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발전소 박상훈 박사 <정당의 발견> 강의 시리즈
정당의 발견 – 강의를 시작하며
1.
이 지상 강의는, 그 자체 민주주의 정당론 강의의 한 결과물이다. 강의는 2014년 10월 7일부터 11월 4일까지 본 강사가 학교장으로 있는 정치발전소(politicalpowerplant.kr)에서 이루어졌다. 그 뒤 강의에서 다룬 내용을 정리하는 한편, 현장 강의에서는 다루지 못했던 주제를 추가해 후속 강의를 이어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정치발전소 페이스북(www.facebook.com/politeia.kr)에 짧은 지상 강의를 40회 연재하게 되었다. 현장 강의를 들었던 수강자들에게는 복습과 심화 학습의 기회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강의를 듣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정당론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2.
중요한 주제일수록 소홀히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정당 내지 정당정치의 문제가 그렇지 않을까 싶다.
분명 현실의 민주주의 내지 민주정치에서 정당만큼 영향력 있는 위치를 차지하는 것도 없다. 그렇지만 정당에 대한 야유나 비난은 많아도 ‘민주주의에서 정당이 얼마나, 왜, 어떻게 중요한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그리 깊은 논의를 찾아보기 힘들다. 정치학계를 보더라도 선거 전공자는 많지만 정작 정당 전공자는 거의 없다. 당연히 대학에서 정당론을 가르치는 전공 교수도 드물다. 본 강사도 오래전 대학에서 정당론을 수강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 보니 한 외국 학자가 쓴 책 가운데 정당 체계 유형 분류론을 한글로 요약해 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정당정치를 하고 있는 정치인들도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 대부분은 정당정치의 언어와 논리를 모른다. 초선 의원들은 더욱 심한데, 정당정치에 복무하는 삶을 선택하면서 내면적으로 어떤 ‘자각적 결정’을 했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모두들 ‘국민을 위한 정치’, ‘정의 실현을 위한 정치’, ‘진보를 위한 정치’, ‘새로운 정치’를 말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어떻게 정당 내지 정당정치의 역할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해 말하는 정치인은 별로 없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스스로 원해서 정당정치인이 된 것이 아니라 (특정 정당이 공천을 준다고 해서, 자신이 속한 단체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라고 해서, 그간의 인맥이나 인연 때문에 안 할 수 없어서 등) 외부로부터의 요청과 제안 때문에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혹은 꼭 그 정당이 좋아서가 아니라 뭔가 실현해야 할 대의가 있는데 그걸 위한 전략적 선택의 일환으로 그 정당으로부터 공천을 받게 되었다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무의식적으로 그들은 자신을 현실의 정당정치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존재로 생각했고, 그렇기에 정당정치에 복무한다는 소명 의식이나 절실한 문제의식이 없었던 것 같다.
정당정치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자각 없이, 그저 국민을 위해 정의롭고 진보적으로 정치를 하면 되지 뭐가 더 필요한가를 반문하는 식이 되면 민주정치는 유익한 결과를 낳을 수 없다. 사실 그런 정치관은 민주주의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에 비해 탁월한 능력을 가진 특출 난 사람들이 국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덕목으로 삼는) 귀족정aristocracy의 정치론에 가깝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선한 정치 엘리트론’ 이상은 아닐 것이다.
여야 어느 쪽을 봐도 과거 권위주의 체제에 저항했던 ‘민주 투사’들이 거의 최대 의원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데, 사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정당이든 갈 수 있는 그들은 자신이 있는 곳이 곧 진리이자 정의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알아봐 주는 곳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특정 정당에 헌신하는 정치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책임성을 갖게 하는지에 대한 숙고는 발견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어디서든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하면 된다는, 자기중심적 선민의식이 더 많이 작용했지 않나 싶다.
솔직히 말해 나는 진보와 정의, 역사와 시대정신, 진심과 진정성을 앞세우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 가치나 신념이 진짜라면 자신의 내면에서 단단히 다질 일이지, 그걸 앞세워 정치를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그런 신념이나 가치에 맞게 현실을 실제로 개선하고 변화시키는 데 있지, 자신의 옮음과 선함을 과시하는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는 식이 되면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 자신을 민주주의자라고 규정한다면, 어떤 이유에서 민주주의자인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왜 정당정치인이 되고자 한 것인지에 대해 자신부터 설득할 수 있는 이유나 논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 혹은 (이탈리아 정치학자 조반니 사르토리의 개념으로 말한다면) 정당 다원주의party pluralism의 논리를 이해하고 그에 맞게 정치 언어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변화도 있다.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정치가라면, 자신이 속한 정당의 발전에 기여하면서 스스로의 내면과 실력을 단단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정당 속에서 일하고 정당을 통해 정치를 할 수 있어야 민주정치가 좋아진다. 그렇지 않고, 그저 국민을 위해 일하겠는 말, 진보와 정의를 위해 싸우겠다는 마음만으로 충분하다면 무엇이 문제겠는가. 당연히 충분하지 않을 뿐더러, 그런 식으로 정당정치를 한다면 성과 없이 좌절할 수밖에 없을 텐데,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책임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세상을 탓하고 제도나 환경을 탓하는 것으로 일관하기 쉽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만 내고 소리만 높이기 쉽다. 그런 무익한 정치인들이 양산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성과로 말하고 실제로 일하는 사람만이 ‘변화의 정치학’을 이해할 수 있고 민주정치를 이끌 수 있다. 이번 강의가 그런 방향으로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
현대 정당론의 완성자, 조반니 사르토리(Giovanni Sartori 1924 – )
기왕에 사르토리라는 이름이 나왔으니 간단히 소개하고 넘어가자. 정당론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사르토리는 도저히 모를 수가 없는 이론가라 할 수 있다. 그는 ‘현대 민주주의를 이론화하는 데 있어서 완전히 누락된 주제 가운데 하나’를 정당이라고 보고, 이에 도전했다. 1976년에 출간된 그의 책, [정당과 정당 체계]는 정치학의 고전이 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복수의 정당들이 서로 다른 사회 집단의 요구를 표출하는 동시에 서로 다른 이념을 구현하려 하면서 경쟁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공익을 증진하는 동시에 공동체를 넓게 통합하는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정당 다원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이를 통해 ? 사회집단 중심의 다원주의론과 ? 제도 중심의 민주주의관을 비판했다. 즉 민주주의란, 정치 밖의 사회에 존재하는 다원적 이익의 반영이나 대표로 이해하는 수동적 정치관에 기초를 둔 것도 아니고, 또 헌법이나 일반 법 혹은 공적 제도가 갖는 외적 제약에 의해 지배되는 피동적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독립 변수로서 정치의 적극적 역할에 의해 주도되는 인간적 질서 내지 체제라는 사실을 부각하려 노력했다. 일반적으로는 그는 정당 체계 유형 분류론을 완결지은 이론가로도 꼽힌다. 이에 대해서는 뒤의 강의에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1924년에 태어난 그는 강단의 정치학자만이 아니라 이탈리아 현실 정치에 대한 논평가로 활발하게 활동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
4.
내가 직업이자 소명으로 삼고 있는 일은, 현실의 정치를 (본 강사가 배우고 전공했던) 정치학의 언어로 설명하면서 정치학의 지식을 실제의 정치적 실천에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풀어서 말하는 데 있다. 이번 강의 역시 그런 작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학문으로서의 정치학과 현실로서의 정치 사이의 대화를 이어 가는 데 있어 정당론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주제가 아닌가 한다.
정치학 안에서도 정당론 분야는 ‘이론의 빈약함’으로 악명이 높다. 그렇기에 정당론만 열심히 공부한다고 현실의 정당정치를 개선할 수 있는 대안을 쉽게 찾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정당정치의 실제 경험을 추려 본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은 더더욱 아니다. 현실의 정당과 이론으로서의 정당론 사이의 깊은 간극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존중해야 할 제약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느 사회에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대안은 물론, 정당론의 빈곤을 채워 줄 획기적인 이론을 만들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한국적 현실에 맞는 정당론 혹은 그 가운데에서도 특정 성격의 정당이 필요로 하는 정당론을 탐색해 가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다만, 그걸 위해서라도 정당에 대한 이론과 우리의 현실 경험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강의가 그런 조건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정치학의 출발은, 시민 개개인의 좋은 삶은 그들 모두의 공통된 문제를 다루는 정치가 좋을 때 가능하다는 자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개개인의 삶이 보람과 가치를 가질 가능성은 정치가 어떠냐 하는 문제와 깊은 상관성이 있다는 것인데, 그렇기에 고대나 현대, 어느 시대든 최선의 사회구성체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실천적 고민이야말로 정치학의 최대 관심사였다. 미국 예일대에서 정치사상을 가르치고 있는 스티븐 스미스Steven B. Smith 교수에 따르면, 그런 지식 내지 지혜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고대의 철학자들은 에로스Eros라고 불렀다고 한다. 다시 말해 좋은 사회구성체 내지 좋은 정치 공동체를 구현하고, 그 속에서 좀 더 자유롭고 선한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을 탐색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에로틱한’ 활동으로 여겼던 것인데, 현대 민주주의에서라면 그런 ‘가슴 두근거리는 일’은 좋은 정당정치의 실현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추적하는 데 있지 않을까 한다. 이번 강의가 그런 열정을 갖는 데 좋은 자극제가 되기를 바라면서, 이제 강의를 시작하겠다. 끝으로 전체 강의 주제를 먼저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다음 시리즈는 이곳 링크를 통해서 보시면 됩니다. ▶ http://politicu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