기획재정부와 같은 관료기구다. 
○ ‘일하지 않는 민주주의’인 이런 대한민국 제6공화국식 민주주의는 복합 위기에 대응하는 시늉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는 ‘일하는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것이 급선무다. 시민사회의 여러 목소리가 국회에 빠짐없이 반영되어야 하며, 이런 목소리들이 일정한 합의로 모아져 책임 있게 실행되어야 한다. 현존 민주주의 체제 중 그나마 이런 시대적 요청에 가장 가깝게 작동하는 사례는 북유럽 국가들의 민주주의 정치다. 이들을 참고삼아 국회와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 정치 질서 전반을 개혁해가야 하며, 진보정당이 그간 주력해온 선거제도 개혁도 이러한 제6공화국 정치 질서 전반의 개혁 중 일부로 다시 자리매김해야 한다. 
○ ‘일하는 민주주의’에서 ‘일’이란 다름 아니라 복합 위기에 대한 민주적 대응이며, 경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개혁이다. 즉, 일하는 민주주의는 일하는 사람들의 민주주의를 위한 제도적 토대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제도정치 개혁과 결사체 민주주의의 토대 강화는 결코 분리된 과제가 아니며, 서로를 전제로 동시에 추구해야 할 과제다. 즉, 진보정당은 제도정치 개혁과 사회운동 정치를 반드시 동시에 추구해나가야 한다. 


사회비전 토론을 위한 발제문 2 : 민주주의 


1. 복합 위기 시대, 민주주의의 위기  

1-1. 복합 위기 시대와 정치의 위기

인간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적 장場이 정치다. 따라서 장기 불황, 미-중 패권 충돌, 인구위기, 기후급변 등이 동시에 전개되는 복합 위기 시대에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정치 영역이다. 그러나 지금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정치는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정치 자체도 위기에 휩싸여 있다. 즉, 복합 위기의 여러 가닥 중에는 각 나라의 정치 위기도 있다. 위기의 제도적 해결 통로인 정치조차 위기 상태라는 사실이야말로 현 국면에 혼란과 절망의 색채를 더한다.  



1-2. 민주주의를 둘러싼 물음

20세기 말-21세기 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대였을 뿐만 아니라 역사상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최전성기였다(혹은 그렇게 보였다). 여러 나라에서 군부독재가 민간정부로 바뀌고 현실사회주의권의 일당 체제가 대부분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드디어 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나라로까지 보통선거제도가 확산됐다. 이렇게 발전한 민주주의는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가장 효과적인 정치 제도로 기능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정반대다. 자본주의 질서만이 아니라 기성 민주주의 체제 또한 기능 장애에 빠졌다. 원인은 무엇인가? 그리고 현 정치 위기의 핵심적인 측면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떤 방향에서 대안을 추구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복합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민주주의 정치가 필요한가? 논의의 초점과 층위에 맞춰 이 물음들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전 지구적인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은 무엇이며, 대안의 방향은 무엇인가? 20세기 말 이후 겉으로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전성기를 누리는 듯 보였지만, 이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결합하면서 도리어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실망과 회의, 좌절과 분노를 낳았다. 그 결과, 2010년대에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들에서부터 기존 주류 정치의 동요와 포퓰리즘 물결이라는, 마치 1930년대 혼란기를 연상시키는 국면이 도래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진단해야 하고, 민주주의의 후퇴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심화 · 확대의 방향에서 정치 위기를 극복하려면 어떤 모색과 노력이 있어야 하는가?  

둘째, 한국에서 정치 위기는 어떤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최근의 혼란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새로운 민주주의 정치를 만들어가야 하는가? 전 지구적인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확산기에 대한민국은 제6공화국 정치 질서를 만들고 그 아래에서 민주주의를 비록 느린 속도로나마 착실히 다지는 듯 보였다. 그러나 2016년 촛불항쟁의 부푼 기대는 그만큼 거대한 불만과 실망으로 돌변했고, 현재 제6공화국 정치는 사회의 위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그들만의’(양대 정당만의) 극장정치가 되어 있다. 이런 정치 위기의 한국적 전개에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 대안과 전략으로 맞서야 하는가? 

 

2.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 그리고 대안의 방향 

2-1. 신자유주의 시기, 민주주의의 전 지구적 퇴행

20세기 말에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지구 곳곳으로 퍼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들에서부터 기성 정치에서 노동 대중의 커다란 성취라 할 만한 내용이 축소되거나 삭제되기 시작했다. 우선 1970년대부터 우파정당들이 점차 복지국가 타협에서 발을 빼고 지구화-금융화의 이념적 토대가 될 시장지상주의를 내세웠다. 그러자 좌파정당 안에서도 복지국가의 위기를 탈자본주의 방향에서 해결하려 한 흐름들(가령 초국적 자본을 사회적 소유-통제 아래 두려는 시도)이 주변으로 밀려났고, ‘제3의 길’ 등의 구호 아래 시장지상주의를 받아들이며 복지국가를 축소하려는 흐름들이 당 내 주류로 부상했다. 그 결과,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칠 무렵에는 주류 좌우 정당 가운데에 신자유주의 정책 합의에서 벗어나는 세력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 상황에서 상당수 대중은 기성 정치 전반이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느꼈으며, 모두 다 위기의 공범일 뿐이라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 

단지 주류 정당들의 이념 · 정책이 신자유주의로 수렴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수렴 과정은 민주주의 정치의 작동 방식과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과정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좌우를 가릴 것 없이 모든 주요 정당은 20세기 말 대중매체의 발전(특히 TV 방송)에 적응해야 했으며, 그럴수록 대중매체를 통해 만나는 대중과 전통적인 조직적 지지 기반을 통해 만나는 대중을 구별하게 되었다. 특히 좌파정당(미국의 경우는 리버럴정당인 민주당)은 노동조합과 긴밀한 연계를 맺으면서 이를 통해 우파에 비해 선도적이고 안정적으로 ‘대중정당’의 지위를 누려왔으나, 이 연계는 이제 무기가 아니라 짐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대의정치와 대중의 유기적 연결을 강조하던 좌파조차 이렇게 미디어 정치에 적응하자 좌우를 떠나 제도정치 전반이 시민의 생활세계와 괴리되어갔다. 최근 미디어 환경을 다시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는 디지털 네트워크와 이를 바탕으로 한 소셜 미디어는 이러한 괴리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민주주의 정치는 레거시 매체, 온라인 공간 그리고 그 바깥의 생활세계라는 다원화된 통로를 통해 대중과 어떻게 다시 유기적으로 결합할지를 놓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정치의 모든 측면이 이렇게 심대하게 변화하는 과정에서 승기를 잡은 사회 집단들과 철저히 패배한 집단들이 극명하게 나뉘었다. 물론 최대 승자는 복지국가 타협의 붕괴를 통해 ‘정치’의 관할 범위에서 벗어난 광대한 ‘시장/경제’의 영역에서 막대한 이익을 누리게 된 신자유주의 지구화-금융화-정보화의 추진자들, 거대 자본과 그 동맹 세력이다. 그런가 하면 20세기 중반 이후에 대학에서 사회로 쏟아져 나온 고학력 중간계급은 지구화-금융화-정보화의 물살을 타고 일정하게 지위를 유지하거나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매체(새로운 온라인 네트워크를 비롯한)에 수월하게 접근함으로써 주류 좌우 정당에 효과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반면에 노동계급 내부의 대다수 계층은 기존의 정치적 자원(노동자 대중조직과 제휴하는 정당)은 상실한 반면에 새로운 자원(정보화의 각종 산물들)에는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이러한 승패의 엇갈림은 신자유주의 시기에 가장 피해를 입은 대중의 상당수가 통째로 정치 전반에서 주변화되고 배제 · 소외되는 결과를 낳았다. 토마 피케티의 비유에 따르면, ‘상인(자본가계급) 우파’와 ‘브라만(지식 중간계급) 좌파’가 정치권을 양분하는 상황에서 다수 노동 대중은 정치 영역에서 완전히 투명인간이 되고 말았다.   

[도움이 되는 책]
- 볼프강 슈트렉, 『시간 벌기: 민주적 자본주의의 유예된 위기』, 김희상 옮김, 돌베개, 2015. 
- 타리크 알리, 『극단적 중도파: 세계 정치에 내린 경계경보』, 장석준 옮김, 오월의봄, 2017. 
- 토마 피케티, 『자본과 이데올로기』, 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0. 중 “제15장. 브라만 좌파: 미국과 유럽의 새로운 균열”. 


2-2. 민주주의의 퇴행에 대한 ‘모순된 저항’인 포퓰리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들에서부터 포퓰리즘 물결이 거세게 일었다. 좌우 양쪽에서 기존 좌우 주류 정당을 위협하고 대체하는 신진-급진 세력이 대두했지만, 성공한 도전자들 가운데 압도적인 다수는 국수주의, 인종주의, 소수자 공격 등을 내세운 극우 포퓰리즘 세력이다. 극우 포퓰리스트들은 경제-사회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는 기성 좌우 세력을 신랄히 공격하며 대중의 지지를 얻었지만, 집권 뒤에 예외 없이 독단과 무능, 독재화 경향을 노정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정치 위기의 중요한 일부임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러나 단지 포퓰리즘을 비판하고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것만으로는 답이 될 수 없다. 극우 포퓰리스트들은 분명히 상당수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득세했고, 지금도 기성 정치 질서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는 대중으로부터 선택받으며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대중의 좌절과 분노를 낳은 현 정치 질서 자체를 극복하지 않고는 극우 포퓰리즘의 상승세를 꺾을 수 없다. 

사실 포퓰리즘populism은 대의민주주의 안에 항상 존재하며 작동하는 한 가지 경향이다. 이는 엘리트주의elitism라는, 대의민주주의 안의 또 다른 경향과 늘 대립하며 형성되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엘리트주의가 자유주의에서 출발한 대의제나 능력주의와 친화성이 있는 관료제에 토대를 두고 나타난다면, 포퓰리즘은 고대 아테네에서부터 민주주의가 대중의 반란을 통해 매번 (재)확인돼왔다는 역사적 진실과 깊이 얽혀 있다. 그럼에도 근대 대의민주주의가 존속해온 상당 기간 동안 이러한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의 대립은 분명히 드러나기보다는 은폐되거나 절충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 대립은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중첩되는 국면에서 돌연 가시화되고 격렬해진다. 첫째, 엘리트와 대중의 간극을 벌려놓는 제도적 상황. 20세기 중반부터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들이 역사상 유례없는 고학력사회가 되기는 했지만, 대중적 계몽주의의 적자인 좌파 이념-운동들이 쇠퇴하고 정보화 혁명이 급속히 진행되면서 시민 내부의 지적 간극과 균열은 오히려 심화됐다. 둘째, 경제 엘리트, 정치 엘리트, 지식-문화 엘리트가 서로를 견제-비판하기보다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 결탁하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기성 체제에 대한 대중의 불만과 분노는 막연한 거대 엘리트 집단 전체에 맞선 반란의 형태로 표출된다. 셋째,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스스로 만들어놓은 함정. 신자유주의 시기에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거대하게 발전한 대중의 결사체들(대표적으로 산업별 노동조합)을 대의민주주의의 정상적 작동을 위협하는 요소로 간주하여 파괴하거나 무력화시켰다. 이런 정치적 자산을 잃어버린 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권장하는 대로 오직 투표를 통해서만 집단적 의사를 표출할 수 있게 된 대중이 선택한 반란 형태가 ‘투표소의 반란’, 즉 포퓰리즘 지지다.      

포퓰리즘 물결의 토대가 이러하다면, 극우 포퓰리즘에 맞서는 세력들의 지향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단순한 유지나 변호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한계를 돌파하는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 형태를 창안하고 정착시켜야 한다. 100년 전 파시즘 역시 의회민주주의 전통의 관성적인 옹호가 아니라 거대해지고 강력해진 국가기구와 사회적 민주주의 요구를 결합하려 한 극히 모험적인 시도들(노동자-농민 연합에 기반을 둔 스웨덴 사회민주당 정부, 미국의 뉴딜과 전시 경제 체제, 영국의 전시 거국내각 등)을 통해 비로소 극복됐음을 상기해야 한다. 

[도움이 되는 책] 
- 샹탈 무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이승원 옮김, 문학세계사, 2019. 
- 샹탈 무페, 『녹색 민주주의 혁명을 향하여: 좌파 포퓰리즘과 정동의 힘』, 이승원 옮김, 문학세계사, 2022. 
- 낸시 프레이저,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위기 그리고 새로운 전망』, 김성준 옮김, 책세상, 2021.   


2-3. 복합 위기에 맞설 수 있는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 형태를 찾아내야 한다

백 년 전, 양차 대전 사이 시기에 지구자본주의의 대위기에 직면한 민중 중 상당수가 민주주의 제도를 통해 반反-민주주의, 즉 파시즘을 선택했다. 현재의 복합 위기 상황에서도, 만약 민주주의가 위기에 맞설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를 통한 반-민주주의의 자발적 선택이 재연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기후재앙에 대처할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재난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닥쳐올 경우(식량 위기나 대규모 난민 사태 등), 현재 가장 안정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조차 파시즘이나 유사-파시즘 체제가 들어설 수 있다. 2010년대의 극우 포퓰리즘 물결은 이러한 더 큰 재앙의 예고편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할 미래다. 오직, 민주주의를 통해 복합 위기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 근본 원인들을 해결할 수 있음을 대중이 실감할 때에만 이런 최악의 미래를 막을 수 있다. 복합 위기를 완화하고 극복하는 통로로서 효능감을 입증하기 위해 스스로를 과감히 혁신하는 민주주의만이 민주주의 위기의 해결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제껏 경험해온 민주주의의 변호나 사수가 아니라 전에 없던 민주주의 경험의 창출만이 반-민주주의를 상대할 수 있다. 특히 다음 세 가지 방향에서 대중이 새로운 민주주의를 체감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 경제 민주주의, 산업 민주주의. 신자유주의는 ‘정치’의 개입 범위를 사회국가 등장 이전 수준으로 축소한 반면에 ‘시장/경제’의 지배 영역을 유례없이 확장하려 했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려는 민주주의는 당연히 그 관할 범위를 ‘시장/경제’라 지칭되는 수많은 실천과 제도, 구조로 다시 확장해야 한다. 민주적 국민국가와 그 국제 협력체가 대자본과 금융 세력으로부터 경제 통제권을 탈환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생산과 서비스가 이뤄지는 바로 그 현장으로 민주주의가 확대돼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미시적 기초가 주주와 같은 금융 투자자의 권력 강화에 있다면, 이를 극복할 방향은 기업에서 노동자, 소비자, 지역사회, 유관업체 등 사회 각 세력의 민주주의가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가장 적극적으로 해석된 이러한 경제 민주주의, 산업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의 오랜 이상과 원칙이기도 하다. 특히 사회가 나서서 경제 단위들에게 탈탄소화를 채근해야 하고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전에 대중이 급박하게 개입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런 이상과 원칙은 가장 생생하고 절박한 당면 과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둘째, 결사체 민주주의. 이러한 경제 민주주의, 산업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대체로 개인으로만 목소리를 내는 상황에서는 제대로 추진될 수 없다. 주류 자유주의의 신조와는 달리, 국가와 개인이 몇 년에 한 번씩 있는 선거를 통해서만 교호할 경우에는 이미 여러 자본주의 제도들을 통해 구조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소수가 다른 대다수 시민을 지배하게 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설령 촛불항쟁 같은 대규모 직접행동이 발발하더라도 제도정치에 일시적인 충격을 던지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시민들이 다양한 자발적 결사체들로 조직됨으로써 시민사회가 이러한 결사체들의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생태계가 될 경우에만 다수 시민은 구조적 권력을 선점한 소수에 맞서 대항력을 행사할 수 있다. 역사상 이러한 결사체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노동조합이었고, 그래서 신자유주의의 노동조합 공격은 단지 노동조합의 파괴에 머물지 않고 결사체 문화 전반의 쇠퇴, 개인주의의 이상 비대화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현재의 민주주의 퇴보를 역전시키려면, 지구화-금융화-정보화를 겪은 현 국면의 조건들에 맞는 다양한 자발적 결사체들이 대두해야 하고 이런 결사체들로 조직된 시민사회가 국가, 자본 등과 세력 균형을 새롭게 형성해야 한다.   

셋째, 기능 민주주의. 기존 대의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한 대안으로 흔히 직접민주주의가 거론된다. 현재의 민주주의에 직접민주주의의 요소가 대폭 강화되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단지 직접민주주의만으로는 좋은 처방이 될 수 없다. 현재 대의민주주의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직접성과 대립되는 대의성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대의제도가 현대 사회에 어울리지 않게 협소하고 단순하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의회/국회가 생산과 소비를 포함한 현대 사회의 핵심 기능들을 두루 책임 있게 관리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경제와 같은 핵심 기능 영역들을 전담할 다양한 대의 체계들이 갖춰져야 한다. 이러한 대의 체계는 선거뿐만 아니라 추첨, 직접 참여, 정책 투표 등을 혼용하는 형태로, 즉 숙의형 참여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형태로 다양하게 설계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결사체 민주주의가 성숙해 있다면, 각 기능 영역과 직결된 결사체들이 논의 · 협상 · 의사결정과정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이런 다원적 대의 체계가 내실 있게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의회/국회는 현재처럼 전능성을 가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원적 대의 체계를 기획 · 구축하고 각 대의 과정의 결정 사항들을 조정하며 최종 인준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령 기후위기 대응이나 디지털 기술의 사회적 관리를 전담하는 대의기구 혹은 대의과정들이 마련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시민들이 복합 위기 대응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효능감을 체감할 수 있어야 한다.   

[도움이 되는 책] 
- G. D. H. 콜, 『길드 사회주의』, 장석준 옮김, 책세상, 2022. 중 특히 “제2장. 민주주의의 기초”와 “해제: 길드 사회주의를 다시 말한다”. 
- 마이클 사워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강정인 · 이석희 옮김, 까치, 2018. 중 “제5장. 민주주의 다시 발명하기”. 
- 이승원, 『민주주의』, 책세상, 2014. 
- 김민하,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반대를 앞세워 손익을 셈하는 한국 정치』, 이데아, 2022. 



3. 제6공화국 민주주의를 넘어 

3-1. 제6공화국 정치 질서, 무엇이 문제인가?

세계사의 신자유주의 시기는 대한민국에서 1987년 민주항쟁과 개헌을 통해 제6공화국이 수립되고 지속된 기간과 겹친다. 이 기간 동안 한국 사회에는 느리게나마 민주주의가 정착됐지만, 타협적 민주화를 통해 자리 잡은 제6공화국 민주주의는 처음부터 심각한 결함과 한계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제6공화국 민주주의, 즉 현 정치 질서는 동시대에 다른 나라들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뒷받침하는 정치적 토대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제6공화국 정치 질서를 구성하는 주된 특징은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제도정치와 시민사회의 심각한 괴리. 반공분단체제에서 정치 참여가 원천 봉쇄돼온 좌파나 노동조합 등의 사회운동 세력은 1987년 개헌과 이후 제6공화국의 잇단 정초적 선거들(1987년 12월 대선과 다음 해의 총선)에서도 참여가 배제되거나 주변화됐다. 이후에도, 유서 깊은 국가보안법뿐만 아니라 정당법 · 선거법 상의 여러 장치들, 노동조합 등에 대한 규제를 통해 시민사회의 활동적 부분이 제도정치에 진출할 가능성이 계속 차단됐다. 2004년 총선을 계기로 진보정당이 원내에 진출했다지만, 진보정당의 제도정치 지분은 늘 지지율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으로 제한됐다. 그 결과, 지난 30년 내내 한국의 제도정치와 시민사회 사이에는 심각한 괴리가 지속되고 구조화됐다. 제6공화국 민주주의의 모든 구성 요소들은, 시민사회의 상당 부분이 제도정치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된다는 이 근본적인 조건을 전제로 형성돼 있다.  

둘째, 극장정치의 무대가 된 국회. 이런 제약 조건들 탓에, 한국 시민사회의 역동성과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국회는 늘 극히 제한된 수의 정당들로만 구성돼왔다. 이 정당들은 선거 과정에서는 실용적인 정책적 입장을 내걸며 포괄정당 전략을 구사하지만, 일단 국회가 구성된 뒤에는 기득권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최소한 이를 거스르지 않는 입법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철저히 수렴한다. 그럼에도 이 정당들은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집권당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에서는 서로 치열하게 부딪힌다. 입법부는 행정부를 견제하는 기구이기에 직접적 통치 책임과는 상관없다는 미국식 대통령제의 기계적인 적용을 바탕으로, 국회는 차기 대선을 바라보며 무한 권력 투쟁을 벌이는 극장정치의 무대로 전락했다. 원내 정치세력들은 이러한 권력 투쟁에 용이하도록 1990년 삼당합당 이후 끊임없이 양당 구도를 구축하려 한 반면에 상당수 유권자들은 선거에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에 개입하여 상대적 다당 구도를 열려 했다. 그러나 모처럼 기존 원내 정당 구도에 변동이 생겨도 주류 정치세력들은 이를 성공적으로 양당 구도로 되돌리곤 했다. 특히 현재는 이 진자운동에서 양당 구도의 구심력이 강하게 관철되는 국면으로서, 낡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합의하면서도 겉으로는 권력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는 양대 정당의 정치 독점이 극에 달해 있다.        

셋째, 민주주의적 관심의 집중점이지만 사실은 ‘공허한 상징’에 불과하게 된 대통령제. 이런 상황에서 대중의 민주주의적 관심은 오로지 대통령 선출에 집중되었다. 대통령 직선제의 복원을 중심으로 구축된 제6공화국의 역사가 이후 한 세대 동안 끊임없이 반복 · 재생산된 것이다. 제6공화국 초기에 민주화를 지지한 대중은 상대적으로 더 개혁적인 대통령 후보를 당선시키는 것을 사회 변혁과 등치시켰고, 반대편 후보를 지지한 대중은 또 그들대로 과거 산업화 시기의 대통령상을 오늘날의 대통령에 투영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관심과 열정이 대통령 선출 과정에 쏠린 것과 달리, 현실의 대통령직은 점점 ‘공허한 상징’에 더 가까워졌다. 제6공화국 정치 질서의 설계자인 김영삼, 김대중은 집권 중에 나름대로 행정부와 입법부를 넘나드는 정치를 펼쳤지만, 이후의 대통령들은 행정부와 입법부의 적대 관계를 이유로 들며 대선 공약의 실행과는 상관없이 관료기구를 일상적으로 관리하는 데 머물렀다. 심지어 2020년 총선을 통해 제6공화국 역사상 가장 우호적인 국회와 마주하게 된 문재인 정부조차 대선 공약을 뒤늦게나마 실현하려는 정치는 시도하지 않았다. 제6공화국 정치 질서의 핵심 문제가 ‘제왕적 대통령제’에 있다는 비판이 무성하지만, ‘제왕적’이라 할 만한 양상은 실은 양대 정당 사이의 권력 독점 경쟁에서만 나타날 뿐이다. 오히려 제6공화국의 대통령제는 선거 과정에서 대중의 민주주의적 관심과 열정을 빨아들이고는 집권 이후 기존 관료기구의 안정적 관리에 안주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블랙홀’이 되어 있다.   

넷째, 실질적 통치자인 관료기구. 그럼 누가 대한민국을 실제로 통치하는가? 선거와 상관없이 권력을 이어가는 관료기구다. 양대 정당이 선거에서 어떤 담론을 내세우든 대한민국을 실질적으로 운영해나가는 것은 국가기구의 고위 관료들이다. 역대 대통령은 이들의 인격적 대변자가 되길 자처하고, 국회는 이들을 지휘하기는커녕 견제도 하지 못한다. 문재인 정부 시기에 이들 중 검찰이 유독 주목받았지만, 대중의 삶에 더 광범하고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기획재정부와 같은 경제적 국가기구다. 이런 경제적 국가기구에는 고위 관료층, 언론과 학계를 비롯한 시민사회 내 기득권 네트워크, 양대 정당의 영향력 등을 통해 대자본, 금융 세력, 부유층의 이해관계가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결국 ‘정치’ 영역에서 제6공화국 민주주의가 어떠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든 상관없이 ‘경제’ 영역에서는 자본 소유 계급의 지배가 지극히 안정적으로 의연히 관철된다. 이것이 제6공화국 민주주의가 결코 넘지 못하는 절대적 한계선이다. 

2016-17년 촛불항쟁의 가장 커다란 한계는 이러한 정치 질서를 흔들거나 조금이라도 변화시켜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촛불정부’를 자임하던 문재인 정부에서도 이 질서가 반복 · 재생산된 결과, 현 윤석열 정부가 들어섰다. 지금 윤석열 정부가 노정하는 여러 무능과 혼선, 독단은 단순히 현 정부, 여당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6공화국 정치 질서의 근본 문제에서 비롯된 말기적 증상이라 봐야 한다. 따라서 윤석열 정부로 표현되는 병증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지난 촛불항쟁처럼 대통령과 집권당의 교체에 그쳐서는 안 된다. 제6공화국 정치 질서 자체를 넘어서는 새로운 민주주의 지형과 제도를 구축해나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제6공화국 민주주의와 하루빨리 작별해야 하는 이유는 복합 위기 시대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정치가 사회의 진짜 문제들을 해결하는 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고 사실상 관료들이 관성에 따라 국가를 운영하는 한, 복합 위기에 진지하게 대처하기란 불가능하다. 위기에 대처하려면,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고, 이 비전을 중심으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이런 합의를 신속히 실행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시시각각 닥쳐오는 기후재앙, 전쟁 위협, 인구절벽 앞에서 지금껏 우리에게 익숙했던 제6공화국식 정치는 쓸모가 없다. 아니, 그 자체가 시한폭탄이다.   

[도움이 되는 책]
- 장석준, 『근대의 가을: 제6공화국의 황혼을 살고 있습니다』, 산현글방. 2022. 중 “제1장. 우리는 지금 제6공화국의 황혼을 살고 있다”. 


3-2. ‘일하는 민주주의’로 바뀌어야 한다

복합 위기 시대에 필요한 민주주의가 되기 위해 현재 한국의 정치 질서는 어떤 방향으로 바뀌어야 하는가? 첫째, 새로운 입장과 비전이 제도정치에 쉽게 진출할 수 있어야 하고, 지지받는 만큼 정치적 지분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기존 관성을 지속하기만 하는 정치 체제는 기후급변 같은 초유의 위기를 해결하기는커녕 위기를 더욱 가중시킬 뿐이다. 전에 없던 목소리와 시도에 항상 열려 있는 정치 체제만이 조금이라도 위기를 완화하고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 

둘째, 새로운 문제제기와 대안을 포용하여 최대한 기민하고 사려 깊게 다수의 합의를 만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민주주의에는 투쟁의 계기와 합의의 계기가 함께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 정치에서는 두 계기 모두 왜곡되고 굴절돼 있다. 사회적 투쟁은 제도정치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며, 정치 무대에서는 사회 현실과 단절된 권력 투쟁이 지배한다. 그러면서, 합의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무한 대결만 반복하는 제6공화국 정치의 모습을 사회적 투쟁과 부당하게 등치하거나 변혁적 정치와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식의 ‘대결’ 민주주의는 오히려 진정한 사회적 투쟁을 억압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사회적 투쟁을 효과적으로 반영함으로써 해당 국면에 필요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그래야 이 합의를 바탕으로 복합 위기에 대처하는 공적 조치를 취할 수 있으며, 이 조치를 통해 사회적 투쟁 또한 보다 높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셋째, 일단 일정한 합의가 형성되면, 합의된 정책의 실행을 위해 국가기구의 모든 부분과, 더 나아가 시민사회까지 효과적으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과 국회가, 대선에 승리한 정당과 국회 내 다수 의석을 점한 정당이 일상적으로 정쟁만 지속해서는 결코 이렇게 움직일 수 없다. 대통령과 국회를 비롯하여 국가기구의 각 부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현재와는 다르게 기능을 재조정하고 관계를 재편해야 한다. 
한 마디로, 복합 위기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민주주의는 ‘일하는 민주주의’다. 일하는 민주주의, 즉 사회의 진짜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데 모든 관심과 열정, 자원이 집중되는 민주주의여야 한다. 이것은 제6공화국 민주주의의 현실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3-3. 자유주의 의회제의 한계를 나름대로 교정해온 북유럽 민주주의

현존하는 민주주의 정체政體들 가운데 이런 민주주의에 가장 가까운 사례는 아마도 북유럽 국가들(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아이슬란드)의 민주주의일 것이다.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은 선거제도 개혁 등을 논의하면서 북유럽 민주주의를 부분적으로 참고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단편적 접근을 넘어 현존 민주주의 체제들 중 가장 앞선 모범으로서 북유럽 민주주의의 전체적 특징과 의의에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지난 세기의 사회국가/복지국가 건설뿐만 아니라 현재 기후위기 대응에서도 북유럽 민주주의는 다른 민주주의 정체들보다 뚜렷이 앞선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북유럽 민주주의의 첫 번째 특징은 철저한 비례대표제에 따른 의회 구성이다. 북유럽 국가들은 모두 권역 수준에 가까운 대선거구에서 각 정당이 받은 표에 비례해 의석을 배분한다(스웨덴과 덴마크는 이에 더해 전국 단위 보정 의석을 통해, 각 정당이 최종적으로 확보하는 의석이 전국 득표율과 최대한 일치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제껏 선거제도의 비례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논거로만 이러한 북유럽 국가들의 사례를 언급했지만, 더 나아가 이들의 전면적 비례대표제가 고전적 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의회제를 나름대로 교정한 결과임을 확인해야 한다. 시민사회 내 각 계급 · 계층을 상당히 미세한 수준까지 차별적으로 대변하는 다수의 정당들이 전면적 비례대표제를 통해 의회를 구성할 경우에 이 의회는 필연적으로 계급별 대표성을 띠게 된다. 이것은 자유주의 의회제의 원리와는 맞지 않지만, 계급 · 계층에 따라 이해관계가 경합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현실에는 더 부합한다. 19세기 말 유럽 국가들에 등장한 사회(민주)주의-노동계급 정당들이 강령에서 전면적 비례대표제 쟁취를 주창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 북유럽 민주주의는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이러한 자유주의 의회제 개혁 요구를 상당한 정도로 실현했다고 할 수 있다. 

북유럽 민주주의의 두 번째 특징은 이러한 의회를 바탕으로 합의형 민주주의를 운용한다는 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북유럽 국가들의 정부 형태는 모두 ‘내각책임제’(더 정확한 명칭은 ‘의회정부제’)로 분류된다. 입헌군주국인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본래 헌법상 대통령제에 가까웠던 핀란드도 현재는 의회정부제에 더 가깝다. 그러나 같은 ‘내각책임제’라 분류되더라도 이런 정부 형태의 가장 고전적인 사례인 영국(그리고 영국을 본받은 캐나다 등)과 북유럽 국가들은 같은 범주로 묶기 어렵다. 양당 구도와 친화적인 전면적 단순다수대표제를 통해 의회를 구성하는 영국에서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대결형 민주주의가 지배한다. 반면에 북유럽 국가들에서는 의회에 포진한 다수의 정당들이 늘 연립내각 형태로 정부를 구성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합의형 민주주의가 정착되어 있다. 전면적 비례대표제를 통해 각 정당이 시민사회의 계급 · 계층을 일정하게 대변하기에 의회 내의 이러한 여당연합-야당연합 구성 과정은 곧 사회 전체의 합의 형성 과정과 중첩된다.    

이러한 특징들을 종합해보면, 북유럽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적 의회제에서 출발하면서도 현대 자본주의의 요청에 맞게 이를 교정해왔다고 정리할 수 있다. 물론 영국 등에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19세기식 자유주의 의회제를 수선했다. 가령 영국에서는 20세기 들어 양대 정당 중의 한 쪽을,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는 자유주의-사회주의 연합정당인 노동당으로 대체함으로써 의회민주주의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다시금 대위기에 접어든 현 상황에서 평가하자면, 북유럽형 교정이 다른 나라들의 사례보다 상대적으로 더 성공적이라 하겠다. 오늘날 여러 자본주의 국가들 가운데에서 대안적인 민주주의, 즉 경제 민주주의, 결사체 민주주의, 기능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기에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갖춘 나라가 어디인지 묻는다면, 우리의 답은 북유럽 국가들이 될 수밖에 없다. 이미 이들 국가들의 대의민주주의 구조와 관행 안에 민주주의의 21세기적 대안에 친화적인 요소들이 얼마간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3-4. ‘일하는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정치 개혁

북유럽 사례 등을 참고하여 한국 조건에 맞게 ‘일하는 민주주의’로 나아가려면, 제6공화국 정치 질서를 이루는 요소들을 어떻게 바꿔가야 하는가? 그간 진보정당은 ‘정치 개혁’을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선거제도 개혁에 시야를 한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국회와 대통령, 지방자치단체, 정당 등 정치 체제를 이루는 요소들 전반의 개혁을 더욱 명확히 추진하면서 선거제도 개혁을 그 필수적인 일부로 정확하게 제시해야 한다. 일단 여기에서는 주로 ‘개헌’과 관련하여 논의되는 대통령 중심 정부 형태와 국회의 개혁을 짚어보겠다. 

첫째, 일하는 국회를 만들기 위한 개혁. 가장 시급한 것은 역시 새로운 정치세력이 제도정치에 활발히 진출할 수 있게 하고 각 당이 대중의 지지에 비례하여 정치적 발언권을 갖게 하는 선거제도의 도입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현행 선거법보다 진입 장벽을 낮추고 비례성을 강화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전면적 비례대표제를 정착시켜야 한다. 동시에 정당 활동의 자유를 전면 보장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선거 · 정당제도 개혁을 전제로, 정부의 구성과 운영에서 의회정부제 요소를 도입 · 강화해야 한다. 원내 정당들이 내각을 구성함으로써 통치 책임을 분담하고 각 당 총선 공약 중 합의된 내용을 임기 내에 실행하는 데 매진해야 한다. 정의당은 2018년 개헌 논의 국면에 이미 “국회가 국무총리를 선출한다”는 개헌안을 제시한 바 있다(‘개헌 성사를 위한 3대 제안’, 2018년 3월 15일). 비례성을 강화하는 선거제도 개혁과 국회에 의한 국무총리 선출제가 결합한다면, 원내 다당 구도 아래에서 각 당이 연립정부를 구성 · 운영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며, 한국 정치는 합의형 민주주의로 새롭게 진화해나갈 것이다.   

둘째, 일하는 대통령을 만들기 위한 개혁. 의회정부제 요소가 도입 · 강화된다면, 당연히 기존 대통령중심제는 어떤 식으로든 변화해야 한다. 논리적으로는 전면적인 의회정부제로 바뀔 수도 있고, 이원집정부제로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상적인 논의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교훈과 시사점을 주는 것은 핀란드 사례와 같은 구체적인 역사적 경험이다. 핀란드는 대한민국처럼 강대국 사이의 지정학적 요충지에 자리한 국가다. 핀란드는 이런 현실을 고려하여 1919년 독립 당시에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했다. 그러나 이후 핀란드는 전쟁을 비롯한 숱한 위기 속에서도 의회에서 내각을 구성하는 의회정부제식 관행을 반복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각이 내정을 책임지고 대통령은 외치에 주력하게 되었다. 핀란드는 20세기 내내 이렇게 헌법 조항이 아닌 정치 관행을 통해 이원집정부제에 가깝게 정부를 운영하다 결국 1999년에 사회민주당 주도로 대통령중심제보다는 의회정부제로 더 기운 형태의 이원집정부제를 헌법에 명문화했다. 외교와 국방은 대통령이 맡고 나머지 영역을 내각이 맡게 한 것이다. 여전히 지정학적 긴장 속에서 생존과 번영을 도모해야 하는 핀란드의 현실을 반영한 제도 배합인 셈이다. 대한민국은 이런 핀란드 상황보다 더 심각한 지정학적 압박과 충돌의 한 가운데에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핀란드 사례 등을 참고하여 대통령과 국회의 가장 적절한 분업 형태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경우에도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대통령이 외교와 국방을 책임지고 내각이 내치를 맡는 정부 형태가 필요할지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개혁은 결국 현행 제6공화국 헌법을 대폭 개정하는 개헌 과정을 통해 완결될 수밖에 없다. 정의당은 정치 체제 개혁을 포함한 대대적 개헌을 주창하고, 시민들을 꾸준히 설득해야 한다. 하지만 위와 같은 정치 개혁이 오로지 개헌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헌법을 개정하지 않더라도 현행 헌법 아래에서 정치 질서를 내용적으로 바꿔가는 시도들을 할 수 있으며, 또한 반드시 그래야 한다. 가령 현 헌법 아래에서도 대통령과 원내 정당들이 정치적으로 합의하기만 한다면, 지금과는 달리 국회가 더 많은 권한을 행사하고 더 많은 책임을 지는 방식으로 내각을 구성할 수 있다(“제86조 ① 국무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제87조 ① 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또한, 역시 정치적 협의와 합의를 통해 대통령은 외치에 주력하고 국무총리와 내각이 내정에서 주도권을 발휘하게 할 수도 있다. 오히려 당장의 정치적 노력을 통해 이러한 경험을 쌓아나간 뒤에라야 다수 시민의 동의 아래 개헌에 착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정의당은 선거법, 정당법 등의 개정, 개헌의 호소와 함께 일상적으로 이러한 새로운 정치 관행을 설득하고 실제로 끊임없이 시도 · 실험해야 한다.  

[도움이 되는 책과 글]
- 김수권, 『핀란드 역사: 자유와 독립을 향한 여정』, 지식공감, 2019.  
- 장석준, 『강대국 사이에 낀 국가의 대통령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대통령제 개혁의 방향, 핀란드에서 배운다』, 《프레시안》, 2022. 10. 4.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2100410334110051)
- 최태욱, 『한국형 합의제 민주주의를 말하다: 시장의 우위에 서는 정치를 위하여』, 책세상, 2014. 


3-5. 제도정치 개혁과 21세기형 민주주의 실현 과제의 관계

이러한 당면 정치 개혁 과제는 앞의 2-3.에서 제시한, 21세기 민주주의의 지향과는 어떤 관계를 맺는가? 혹시 한국 정치의 특수성 탓에 현대 민주주의의 보편적 과제와는 구별되는 과제를 추구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제6공화국 정치 질서라는 장벽을 먼저 해소하고 난 다음에 복합 위기 시대에 필요한 민주주의 형태를 찾아가는 식의 단계적 접근이 필요한 것인가? 아니다. 한국의 제도정치 개혁과, 복합 위기 시대에 필요한 민주주의의 확대 · 심화는 서로 긴밀한 상호작용을 한다. 두 과제는 서로 얽혀들어, 민주주의의 위기를 민주주의의 후퇴가 아닌 민주주의의 확대 · 심화로 극복한다는 하나의 실천 과제로 수렴 · 통합한다. 

첫째, 위에 지적한 대로, 제6공화국 정치 질서는 한국만의 특수한 현실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시기에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전반이 보인 특징의 한국적 표현 형태다. 다른 나라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당대의 지구 자본주의와 교호하며 특유의 한계와 모순을 노정한 것처럼,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 역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상호작용하며 현재와 같은 형태로 진화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사회에 유별나게 보편적 자유주의 같은 요소가 부재한 탓으로 돌릴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제6공화국 정치 질서를 개혁하는 힘은 어떤 각성한 자유주의 정치 흐름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복합 위기의 전개에 쫓기며 정치의 급박한 변형을 요구하는 세력에서 나온다. 

둘째, 이러한 상황 논리의 필연적 결과로, 정치 개혁의 방향인 ‘일하는 민주주의’에서 그 ‘일’의 내용은 경제 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다. 복합 위기에 맞서려면 신자유주의 시기에 굳어진 ‘시장/경제’의 지배, 소유권과 이윤 논리의 절대화, 사회 관계 전반의 금융화 등을 제압하고 넘어서야 한다. 그래야 기후위기 대응과 보편적 돌봄에 주력하는 21세기형 사회국가(기후-돌봄국가)를 향해 발걸음을 뗄 수 있다. 우리는 다름 아니라 이 방향으로 하루빨리 나아가기 위해 일하는 국회, 일하는 대통령이 필요한 것이다. 합의형 민주주의가 필요한 이유 역시, 오랜 시간 하나의 구조로까지 굳어진 신자유주의 정책 합의와는 다른 목소리들을 조금이라도 반영한 새로운 합의를 형성하여 조속히 시행하기 위해서다. 달리 말하면, 제도정치 개혁(일하는 민주주의)은 경제 민주주의(일하는 사람들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다.      

셋째, 복합 위기는 그 다양성과 복합성, 거대함과 광범위함 탓에 단순히 국가기구의 노력만으로는 대응할 수 없다. 국가기구에 한정되는 좁은 의미의 정치가 아니라 시민사회 전체가 참여하는 보다 넓은 의미의 정치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이것은 팬데믹 국면에 이미 확인됐다. 사회학자 E. O. 라이트가 제안한 개념인 ‘사회력social power’이 획기적으로 성장해야 하며(『리얼 유토피아』), 그러려면 사회력을 구현하는 주체인 민주적 결사체들의 생태계가 활성화 · 성숙해야 한다. 즉, 결사체 민주주의가 아래로부터 광범하게 발전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에서 결정적으로 저발전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바로 이 결사체 민주주의다. 따라서 진보정당에게는, 빠른 속도로 결사체 민주주의를 키워가는 정치, 제도정치 바깥의 정치, 사회운동의 정치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제도정치 개혁 노력조차 이러한 실천과 함께 하지 못한다면, 혹은 오히려 이를 방해하고 교란한다면, 복합 위기에 대한 진정한 대응력 · 회복력 확보에 도리어 장애물이 될 뿐이다. 따라서 제도정치 개혁과 개입, 결사체 민주주의 성숙을 위한 사회운동 정치, 이 두 과제를 동시에 추진하면서 상호 상승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당분간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당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3-6. 원칙에 바탕을 둔 현실적 정치 전략

이러한 과제 상황에서 진보정당이 견지해야 할 정치적 태도와 전략은 무엇인가? 일단 위에 제시한 한국 정치 개혁 방향을 다름 아닌 진보정당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 현재의 북유럽 민주주의와 가까운 정치 환경에서 만약 진보정당이 집권한다면, 그것은 연립정부 형태의 집권일 것이다. 즉, 기후-돌봄국가 건설에 합의하는 복수의 진보-녹색 정당들의 공동 집권이 될 가능성이 크다. 단지 정당들의 공동 집권일 뿐만 아니라 이런 개혁에 동의하는 시민사회 내의 적극적인 요소들, 즉 대중조직과 대중운동이 함께 사회 운영의 주역으로 부상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당은 지금부터 진보-녹색 정치세력, 사회운동들과 연합을 형성하고, 이러한 연합을 통한 정치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 연합의 기준이자 지향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방향에서 복합 위기에 맞서 21세기형 사회국가인 기후-돌봄국가를 수립하는 것이다. 잠정적으로 이를 ‘높은 수준의 연합’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상당 기간은 ‘낮은 수준의 연합’ 또한 필요하다. 무엇보다 정치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보다 다양한 정치 세력과 연대 · 협력할 필요가 있다. 제6공화국 정치 질서의 중요한 구성요소들을 개혁하는 데 합의한다면, 진보의 범위를 넘어선 정치세력들과도 적극적인 공동의 정치 행동을 펼쳐야 한다. 달리 말하면, 탈-제6공화국 정치 개혁에 대한 합의와 강력한 추진이 당분간 정당 간 협력의 주된 기준이 되어야 한다. 

물론 낮은 수준의 연합이 높은 수준의 연합을 교란하거나 방해해서는 안 된다. 우선순위와 강조점은 항상 높은 수준의 연합을 발전시키는 데 있다. 그러나 높은 수준의 연합이 실제로 복합 위기 해결의 주역으로 나설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정세에 따라 기민하고 유연하게 낮은 수준의 연합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진보정당으로서 이념과 원칙이 분명한 정당일수록 이런 현실적인 정치 전략을 보다 과감하고 자신 있게 펼칠 수 있다. 정체성이 흔들리는 정당은 복잡 미묘한 정치적 선택을 결행하다 스스로 분해될 가능성이 크고, 이를 염려하여 오히려 정세에 필요한 적극적 정치 행위에 잘 나서지 못한다. 이 점에서 지구자본주의의 복합 위기 시대에 맞는 진보정당의 이념과 원칙을 분명히 하는 것과 현재 한국 정치 지형과 정세에 맞는 정치 행동에 나서는 것은 양자택일의 사안이 아니라 반드시 서로를 전제로 동시에 추진해야 할 과제다.    


[책임 집필 : 장석준 정의정책연구소장]

참여댓글 (5)
  • 바삭바삭

    2023.05.20 09:40:34
    현재 상황의 진단은 대체로 동의가 됩니다.
    바람직한 대안이 많이 제시되지는 않네요.

    핀란드의 사례는 보기에 따라서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 아직도 북유럽이냐는 식상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뭐하자는 말이지?" 라는 질문은 끝까지 해소되지 않네요.
  • 프랑켄

    2023.05.26 08:04:04
    진짜 쓰레기 같은 글이네요. 제 2의 '군자산의 약속'을 보는것 같네. 현실이라곤 전혀 반영되지 않은 상상속의 판타지 소설, 친일 독재 세력과 싸우는 것만 해도 힘에 부쳤던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대체 언제부터 시민사회 세력이 국가 경영에 참여했었길래 시민사회가 정치에서 유리되서 민주주의의 위기가 발생했다는 겁니까? 어디 프랑스, 스웨덴 살다 오셨어요? 이딴 외국 책에서 베껴온 분석을 존나 비장하게 쓰면서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거 정말 한심하네. 정말 개같습니다. 이런 자들밖에 없다는게.
  • 프랑켄

    2023.05.26 23:26:55
    지금 이자가 주장하고 있는걸 요약하면 이겁니다. 일단, 민주주의가 위기다. 아무튼 위기인데, 그 원인은 시민사회가 정치에서 유리된 게 원인이다. 그래서 이 민주주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시민사회가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데, 그 시민사회라는 건 곧 정의당을 말한다. 즉 정의당이 의석을 더 먹어야된다. 근데 그러러면 비례 강화가 필요하다. 근데 비례로 의석 몇 석 더 먹어봤자 사실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래서 이원집정부제 같은 걸로 국회가 행정부를 운영하게 만들고, 연합정치 같은걸 확대해서 정의당도 연립정부에서 한자리 차지하도록 해야한다... 즉, 긴 글로 빙빙돌려 이야기했지만 결론은 나도 행정부에서 한자리 해먹어야겠다는 작전계획 같은 것이죠.

    일단 한가지 물어봅시다. 시민사회가 곧 정의당입니까? 당신들 지지율 지금 3퍼센트 밖에 안되요. 아니,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게 3프로 밖에 안되는 당신들 뿐이라면, 그냥 초능력 히어로들이 모인 어벤져스지 그게 무슨 시민사회에요. 진짜 시민사회라는 건 친일 독재 정치 세력으로부터 그래도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는 40%의 민주세력 지지층을 구성하는 평범한 시민들 아닙니까?

    말은 시민사회 어쩌고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나만 이 위기를 구할 수 있다는 운동권의 엘리트 의식 그 자체이고, 내가 주류가 아닌 상황 이 자체가 그냥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아무튼 위기론' 이 어긋난 엘리트 의식,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선민의식, 이건 그냥 7,80년대 사회주의 학생운동 시절의 그 설익은 운동권 인식 그 자체 아닙니까? 당시는 풋풋함이라도 있었지, 이건뭐...
  • 프랑켄

    2023.05.26 23:47:08
    또 한가지 물어봅시다. 당신들이 말하는 그 이원집정부제 연합정치 어쩌구 하는게 당신들이 젊은 시절 싸웠던 친일친미 독재세력에 대한 투항이고 항복이라는 생각은 안해봤습니까? 당신들이 말하는 프랑스, 북유럽 연립 정부는 그 상대가 단지 계급적 이익에만 충실할 뿐 정상적인 사고와 정상적인 도덕성을 갖춘 상대 세력을 상정했을 때 성립되는것 아닙니까? 지금 대한민국을 반으로 가르고 있는 자유당 -> 한나라당 -> 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저 세력이 그런 정치에 합당한 상대 세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까...?

    정말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내가 보기에 이 글을 쓴, 그리고 이 글에 동의하는 당신들은 그냥 내가 한자리 해먹어야 한다는 욕심에 눈이 멀어서 이미 반노동자 친일 자본 수구보수 세력에게 투항할 모든 몸과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기회만 노리고 있는 배신자들이에요. 일제 친일로부터 군사독재로 이어지는 반민주, 노동자 탄압, 시민학살의 주범 세력들을 계승한 저 집단을 '눈 딱 감고' 그냥 '정치 세력'으로 포장한 뒤, 저들과 연합해서라도 내가 한자리만 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지난 2018년 근처에 총리추천제 논쟁이 나왔을 때 심 대표가 비례확대를 놓고 새누리당과 딜을 할수 있다는 언급을 할때, 이 자들이 욕심에 눈이 멀어 물불을 못가리나 의심스러웠는데, 그래도 설마 설마 했는데 아예 대놓고 이따위 계획을 세우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장석준 연구소장, 당신은 이런 '배신 계획'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온갖 유럽 연구자들의 책과 논리를 짜집기해서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맞지도 않는 어거지 논리를 세우고 있을 뿐인 겁니다. 제 2의 '군자산의 약속'인데, 당시의 풋풋함이나 순수함은 잃어버린채 욕심만 남아서 이딴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이 음흉함, 비틀린 역사인식, 현실인식은 오히려 차원이 다를만큼 타락한 당신들의 오늘날의 모습입니다.
  • 프랑켄

    2023.05.27 00:03:40
    당신들이 윤석열 정부에 대한 비판에 이상하리 만치 인색하고, 특히 여당과 야당을 굳이 '양당'이라며 싸잡아 비판하려는 회색 스탠스를 유지하는 이유가 이 글에 다 나와있네요. 청년정치 하겠다는 누군가는 아예 대놓고 '중앙으로 진출' 운운하기에 이자가 변절이라도 하겠다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던 차에, 그래도 그자와 경쟁하고 있는 다른 주류 정파들의 생각은 다르겠지 싶었는데, 아예 이쪽은 더 대놓고 작전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니... 정말 당신들을 어찌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