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이름은 서현숙
왜 대선 경선에 나섰냐면
나는 일하고 싶어서 입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리더십 이 내가 가장 잘 할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랜세월 준바해 왔고 대담하게 하게 나섰습니다.
한사람의 예술가로 제 인생 전부
목숨을 걸고 쌓아온 길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와서
내자신과 국민여러분께 정직하게 말합니다
내 국민과 국가를 위해 일하고싶은 간절함이 있습니다 라고
제 스스로를 소개합니다.
저는 예술가 였던 싱글 맘 출생으로 어린날 여러가지 사회 문화적으로
가족생태적으로 불평등을 경험하며 성장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후, 인터리어 디자인 연구소 직원을 시작으로,
생명보험회사 최초 최연소 여성 세일즈 팀장으로 일하며 만 스므살도 안된 내가 비지니스 슈트를
입으면 30살 이상으로 보여 거의 대학졸업한 직원들과 일했습니다.
어른 남성들 과 함께 경쟁하며 팀을 이끌었고 회의참석은 물론 전략적 영업 또는세일즈맨쉽에 대한 강의도 했지요.
새로운 그런와중에도
대학입시공부를 끊임없이 하다 25살이되어 결심하고 작은 예술대학교에 장학금 받고
입학해 나를 온전히 작업과 공부에 주었습니다. 대학 다니는 동안 알바로 일한 유치원 미술교사로 이름이 나기도.
학교 졸업후 서영선 이란 이름으로 국내에서,개인전과 초대 구릅전시들로 5,6년간 맹렬히 현대미술 작품전시 활동을 하는 동안
세상은 독재자와 그 무리들에게 속해있었고 사람들은 돈 앞으로 앞으로 모여들었다. 모든잣대 가 돈
돈 이었다.
세계로 뻗어보자.
공부를 더 하자.
세계적인 작가 가 되보자.
어떻게? 특히 경제적 뒷바침 필요한데 어떻게?
해결책 없어 2년 정도 방황하다 한학기 등록금 만 가지고 목숨을 내어 줄 각오로 유학길을 떠났다. 33 살 이었다.
학부로 전학해서 시작했는데 전공분야는 별로 배울것이 없었다. 나는 한국을 떠나올때
이미 작가였지만 생각을 바꾸자, 고정관념 문화적 태도 등을 바꾸자. 그래서 시각확대와
이해력과 창의력을 기르며 조직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체계로 또 영어를 능숙하게 하는데 마음을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로 다 할 수없는 끊없는빈곤 과 고난속에 일어서고 또 일어섰다.
풍요롭고 화려한 뉴욕에서 늘 배가 고팠고 주거지가 늘 흔들 거렸다.
알바를 세개씩 뛰며 풀타임 학생, 잠잘시간없어 자주 대낮에 길을 걸으면서 잤다.
사방이 절벽이었다. 친구들 말데로 기적이었다. 대학원을 맞친건.
졸업후
세계를 향한 작가가 되기위해 다시 온전히 예술작업에 헌신했다. 오롯히 인생 전부를
예술에 주었다. 대단한 찬사가 줄을 이었다.
작가로서 촉망받았다. 작가로서 전시 오픈닝을 위해 대륙들을 날아다녔다.
그러나,
작품을 팔 돈 배경없는 작가나 화랑주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치명적이다.
몸 여러군데가 고장났다. 극단적 고난의 장기적 행군은 몸과 마음이 너무나 부서졌다. 많이 아팠다. 죽음의 문전에 갔다.
종내는 내가 없어졌다. 비우게 했다. 버렸다 나를. 한 예술가를. 인생전부를 준 예술, 예술이 특별하다는 생각도 버렸다.
인생전부를 준 작품들 30여년동안 제작된 모든 작품들이 쓰레기장에
작업장 건물주인에 의해 버려졌다.
허망과 허무의극치.
분노.
말를 잃었다.
한동안 몸과마음을 추수리면서 내가 얼마나 살아남기위해 그리고
작가되기에만 혼신을 다했지 남을 배려하거나 이웃을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는지를 깨닺자 몇년을 반성했다.
그리고
* 9.11
2001 현장에서 경험하였다. 가장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평화의 표상인지
이날이후 깨달았다. 뼈져리게 체험하였다. 수도꼭지를 틀어논듯 눈물을 멈출수 없었다.
그런데
어떤 부르심이
계속해서 보이지않은 저 심연 깊은곳에 감추어진 원래의 꿈을 흔들어 깨웠다.
예술에 집착하면서도 무력해진 내 자신을 더는 감당하지 못했고 예술도 지루했다.
자신에게 정직해지기로 했다. 정말로 새로운 도전, 감히 정치라는 단어를 입밖에 꺼내본적도 없었다.
받아들이자.
적어도 내 자신에게 정직해지자.
그이후 수년 동안 혼자서 정치가가 되기위한 인성훈련과 정치평론과 분석,
우리역사를 공부했다( 우리역사 쓰여짐에 많은 문제점도 알게되다.
그러한 과정속에서
나는 다시 태어났다.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어졌다.
눈이 뜨이며
주변사람들, 이웃이, 공동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 빈 공간, 조각 or 설치작업 공간,
혹은 캔버스 대신, 사람들이 보이고 관계를 시작하니 사람들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하고
어려운지 깨달았다. 작품속 빈 공간을 나름 심오하게 오랜세월 바라보다가 외톨이가
되어버린것이다. 사람들로 부터 멀어진 것이다.
인간관계가 없는곳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색하고 훈련되지 않은 그곳에서 난
다시 시작해야했다.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기로 결심했다. 사회적 정치적 이슈들을
정의 와 평등과 자유의 관점에서 바라보자 비슷한 생각을 가진 친구들과 공동체속에서 뜨겁게 토론하고
판단에 따라 행동에 옮기기도 했다.
다시 생기가 돌고 기뻤다.
2013 학교버스에 내몸이 15 feet 날아가는 교통사고 - 막 시작한 뉴욕시립대학 교수직 사표내고 2년동안 치료에 만 전념.
2015년 8월15날 이사
드디어 뉴욕에서 대한민국으로
늘 그리워 하고 목이 메였던 고향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나를 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유형 무형 내가진 탈렌트를 이웃과 나누고 살려합니다.
문화적으로 생각이 틀리다. 인내가 필요하다.
나를 버리는 일과, 또한 나를 지키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늘 배가 고팠고 살기위해 알바를 허겁지겁 살기위해 했던 기억, 집이없어 30년동안
해온 작품 모두를 잃은 말로 다 표현할수없는 아픔
●맞춤형 복지를 스케치 해봅니다.
●아름다운 우리강산 평화 문화 경제 군사 수퍼강국으로!
뉴욕에서 경험한 지독한 인종차별로 인한 수많은 별들이 가슴에 꽂혀
수퍼강국이 되고자 하는 한이있습니다.
●젊은 청년들의 좌절, 가난, 불평등한 삶을 깊이 경험한 저는 반드시 해결해 보겠습니다.
●힌국에 돌아와 대학에 이력서를 보냈지만 나이가 많다는 아유로 직업을 구할수 없었습니다.
●우리 다 함께 살아요ㅡ 청정한 공기를 위해 기후를 위해 우리가 할수있는 모든것을 합시다.
동물들과 식물들 을 배려하며 다함께 삽시다.
@ 저는 일하고 싶습니다. 위의 이유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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