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정치에 맞서는 길'
[그래도 진보정치]
장 석 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
정의정책연구소 부소장
이른바 ‘이준석 현상’을 놓고 분석과 진단이 분분하다. 우려의 시선으로 이를 바라보는 이들은 특히 그 안의 두 가지 흐름에 주목한다. 하나는 능력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반페미니즘이다.
내가 보기에 둘 가운데 진짜 위험한 쪽은 후자다. 능력주의는 공격 방향이 권력 피라미드의 위쪽인가 아니면 아래쪽인가에 따라 정의의 목소리가 될 수도 있고 정반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반페미니즘은 그럴 여지조차 없다. 이는 여성의 진출에 대한 막연한 질시나 공포를 부추기고 과장해 정치적 자원으로 삼으려는 ‘혐오의 정치’다. 2010년대에 세계 곳곳에 등장한 극우 포퓰리즘의 판박이다.
국민의힘 신임 대표도 이를 의식하는지 당선 이후에는 노골적인 여성 혐오 발언은 꺼내지 않는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 한국에서도 혐오의 정치를 구사해 권력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음을 실증했다. 사회 저변에 이미 만연해 있는 여성, 성소수자, 이주민 등에 대한 혐오 정서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법을 보여주었다. 꼭 국민의힘 소속이 아니더라도 또 다른 ‘참신한’ 정치인이 더 강한 혐오를 선동하며 성장할 가능성이 이제 한국 사회의 상수가 됐다. 이런 혐오의 정치가 더는 성장하지 못하게 막으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한국인들은 2010년대 내내 다른 나라들과는 사뭇 다른 정치적 시간을 살았다. 하지만 촛불항쟁의 여파를 개혁으로 연결하는 데 실패한, 아니 이를 사보타주한 집권 리버럴 세력 덕분에 이 간극은 아무 의미 없이 사라져버렸다. 한국 역시 이제 세계의 시간에 합류했다. 세계의 ‘나쁜’ 시간에 말이다.
일이 이리될 줄 예감한 많은 이들이 미리 논의하던 방향은 ‘좌파 포퓰리즘’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극우 포퓰리즘을 격퇴한 힘은 신흥 급진좌파에서 나왔다. 이들은 극우 포퓰리스트들보다 더 활기찬 대중정치를 통해 혐오 정서를 연대의 각성으로 제압하곤 했다. 한국 사회가 세계의 시간을 뒤늦게 따라가고 있다면, 우리에게도 분명 이런 방향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한데 ‘좌파 포퓰리즘’이라고만 하면, 자칫 편협한 정치 기술이나 수사의 문제로만 여겨질 수 있다. 실제로 한국 진보정당운동의 다수는 그렇게 이해하는 것 같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훨씬 더 근본적인 고민이고, 실천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경쟁과 질시로 잘게 찢어진 사회집단들을 다시 이어 새로운 다수 연합을 구축하려면, 두 가지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하나는 강력한 공동의 이상을 제시하는 일이다. 과거에는 ‘민중’이나 ‘노동계급’처럼 그런 이상을 상징하는 보편적 이름들이 있었고, 이 이름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적 비판 및 대안과 결합돼 있었다. ‘좌파 포퓰리즘’의 성공 사례라 불리는 흐름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존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달리 이런 요소를 다시 전면에 내세운 덕분에 새바람을 일으키는 것이다. 지금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은 이 중심 요소부터 착실히 채워나가야 한다.
또 다른 과제는 이러한 보편적 이상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 여러 집단의 ‘경제적-조합적’ 성향을 극복하는 일이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통해 자기 해방을 실현하는 ‘윤리적-정치적’ 노력에 대비해, 사회의 다른 부분들에게 자신의 단기적-분파적 이익을 주장하기만 하는 행태를 ‘경제적-조합적’이라 칭했다. 이런 경제적-조합적 단계에 머무는 한, 어떤 집단이나 운동도 사회 해체에 기여할 뿐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들이 처한 궁지가 이것이다. 혐오의 정치에 맞서는 연대가 모습을 갖추려면, 우선 사회운동 안에서 경제적-조합적 단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시작돼야 한다.
모두 다 어려운 과제다. 그러나 우리가 진입한 21세기의 보편적인 정치적 시간 속에서 결코 회피하거나 기권할 수 없는 과제이기도 하다. 좌파란 본래 이런 일을 하자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