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하청업체 쥐어짜서 오늘의 삼성이 되었다니
'삼성이 하청업체 쥐어짜서 오늘의 삼성이 되었다'는 발언은 틀렸다. 그 문장은 진행형이어야 한다. 삼성은, 오늘의 삼성이 되고도 여전히 하청업체들을 쥐어짜고 있다. 어떻게 그런 멍청한 말을 하냐고? 나도 별로 하기 싫은데, 오늘은 해야겠다. 내가 삼성으로 출근하는 협력사원이고, 오늘은 참다 참다 화가 나서 '일찍' 일곱시 버스를 타고 퇴근했음에도 불구하고 화가 가라 앉지 않아서 이 글을 쓰는 중이니 자격이 아주 없지는 않을거다.난 7월 말부터 SI업체 개발자 소속으로 기흥 삼성 반도체로 파견 나가 근무중이다. 뭐, 첫인상은 크게 나쁘지 않았다. 청소아주머니들 탈의실 겸 쉼터로 보이는 공간이 1층 장애인 화장실인 점과 6500원인 식권을 내 돈 주고 사서 점심을 먹어야 한다는 점. 또 그 식권 구입을 위한 결제수단은 오직 현금으로 제한되어 있어 삼성페이를 쓸 수 없다는 점(삼성페이 덕에 잔돈에서 해방되었던 내가 삼성에 파견가면서부터 다시 지갑을 가지고 다니게 될 줄은 몰랐다)을 제외하곤 말이지.
그러나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슬슬 압박이 들어왔다. 삼성은 8-5제를 시행중이어서 기흥에 8시까지 출근을 해야하는데 내가 사는 서울대입구엔 출근버스가 6시 35분에 딱 한 대 온다. 그걸 놓치면 대중교통을 이용해 장장 두시간 가량 기흥으로 여행을 떠나야하기에 다섯시 십분즈음 일어나서 씻고, 시리얼 하나 말아먹고 나가는 식으로 생활패턴을 조정할 수 밖에 없었는데, 평소 아침잠이 많은 편이 아님에도 그렇게 생활해야 하니 매우 피곤했다.
그러다보니 할 일 하고 늦어도 10시에는 잠들기 위해 5시에 딱 퇴근해서 집에 갔는데 그게 삼성 측에선 꽤 고까웠나보다. (난 심지어 출근 버스가 기흥에 도착하면 7시 10분이라 준비시간 제외하고 30분 정도를 이미 꽁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부장님으로 들어온 프리랜서 분이 자꾸 퇴근시간으로 압박을 주길래 이유를 물어보니 삼성측에서 자꾸 말이 나온다고.. 자기도 쪼고 싶어서 쪼는 건 아니라고 했다. 다행히(?) 때마침(?) 발목에 발병한 봉와직염 치료를 위해 나는 그 이후로도 칼퇴를 할 수 있었지만 그 날 이후 팀원들은 적어도 30분씩은 늦게 나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 30분은 점점 늘어나 한시간, 두시간, 세시간이 되어갔는데 삼성의 이런 압박이 프로젝트가 진행되어갈수록 나날이 더해갔기 때문이다. 경험해 본 개발자 분들은 아시겠지만 삼성은 기존의 Spring MVC 패턴을 사용하지 않고 지들만의 요상한 프레임워크를 쓴다. 그게 좋은 거면 또 모르겠는데.. 단순한 이벤트 하나만 고치려해도 소스를 여기저기 뒤져야 할만큼 비효율적이다. 아무튼 그래서 개발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기존에 자기들이 정해놓은 소설같은 데드라인에 맞춰 더 빨리, 더 빨리만 강조했다.
뭐 간단한 홈페이지 하나 만드는거면 또 몰라..반도체 설비 상태를 관리하는 웹어플리케이션을 만드는 일이라 반도체 공정에 대한 이해도 빠삭해야 하는데 반도체 설비를 직접 본 적도 없고 공정에 대해서 알리도 만무한 사람들을 7월 말에나 불러모아놓고 분석/설계/개발을 11월 초까지 끝내라니..초반엔 그게 너무 말도 안되는 일정이라 개발자들끼리는 비웃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자꾸 들이대며 압박을 해오니 자연스레 야근 시간이 늘어날 수 밖에..야근을 하게 되는 날마다 '그렇게 일정을 딱 맞춰야 하는 일이면 사람을 더 뽑지' 하는 생각만 들었는데 지금까지도 그런 일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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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야근을 해도 진도가 밀리기 시작하자 이제는 은근 슬쩍 주말 출근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주말에 나오는 사람 내가 점심 쏩니다" 이런 ㅅㅂ..PM의 그 말을 듣고 내가 어찌나 욕이 나오던지..내 주말을 점심 한끼 따위로 사려 하다니..나는 SI 소속이라 야근 수당이고 주말 수당이고 그런 거 없다. 받기로 한 돈만 딱 받게 계약되어 있고, 그 수많은 협력업체와 일하는 삼성 직원이 그걸 모르진 않을거다. 아마, 알아서 그런거겠지. 야근과 주말 근무를 시켜도 본인들은 추가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고, 직원이 반발해 그만두겠다고 먼저 말하기라도 한다면 삼성은 협력업체에 그 인력에 대한 돈 자체를 안 줘도 되니까 그것도 나쁜 일은 아니라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삼성과의 계약이 아쉬운 협력 업체 차원에서 돈을 더 주든, 윽박을 지르든해서 알아서 출근시킬거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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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속 회사의 대응도 그랬다. 삼성이 자꾸 주말 출근하라고 눈치준다고 전하자 다행히 회사는 윽박지르는 쪽이 아니라 돈을 더 주는 쪽을 택하는 현명한 판단으로 나를 달랬다. 그 준다는 액수가 평소 듣던 SI의 악명에 비해 꽤 큰 편이어서 평일 내내 야근에 시달리고도 '어쩔 수 없지, 돈도 준다는 데 가서 일이나 하자' 하며 주말 출근을 한 게 지난 주 일이었는데, 알고 보니 '어쩔 수 없지' 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오늘은 PM이 귀엽지도 않게 '일정이 빡빡하니 이번주 토요일은 원래 오던 시간에 다 나와서 근무하고 가시고, 일요일도 바쁜 분들만 사유 얘기하고 빠지시고 나머지 분들은 다 출근하세요'라고 아예 통보를 했다.ㅅㅂ. ㅅㅂ. ㅅㅂ. 일정은 이번주만이 아니고 미국 출장이 예정된 11월 말까지 계속 빡빡할 예정인데 이 새끼들 봐라? 내 그 소리가 듣자마자 어찌나 열이 받던지..씩씩 거리다가 짐 싸서 나왔다. 오늘 '일찍' 일곱시 버스를 타고 퇴근한 건 그 때문이다.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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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 프로젝트가 실은 늦어도 5월엔 시작하기로 계획되어 있던 것이었단다. 그러다 삼성측 사정으로 일정이 딜레이 되서 7월 말에나 개발자들을 다 모아 프로젝트에 들어간 것인데 거의 세달 가까이 딜레이된 스타트와는 달리 투입 인력과 데드라인은 5월에 계획한 그대로인 거라고. 그래서 일정 타령을 하며 야근에, 주말 출근을 강요하면서 자꾸 개발자들을 쪼아대는 거라고 하더라. 그 말을 듣고 오늘 일까지 겪고 나니, 대수롭지 않게 보고 넘겼던 '삼성이 협력업체 쥐어짜서 오늘의 삼성이 되었다'던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의 발언과 그 발언을 비웃던 사람들의 반응이 생각나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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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그렇게 웃겼던 건지, 궁금해서. 나는 이 상황이 정말 하나도 웃기지 않는데. 당신들은 뭐가 그렇게 웃기셨던건지. 당신들이 비웃은 포인트가 대체 어디였던건지, 정말로 궁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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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개빡친 나는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개겨볼 생각이다. 일단 소속 회사에 전화해서 오늘부터 야근, 주말 출근 안하고 정시 출근 정시 출근할테니 야근, 주말 수당 안 주셔도 된다고 통보하고 그렇게 행동할 것이고, 그에 대해 삼성 직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일일이 기록해 올릴 생각이다. 그리고 지켜볼 생각이다. 어떤 댓글이 달리는지. '삼성이 협력업체 쥐어짜서 오늘의 삼성이 되었다'던 말을 비웃던 사람들은 그 글들을 보며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아무튼 오늘은 이만 자야겠다. 금방 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