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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자료

  • [문서자료] [활동가 기본교육-교재 2] 정당.정치론 : 정당과 의회, 민주주의 (서복경 박사)


정의당 교육연수원 : 활동가 기본교육 교재 2

정당과 의회, 민주주의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0. 이상한 제도, 이상한 민주주의
 
1) 이번 강의는 한국의 ‘이상한’ 민주주의 제도와 그 제도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상할 수밖에 없는’ 정치행태를 이해해 보고자 한다.
 
2) 한 사회의 법(규)은 그 사회의 ‘사회적 합의를 반영한 규범’으로 이해된다. 사회가 변화하고 그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이 변화하면 가치와 규범도 바뀌고, 변화된 구성원들의 인식은 사후적으로(!) 법의 변화를 가져온다. 그러니 사회적 인식변화가 제도변화를 가져온다는 말은 맞다.
그런데 당대에 태어난 모든 이들은 앞선 세대가 만들어놓은 규범 위에서 사회화를 경험하게 된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초록 신호등일 때는 길을 건너고 빨간 신호등일 때는 멈추도록 되어 있었고, 나는 이 규칙을 학습하면서 사회에 적응했다.
 
3) 한 사회 구성원들이 가진 ‘정치적 규범’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가진 정치에 관계된 여러 법 규범들도 우리 부모세대, 조부모세대, 혹은 그 이전의 선대(先代)가 어떤 이유로 만들어놓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그 체제에서 태어나 그 법 규범들이 형성해 놓은 정치적 가치, 문화, 습관을 체득하면서 사회화되었다.
 
4) 그런데 그 법 규범들이 민주주의에 반(反)하는 것들이라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태어나 지금까지 배우고 익숙해진 정치에 대한 인식, 문화, 관습들이 원래는 민주주의가 아닌 체제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불편한 제도들이 원래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들이라면? 당연히 지금이라도 바꿔야 한다.
 
5) 그런데 기존의 제도를 다른 제도로 바꾸는 일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현행 체제에서 법을 바꾸려면 선출된 대표, 국회의원들의 다수가 이를 지지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하에서 논의하겠지만, 현재 우리나라가 가진 정치 관계 법률들은 ‘정말 이상한’ 것이 맞다. 그런데 현직 국회의원들 혹은 전직 국회의원들은 왜 여태 바꾸지 않았으며 지금도 바꾸지 않는 걸까?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나쁜 의도로 이를 지속해 온 것일까? 그런 정치인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핵심적인 이유는 아니다. 우리 사회 유권자 다수가 그러하듯이, 그들 또한 이 체제에서 배우고 사회화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당대를 살아가는 정당과 정치인들보다 정치 관련 ‘이상한’ 제도들의 기원이 더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6) 그래서 더 바꾸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하지만 오늘의 주제는 이 ‘이상한 제도’를 당장 ‘어떻게’ 바꿀 것인가가 아니다. ‘이상한 제도’ 때문에 만들어진 정당과 정치인, 유권자들의 ‘이상한’ 정치행태를 이해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정치인식과 행동을 근본적으로 한계 짓고 있는 ‘이상한 제도’를 이해해야, 당대를 살아가는 한국 민주주의의 찌그러진 모습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애들은 가라!
 
1) 우리나라 선거법·정당법에 따르면 19세 미만의 국민은 선거권이 없고, 선거권이 없는 자는 선거운동을 할 수 없으며, 정당의 발기인이나 당원도 될 수 없다.
 
2) 보통 선거권 체제를 가진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 대부분은, 일정 연령을 기준으로 한 선거권 제한을 두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물론 우리나라의 ‘19세’ 기준은 OECD 등의 기준에서 볼 때 높은 게 사실이며, 낮아져야 한다.
 
3) 그런데 선거권 연령기준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 정치활동과 정당가입 제한이다. 1948년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선거법에는 선거권 연령과 정치활동 제한을 연계하는 조항이 없었다. 선거권이 없어도 선거운동이나 정당가입 등 정치활동은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1958년 선거법이 개정되면서 ‘학생, 미성년자의 선거운동 금지’ 조항이 최초로 만들어졌고, 1962년 정당법이 만들어지면서 정당가입이 금지되었으며 그 체제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4) 1960년 ‘4월 혁명’과 이승만 정권의 몰락이 중·고등학생들이 대거 참여한 시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당시 반정부 시위의 주 참여자들이 중·고등학생들이었을까? 그 때는 지금처럼 대학이 많지 않았고 대학에 진학하는 사람들도 매우 소수였던 시절이었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비교적 정치정보를 많이 접할 수 있는 지식인에 속했고, 1950년대 이승만 정부의 여러 실정에 대해 더 잘 반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1958년 개정 선거법에 ‘미성년자와 학생의 선거운동 금지’ 조항이 들어간 것은 1950년대 사회상황, 정치상황 때문이었던 것이다.
 
5) 문제는 이런 체제가 민주화 이후에도 지속되었고, 민주화 3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에도 ‘한참 공부해야 할 나이에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 안 된다’는 논리가 이 체제의 유지를 뒷받침해 주었다.
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직접 경험했거나 심정적으로 지지했던 사람들이 부모가 되었지만, 이들은 중·고등학생들이 ‘정치 빼고 다른 것들만’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논리의 적극적인 지지자들이 되었다.

6) 한참 공부할 나이에 ‘정치’를 배우고 경험하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정치체제가 민주화되었지만, 그들에게 여전히 정치는 ‘피해야 할 불온한 무엇’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귀한 내 자식들이 채 다 자라기도 전에 접하게 해서는 안 될 ‘무엇’이라는 것에 대해, 지금의 부모세대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에 나가기 전에는 혹은 대학에 진학하기 전에는’ 철저히 정치로부터 보호해야 하며, 그 이후에도 가능한 한 정치로부터 멀리 살아가기를 바라는 부모들이 되어 있었다. 그 부모들이 알아왔던 정치는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7) ‘정치로부터 애들은 가라’는 체제에서, 민주적인 시민들이 자라고 커가기란 어렵다. 우리나라의 19세 이전 시민들은 부모에게 ‘정치란 어른이 되기 전에는 접해서는 안 되는 무엇’이라는 가르침을 직접, 간접적으로 배우며 느끼며 자란다. 왜? 자세한 설명은 제공되지 않는다. 그저 언론을 통해 접하는 바, 정치는 ‘나쁜 것, 가까이 해서 해가 되거나 최소한 이롭지 않은 것’이라는 이미지를 반복해서 학습할 뿐이다.
 
9) 19세 이전까지 ‘정치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어 있던 시민들은 19세가 되면 어느 날 갑자기 선거권을 ‘받는다.’ 말 그대로 ‘받는다.’ 민주정체에서 당연히 가져야 할 정치활동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를 서서히 학습하고 체득하면서 유예되어 있던 정치적 선택권을 비로소 행사하게 되는 것이 아닌, 투표권만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받는 것이다.
 
10) 어제까지 ‘불온하거나 최소한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에 멀리해야 할’ 그 무엇에 대해, 갑자기 관심이 가고 애정이 생길 리 없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언론과 정치인들은 앞을 다투어 청년들의 ‘낮은 투표참여’를 질타한다. 왜? 라고 누구도 묻지 않는다. 덮어놓고 욕을 먹는 청년세대들의 입장에서 보면, 기성세대들의 호들갑이 억울하기도 하거니와 이해될 리가 없다. 이런 방식의 정치학습, 정치사회화 과정 속에서 어떻게 민주적인 시민이 자라날 수 있을까?
기성세대들이 걱정하는 ‘청년들의 정치 무관심, 정치 불신, 낮은 투표참여’는 기실 청년들의 문제가 아니라, 기성세대가 만들고 유지해 온 기성체제의 문제인 것이다. 19세 이전 세대를 정치로부터 격리시키는 것, 막연한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정치를 접하게 만들어 성인이 되어도 반(反)정치적 시민이 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한국정치가 민주주의의 모습이 아니게 만드는 가장 토대이자 ‘이상한’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룬다.
 
11) 어려서부터 부모와 함께 혹은 초·중·고등학교 프로그램을 통해서,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정보를 접하고 체험도 해보며 자라나다가 때가 되면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는 시민들을 생각해 보라. 정당의 유년 캠프, 초·중등 캠프에 참여하고, 당원가입도 하고, 선거운동에도 참여하면서 민주정치를 체득하다가, 일정 연령이 되면 당직도 맡고 공직후보자도 되는 경로가 열려 있다면, 우리는 19세를 기점으로 완전히 상반되는 정치관을 강요받는 사회와는 많이 다른 사회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정당의 유년캠프, 청소년캠프가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는지 생각해 보자. 내가 그 시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정치교육에 대해 내 동생, 내 아이들이 어떻게 접했으면 좋을지에 대해 상상을 해보자.
 
 
2. 공적인 일을 하려면 정당 근처에 가지 마라!
 
1) 현행 법 상 우리나라의 중앙정부 공무원과 지방정부 공무원은 선거운동을 할 수 없고, 정당의 ‘당원’이 될 수도 없다. 다르게 보면, 정당의 당원은 공무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왜? ‘정치적 중립 의무’ 때문이란다.
 
2) 우리 헌법에 의하면,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가 있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지며, 정당의 설립은 자유이고,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에 해당하지 않는 한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받지 않는다.
공무원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받아야 할 이유(선거운동을 할 수 없고 정당가입을 할 수 없으므로)는 무엇인가? 공무원이 선거운동을 하고 정당가입을 하는 게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에 위배되는 일이어서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받아야 하나? 그것도 아니라면 공무원은 ‘법 앞에 평등하고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자유와 권리를 제한받아서는 안 되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가?
 
3)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란, ‘공무원이 공적 권한을 남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추구하지 말아야 할 의무’를 말하는 것이지, 공무원이 정치적 의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거나 정치적 표현을 해서는 안 된다거나, 정당 가입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개인의 종교와 직업윤리의 관계와 유사한 것이다. 공무원인 개인이 특정 종교의 교인이 되는 건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로서 당연히 보장된다. 그가 업무시간 외에 그 종교의 예식에 참여하거나 헌금을 내는 행위는 그의 자유이자 권리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직위를 남용하여 특정 종교에 편향된 특권을 허용하거나 재정적 특혜를 제공했다면, 그것은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는 문제가 아니라 공적 직업윤리를 위반한 것이고 다른 이의 이익을 침해하는 등 법률위반으로 처벌받아야 하는 것이다.
공무원과 정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공무원이 양심의 자유 영역에서 특정 정당을 지지하고 어떤 정치적 견해를 갖는 건 자유다. 결사의 자유 및 권리 영역에서 특정 정당의 당원이 되는 것도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다. 업무시간 외에 그 정당의 행사에 참여하고, 자기 돈으로 당비나 후원금을 내는 것도 그의 권리다. 개인의 자격으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행위를 하거나, 특정 정치적 표현을 하는 것 역시 헌법이 보장하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
다만 그가 공적 권한을 남용하여 특정 정당에 특혜를 주거나, 위계를 이용해 지지강요를 하는 행위는 직무윤리 위반이자 다른 누군가에게 불이익을 주는 행위로 처벌받을 수 있다. 국민의 세금인 국가재정을 사용해 자신이 속한 정당에게 편향적인 특혜를 주었다거나, 공적관계에 있는 기업이나 개인에게 인허가권 등의 공적 권한을 남용하여 특정 정당의 지지를 강요하는 등 지위와 권한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직무윤리에 관한 것이지, 공무원인 개인의 정치활동의 자유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4) 또한 우리나라의 각종 법률에는 공무원이 아니더라도 ‘정당의 당원인 자’에게 금지되어 있는 직위들이 너무나 많다. 역시 ‘정치적 중립’이라는 명분 때문이다.
공직선거법만 놓고 보자. 선거법에는 선거방송을 심의하는 기구로 ‘선거방송심의위원회’, 선거기사를 심의하는 ‘선거기사심의위원회’, 인터넷보도를 심의하는 ‘인터넷선거보도심의위원회’, 선거방송을 주관하는 ‘선거방송토론위원회’, 선거관련 여론조사를 심의하는 ‘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 등을 설치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각각의 위원회의 위원은 ‘정당의 당원’이어서는 안 된다. 왜? 특정 정당의 당원인 사람은 그 정당에 편파적인 태도를 취할 것이므로 공정한 심의를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가정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가정이 타당한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이 직무윤리이듯이 이들에게도 그 개인의 정치적 의사가 무엇이든 직무윤리만 지키면 되는 것이다. 오히려 더 다양한 정당의 당원들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서로 견제하면서 더 공정한 심의를 진행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다른 많은 정부 관련 위원회와 관련기관 직위들에도 이런 조항들이 ‘일반적’으로 들어가 있다. 즉, 정부 관련 일을 하려면 정당의 ‘당원’이 되지 마라 혹은 정당의 당원인 자들은 정부 관련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대개 이런 자리들은 법조인, 교수, 언론인 등 전문직 종사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런 사람들은 언론에 칼럼도 쓰고 강의도 하고 방송도 하면서, 여론에 좀 더 영향을 많이 미치는 집단에 속한다.
이들이 신문, 방송 등을 통해 반(反)정당적인 논리를 반복해서 제공하고 교육하는 사회에서, 정당 민주주의가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어떤 방식으로든 공적인 기여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나는 당원이 아니다.’라는 자기검열을 하도록 만드는 사회에서, ‘정당 활동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정치활동’이라는 말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공무원, 국가기관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일을 하는 사람들, 이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목소리가 크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을 가능한 한 정당으로부터 격리시키는 체제, 이것이 이 ‘이상한 민주주의’를 지탱시키는 두 번째 근간이 된다.
 
5)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제도를 바꿔야 하고, 하루라도 빨리 바뀌면 좋다. 그러나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일단 현재의 제도가 공적 영역에서 ‘정당’의 존재 자체를 밀어내고, 공적 관심을 가진 시민들이 ‘정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이상한’ 제도라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해야 한다. 그리고 ‘정당’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다양한 노력들, 이를테면 정당을 만들고 정당의 당원으로 가입하고 정당의 당원으로서 행동하는 일이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행사이자 민주적 시민의 당연한 권리라는 사실을 주변으로부터 공유해나가야 할 것이다.
 
 
3. 정당,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1) 현행 헌법에 따르면 ‘정당설립은 자유이며, 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않는다.’ 정당은 정치적 목적을 가진 결사체이므로 역시 허가는 인정되지 않는다. 그런데 헌법에 따라야만 하는 법률인 정당법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정당은 일정요건을 갖추어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을 해야만 ‘정당’이 될 수 있고, 등록을 하려면 일정한 요건을 충족해야만 하며, 등록이 된 뒤에도 이 요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등록이 ‘취소’된다. 그 요건은 다음과 같다. 정당의 중앙당은 수도에 있어야 하고, 5개 시·도당이 있어야 하며, 각 시·도당마다 1,000명 이상의 당원이 있어야 한다. 정당법에는 ‘허가’라는 말은 없지만, ‘등록’과 ‘신고’, ‘등록 취소’라는 말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
 
2) 당대를 살고 있는 유권자들의 다수는 이 체제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살아왔기 때문에, 이 체제 자체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 볼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이상한’ 제도는 지금부터 55년여 전인 1962년에 처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5.16 쿠데타 세력이 1963년 민정이양 선거를 준비하면서 장고 끝에 만든 창작물(!)이 현행 정당법의 기원이다. 당시 지구상에 정당을 법으로 규제하는 나라는 아르헨티나, 단 한나라뿐이었다.
지금도 OECD 대다수 국가들에는 이런 제도가 없다. 우리보다 앞서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는 국가들 가운데 가장 후진 정치제도를 가진 일본에조차 이런 제도는 없다. 왜? 우리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바처럼 ‘정당설립은 자유’여야 하기 때문이다.
 
3) 정당의 중앙당을 어디에 두든, 정당의 지부가 어디에 있든, 당원이 몇 명이든 상관없이 ‘정당’이 될 수 있어야 그것이 ‘자유’다. 정당의 중앙당이 왜 서울에 있어야 하나? 서울이 아닌 곳에서 활동하는 시민들은 왜 정당을 만들 수 없어야 하나? 중앙정부가 규제하기 쉽도록 해 놓은 것이다.
또 전국적 단위로 조직력을 갖출 수 있는 몇몇 집단만 ‘정당’이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조항은 5개 시·도당이 있어야 하고 각 시도당마다 1천명 이상의 당원이 있어야 한다는 규제조항과 결을 같이 한다.
생각해 보자. 부산에서, 광주에서, 대전에서, 춘천에서 주로 활동하는 정치인들은 서울에 중앙당을 두고 자기 지역 외에 다른 4개 시·도에 조직력을 갖출 능력이 되지 못하면 독자적인 ‘정당’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서울에 중앙당이 있는 ‘정당’에 가입해야 한다.
이런 규제는 처음 만들어질 시점에 이미 전국적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던 ‘정당들’에게는 특혜를 주되, 새롭게 ‘정당’이 되고자 하는 세력들에게는 높은 진입장벽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미 정당법이 요구하는 요건을 충족하고 있는 기성 ‘정당’에게는 특혜를, 신생정당들에게는 무조건 불리한 장벽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4) 정당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신생정당이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중요하다. 시민들이 기존 정당이 아닌 새로운 정당을 만든다는 것은, 기존 정당들이 그 시민들의 정치적 욕구를 대변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의제나 대안에 대한 욕구가 언제든 정당으로 조직될 수 있다는 긴장감이 있을 때, 기존 정당들은 새로운 의제를 발굴하고 노선을 채택하고 더 많은 지지를 얻기 위한 경쟁에 나서게 된다. 기존 정당들을 사회변화와 유권자들의 욕구에 더 민감하게 만들기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또한 기존 정당들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언제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가지기 위해서도 신생정당이 등장할 가능성이 폭넓게 존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5) 또한 작은 단위에서도 정치결사를 할 수 있는 자유가 중요하다. 현실을 살아가는 시민들이 접하는 생활 네트워크의 범위는 수백만의 인구로 구성되는 광역 시·도에 이르지 않을 뿐 아니라, 수십만으로 구성되는 기초 지방정부 수준에도 이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범위 내에서 개별 시민들의 생계, 생활, 직업, 주거, 환경의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마련이다. 우리 동네에서 발생한 문제를 수백만이 공존하는 광역시·도까지 끌고 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야 하고, 여론을 형성해야 하고, 결정해야 할 우선순위에 올려야 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결정을 이끌어내야 하는 단위가 크면 클수록 더 많은 자원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작은 단위에서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결사는 여러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전국정당의 지부일 수도 있고, 별도의 정당일 수도 있다. 공통의 문제를 안고 있는 단위에서 공통의 조직이 만들어지고 활동할 수 있을 때, 문제를 공유하는 시민들의 이해도 깊어지고 해결의 모색도 더 쉬워진다.
작은 지방정당이 결성되고 활동하다가 지방선거에 나가고 지방공직자를 배출하여 문제해결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활동과정에서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지지를 얻어 더 큰 정당으로 발전할 수도 있지만, 전국적인 정당에서 지방정당과 연합정치를 모색하게 만들 수도 있다.
 
6) 현행 정치결사 규제를 지탱하는 핵심 논리 가운데 하나는 ‘작은 정당들이 난립하면 정치가 불안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작은 정당들이 등장할 가능성이 열려 있을수록 큰 정당들을 더 경쟁하게 만들 수 있고, 시민들의 정치 네트워크는 더 촘촘해질 수 있으며, 정치에서 연합의 기술을 더 발전할 수 있다.
사실 작은 정당들이 등장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과, 실재 작은 정당들이 우후죽순 만들어진다는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생각해 보자. 자신의 직업이 있고 아이도 키워야 하고 부모도 돌봐야 하는 생활인들의 입장에서, 아무리 작은 단위라 하더라도 상설적인 정치조직을 만든다는 게 쉬운 결정일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문제는 현행 제도가 정당을 ‘전국적 조직과 금력을 가진 그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묶어두는 한, 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은 정당을 돈과 조직과 권력을 이미 가진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체제에서 ‘내 문제를 정당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원리는 결국 ‘그들의 특권’을 옹호하는 논리가 되어버린다.
 
7) 우리나라의 정치결사 제한체제는 다른 다양한 시민결사 제한 체제의 정점을 이룬다. 시민들이 집단으로 모여 뭔가를 도모하는 것은 이유를 불문하고 ‘불온하고 정치와 사회를 나쁘게 하는 것’이라는 원리가 사회전체에 뿌리내리고 있고, 그 가장 꼭대기에 정치결사에 대한 부정적 태도와 관점, 이를 제도화한 법규범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결사제한체제는 이 ‘이상한’ 민주주의의의 세 번째 근간이 된다.
 
8) 일상적으로 시민들이 모여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집단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일체의 행위에 대해 우리는 일단 지지할 필요가 있다. 심지어 ‘일베’마저도. 물론 그들의 어떤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 비난과 비판, 때로 법적 단죄는 그 집단이 아니라 그 집단의 ‘어떤 행위’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 사실 이 둘을 구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 둘은 구분되어야 하며, 이런 접근은 정당 민주주의가 토대를 두어야 하는 다원화된 시민사회를 만드는데 가장 기본이 된다.
 
 
4. 정치에 대해 관심 갖지 마라!
 
1) 다음으로 우리나라의 ‘이상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근간은, ‘선거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기간’을 정해 놓은 것이다.
우리 선거법에 따르면, 국회의원 선거기간은 13일, 대통령 선거기간은 21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기간 내에서만 ‘선거운동’을 할 수 있고, 기간이 아닌 때에 ‘선거운동’을 하면 처벌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규제가 사실 ‘선거’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규제가 대상으로 하는 건, 선거기간이건 아니건 간에 시민의 모든 일상이다. 평범한 시민들은 언제,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할 수 없는지에 관해 알 수 없기 때문에,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항상 이 규제에 제한을 받는다. 그 결과는 정치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자체를 회피하게 되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처벌받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정치 자체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체제에서, 어떻게 민주주의가, 참여가 작동될 수 있을까?
 
2) 우리는 일상적으로 언론을 통해 다음과 같은 보도를 접한다. ‘시민단체 000이 선거법 00조를 위반해서 기소되었다, 시민 홍길동이 정치자금법 00조를 위반해서 재판을 받았다, 인터넷 이용자 고길동이 인터넷에 정치 관련 글을 썼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00판결을 받았다...’
이런 보도를 항상 접하는 시민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이유가 뭘까 하고 처음에는 뉴스를 꼼꼼히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렵다. 그의 행위가 위법인지, 그의 행위를 위법이라고 하는 그 법이 문제인지 판단하는 건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을 벗어나는 영역이다.
그리고 그는 점차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고 멀어져 간다. 왜?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 ‘위험’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또는 그는 정치에 대해 이렇게 말하게 된다. ‘정치하는 놈들은 모두 범법자이고, 정치 근처에 얼씬거리는 사람들도 모두 범법자’다. 그렇게 말하는 시민의 정치 무관심, 냉소를 탓하기 이전에 이 제도가, 이 체제가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3) 우리 공직선거법은 책 한권 분량이며, 그 대부분이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저렇게 하면 벌 받는다...’는 내용이다.
입법자들도 다 아는 건 아니다. 선거법을 집행하는 선관위 직원들도 헷갈리는 게 현실이다. 시민들의 일상과 너무나 동떨어진 규제를 근간으로 하다 보니 이러저러한 예외조항이 너무 길게 되어 있고, 조항과 조항을 이중, 삼중으로 엮어서 종합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해석이 어렵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법이 너무 복잡하고 조잡해서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면 법을 평범한 시민들이 이해하기 쉽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 맞다. 그렇게 만들면 되는데 하지 않고 있고, 아마도 그렇게 바뀌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러면 또 의문이 든다. 왜 우리 선거법은 이 모양이 되었을까? 지금의 입법자들은 왜 이 모양으로 방치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나쁜 의도가 개입되어 그들만의 공모로 유지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있다. 지금의 입법자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 체제가 만들어졌고, 그들 또한 이 체제가 당연하다고 교육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4) 기간을 정해서만 선거에 대해(사실 정치에 대해) 말하고 활동할 수 있는 체제, 사람을 정해서만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체제, 현수막은 몇 개, 명함은 몇 센티로 만들지 않으면 위법이 되는 체제는 1950년대 초 이승만 정부에서 기원을 했다.
이승만 정부가 이 ‘이상한’ 선거법의 초안을 처음 국회에 제출한 것은 1951년이었다. 1951년이라는 시점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 때는 1950년 전쟁이 발발한 이후이며 1953년 휴전이 되기 전이다.
수도는 부산으로 이전해 있었고, 대한민국 사람들은 전란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 이승만 정부는 당시 전시에 저지른 어마어마한 실책으로 국회의 연이은 국정조사에 시달리고 있었다.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또 1951년은 1952년 대통령선거를 앞둔 해였다. 1948년 제헌헌법에 따라 국회에서 선출된 이승만은 4년이 지난 1952년에 국회에서 다시 한 번 대통령 선출절차를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1950년 5.30선거로 구성된 2대 국회와 대통령 이승만의 사이는 심각하게 나빠져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절대로 대통령 당선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 이승만 정부가 1952년 군대를 동원해 2대 국회의원들을 포위하고 벌인 사건이 ‘부산정치파동’이며, ‘부산정치파동’으로 만들어진 결과가 ‘발췌개헌’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쿠데타인 ‘부산정치파동’ 한 해 전에 이승만 정부가 내놓았던 선거법 개정안이 지금 우리 공직선거법의 모태다.
2대 국회는 이승만의 제안을 거부했다. 2대 국회에서 이승만은 1954년까지 이 제안을 5번이나 반복했지만 2대 국회는 그 때마다 진지한 토의를 거쳐 이를 거부했다. 결국 전쟁이 끝나고 3대 국회가 구성되었고, 3대 국회는 그 임기종료 직전인 1958년 1월 1일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는데, 그 골자는 1951년 이승만 정부가 제출했던 원안의 내용을 대부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이승만 정부가 2∼3대 국회를 거치면서 통과시키려고 그렇게나 노력했고 결국 성공했던 그 선거법 내용은, 사실 이승만 정부의 창작물이 아니었다. 군국주의 시절 일본에서 만들어진 선거법을 베껴온 것이다. 왜? 정치인들의 입에 재갈을 물릴 수 있었고, 무엇보다 시민들의 일상적인 정치활동을 제약하는데 더없이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5) ‘정해진 기간 동안만, 정해진 사람들만, 정해진 방식으로만 정치활동을 하라!’ 이유는? 당시에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이 내건 이유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하다.
그들은 ‘돈 선거’를 막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 이 체제를 유지하는 핵심논리 중 하나도 그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누가 지금까지 금권선거를 했을까? 대기업, 대자본이 당대 집권세력들과 결탁했던 것이 지금까지 금권선거의 모습이었다. 평범한 시민들은 금권선거를 하려고 해도 할 능력이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하지만 금권선거를 막기 위해서는 평범한 시민들의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막아야 한다는 이 희한한 논리는, 지금도 많은 시민들의 동의를 얻고 있다.
또 1950년대 그들은 ‘혼탁선거, 과열선거’를 막아야 한다고 했고 지금도 다수의 입법자나 시민들은 그 말에 동의한다. 선거운동기간이 길어지면 선거가 과열되고 음해나 비방이 판치고 혼탁해지기 때문에 막아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더 일찍 도전자들이 도전장을 내고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면 손해를 보는 사람은 누구일까? 현직자들이다. 후보자들이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현직자들은 재선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대로 현직자에게 도전하는 후보자들이 더 일찍부터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면 유권자들은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 때로 그 와중에 사실이 아닌 정보가 흘러 다닐 수도 있다. 때로 돈으로 유권자의 환심을 사려는 후보자들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길면 길수록 유권자들은 서로서로 정보를 교환하면서 부적격의 후보를 걸러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또 선거운동기간이 지금보다 더 길면 소음 등의 피해로 유권자의 일상이 너무 피곤해진다고 말한다. 그런데, 13일이 아닌 1년 혹은 2년 동안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면 후보자들이 지금처럼 확성기가 달린 트럭을 타고 그 시간 내도록 골목을 누비고 다닐까? 아닐 것이다.
후보자의 제1목표는 당선이고 지지다. 유권자가 싫어하는 짓을 하면서 표를 얻으려는 후보가 있을까? 지금은 너무 짧은 시간에 자신을 알려야 하기 때문에, 이런 방식의 선거운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의 정책을 설명하기 이전에, 나의 고민을 나누기 이전에, 우선 내 이름 석 자를 선거권자들에게 인지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또 현행 선거법이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선거운동방식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선거운동원이 후보자 없이 명함을 나누면 불법이 되고, 몇 명 이상 열을 지어 행진을 해서도 안 되고, 서명을 받아서도 안 되며 호별방문을 해서도 안 된다. 제도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후보자에게, 유권자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6) 다시 되돌아가보자. 1950년대 독재체제에서 만들어진 선거법은 3∼5공화국 군사독재체제를 거치면서 더 꼼꼼하게(?) 정비되었다. 그리하여 1987년 민주화가 되었을 때, 당시 입법자들은 이 체제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대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이 제도를 지탱하는 핵심논리들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민주주의에 반(反)하는 선거법의 골격자체를 바꾸기보다는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예외조항을 계속 덧붙였다.
대체 정해진 기간에만 할 수 있다는 ‘선거운동’이 아닌 게 뭐냐 라고 물으면, ‘단순 투표독려행위는 예외다’라고 조문에 덧붙였다. ‘단순’ 투표행위가 뭐냐고 물으면, ‘특정 후보나 정당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을 포함하지 않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식으로 조문을 길어졌지만, 규제적용의 모호함만 자꾸 확산되었다.
시민의 정치활동이 어떻게 선거운동인 것과 아닌 것으로 나뉘느냐, 기간제한을 없애자 라는 제안을 하면, 혼탁선거, 과열선거, 돈 선거....라는 너무나 익숙해진 대답들이 줄줄이 나온다. 대개 이런 대답을 하는 사람들은 진짜 그렇게 믿고 있는 경우가 많다. 어려서부터 이런 인식을 조기교육(!) 받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온갖 언론 보도, 직장생활 등을 통해 평생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7) 인터넷이나 SNS가 활성화되면서 그나마 상황은 좀 나아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다르게 보면 이런 매체환경이 시민들의 일상을 더욱 옥죄는 명분이 된다. ‘온라인은 풀고 오프라인을 묶는다.’는 희한한 논리가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온라인 대한민국과 오프라인 대한민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시민들이 일상의 대면관계 속에서 정보를 교환하고 의견을 형성하는 것을 가로막은 채 온라인에서만 이를 하라는 건 또 다른 나쁜 정치적 효과를 낳는다.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 기무사 등 국가기관의 댓글 사건을 돌이켜보라. 온라인의 여론은 오프라인의 여론보다 훨씬 조작하기 쉽다. 또 시민들의 집단행동을 막는 데에도 훨씬 용이하다. 집단행동은 기본적으로 대면관계 속에서 조직화된다. 온라인 집단행동 유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익명성을 띠고 일회적이며 그 공감대가 유지되기 어렵다. 온-오프라인을 마치 다른 세계인 것처럼 나누고, 서로 다른 규제원리를 적용하는 것처럼 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8) 지금까지의 스토리를 보면, 누군가의 거대한 음모나 기획이 사태를 이렇게 만든 것이라기보다 너무도 오래전에 민주주의가 아닌 체제에서 만들어진 논리와 제도가 민주주의 하에서도 지속되면서 이런 ‘이상한’ 제도를 유지시켜온 것에 가깝다.
문제는 그 효과다. 이런 체제에서 시민들은 정치에 대해 관심 갖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회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양비론, 정치 전체에 대한 냉소를 벗어나 구체적인 것에 관해 정보를 수집하고 의견을 표현하기에 너무나 많은 법적 제약, 인식적 제약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이다.
 
9) 어떻게 해야 할까? 역시 일단은 알려야 한다. 이런 규제들이 시민의 기본권을 어떻게 가로막고 있는지, 시민들의 일상적인 연대를 어떻게 훼손하는지에 대해 공유해나가야 한다.
더불어, 표현하고 연대하는 당연한 행위들이 왜 위법인지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만들어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현행법이 금지하고 있지만 당연한 권리들에 대해 왜 문제인지 생각해 볼 기회를...
 
 
5. 무엇을 해야 할까?
 
1) 지금까지 한국의 ‘이상한’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것 네 가지를 살펴보았다. 이밖에도 많지만, 정당과 정치인, 유권자들을 가장 포괄적으로 제한하여 이 체제를 유지하고 지탱시키는 핵심원리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갖고자 했다.
민주주의에서 시민교육을 하는 장은 온 사회 전체다. 정당과 정치인의 언어는 시민들에게 정치를 교육하는 핵심도구다. 정치 관련 언론의 보도들은 그 자체가 정치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시키고 유지하는 평생 교육 프로그램에 다름 아니다.
우리나라 시민들은 19세가 되기 이전까지 부모의 교육과 언론의 보도 등을 통해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학습하고, ‘성인이 되기 전까지 멀리해야 하는 불온한 무엇’으로 배우며 자란다. 성인이 되어서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정보를 모으고 의견을 개진하다가는 조사를 받거나 재판을 받을 수 있다’는 경고를 반복해서 받으면서 일상을 살아간다.
게다가 ‘좋은 직업을 가지려면 정당을, 정치를 멀리해야 하며 정당의 당원이 되면 직업세계에서 온갖 가지 불이익을 받을 수 있고 실제로 받는다.’는 사실을 법률과 사회적 인식을 통해 확인 받는다. 생애주기 전체를 통해 시민의 정치관심, 정치참여를 체계적으로, 제도적으로 배제하는 사회인 것이다. 이것이 ‘이상한’ 민주주의의 현실이다.
 
2)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출구가 없는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는 느낌을 줄 수도 있겠다. 다행히도, 우리를 제약하는 제도는 생애주기 전체를, 삶의 공간 곳곳을 둘러치고 민주주의에 반(反)하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지만, 그 제도적 그물망에 균열을 내려는 시민들의 역동성 또한 지난 30여년 함께 성장해 왔다.
예컨대 현행 선거법이 지금처럼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운’ 누더기가 되어버린 것은, 민주정체를 경험한 시민들의 저항 덕분이다.
민주화가 되었을 때, 우리는 수십 년에 걸친 독재정권들이 갈고 닦아 깔끔하게 만들어 놓은 반(反)민주적 선거법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국민이 주인’이라는 체제에서 자라나고 경험을 가진 시민들이 늘어났고, 이들은 구(久)체제가 남겨놓은 유산에 저항했다. 그 저항이 선거법의 골격을 부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국지적인 다양한 저항들은 ‘정해진 기간 동안만, 정해진 사람들만, 정해진 방식으로만’ 정치활동을 하라는 체제의 곳곳에 구멍을 만들어냈다.
‘오프라인은 안 되지만 온라인은 된다,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를 거명하면 안 되지만 그것 빼고는 된다...’ 이런 해괴한 논리들이 공존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시민들의 다양한 저항에 구(久)체제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만들어낸 것들이다.
내년이면 민주화 30년이 된다. 1987년 이후 태어난 세대가 선거권자가 되고도 10년이 더 지난 세월이다. 민주화된 한국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대가 그 이전 세대보다 ‘항상, 모든 면에서 더 민주적 가치와 규범을 체득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초등학교 때부터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야간통행금지로 모든 일상을 통제당하며, 5시가 되면 애국가에 발걸음을 멈추면서 국가주의를 매일매일 학습했던 세대와는 다른 경험을 가진 시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여전히 시민들의 시위는 ‘불온한 것’이라는 훈계가 사회 곳곳에서 들려오긴 하지만, 거의 매일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의견을 위해 집단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며 자란 시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아직도 집단의 이익을 위한 개인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계도가 사회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개인의 침해받을 수 없는 권리를 위한 연대의 경험들도 쌓여 나가고 있다.
 
3) 생각해 보면 민주주의체제에서 뭔가를 바꾼다는 건, 참 지루하고 피곤하고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다. 당대를 살아가는 다수 시민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무엇 하나 바꿀 수 없는 체제가 이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 긴 시각에서 보면, 어쨌든 당대 다수 시민들의 동의‘만’ 얻으면 ‘무엇이든’ 바꿀 수 있는 체제가 이 체제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보를 제공하고, 설득하고, 변화의 시도에 참여할 계기를 만들고, 참여의 의지를 연대의 경험으로 바꾸어내고, 연대의 경험을 조직의 결성으로 전환시켜내고, 다양한 조직적 연대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다시 더 큰 틀에서 연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일상에 익숙해져야 한다.
당장에 이런 일들은 마치 시지프스의 돌 굴리기처럼 느껴진다. 단기간의 목적지향을 가지고 임한다면 금방 지치기 쉽다. 그저 일상으로, 마음과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이고 논의하고 도모하는 일상의 당연한 부분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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