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당 내에서 다양하게 쓰이는 '노동중심성 회복'에 대한 제 생각을 페이스북에 적은 글입니다.
페이스북을 사용하지 않는 분들과 내용을 공유하기 위해 이 곳에도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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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원용 글 III)
'노동중심성 회복'이란 말이 '비노동운동 진영'에 어떤 의미인지 정말 모르고 있구나라는 걸 어제, 오늘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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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원용 글 III-1)
너무 짧게 쓰다보니 추가 해설하나 더.
1. (전체 운동에 복무하는 부문운동)
1990년대 학생운동을 하면서 가장 많이 싸웠던 것 중의 하나가 '전체 운동에 복무하는 부문운동'이란 표현이었다. 여기서 전체운동은 말그대로 사회운동 '전체'를 뜻하는 말이기 했지만, 사실 현실에서는 '노동운동'이나 '비합운동', '전위운동', '변혁운동', '계급운동'의 뜻이 더 강했다. 부문운동은 당시 환경운동, 여성운동, 문화운동 등등을 칭하는 표현이었다.
지금 1990년대 논쟁을 다시 반복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당시 정파별로 '부문계열운동', '부문운동', '영역운동' 등 다양한 표현을 썼지만, 결국 시간이 감에 따라 노동운동의 중심성을 인정하고 부문운동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어설픈 봉합'을 했던 것이 당시 현실이었다.
어설픈 봉합에도 불구하고 당시 다양한 '부문운동'이 새로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운동에 대한 열망이 컸고, 전체 사회운동에서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 노동자'의 힘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하게는 조직 역량부터 사회운동(변혁운동) 주체로서의 의미까지 매우 다양했다.
하지만 실제 '부문운동' 주체들이 겪었던 상황은 달랐다. 1990년대 이후 다양한 환경 생존권 투쟁 현장이 생겼지만, 이를 '부르조아식 환경운동'(먹고 살만하니까 나와서 저런다)으로 치부해버리는 흐름은 끊이지 않았다. 이런 이들일 수록 '전체 운동에 복무하는 부문운동'이란 표현을 좋아했다. 노동운동과 부문운동은 결코 동등한 운동이 아니었다. 조선일보의 신문지 모으기 운동부터 생존권 투쟁까지 환경운동의 스펙트럼이 다양하게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반자본주의 환경운동'이란 강한 표현을 써보기도 하고, 환경문제가 자본주의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한 다양한 글도 생산했다. 이런 흐름은 현재에도 '체제 전환'이라는 용어로 여전히 남아 있다.
1990-2000년대 환경운동을 했던 이들이라면 이런 논쟁에 휘말리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이런 논쟁은 낡은 것이 되었다. 개인의 실천과 자각만 갖고 환경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중심성'이란 표현은 수십년동안 잊혀졌던 기획을 재소환하는 표현이다. 당 내부적으로야 이런 표현이 필요한 이유가 있겠지만, 이로 인한 '부작용'과 '오해'는 고려했는지 모르겠다. 노동 부문만 추스리면 정의당이 살아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2. (노동환원주의와 비노동환경운동)
어느 운동이나 그렇듯 노동운동과 환경운동도 공통분모가 있다. 기후위기 담론과 함께 확산된 '정의로운 전환'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노동자, 중소상공인, 농민, 저소득층 등 주요한 이해 당사자들과 함께 기후위기 극복과정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모든 환경운동을 노동운동으로 환원할 수 있을까?
'노동에 기반한 기후위기 극복'이란 표현이 기후위기 문제 전체를 포괄 할 수 있을까?
노동조합의 활동을 설명할 때는 그럴 수 있다.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기후위기 극복과제를 도출해야 한다.
그러나 정당의 활동을 표현할 때는 적합하지 않다.
'노동에 기반하지 않은 다양한 기후위기 극복 과제'들이 있다. 기후위기 주요 과제 중 하나인 '적응'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점차 늘어나고 있는 산불, 홍수를 막기 위한 국가, 지자체 차원의 계획이 필요하다. 현재 환경부의 주요 쟁점과제인 'K-텍소노미'는 어찌할 것인가? 녹색산업을 선정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정책에 핵발전과 LNG 가스발전을 포함시키려고 하고 있다. 이를 '노동에 기반한 기후위기 과제'로 설명할 수 있을까?
환경 이슈에 따라서는 노동자(노동조합)들과 부딪히기도 한다. 석탄화력 폐쇄의 경우, 탈석탄 정책 취지에 동의하는 노동자(노동조합)의 의견이 다수라는 점이 수차례 확인되기에 '정의로운 전환' 방안을 둘러싼 다양한 기획을 그동안 정의당이 만들어냈다.
하지만 핵발전소 폐쇄에 대해서는 핵발전소 증설을 요구하는 노동자(노동조합)과의 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그럼 '노동에 기반한 에너지 정책'은 탈핵 정책을 포기하는 것인가? 핵발전소 노동자들을 설득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기반', '중심'이란 표현은 이런 의미로 보기 힘들다.
다른 예로 '노동에 기반한 000 운동'이란 표현에 해양생태나 국립공원, 동물권을 넣으면 이 표현이 얼마나 이상한 표현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젠더 운동이나 장애인 운동, 인권운동, 문화운동 등도 비슷할 것이다.
하나의 운동을 다른 운동으로 환원할 수 있다면 애초 그런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각 부문이 갖고 있는 고유한 특성과 성격이 있기 때문에 운동이 분화된 것이다. 이를 모두 노동으로 치환하려는 순간 운동은 협소화되고 애초 의미는 퇴색된다. 녹색과 적색을 섞으면 청록색과 같은 둔탁한 색이 될 수 밖에 없다. 각각의 경계가 분명해야 다양한 무지개 빛을 낼 수 있는 것이다.
3. (노동운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글에서 나는 비대위 문서에 포함된 '노동에 기반한 사회연대정당'이란 표현에서 '노동'이 뭘 뜻하는 건지 물은 바 있다. 여기서 '노동'이 '노동의제'가 아니라, '조직노동', '노동조합', '노동자'와 같이 운동 주체를 뜻하는 것이라면 또 다른 문제이다.
명확한 지지층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정의당에 대한 비판을 고려한다면 더욱 분명한 지지층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정의당이 그동안 사용해 온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이란 표현을 강화하는 정도 수준이라면 이는 크게 충돌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의당의 정체성을 '노동운동 환원주의'로 오해하게 만드는 일련의 표현에는 단호히 반대한다. 환원주의 오류는 한국사회 진보정당운동에서 노동 운동이 갖고 있는 위상과 전혀 다른 문제이다.
지금은 정의당 혁신의 방향을 논의하는 시간이다. 이 중요한 시기에 엄밀하지 못한 표현으로 혁신이 아니라, '퇴보'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오해를 낳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