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도 페미도 제대로 하는 정의당이 되어야 합니다.
오비이락당은 그만. 지역기반을 가진 독립정당이 되어야 합니다.
정파의 역기능 대신 순기능이 작용하는 정당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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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장혜영 의원입니다.
얼마 전 한석호 비대위원 겸 10년평가위원장께서 의원단 차원의 입장문과 별개로 지금 당이 처한 상황에 대하여 의원 개개인의 생각을 적극 토론할 것을 공개적으로 주문하셨습니다.
의원단 차원의 논의와 별도로 당이 백척간두에 선 지금, 한국 사회에서 정의당의 존재이유를 다시 찾기 위해 치열한 토론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의원 각자가 적극 의견개진해야 한다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당에 대한 애정과 염려를 바탕으로 당이 마주한 여러 문제들에 대해 저의 솔직한 생각을 말씀드립니다.
정의당이 ‘페미’ 때문에 망했다는 얘기가 들려옵니다. 소수자 문제에만 골몰하다 망했다는 얘기도 들려옵니다.
반여성주의 포퓰리즘에 맞서 여성의 인권보장에 목소리 높이고 장애인과 성소수자가 겪는 차별과 맞서 싸운 것이 정의당의 패인이라는 주장에 공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주장은 당의 진짜 문제를 여성과 소수자들에게 돌리는 책임회피입니다. 세상 어느 진보정당도 차별에 맞서 싸운 것을 잘못했다고 문제 삼지 않습니다.
정의당은 표가 될 때만 여성인권과 소수자 차별반대를 말하고 표가 안 되면 안 하는 그런 정당이 아닙니다. 저는 정의당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여성 인권을 지키고 장애인을 비롯한 소수자 차별에 맞서는 정당이라 생각했기에 이곳에 왔습니다.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를 대변하는 정치가 곧 모두를 위한 정치라고 외치며 당의 문을 두드렸고 시민과 당원의 선택으로 당선되어 약속을 지키는 정치를 했습니다. 여성인권을 보장하고 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것은 정의당의 근본 가치입니다. 당의 근본 가치를 지지율 하락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평가에 반대합니다.
사실 진짜 문제는 성평등이 여전히 당의 공고한 가치로 자리잡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높은 성별임금격차, 끝없이 재발하는 직장 내 성폭력 문제에서 보듯 페미니즘과 노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당내의 많은 이들은 여전히 ‘여성’을 ‘노동’의 하위 종속 가치로 보거나 아예 별개의 가치, 심지어 노동에 대립되는 가치로 간주합니다. 당의 책임있는 여러 인사들은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는 커녕 앞에서 방치하고 뒤에서 동조해왔습니다.
그 결과 정의당은 여성인권 보장에 있어 제대로 역할을 해내야 할 순간에 눈치보고 주춤거리는 당이 되었습니다. 당의 실패를 ‘페미’에게 묻는 이들은 많지만 성평등이라는 근본가치를 뒤흔드는 이들에게 책임을 묻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의당이 마주한 근본적인 문제이며 반드시 바로잡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노동 정당이 페미 정당이 되어서 선거가 망한 것이 아닙니다. 노동도 페미도 제대로 못해서 망한 것입니다. 시민들에게 우리가 누구를 위한 정당인지 분명히 답하지 못해서 망한 것입니다.
노동을 말하면서도 왜 선거 시기 노동조합은 물론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의 지지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정당이 되었는지, 왜 프리랜서 출신 의원은 당연히 ‘노동자 출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정당이 되었는지, 정의당의 ‘노동’이 조직 노동으로 수렴하는 것인지 아니면 조직 노동을 넘어 정말로 일하는 모든 시민들을 품어안는 것인지, 노동 정당을 표방하는 정의당이라면 반드시 이 질문들에 명확히 답해야 합니다. 이 질문의 답을 페미니즘에서 찾으려 한다면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합법과 불법을 막론하고 자녀에게 학벌을 세습하고 개인적 신분상승의 길을 마련해주는 데는 진영이 따로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냈던 조국 사태에 당의 가치를 훼손하는 임명 찬성을 압박하고, 명백히 졸속으로 발의된 검수완박법에 대해 ‘선거 안 할 거냐’며 찬성을 종용하고 정작 결과에 따른 책임은 드러난 몇몇 사람들 외에 누구도 제대로 지지 않는 정치적 의사결정구조의 문제 역시 페미니즘의 문제로 단순히 덮어쓰기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문제의 핵심에 비례 기반 ‘오비이락’당으로 회귀할 것인지 아니면 지역 기반 독자정당의 길을 개척할 것인지, 즉 당의 미래전략에 대한 이견이 깔려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의 핵심정체성을 좌우할 이 토론이 10년평가위원회의 가장 치열한 쟁점의 하나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지난 2019년, 당에 입당하자마자 처음 동년배 청년정치인들에게 들은 질문이 ‘인천이냐 좌파냐 함께서울이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설명을 들으니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당대표가 제출한 대선기본계획을 뒤집어 엎을 정도로 당의 크고 작은 결정에 강력하게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정작 볼드모트처럼 제대로 호명되지 않기에 명시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정파 구조의 문제도 페미니즘 문제로 치환될 수 없습니다.
정파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폐쇄성에서 비롯되는 역기능입니다. 공개된 당적 토론은 형식일 뿐이고 정파 내의 비공개 토론이 더 큰 영향력을 갖는 당이 시민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기란 어렵습니다. 전국위 해체부터 정파등록제까지 정파의 역기능 대신 순기능이 발휘될 수 있도록 하는 대안이 이제는 논의되어야 합니다.
저를 비롯해 의원실에 저와 함께 지난 2년간 열심히 일해온 ‘보좌진’이라는 이름의 노동자 9명이 있습니다. 저희는 반여성주의에 맞서 여성의 인권을 지키고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맞서는 당의 가치를 지키는 역할을 큰 자긍심으로 생각하며 아무리 힘들어도 묵묵히 진심으로 당원과 시민을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물론 스스로 돌이켜 반성되는 지점이 많습니다. 공감의 정치보다 비판의 정치에 치우치지 않았나, 당의 풍부함이 되고자 했으나 결과적으로 당의 이질감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같은 말을 하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저를 낯설어하는 당원들과 당직자 여러분께 일분일초라도 더 짬을 내어 살갑게 다가가지 못한 점도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정의당 원내의 다른 의원님들, 당대표와 지도부, 당원 그리고 당직자 여러분과 함께 페미니즘을 비롯해 당의 미래를 좌우할 핵심 주제들에 대해 발전적 토론을 적극 조성하고 치열하게 함께하는 노력이 부족했습니다. 여러 이유로 쏟아지는 비난과 공격에 위축되어 어느새 터놓고 토론하기보다 편견에 갇혀 사람들을 재단하지 않았는지 저를 돌아봅니다.
저는 감히 정의당 10년을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제가 아는 것은 오로지 제가 겪은 시간들입니다. 다만 그간 당에 누적되어온 모든 구조적 문제가 중첩된 지금의 결과를 오로지 ‘페미니즘 탓’ ‘소수자 정치 탓’으로 돌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스스로 정의당의 존재 이유 찾기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정의당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불평등과 차별, 기후위기에서 서민들과 약자를 대표할 정당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6월 2일 대표단 사퇴 이후 우여곡절 끝에 출범한 정의당 비대위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기대와 냉소가 교차합니다. 어려운 시기에 비대위의 무거운 역할을 외면하지 않고 맡아주신 이은주 위원장과 김희서, 문정은, 한석호 세 분 비대위원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비대위가 요청하는 기획과 토론에 열린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치열하게 참여하는 것으로 저의 기대와 응원을 표현하겠습니다. 모든 구태를 벗어던지고 햇볕 아래 제대로 토론하겠습니다. 함께해주십시오.
2022. 7. 5
국회의원 장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