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김지선후보, 일요신문 “난 몸으로 뛰어온 사람, 안철수에 꿀릴 게 없다”
[까놓고 톡] 진보정의당 김지선 노원병 예비후보

“난 몸으로 뛰어온 사람, 안철수에 꿀릴 게 없다”
뉴스일자: 2013년04월01일 09시20분

[일요신문]

김지선 예비후보가 3월 21일 노원구 마들주민회 자연터 개소식에 참석해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오는 4·24 재보선에서 가장 ‘핫’한 지역구를 꼽으라면 단연 서울 노원병이다. 이곳은 야권 유력 대선후보였던 ‘거물’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가 택한 정계 복귀 무대기도 하지만, 노회찬 진보정의당 대표가 ‘안기부 X파일’ 논란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문제의 지역구이기도 하다. 여기에 안철수라는 거물을 맞아, 남편 노 대표 대신 ‘맞짱’을 뜨러 나온 여인이 있다. 바로 김지선 진보정의당 예비후보다. <일요신문>은 김 후보의 출정식이 있었던 지난 3월 25일,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촌철살인으로 유명한 남편 노 대표와 부창부수, 인터뷰 내내 그는 달변이었다.

―오늘 오전, 출정식이 있었다.

▲그렇다. 내 인생에 이게 웬일인가 싶을 정도다. 사실 아직도 내가 선거판에 뛰어들었는지, 실감이 잘 안 난다. 내 사진이 저기(선거 사무실 벽면)에 걸린 것도 참 이상하다(웃음).

―이번 재보선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나.

▲당연히 (남편 노회찬 진보정의당 대표의) X파일 판결로 인해 무너진 정의를 다시금 올바른 자리로 되찾게 하는 것이다. 지난 총선 당시 상계동 주민들 상당수는 노 대표가 유죄판결을 받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럼에도 노 대표에게 57%의 지지를 보내줬다. 또 현직 국회의원 159명이 노 대표 재상고심 판결 연기 탄원서까지 제출하지 않았나. 법원은 그 자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번 선거는 국민적 심판이다. 정의가 세워지느냐 마느냐의 분기점이 될 것이다.

―어찌됐건 정치에 뛰어든 건 큰 결심이다. 쉽지 않았을 텐데.

▲지난 2월 14일, 노 대표가 유죄판결을 받았을 때부터 불안했다. 40년 동안 노동·여성계에서 운동을 해온 나는 나름대로 정치적 판단이 빠른 사람이다. 백기완 전 대통령 후보 시절에는 직접 옆에서 선거 지원을 하기도 했다. 판결 직후 ‘보궐선거 들어가겠구나, 혹시 당이나 남편이 나보고 선거에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같은 생각이 들더라. 사실 그 전에도 정치적 권유를 많이 받았지만, 그 때마다 정치는 내 영역이 아니라고 판단해 거절해 왔다. 이번에는 무엇보다 남편의 자리를 물려받아 나가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다. 그런데 당 최고위원회에서 계속 제안이 오더라. 많은 시민사회 여성들, 노동자들과 의논했다. 주변에서도 ‘나가지 말라’고 붙잡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결국 어려운 결정을 했다.

―노 대표의 직접적인 권유는 없었나.

▲그 사람은 내게 그런 말 직접 못한다. 원래 생활 면에서는 서로 터치 안하고 따로따로 지냈다. 그런 면에서는 내가 참 강한 사람이다.

―현실적으로 ‘노회찬 대리인, 지역구 세습’이라는 오명은 벗기 힘들 것 같다.

▲저 사진 봐도 알지 않나(그는 웃으며 사무실 벽면의 노 대표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가리켰다). 그런 이미지가 있긴 하지만, 뭐 거부할 생각도 없다. 어찌됐건 노회찬이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었고 나 역시 기본적으로 그것을 계승해야 한다는 생각이니까. 또 그의 삶이 내 삶과 무관하지도 않고. 하지만 결코 세습은 아니다.

―계승과 세습은 다르다?

▲그 이전에도 남편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정계에 진출하는 여성 의원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당선 가능성이 높은 경우였다. 그것은 세습이었다. 난 분명 그들과는 다르다. 솔직히 우리 당에서 안철수 후보와 싸워 이기기가 말처럼 쉽나. 이런 부담스런 자리에 누가 나서고 싶겠나. 난 이런 어려운 싸움에 나선 것이다. 어찌 보면 희생이다. 이를 세습으로 바라보면 문제가 있다.

―노 대표와의 차별성도 중요할 것은 같은데.

▲기본적으로 노 대표가 내세웠던 정치를 계승하겠지만, 김지선만의 정치로 그것을 배가시킬 것이다. 내가 노회찬보다 더 잘할 수 있다. 내가 노동계에서는 노회찬, 심상정보다도 한참 선배다. 수배도 먼저 당했고, 감옥도 먼저 갔다 왔다. 단체를 조직하고 창립한 경험도 내가 훨씬 많다. 노 대표가 내놓은 정책 중에는 솔직히 내가 내놓은 것도 많다.

―노회찬보다 잘할 수 있다?

▲물론 노 대표도 서민 밀착형 정책을 지향했지만, 좀 더 큰 것을 바라봤다. 나는 그것보다 더 세세하게 생활 속에서 주민들과 같이 하면서 의제를 개발하고 풀어나가는 능력이 있다. 40년 동안 시민사회에서 그런 일만 해왔다. 그런 생활 정치 면에서는 내가 노 대표보다 낫지 않겠나. 예를 들어 내가 생각하는 공약 중에는 ‘아파트 내 지역공동체 현실화’가 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증축해 노인과 아이들의 학습·놀이 공간을 확보하고 여기에 실업자들이 참여해 이들을 돌보게끔 하는 구상을 정책화시키는 것이다.

―안철수 후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사실 몇몇 비공개 여론조사에서 안 후보가 출마하지 않을 경우, 김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높게 나왔는데.

▲‘새정치’ 얘기하셨던 분이 설마 이곳에 출마할까, 생각했다. 물론 처음에는 섭섭했다. 하지만 내가 안 후보에게 나오지 말라고 할 수는 없다. 이제 아름다운 경쟁을 해야 하지 않겠나. 솔직히 내가 출마를 결심하게 된 데에는 안 후보 영향이 컸다. 역으로 보자면 내 결단에 도움이 됐다. 그 분이 나온다고 하니까, 출마 쪽으로 마음이 움직였다.

―본인이 안 후보와 비교해 경쟁력이 있다고 하는 부분은?

▲내가 뭐가 꿀리나. 물론 안 후보는 혁신 기업도 운영하시고, 대권 문턱까지 갔던 사람이다. 하지만 난 그 분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다. 열아홉에 노동 현실 극복을 위해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20년 동안 노동계에서 두 차례 구속, 수배를 당했다. 그렇게 노동자의 권리 찾기, 탄압문제 해결을 위해 뛰었다. 그 후 20년은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 안 후보도 훌륭하지만, 난 온몸으로 뛰어온 사람이다. 또 무엇보다 난 노원에서 7년 살았다. 지역 파악도 안 후보보다 훨씬 낫다. 

―민주통합당에서는 결국 서울 노원병 공천을 포기했는데.

▲민주통합당에서는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겠나. 특히 이동섭 예비후보는 20년 넘게 지역에 살면서 열심히 뛰어온 분이다. 내가 잘 안다. 그 분께는 정말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무겁게 받아들이겠다. 원래 이 지역구에서 민주당과는 정책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민주당이 이루고자 했던 뜻도 받아 안고 가겠다.

―야권 단일화 문제는.

▲개인적으로는 완주 의지가 강하다. 그 부분은 상황에 따라 당이 판단할 것이다. 당의 결정에 따르겠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김지선은 누구

여의도광장서 “노동3권 보장” 외쳐 옥살이

인터뷰를 하는 모습. 최준필 기자
2001년, 2002년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치르고 2004년 방송통신대학교에 들어가 지난 2008년 법학사를 취득할 때까지, 김지선 후보의 최종학력은 ‘초졸’에 불과했다. 늦은 나이에 학업을 이어갔던 만학도인 셈. 1955년 인천의 작은 섬 소청도에서 6남매(2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난 김 후보는 열여섯 되던 해, 뭍으로 나와 인천의 한 목재공장에 취업했다. 가난 때문에 택한 선택이었고, 이마저도 어린 나이 탓에 언니의 신분증을 들고 들어간 위장취업이었다. 명문 경기고와 고려대까지 졸업한 남편 노회찬 대표가 엘리트 노동운동가 출신이라면, 김 후보는 말 그대로 ‘생짜배기’ 운동가였던 셈이다.

1970년대 중반, 열아홉 되던 해 김 후보는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다. 다소나마 노동 환경이 개선되기 시작한 시점이었지만, 지방의 상황은 그 이전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삼원섬유, 동일방직 등에서 노조 간부를 지낸 김 후보는 1978년 ‘부활절새벽예배사건’으로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당시 이 사건은 김 후보를 포함한 여성운동가 5명이 사전에 모의·계획하에 여의도 광장 예배 설교 강단에 올라가 CBS 마이크를 잡고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고 외쳤던 사건이었다. 김 후보는 그 일로 처음 구속돼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노 대표와 결혼 후 서울로 둥지를 옮긴 김 후보는 1990년대 들어 여성인권운동을 시작했다. ‘인천 여성의 전화’ 설립을 주도했던 그는 서울 강서·양천 지역에서도 여성의 전화를 개설하고 이 지역 가정폭력상담소장을 역임했다. 남편의 지역구를 따라 2008년 서울 상계동으로 옮긴 김 후보는 최근까지 마들주민회 등 지역 풀뿌리 조직에 참여하며 지역운동을 펼쳐왔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김-노 연상연하 러브스토리

옥바라지 하느라 ‘무자식’

노회찬 대표는 두 살 위인 김 예비후보에 첫눈에 반해 적극적으로 구애했다고 한다. 이종현 기자
노회찬-김지선 부부는 노동계에서도 유명한 연상연하 커플이다. 김지선 예비후보가 노회찬 대표보다 두 살 위, ‘누나’다.

그들이 처음 만난 건 1987년 겨울, 인천에서였다. 김 후보는 당시만 해도 인천 노동운동의 대모로 통할 만큼 노동계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다. 노 대표는 선배를 통해 소개 받은 김 후보를 보고 첫눈에 반해 적극적으로 구애, 시쳇말로 ‘대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 후보는 노 대표의 고백에 “결혼할 생각이 없다”며 퇴짜를 놨다. 그 뒤 두 사람은 길이 엇갈렸다고 한다.

그렇게 1년이 흐른 뒤, 1년 전 두 사람을 이어줬던 선배가 총선에 출마하게 됐는데, 두 사람은 바로 그 사무실에서 재회한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선거운동이 끝나고 밤늦게 가로등 아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노 대표의 작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두 사람은 막차를 놓치게 된다. 노 대표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날 김 후보가 노 대표에게로 ‘귀순’하게 된 것. 첫차가 다닐 때까지 서로를 알아간 두 사람은 동인천역에서 무작정 15번 시내버스 첫차를 탔고, 만수동 종점까지 함께했다, 그리고 그해 바로 결혼에 골인하며 신접살림을 차리게 된다. 두 사람의 인연은 결국 그날 놓쳐 버린 ‘막차’에서 시작된 셈이다.

당시 김 후보는 서른다섯. 무척 늦은 결혼인 데다 노 대표는 수배상태였다. 결국 결혼 10개월 만에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사건으로 노 대표는 구속됐고, 3년 6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한다. 김 후보는 초창기 신혼 생활 대부분을 남편 옥바라지로 보내게 된 것이다. 출소 후 김 후보의 나이는 어느 덧 마흔을 바라보게 됐다. 이후 두 사람은 아이를 바랐지만, 워낙 늦은 나이인 터라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현재 김 후보 부부는 슬하에 자식이 없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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