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 혁신위원회에서 제출한 ‘혁신안’ 초안이 공개되었다. 혁신위원들 중 개인적으로 잘 알며 정치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신뢰하는 분들이 많고, 그들의 노고를 의심하는 바 아니다. 내부에서 많은 토론과 의견 충돌이 있었고 그 과정에 대한 결과물로 나온 것이 이 초안임을 역시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내유일 진보정당의 전당적 혁신이라는 막중한 책무에 응하기에 이번 혁신안은 미흡하고 불충분하다.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매우 많으나 그 중 혁신안에 올라온 청소년 당권부여에 대한 내용은 특히 문제적이라고 생각하기에, 해당 내용에 대한 문제의식을 옮겨 적는다.
청소년에게 불합리하고 불평등하게 제한되어 있는 참정권을 보장하고 그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억압에 맞서 연대하는 것은 진보정당의 유구한 전통이다. 그러한 층위에서 지난 시기 민주노동당에서도, 진보신당에서도 (비록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고는 하나) 청소년에게 당원으로서의 동등한 권리를 부여해 온 바 있다. 그러나 뒤를 이은 정의당에서 청소년 당권은 다양한 ‘정치적’ 논리 때문에 부여되지 않아 왔다. 그들에게 주어졌던 것은 아무런 권한도 없고 단지 이름만 존재하는 예비당원제도뿐이었다.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많은 청소년 당원들이 당 내 청소년 권리의 쟁취를 위해 싸워 왔지만 항상 돌아오는 답변은 “현행법이 청소년의 당원가입을 막고 있기 때문에 어렵다”는 하나마나한 소리뿐이었다. 진보정당의 일이 언제부터 악법에 순응하는 일이었나? 그렇게 따지면 같은 논리로 국가보안법 반대 투쟁도 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청소년 당권에 대한 내용은 혁신안에 올라온 제안 중 당비인하 문제와 더불어 유이하게 A, B 두 가지 안으로 올라온 바 있다. A안은 즉각 당헌당규를 개정하여 청소년 당원들에게 당권을 보장하며 제도불복종운동의 전개를 통해 입법과 대중정치활동을 이어나가는 것이고 B안은 청소년 당권부여를 나중으로 미루고 대중적 활동만 전개한다는 내용이다. 우선적으로 짚을 것은, 바로 이 지점에 있어 혁신위원회의 가장 큰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초안이라고는 하나 논쟁적인 사안에 있어 단일안의 도출 없이 대립되는 의견을 모두 안으로 올린다는 것은 쟁점의 거세이며 무책임함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표결의 형식이 아니더라도 다수의 의견과 가까운 것을 단일안으로 제시하거나, 완비되지 않았다면 차라리 아예 안을 올리지 말았어야 했다. 당원들에 대해, 특히나 청소년당원 당사자들에게 이것은 희망고문에 가까운 기만적 행위라는 생각도 함께 하게 된다.
안 자체의 내용을 보자. A안은 당연히 옳은 내용이나 B안은 더불어민주당에게 가해지는 ‘나중에민주당’이라는 비판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작금의 문제는 정의당의 ‘사회운동정당’화를 지향한다는 혁신위 내부에서조차 기존 대중정치의 문법과 한 치 다를 바 없이 “청소년 당권부여는 현실적으로 어려우므로 미루는 것이 맞다”는 논거가 이미 주되게 자리잡아 있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혁신위원들 대다수가 청소년 당권부여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함에도 불구하고, 반대자들의 주요 논거는 당이 이것으로 인해 사법적 문제에 휘말리면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책임질 사람이 도대체 왜 없는가. 당원이 당 활동을 하다가 당의 정신과 배치되는 악법에 의해 처벌될 위기에 처했다면 그것을 책임져야 하는 것은 혁신위원들을 포함한 모든 당원들이고, 당의 지도부이며, 당 그 자체다. 그것이 정당의 의무이다. 정당활동으로 인해 조사받거나 처벌받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은 그의 책임이 아니라 당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소송이 두려워 틀린 길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그냥 책임회피일 뿐이다. 헌법소원 제기를 비롯한 청소년 참정권 관련 대중정치활동의 전개,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틀린 법 조항을 전부 지켜 가며 당내에서조차 청소년 참정권을 주지 않은 상태로 전개하는 투쟁은 과연 얼마만큼의 호소력과 진정성을 갖출 수 있을까?
심지어 모 혁신위원은 청소년 당권 문제에 대해 “현행법 기준 준용”이라는 고작 일곱 글자의 무성의한 의견을 던지기도 했다. 혁신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내걸고 의견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따위 의견을 제시할 것이라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단 일곱 글자로 당권을 쟁취하기 위한 청소년당원들의 지난 기간 모든 활동을 퉁쳐버리는 것은 그들에 대한 인격적 모독이며, 정의당이 지향하는 진보적 가치에 대한 모독이다. 국어사전의 ‘혁신’이라는 단어를 다시 찾아봐야겠다. 도대체 언제부터 혁신이라는 말에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대로 있는 것’이라는 뜻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니까.
악법도 법이라는 말이 있다. 맞다. 악법은 법이다. 그리고 진보정당이 가야 할 길은 법이라는 테두리 내에 스스로를 가두는 길이 아니다. 남은 한 달의 기간 동안 혁신위원회는 청소년 당권부여에 대한 입장을 전향적으로 재검토해야만 한다. 장혜영 위원장은 과거 청소년의 정치참여에 대한 모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전적으로 지지하며 동의한다. 혁신위원회는, 특히 청소년 당권 부여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일부 혁신위원들은 지금 진보정당이 정말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길 바란다.
숙고와 토의를 통해 최종안은 훌륭한 혁신안으로 완성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남은 기간 혁신위원들의 노고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