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호 비대위원이 정의당 10년 평가에 대한 국회의원들의 동참을 요구했습니다. 저는 정의당에서 당 대표 두 번, 대선후보 두 번을 했습니다. 정의당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개별 행위자로서는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고 그만큼 책임도 무겁습니다.
당대표, 대선후보로서 결정하고 수행했던 주요 일에 대해서는 그간의 당의 평가에 이미 담겨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의 주요 행위자로서의 인식과 목표 설정, 전략적 판단 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평가도 중요합니다. 이 글에서는 그간 당의 리더로서의 소회를 포괄적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구체적인 쟁점들에 대해서는 평가와 혁신 과정에서 별도로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1.
저는 지난 23년 동안 진보정당 정당인으로, 또 4선 국회의원으로 활동해왔습니다. 저에게 지난 20여 년의 시간은 ‘진보정당의 집권 가능성’의 길을 찾기 위해 몸부림해 온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보정당 창당 때부터 진보정당의 전망에 대한 통념적 인식은 지독히 비관적이었습니다. 진보정당의 집권을 꿈꾸는 것은 철없는 이상주의자들의 환상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노동정치의 필요성을 설파하셨던 최장집 교수조차도 양당제하에서 진보정당의 독자적 전망에 대해 일관되게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독자노선은 등대정당의 길이다, 노회찬, 심상정, 민주당 왼쪽 방을 차지해라!” 제가 그동안 수없이 들어온 말들입니다. 그렇지만 같은 명분으로 민주당에 들어간 수많은 진보활동가들은 결국 민주당의 왼쪽 방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분명 기존 양당을 넘어선 다른 세상을 꿈꾸었고, 정치의 방법으로 그 꿈을 이루고자 진보정당을 만들었으며, 그렇게 지난 20여 년간 집권가능한 대안세력의 길을 찾아 시행착오를 거듭해왔습니다.
진보정당은 민주노동당 이래 재창당을 계속해왔습니다. 존립의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정의당으로 거듭 이어졌습니다. 지금 정의당의 위기 앞에서 우리는 또 재창당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는 과거의 경우와는 명확히 다르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정의당의 위기 진단과 관련해서, 가장 뼈아픈 지적은 지지기반이 형해화되고 그동안 내세웠던 비전과 깃발도 퇴색했다는 평가입니다. 단지 양대선거의 패배 문제가 아니라 20년 진보 정치가 실존적 위기에 직면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20년간 당을 지탱해온 정치철학, 비전, 조직 등은 수명이 다했습니다. 그동안 몇 번의 재창당을 통해 새로운 시도들이 보완되긴 했지만, 전면적으로 대체되지는 못했습니다. 그간 당을 주도해온 세력은 낡았고, 심상정의 리더십은 소진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진보정당 1세대의 실험이 끝났다고 봅니다. 민주노동당 창당 이래 23년간을 버텨 왔지만, 우리는 미래를 열지 못했습니다. 그 지난한 과정에서 저의 책임을 통감합니다.
이제 차기 리더십이 주도할 근본적 혁신은 주류세력 교체, 세대교체, 인물교체를 통해 긴 호흡으로 완전히 새로운 도전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2.
정의당은 저의 4번째 정당입니다. 날지 못하는 새는 도태되기 마련입니다. 그것도 20년 동안이나 유력정당의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당에 국민적 관심과 지지가 꾸준히 유지되긴 어려울 것입니다. 저에게 있어 정의당 10년은 유력정당으로의 도약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시간이었습니다.
통진당이 와해되었을 즈음, 저는 정치를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깊은 회의감 속에서 허우적거렸습니다. 그러나 주저앉은 동지들을 서로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진보 집권의 꿈을 되살려가며 가슴에 가득한 허무를 조금씩 밀어내는 고통의 과정을 겪으면서 정의당을 시작했습니다.
정의당을 창당할 때 우리는 이미 10년이 넘은 기성정당세력이었습니다. 50년 만에 탄생한 노동자·서민의 대표 정당을 자임한 민주노동당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와 격려는 매우 컸습니다. 우리는 이미 10년의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기대의 역설'을 감내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일정 기간 내에 효능감을 주지 못하면 가차 없이 외면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습니다. ‘당이 작아서’라는 것은 더 이상 핑계가 될 수 없었습니다.
정의당의 태동기를 떠올려보면, 그때는 당 안팎에서 당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던 시기였고 무엇보다 독자생존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시급했던 때였습니다. 2015년 당 대표가 되어 2016년 총선에서 7.4% 득표를 통해 5석의 의석을 확보했고, 촛불혁명과 탄핵정국에서 정치적 역할을 극대화함으로써 시민 대중과 결합했으며 이어지는 대선에서 “노동이 당당한 나라“를 대표 슬로건으로 내걸고 대선에서 6.2%를 얻은 바 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정의당은 제3당으로서 존재감과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2019년 당 대표 출사표를 던질 때는 진보 정치 1세대 마지막 당 대표로서의 역할을 상정하고 출마한 것이었습니다. 2020년 총선에서 국회 교섭단체 구성에 도전하기 위해 민주당과의 개혁 공조를 통한 선거제도개혁에 올인했고, 당내 청년 정치의 제도적 기반을 만들고자 했으며, 기후 위기 아젠다를 세팅하는데 주력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쏟아부은 개정선거법은 위성정당으로 좌초되었고, 교섭단체의 꿈은 좌절되었습니다. 법과 제도는 그것을 지켜낼 역량이 부족한 세력에게 스스로 봉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확인시켜주는 계기였습니다.
또 조국 사태 국면에서의 오판으로 진보 정치의 도덕성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일전에도 거듭 사죄드린 바 있지만, 조국 사태와 관련한 당시 결정은 명백한 정치적 오류였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이 사건은 제게 두고두고 회한으로 남을 것입니다.
저는 총선 과정의 오류와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당 대표에서 조기 사퇴했습니다. 제 다음 리더십이 정의당에 표를 주신 9.8%의 시민들과 긴밀히 소통하고, 유보되었던 혁신을 서둘러 추진해가면서, 빠른 시일 내에 당을 수습할 수 있기를 고대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2년여간 당의 리더십이 안정되지 못하고 표류하면서 위기가 더욱 심화된 것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지난 대통령선거는 진보정당의 씨앗을 지켜내야 한다는 심정으로 완주하였습니다. 양당의 박빙 구도 하에서 완주가 낳은 정치적 부담감, 그리고 2.3%의 저조한 대선 성적표는 지방선거 참패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유구무언이고, 죄인의 심정입니다.
3.
제가 당 대표를 수행하면서 직면한 가장 고민스러운 딜레마가 있습니다. 원내정당으로서 단기적 선거 승리와 장기적인 토대구축과의 전략적 불일치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선거에만 매달린다고 유력정당이 될 수 있는가”
결국 이 문제가 핵심입니다. 닥쳐오는 선거에만 집중한 나머지 자강을 위한 노력이 늘 뒷전으로 밀리게 된 것이 오늘의 위기를 심화시켰습니다. 제가 가장 뼈아프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제가 당 대표 출마했을 때의 핵심 공약이 뿌리 깊은 당을 만들겠다는 것이었고, 당의 일상적 정치 및 조직활동을 강화해 ‘작지만 내공이 강한 당’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절실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존을 다투는 원내 정당으로서 눈앞의 선거 승리를 위해 현재 구도에서 모든 자원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의당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전망 속에서 허물어진 정치적·조직적 토대를 차곡차곡 다시 쌓아가는 긴 호흡이 필요합니다. 리더십의 중심을 장기적 토대구축에 두고, 필사적으로 당의 일상 활동을 정상화하며, 의원단의 정치 활동이 이를 지원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합니다.
사회운동 정당, 지역 중심 강화, 당정치교육 등 당의 일상 정치활동을 강화하는 여러 방안이 제출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단기적 선거 승리와 장기적 토대구축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실행 가능한 당적 전략을 구체적으로 합의하는 것입니다.
정의당은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리더십 교체와 재창당 과정에서 장기적 희망에 대한 낙관의 분위기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4.
지금 추진하고자 하는 평가와 혁신이 과거를 덜어내고 단절하는 데에만 초점을 두기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통해 미래를 채워가는 혁신이 되길 바랍니다.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도래하지 않은 상태를 위기라 말합니다. 지금 정의당의 위기는 단지 선거 실패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진보정당의 새로운 비전과 노선, 전략과 의지를 벼리는 혁신으로 극복되어야 한다는데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평가도 성찰도 철저히 미래의 비전과 에너지로 모아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몇 가지 쟁점에 대한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국 사태에서 검수완박까지 정치 현안에 대한 갈등은 분명 민주당에 대한 입장 차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만, 근본적으로는 당의 집권전략 부재 또는 인식의 불일치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조국 장관에 대한 조건부 승인을 언론과 국민들께서는 선거제도와 협상한 것으로만 생각합니다만, 당시 그 결정을 이끌어낸 직접적이고도 중대한 고려사항은 당내 여론이었습니다. 당시 당의 의사결정 구조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절대다수가 조국 장관에 대한 승인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승인을 하지 않을 경우 최소 4천명에서 많게는 8천명 당원들의 대량 탈당이 예측되었습니다. 당 대표로서 총선을 앞두고 거의 분당에 가까운결정을 내리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큰 규모의 조직 균열을 내재한 입장 차이가 더 이상 방치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상대를 일방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하는 방식의 논의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민주당과의 관계를 둘러싼 갈등은 오랜 기간 지속된 당의 전략적 모호성에서 비롯된 측면이 큰 만큼, 당의 비전과 전략을 또렷이 해나가는 열린 토론을 통해 의지를 최대한 통일시켜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당의 핵심가치가 무엇이냐? 노동이냐 젠더냐 하는 최근의 논쟁이 있습니다. 당의 그 누구도, 성평등 이슈에 앞장섰던 의원들도 노동보다 젠더 가치가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민생문제를 중심에 두고 노동과 젠더, 청년 등의 이슈들을 보편적 가치 실현의 관점에서 조화시켜 가야 한다는 큰 원칙에 동의가 가능합니다.
민감한 성폭력 이슈가 많이 터졌고 그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언론에 많이 부각되었고, 그에 대한 백래시로서 ‘페미당’이라는 공격이 있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면 노동 및 민생이슈를 부각시키려는 노력을 배가해야 할 일이지, 성평등 노력이 과했다는 식으로 접근할 문제는 아닙니다.
물론 그동안 지적되었던 의원들의 개인적 돌출행위에 대해서는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의원들은 신중하게 처신하고 적극적으로 당적 고려를 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당 지도부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핵심의제 전략을 구체화하고 갈등 이슈들을 당익에 부합하게 컨트롤해 나가야 합니다.
양당 대결정치가 양산해내는 정치 현안에 휘말려서 하는 대응보다, 우리 당의 비전을 실현할 핵심 아젠다를 중심으로 밀어 올리는, 완강한 의제 전략을 구축해야 합니다.
5.
일부 당원들께서 비례대표 의원 총사퇴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 저는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양대 선거 패배와 당의 위기 앞에서 당원들의 좌절감과 허탈감, 분노가 얼마나 클지 충분히 이해합니다. 또 비례 의원들에게 여러 공과 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당의 실존적 위기에 대한 책임을 2년 남짓 활동한 비례 국회의원들에게 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에서 부여받은 권한의 크기만큼 책임도 지는 것입니다. 책임을 따지자면 그동안 이 당을 이끌어온 리더들의 책임이 앞서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저의 책임이 가장 무겁습니다.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서 이 상황을 맞게 된 것에 대해 당원들에게 송구스럽고 국민들에게 민망합니다. 국회의원들의 정치활동에 대해 평가와 성찰과 분발을 촉구하시더라도, 주요한 책임의 몫은 저에게 돌려주십시오. 더욱 더 깊이 성찰하고 위기 극복을 위해 책임질 방안이 무엇인지 숙고하겠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험난한 진보정당의 길을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이 길이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커서가 아니라 이 길이 아니면 세상을 바꿀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0여 년간 진보정당의 수많은 도전과 좌절 위에 진보 정치의 성과와 한계, 실패의 교훈까지도 거름 삼아 새로운 도전들이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으로 함께 하겠습니다.
심상정
2022. 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