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지만, 또 식상하지만 매번 하는 얘기를 한 번 더 꺼내야겠다. 버니 샌더스는 두 번의 대선 도전 끝에 모두 떨어졌지만 오카시오-코르테즈라는 훌륭한 정치적 유산과 좌파에 대한 미국인들의 긍정적 인식을 만들어냈다. 제레미 코빈은 보리스 존슨에게 큰 격차로 패배했지만 동시에 20대 청년층의 60% 이상이 노동당에 표를 던지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아일랜드의 신 페인, 그리스의 시리자, 스페인의 포데모스는 기존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위협하며 급진좌파 진영의 급격한 성장을 이끌어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핵심은 결국 간단하다. ‘사회운동 정당’으로서, 급진적 대중운동을 통해 집권하거나 그에 준하는 강고한 지지기반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체제의 기득권을 지녔고 그것을 수호해야만 하는 우파와 달리, 체제를 바꾸고자 하는 좌파가 대중운동이라는 물적 토대 위에서밖에 성장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민주노동당의 급격한 성장은 1996년 노동법 날치기 사태와 이어진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 이후 노동운동의 열기가 고조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DSA라는 미국 제일의 사회주의 대중조직과 직결되어 있는 샌더스와 코르테즈의 상황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사회운동 정당의 의미란 단순히 각 분야별 사회운동에 연대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인천국제공항 정규직전환 사태에서 (사회운동이라면 사회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정규직 노조의 운동에 대한 보수정당의 강한 서포트를 보았듯이, 그런 것은 진보정당이 아닌 정당도 할 수 있다. 진보정당에서 이야기되는 사회운동정당론의 핵심은 결국 단순히 주체가 존재하는 운동에 객체로서 연대하는 정당이 아니라 사회운동에 직접 깊게 개입하고, 그것을 넘어 사회운동 전반의 흐름을 진보정치에 유리한 방향의 흐름으로 바꾸고자 하는 시도인 것이다. 특히 절대다수 사회운동의 주체가 사라지거나 약화된 한국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한 개입이 필요할 수밖에 없으며 당이 주체가 되어 직접 운동을 재건하지 않는다면 자생적인 운동의 재생을 바라기 힘든 상황이다.
이에 대해 가장 쉽고 편한 반론은 ‘정당이 할 수 있는 일과 시민단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르다’는 말일 것이다. “모든 활동가가 정치인이 될 필요는 없지만 모든 정치인은 동시에 활동가여야만 한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다. 모든 시민단체가 의회정치로 대표되는 현실정치를 할 필요는 없지만, 정당이라면 시민단체의 기능조차도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라는 말의 광의의 해석은 의회정치가 아닌 시민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의사결정이라고 한다면 진보정당이 동시에 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더욱 명확해진다.
지난 1년 간 학생위원회 활동을 하며 가장 많이 든 고민은 21세기 대학생들이 가진 정당에 대한 생리적 거부감을 어떻게 해소할지였다. 대선후보 심상정이나 국회의원 장혜영 등으로 인해 정의당에 대한 호의가 존재하는 것과 별개로, 학교 현장에서의 운동적 실천 없이 무턱대고 “정의당 학생위원회가 이런 곳인데 들어오라” 한다고 청년학생들이 당에 들어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렇다고 학생회를 통해 운동을 해 나갈 수 있는 시대도 아닌 상황, 결국 현재 청년당원들의 감소와 부재라는 문제는 당이 개입하고 주도하여 만들어 나가는 진보적 학생운동의 부활로밖에 해결할 수 없다. 근래 대학에서 펼쳐지고 있는 자생적 여성운동, 노학연대 운동 등과의 연대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지부터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그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혁신위원회에서는 ‘사회운동 정당’이라는 말이 계속 오간 바 있으며 지금도 그러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 사회운동 정당이라는 단어의 정의와 사용에 대해, 당 내는 고사하고 혁신위 내부에서 어느 정도까지 합의가 이루어졌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모두가 말하려 하지 않지만 지금 혁신위는 매우 다양한 인적, 정치적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누군가는 사회운동정당과 선명한 좌파 야당을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지지당원제의 도입 외에는 아무것도 바꾸지 말자고 하고 있으며, 다른 누군가는 ‘왼쪽도 오른쪽도 아닌 아래로 가야 한다’는 공허한 소리를 읊고 있다. 지금 당장 직장별로, 학교별로 사람들을 모으고 어떠한 운동에 어떻게 개입하여 당이 그것을 주도할 것인지가 논쟁의 대상이 되어도 모자랄 시점에, 당의 혁신을 위해 모였다는 혁신위원회가 보여 주는 모습은 사회운동정당이라는 - 그동안의 실패를 바탕으로 했을 때에 당연히 도출되어야만 하는 - 최소한의 합의점조차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방증밖에 되지 않는다. 실망스럽다.
더욱 안타까운 지점은 당이 가져가야 할 상의 결정, 방향성의 설정에 있어 당원들을 대상으로 한 최소한의 의견 수렴과 공론화의 과정조차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회운동에 연대해야 한다는 당원도 있고, 의회정치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당원도 있으며, 사회운동을 직접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당원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들 간의 이견을 조율하고 또 설득하는 과정이 존재해야만 했다. 그러나 혁신위에서 주된 쟁점으로 다뤄진 것은 되려 집단지도체제 도입의 문제를 비롯한 철저하게 ‘제도적인’ 문제들뿐이었다. 혁신이라 함은 그 동안 어떤 길을 걸어왔고 그것을 바탕으로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지 방향성을 설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운동 정당은 필요하다. 이 명제 자체에는 공감할 사람이 적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사회운동 정당의 정의가 무엇인지, 어째서 필요한지, 그리고 어떻게 그런 정당을 만들어 나갈 것인지 열어 놓고 이야기하자. 100명에게 각자 다른 100개의 사회운동 정당에 대한 상이 있다면, 그 100개를 모두 들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좌도 우도 아닌 아래’ 같은 헛소리를 할 시간에 말이다. 좌는 아래고 우는 위일 수밖에 없다. 나는 그렇게 배웠다. 그리고 더 좌측으로, 더 아래로, '투명인간'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명백한 방법은 사회운동 정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