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인천 당원 김대현입니다.
10월 9일 오전 10시, 인천 남동구와 부평구의 청년당원들이 모여 만든 학습소모임 <정의당 남부터미널> 첫 모임을 가졌습니다.
교육연수원의 가이드라인대로 9월 중 모임을 개시하려 했는데 여러 사정으로 여의치 않았네요.
<한국 진보정당 운동사> 1장부터 3장까지를 각자 읽어 오고, 자유롭게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총 8명 중 4명(김대현 박수현 이연수 조세준, 가나다순)이 zoom으로 모였습니다.
논제 1: <조봉암>
한국전쟁 이후 '저항 없는 우익 사회'로 재편되어 가던 한국 사회에서, 진보당은 "합법 공간에서 진보 정당 운동의 현실적 가능성을 확인한 정당"이었습니다(p. 25).
진보당의 이러한 약진에는 바로 죽산 조봉암 선생의 공헌이 컸습니다.
1956년 5월 15일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은 총 216만 3천 표(23.8%)를 획득하며 일대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조봉암은 진보당을 창당하고 당세를 확장하며 자유당 정부에 큰 위협으로 다가왔죠.
결국 자유당은 1958년 '진보당 사태'를 일으켜,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국시에 위배되고 북의 간첩과 접선했다며 조봉암 및 핵심 간부들을 일제 검거하기에 이릅니다.
조봉암은 1심에서 징역 5년,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2심 판결은 사형으로 바뀌었고, 재심 청구가 기각된 다음날인 1959년 7월 31일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조봉암을 핵심으로 한 '단핵 원심 조작'이었던 진보당은 그 핵을 잃자 곧바로 무기력하게 해체"되고 맙니다(p. 31).
당시 조봉암 선생의 영향력이 실로 대단했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했습니다.
조봉암 법살 이후 채 1년이 되지 않아 4월 혁명이 일어났는데, 조봉암 선생이 무고하게 죽지 않고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면 진보정당 운동의 명맥이 더 잘 이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이야기했습니다.
집권당을 비판하는 정치세력을 만들고 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던 엄혹한 시대 상황 속에서, 조봉암은 '시대가 거부한 급진주의자'가 아닐까 합니다.
논제 2: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목숨을 건 진보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조봉암을 비롯하여 당대 진보운동가들이 받았던 탄압을 접하니, '과연 우리는 당시 세대에 진보운동에 투신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결과는 네 명 모두 "나는 자신없소"...
적어도 지금은 진보정당 활동을 하면서 목숨을 위협받는 시대는 아니기에,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선배 진보운동가들이 존경스럽기도 했고요.
그러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역경을 딛고 일궈낸 진보운동의 경험을 보유한 선배세대가 "라떼는 말이야~"를 손쉽게 내뱉으며 앞으로의 방향까지도 규정하는 것은 지양해야겠지요.
숭고한 과거의 헌신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계승할 수 있을지에 대해 논의할 수 있었습니다.
논제 3:
3장에서는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전국노동단체연합(전국노련) 등등 한 번쯤 들어 보았던 단체들이 대거 등장했습니다.
소위 'NLPDR' 논쟁, 그리고 그 안에서의 복잡다단한 노선투쟁들이 그려졌는데요.
청년당원들은 이 NLPDR 논쟁을 어떻게 느끼는지 이야기를 나눠 보았습니다.
이 논쟁이 잠잠해진 뒤에 입당하거나 입문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생소한 논쟁일 수밖에 없다 보니, '저 사람들과는 죽었다 깨어나도 함께 운동 못 한다'고 대립각을 세우는 모습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80년대 사회운동의 핵심 논쟁이었던 것은 맞으나, 오늘날 직면한 사회문제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당내 정파, 계파로 일컬어지는 그룹 간 입장 차이에 관해서도 대체로 '다소간 차이는 있어도 함께 할 수 없거나 배타적이어야 할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한다'는 의견이 대다수였습니다.
청년 세대는 노선과 정파를 초월해, 시민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보다 현실적이고 유연한 자세로 활동을 이어나갔으면 하는 마음을 모았습니다.
논제 4: <비판적 지지에 관하여>
3장에는 손호철 교수의 언급을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진보 정당'과 '비판적 지지'라는 두 단어는 87년 민주화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현실을 고민해 온 모든 사람들의 피를 끓게 하고, 열띤 논쟁에 혈압을 올리게 하는가 하면, 피를 나눈 한때의 동지들이 서로를 증오하게 하고 '원수'가 되게 한 시대의 표상어들이다. 그래,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 이 문제를 될 수 있으면 피해 가려고 노력해 왔다(손호철, 2002).
비판적 지지라는 말을 요새는 많이 사용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말의 의미가 참 묘하다는 생각을 해 왔던 터라, '비판적 지지'라는 말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지를 나누었어요.
'비판'과 '지지' 중 전자에 주로 방점이 찍히고,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지지하기에 너무나 정이 털려 버리는 상황이 많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비판적 지지는 '우리는 이번 레이스를 여기서 끝내고, 저쪽 팀에 힘을 실어주려 하지만 그닥 내키지는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마치 '선량한 차별주의자'처럼, 비판과 지지가 한 단어 안에 녹아 있는 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지적이었는데요.
우리는 민주당을 비판적 지지할 수 있는가. 앞으로 그럴 일이 없다면 다른 어떤 정치세력에게 비판적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도 논의해 보았습니다.
참고문헌
손호철(2002). 누구를 위한 비판적 지지인가?. 『이론과 실천』(8월호)
조현연(2009). 한국 진보 정당 운동사: 진보당에서 민주노동당 분당까지. 후마니타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