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에서 심상정 후보에게 보내온 편지]
프랑스에서 심상정 후보에게 보내온 편지 입니다. 
 

"분초를 다투는 선거일정이지만 요며칠 프랑스에서 보내온 한 편지에 가슴이 먹먹해 잠을 잘 이루지 못했습니다. "넉넉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가난한 유학생" 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청년의 편지입니다. 연락처도 없이 여섯 페이지를 빼곡히 채워넣은 편지만 보내주신 탓에, 감사의 말씀을 대신해 이렇게 올립니다. '정권교체'와 '정권교체 그 이상' 사이에서 고민하시는 분들과 나누고 싶은 글입니다."

-심상정-


안녕하세요. 저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000이라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쓰는 게 한참만이라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하고 끝맺음해야 하는지 고민이 되지만 그냥 하나하나 풀어 놓아보려 합니다. 

저는 제가 고등학생일 때부터 당신 이름을 종종 봐왔습니다. 그 때부터 꽤 오랫동안 당신의 이름을 만났지만 당신이 누구인지는 잘 몰랐습니다. 숱하게 많이 언급되는 정치인들 중에 한명이라고 생각했고, 가끔 굵고 큰 글씨로 신문 타이틀을 장식하는 걸로 봐서는 그래도 목소리가 큰 사람이구나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당신을 조금은 특별한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던 것은 역시 사자후 영상 덕분이었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당신을 이렇게 만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 이후로 듣게 되었던 당신의 이야기들은 참 인상 깊었습니다. 

당신이 노동을 이야기하는 게 인상 깊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저에게 노동이라는 단어는 멀게만 느껴지고, 여전히 무거운 주제입니다. 이게 단지 제가 아직 학생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아직 아르바이트를 해 본 적 없는 한국의 평범치 않은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작년 여름, 학업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했던 어린이 집에서 일을 했던 한 달이 전부입니다. 그것 역시 자의에 의해 했던 봉사활동 느낌이 강했고, 노동이라는 개념과 저의 간극을 좁히기엔 턱없이 부족했었습니다. 중·고등학생 때는 딱히 돈 쓸 일이 없었고, 그래도 아르바이트를 해볼까 생각이라도 할 때면, 어려서 밤낮으로 아르바이트하며 공부를 해야 했던 엄마는 벌컥 화를 내시며, 그거 할 때 공부한자 더하고, 책한 권 더 읽을 생각을 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실 사회에서 말하는 최저임금, 근로계약서, 4대보험, 노동법 노동복지들이 어렵고,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더군다나,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프랑스로 건너와 공부를 하게 되어 노동은 여전히 지금 당장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생활이 그렇게 풍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허리띠를 조금 졸라매면 그럭저럭 가난한 유학생으로 살 만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의 시간들이 꽤 길었고, 하여 저는 이게 그냥 평범한 삶이라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가끔 하게 되는 친구들과의 연락은 그런 저에게 아니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저를 많이 일깨워 주었습니다.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친구들의 삶에 아르바이트는 삶의 일부였고, 때론 삶의 그 자체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에게 최저임금은 밥줄이었고, 근로계약서는 최소한의 보험이어야 했고, 4대 보험은 선물이었습니다. 노동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 친구들의 생활을 건드릴 때도 있었고, 그 가족을 통해 삶을 흔들 때도 있었습니다. 

이곳의 제 친구들은 저와 비슷하게, 평범한 줄 알았던, 평범치 않은 삶을 살아왔고 여전히 앞으로 몇 년간은 더 이렇게 살아갈 생각을 합니다. 이 친구들의 삶에서도 아직 노동은 후에 생각해도 괜찮을 주제입니다. 많은 제 프랑스 친구들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지에 대해 고민을 하지 당장 내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날은 멍하니 버스를 타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이 친구들이 부러워졌습니다. 몇 달 바짝 일을 하면 새 차는 아니어도 몰고 다닐 수 있는 차를 척 살 수 있고, 그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도 목숨을 걸고 하지 않아도 되고 혹, 피해를 받아도 말을 하면 들어 줄 수 있는 곳이 있고, 그 누구도 일하는 사람들 쥐 잡듯 잡지 않고, 노동 자체로 존중하고 존중 받는 사회에 산다는 게 갑자기 너무나도 부러워졌습니다. 이는 곧 “네가 꿈을 꿀 수 있고, 희망해도 괜찮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사회다”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건 어쩌면 친구들이 자기 차를 몰고 등·하교하는데 새삼 신기해서 였을 수도 있고, 점심을 먹으며 보았던 다큐멘터리에서 최저임금협상을 한답시고 모인 사람들이 가위바위보로 정하는 것은 어떻냐고, 자기가 이기면 동결이라고 웃으며 마이크에 대고 이야기했던 것들이 다시 한 번 불현 듯 뇌리에 스쳐서 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했던 노동 이야기가 인상 깊었던 이유는, 적어도 당신이 했던 노동에 대한 말들은 가위바위보로 치부되어버리는 제 3자의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여서 였을까 싶습니다. 노동이 가볍게 여겨지고, 보호받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이야기를 노골적으로 하는 성숙하지 못한 사회에 당신이 했던 노동이야기들은 결국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땀이었고, 눈물이었고, 삶이자 희망이었음을 노동이 아직도 어려운 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여성을 이야기하는 게 인상 깊었습니다. 얼마 전 알게 된 사실은 저는 꽤나 바람직한 집안에서 큰 여자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제 주변에는 꽤나 독립적인 여자 어른들이 많았고, 그런 여자들이 꼭 드센 여자들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말해주는 남자어른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에 사회가 말했던 페미니즘 코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주변에서 침을 튀기고 열을 내며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때로는 그 사람과 같은 온도의 화를 느끼고 열을 내며 같이 침을 튀기며 이야기를 할 때도 있었지만, 그만큼의 열과 화를 못 느끼며 그 사람을 맹한 눈으로 보게 되는 때도 있었습니다. 여러 번,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본 후에야 저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집은 성 불평등이 문제가 되던 집이 아니었기에 그랬구나, 그래서 그 말들을 영혼 깊이 느끼지 못했구나’하고 말입니다. 

저희 부모님은 두 분 다 같은 분야에서 같은 일을 한지 한 20년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매일 아침 차를 끌고 나가 저녁까지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두 분은 제가 커오는 동안 항상 같은 코드의 이야기를 하셨고, 늘 같은 선상에 서서 서로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두 부모님의 첫째 딸입니다. 저희 부모님 두 분 중 그 누구도 첫째인 제가 딸이라 어떻다 이야기하신 적 없었습니다. 저에게 남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역시, 저희 부모님 두 분 중 그 누구도 아들인 동생이 둘째라 저떻다 이야기 하신 적 없었습니다. 저희 할머니, 할아버지도 제 동생이 남자아이라 좋고, 제가 여자아이라 싫다 하신 적 한 번 없었습니다. 집안의 그 누구도 저에게 “넌 여자 아이니 집에서 집안일을 해야 한다”라거나, 동생에게 “넌 남자 아이니 집안일에 손대는 거 아니다” 이야기 한 적 없었습니다. 하나 기억나는 것은, 증조외할머니께서 용돈을 주신다고 저에게는 오천원, 동생에게는 만원을 쥐어주신적이 있었는데, 이마저도 바로 이모할머니께서 “아이고 엄마, 요즘은 이렇게 주면 주고도 욕먹어~”하시며 저에게 오천원을 더 쥐어 주셨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집에서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어도 “이 여편네가”,“이 기지배가”,“어디 여자가”하는 소리 한번 못 들어봤습니다. 

하지만 사회는 아니었습니다. 가까이 친구들 사는 이야기만 들어도 “이 여편네가”,“이기지배가”하는 소리들은 소설 속의 대사만은 아니었고, “어디 여자가”하는 소리는 그저 한국영화의 클리쉐가 아니었습니다. 여성대상 농담부터 차별, 여성혐오범죄까지 사회에서는 성불평등이 공공연하고 만연했습니다. 사회에서 꽤 많은 여성들이 불쾌하고 억울한 경험을 해야했고, 때로는 겁에 질려야 했습니다.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제 삶은 한 번 더 그들 앞에, 평범치 않은, 부러운 삶이 되어버렸습니다. 한 번은, 이곳의 한 친구가 “난 나중에 아이 갖게 되면, 일 딱 끊고, 집에서 있으면서 집안일하고 아이 키울거야”하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속으로 ‘여기 여자 치고는 굉장히 특이한 발상인건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 앞에 있던 다른 친구가 제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하는 거냐 하는 말투와 표정으로 “뭐???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네가 하는 말이 하나도 이해가 안돼!!!! 우리가 그럼 왜 이 고생을 하면서 공부하고, 고생을 하는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천장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아니, 난 그냥 그러고 싶다는 거지!”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경제적인 것이 이유가 아니라, 당연히 멀어지고 있는 모성애 신화 때문이 아니라, 직장과 사회의 시선과 차별이 이유가 아니라, 그냥 그 선택자체로 물어지고 거기에 자신의 선택이 그렇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회에 사는 친구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한편으로는 부러웠고, 한편으로는 씁씁했습니다. 아울러 자연스럽게, 한국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지어야했던 짐들이 생각보다 많았구나 생각했습니다. 집안 구성원으로서 경제적으로 짐은 되지 말아야 했고, 동시에 현모양처가 되어야했으며, 둘 중 하나 꼭 그렇게 되지 못하면 안 되는 것처럼 사회는 이야기 했습니다. 상당부분의 육체적, 정신적 짐은 후에도 죄책감이 되어 스스로를 나쁜 엄마, 나쁜 아내, 나쁜 사람으로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대부분, 여자 혼자서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당신이 했던, “슈퍼우먼이 되기를 거부하겠다”는 말이 아주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조금은, 점점 제 목을 옥죄어오던 것들이 느슨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당신이 장애인을 이야기하는게 인상 깊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졸업을 앞두고 대학에서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마지막 학년인 3학년 때는 졸업논문을 쓰거나 ‘스타쥬’라고 하는 실습을 하고 레포트를 제출해야 합니다. 저는 욕심을 좀 부려서 1학기 때는 논문을 썼고, 2학기 때는 자폐증 친구들의 문화, 예술, 교육 단체에서 스타쥬를 했습니다. 저는 감히 이곳에서 대학3년 배운 것 그 이상의 무언가를 배우고 느꼈다 생각합니다. 제가 이 전에 가지고 있던 자페증, 자폐아에 대한 오해, 이론과 실제의 차이부터, 두 다른 사회가 이들을 보는 시선, 대하는 태도나 방법, 그리고 나아가 그 가족, 부모가 지어야 하는 짐의 무게 등등 이곳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큰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전에 중학생일 때, 의무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한 복지원을 찾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곳에서, 하루였지만 한나절, 긴 시간 있었기에 얼추 그곳에서 하는 일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고, 그 속에서 그들과 하루를 같이 살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버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며 했던 가장 큰 생각은, “웬만하면 이곳에서는 봉사활동을 하고 싶지 않다.” 였습니다. 그곳에는 너무나 많은 지적장애우분들이 계셨고, 그들을 돌 볼 인력은 턱없이 부족했어서, 그들은 관리당하고 있었고, 일하시는 분들의 표정은 굳어, 기본적으로 미간에 깊게 파인 주름하나씩은 갖고 게셨습니다. 그걸 보는 일이 너무 힘들고 불편했어서, 그래서 어렸던 마음에 ‘인력이 부족하니 내가 가서 도와야지’하는 생각보다는 ‘다른 봉사활동지를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조금은 많이 달랐습니다. 모두들 밝은 표정이었고, 사랑하는게 보였고, 아이들을 한 인격으로 대하려는 인위적인 특별한 노력 없이도 이미 아이들은 아이들 자체로 받아들여지고,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표정 역시 밝았고, 그 아이들을 이곳에 맡기는 부모들의 표정도 늘 밝았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장애를 가진 아이의 부모”의 얼굴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타 다른 평범한 아이를 둔 부모의 얼굴로 보였습니다. 이 단체에서는 끊임없이 어떻게 이 아이들이 사회에 어울릴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사회도 어떻게 하면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하여, 가족과 부모의 짐을 나누어 지려 노력했습니다. 제가 경험했던 이 작은 사회 속에서 자폐증을 가진 아이들은 더 이상 치료받아야 할 병, 장애를 가진 존재가 아니었고, 그저 사회를 이루는 한 부분이었습니다.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소풍을 나갔고, 산책을 했고, 수영도 했습니다. 영화관에서 평범한 사람들과 어울려 영화도 보고, 같이 게임도하고, 때로는 부모 없이 여행도 같이 떠났습니다. 이곳에서는 이게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고, 이곳은 그것을 불가능하다고, 안된다고 말하는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보았던 이 작고 큰 사회가, 당신이 한 탈 시설, 장애인의 이동권을 비롯한 여러 장애인들의 인권이야기와 맞닿아있다고 여겼습니다. 더 이상 일부만 지어야했던 짐들이 일부에게만 지어지는게 아니라, 그게 당연한 사회가 아니라, 그 짐들을 나누어지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짐들이 일부만 감당해야 하는 것으로 남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장황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그를 통해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당신과 정의당이 말하는 가치가 한국 정치사회에 얼마나 큰 의미를 갖고 있는가, 고맙고 또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당신과 정의당이 갖는 의미는, 그 자체로 혹은 그 영향으로 사회를 보는 시선을 바꾸고, 희망할 수 있게 한다는 말을 꼭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다수는 당신들이 소수만을 이야기한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것이 결코 소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를 이루는 것은 여러 작은 소수들이고, 그 소수들이 있어야 다수가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늘 당신과 정의당이 지치지 않았으면 생각하고 바랍니다. 

오늘 저는 성인이 된 이후 처음으로 이곳에서 투표를 했습니다. 매년, 학교에선 학생대표를 뽑았지만, 항상 후보자들이 한명이거나, 두 명을 넘기지 않아 형식적으로 투표를 하지 않아도 되었었고, 그냥 그들 모두가 학생대표가 되었었습니다. 올해는 두 명씩 두 팀이 나와 투표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마저도 학생페이지로 투표를 해 투표보다는 설문조사를 한 느낌이었습니다. 오늘은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한 친구가 주섬주섬 가방, 지갑에서 학생카드를 꺼내길래 보았더니, 친구가 “우리 어차피 가는 길인데, 가는 길에 들러서 나 투표 좀 하려고!” 하며 말했습니다. “무슨 투표인데?” 물으니 우리 단과대학 대표를 뽑는 투표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밖에서 기다릴까 하다가 구경이나 할겸 들어갔더니 나머지 친구도 주섬주섬 학생카드를 꺼내며 “너는 안 해?” 제게 물었습니다. “어차피 나 누가 누군지 몰라서...” 하니까 “어차피 한 팀 밖에 없어, 우리도 응원차 하는거야”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얼떨결에 하게 된 투표였지만 뭔가 특별한 느낌이었습니다. 신기한 느낌을 안고 투표장을 나와 걸으며 저흰 아주 자연스럽게 곧 있을 프랑스와 한국의 대선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곳 친구들도 꽤나 진지한 모습이었습니다. 친구들은 늘 그렇듯 자기들은 차악을 찾는데 힘을 써보겠다고 웃으며 이야기했습니다. 아마 제가 당신을 몰랐다면 저 역시 친구들에게 저도 한국의 차악을 위하여 고민을 했겠지 생각해봅니다. 

친구들은 저보고 투표를 어떻게 하냐, 부모님이 대신하냐 물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파리로 올라가 대사관에서 투표를 한다고 하니 친구들은 비싼 투표를 한다며 웃었습니다. 지난 총선 때는 어찌해야하나 고민을 하다가 결국 이런저런 여러 이유들로 투표를 하지 못했었는데 이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차를 타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투표가 아닌 최선을 위해 투표를 할 수 있는 날이 또 올까 싶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되어 처음하는 투표에서 최선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저를 벅차오르게 합니다. 

당신이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고, 당신 역시 계속 희망하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2017년 4월 4일. 모두가 평범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평범한 삶을 계속 살고 싶은 000, 프랑스에서 씁니다.

 

(출처 : http://blog.naver.com/713sim/220986247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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