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타임스 2019-17호] '20대 남성' 담론은 정치의 문제인가, 류호성 기자

‘20대 남성담론은 정치의 문제인가

[꼭 들었으면 하는 20대 남성(들)의 속마음: 우리는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가?]

20대 남성들은 20년 이상의 긴 시간을 성평등 교육을 받고 자라왔다. 학창시절 내내 여성의 희생과 남성의 기득권에 대해서, 또 성범죄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기성세대는 감이 안 오겠지만, 20대들에게는 평생의 시간에 가깝다. 때문에 2015년까지는 20대 남성들 내에서도 페미니즘에 대한 지지가 일반적이었다. 대체로 페미니즘은 성평등과 동일시되었고, 자유나 인권처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곤 했다. 그런데 그런 지지 수준은 근 몇 년 새에 곤두박질쳤다. 20191월 한국여성정책연구소에서 실시한 20대 성평등 현안 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인식하는 20대 남성은 불과 10.3% 밖에 되지 않는다. 이제는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는 20대 남성이 전체의 90%에 이르는 것이다.

 

20대 남성들은 왜 이탈하는가

‘20대 남성이라는 담론이 뒤늦게나마 공론화된 데에 복잡한 기분을 느낀다. 20대 남성들이 현 정권의 방향성에 불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게 된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20대 남성들의 해묵은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는 접근법은 여전히 부재한 게 문제다. 과연 기성세대는 20대 남성의 문제를 어떻게 파악하는가. 대체로 이 문제를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과 연결 지어 해석한다. 지금까지 각 언론사에 올라온 기사들과 분석들을 살펴보면 대략 세 가지 흐름이 발견된다.

 

1) 20대 남성의 지지율 이탈은 젠더 문제를 이용해 이득을 보려는 작전 세력의 호도 때문이다.

2) 20대 남성의 이탈은 어쨌든 젠더 이슈와 관련이 없다. 모두 다른 문제 때문이며, 절대로 페미니즘 탓으로 돌려선 안 된다.

3) 20대 남성의 이탈의 원인은 젠더 이슈가 맞다. 하지만 이는 20대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잘못된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잘 설득해서 바로 잡으면 된다.

 

1)번부터 살펴보자. 젠더 이슈를 통해 20대 남성이 대통령에 대한 지지에서 이탈하게 되면 득을 볼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집단은 단연 보수 야당이다. 하지만 이들은 작전은커녕 이 문제의 기본적인 부분조차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20대 남성에 대한 담론이 공론화될 무렵 자유한국당 대변인의 이름으로 올라온 논평은 고집스럽게 말한다. “20대 남성들의 좌절은 남·녀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자한당 대변인 논평. 20대 남성들의 지지율 하락을 페미니즘과 관련된 논의와 결부되지 않도록 취업난, 양심적 병역 거부 등과 결부시키며 정부 정책을 공격하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청년과 여성을 함께 묶어서 혜택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건네고 있다. 그렇게 하면 청년 (남성)(청년) 여성 양쪽 모두가 거북해하는데 말이다.


2)번은 어떠할까. 주로 여성계의 입김이 강한 언론사에서는 20대 남성의 지지율 이탈을 젠더 이슈와 결부하기를 한사코 거부한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들은 신기할 정도로 20대 남성 당사자들의 목소리에 직접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청년들의 입장과는 별로 상관없이 좀 더 쉽고 편리한 해석, 본인들의 입장을 재검토할 필요가 없는 해석으로 기운다. 청년실업 같은 다른 원인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젠더 이슈를 제외한 경제문제, 안보문제 등 나머지 문제들은 오히려 20대 남성들에게서도 그나마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 그 이하로 떨어지지 않게끔 지탱해주는 긍정적인 요인들이다. 물론 북한 문제 등을 두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20대 남성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애초부터 문재인 정권을 지지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보수 성향인 이들일 가능성이 높다.

 

20대 남성들의 이탈은 그 무엇도 아닌 정확하게 페미니즘 때문이다.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다. 정확하게 페미니즘 때문이다. 그러나 왜 그게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 하락으로 연결되었을까.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시절부터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처하며 남윤인순 의원 등 부담스러운 인사들을 등용하곤 했다. 때문에 그때도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그리 견고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20대 남성들은 그런 모습을 막연한 레토릭으로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페미니즘에 대한 강한 반감이 대통령에 대한 지지철회까지 이어진 것은 다름 아니라 그 것 말고는 20대 남성들이 이 문제에 대해 본인들의 목소리를 낼 방법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언론에서는 남성들의 목소리를 약자에 대한 혐오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둔갑시킨다. 남성들이 결집해서 집회를 열기에도 힘이 미약하다. 워마드식 용어가 쏟아져 나온 혜화역 페미니즘 시위에 굉장히 많은 기성 여성단체가 지원해줬다는 사실과 대조적이다. 심지어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관련 책들이 거부당하기도 한다. 청년 남성들은 어떻게 해도 본인의 목소리를 제대로 호소할 수도 없고, 혐오라는 이름으로 왜곡되어가는 상황에 저항할 수도 없다. 어떻게 해도 할 수 없다는 지독한 무기력 끝에 본인들의 고통에는 둔감한 정권을 원망하며 지지를 거두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기성세대에겐 현실과 인식에 괴리감이 생기는 듯하다. 사실 20대 남성의 불만과 문제의식은 정부 정책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다. 청년 남성 본인들도 이 괴리감을 할당제 같은 정책상의 불공정성 논의를 통해 해소하고자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론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예컨대 결혼에서 신랑 측이 훨씬 더 많은 비용을 들여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해보자. 젊은 남성들 입장에서 너무 버거운 문제이다. 특히나 여성의 경제활동을 보장해주고자 하는 정책과 슬로건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는 소외감을 부채질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정부 정책 차원에서 접근하긴 사실 어렵다. 그러한 사실은 20대 남성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기성 정치권과 언론, 지식인들이 계속해서 20대 남성들의 지지율 하락을 정부의 청년 정책에서 원인을 찾게 되면서 해결책 역시 정부 정책에서 찾고자 한다. 청년실업 완화, 청년 대표성 강화 같은 오래되고 편리한 구급함 속의 대증요법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청년의 삶에 대한 담론은 언제나 정치권과 학계를 뜨겁게 달궜다.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청년의 대표성을 강화하기 위해 이준석과 손수조 후보를 발굴했다. 하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다. 때문에 민주당의 청년미래연석회의를 설치하겠다는 움직임 역시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진부하게 느껴진다. 20대로서 2010년대의 10년을 살아 본 나로서는 그다지 인상적이지도, 신선하지도 않은 광경이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이 청년 남성들의 분노를 다소 의식한 듯한 태도를 보인 적도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긴 대체 복무기간에 대해 인권단체가 우려를 표하자 여성계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문제이니만큼 그 우려를 단호하게 묵살한 것이 좋은 예다. 물론 청년 남성들은 조금도 감동받지 않았다.

 

결국 우리세대 20대 남성의 고유한 문제의식을 이해해야 한다. 신기하게도 그 어디에서도 진정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20대 남성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인터뷰도 없고, 심층적인 취재도 없다. 누군가 의문을 표하면 손쉽게 일베저장소와 같은 자극적인 커뮤니티 일각에서 보이는 혐오표현이 사례로서 줄기차게 동원할 뿐이다. 그러니 일반적인 청년 남성들에겐 모든 게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뚱딴지같은 소리로 여겨질 뿐이다.

 

20대 남성의 고통은 환각통인가

바로 이 점이 20대 남성들이 첫 번째로 맞이하는 난관이다. 20대 남성들 본인들의 목소리를 먼저 긴 시간 차근차근 듣고 나서 판단하지 않는 걸까. 언론과 작가들은 남성들의 심리에 대해서 외부에서 관념적으로 미리 재단된 틀로 객관화하거나, 기계적으로 탐구해서 분석하기만 한다. 이런 소외감이 기존의 상처에 덧씌워진다.

 

기성 언론인들은 애써 태도를 바꾸고 심사숙고하지 않아도 되도록 언제나 편리한 답을 가지고 있다. ‘20대 남성들은 이제 겨우 페미니즘을 통해 여성과 남성의 권리가 균형을 찾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한다.’ ‘20대 남성들은 개인적 문제를 벗어나기 위해 더 약자인 여성과 성소수자에게 전가하는 폭력을 행사한다.’ 등등. 이런 믿음은 페미니즘이 어떻게 해서도 잘못될 수 없다는 관념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이 관념을 거스르고 20대 남성이 남성으로서 겪는 고통과 상처들을 절박하게 외칠 때 당혹감을 느낀 거다. 분명히 남성은 절대로 고통을 느끼면 안 되는 기득권 강자인 걸로 되어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 당혹감은 이내 손쉬운 관념적 장치를 통해 해소된다. 바로 20대 남성의 그 고통은 사실 진정한 고통이 아니며, 허위라고 부정하는 것이다. 인문학 담론 일각에는 실재하는 듯 보이는 현상이 사실은 실재하지 않으며, 그것에 대한 인식이 허위라고 부정하는 복잡한 인식론이 있다. 그 인식론을 어설프게 적용하여 20대 남자들의 고통을 항상 이중적인 것으로 해석하게 된다. 현실에 보이는 표면적인 고통은 기만일 뿐이다. 그 현실의 이면에는 기득권 가해자의 허위의식이 있다.

 

예컨대 남성의 독박 군 복무에 대한 불만 표출을 보자. 거의 대부분의 오늘날의 20대 남성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점은, 남성들이 군대를 통해 남성으로서의 특권을 발견한다는 주장이다. 그 특권이 역사 속에서 희미해지면서 남성들이 박탈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믿는다. 오래 전에는 군 복무가 시민의 특권이며, 시민권을 부여받을 수 있는 기회였던 적이 있었다. 그 기회는 그 시대의 남성들에게만 열려 있었다. 그러니 그 특권을 되찾고 싶어 안달 난 남성 청년의 군 복무에 대한 고통 호소는 가증스러운 기만일 뿐이다. 그렇게 해석하면 한국의 페미니즘은 더 이상 고민할 것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이런 논의를 전개하는 지식인들과 달리 대부분의 평범한 청년들은 구태여 역사적으로 사유하지 않는다. 그 역사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평범한 남성들을 지나치게 과잉지식인화해서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자. 군 복무는 그냥 힘들고 아프고 고달플 뿐이다. 이런 고통에 대해 아무런 보상도 없는 환경에서 비하당하는 게 괴로운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개개인들의 내밀한 삶과 감정에 대한 이야기는 질식되고 왜곡된다. 그 감정은 거짓이고, 조작된 것이다. 자기기만일 뿐이다. 무슨 말을 해도, 아무리 간절히 호소해도 복잡한 관념을 동원해서 그것을 무조건 혐오로 낙인찍을 수 있도록 아직 파이지 않은 도장을 잔뜩 준비해 놓은 것만 같다.

 

겨우겨우 수면 위로 떠오른 남성의 호소들이 도리어 남성들 개개인의 못남으로 둔갑된다. 항상 똑같다. 처음에는 남성들의 여러 가지 호소가 페미니즘 담론 내부에는 없었던 낯선 주제이기에 난감해한다. 하지만 이내 인정받는 페미니스트들이 본인들끼리 모여 본인들이 믿는 페미니즘의 관념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논의를 하고, 새로운 개념어를 창안해 낸다. 근래에는 20대 남성의 고통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기 위한 편리한 개념이 생겨났다. 바로 20대 남성들의 고통 호소가 자기 학대이자 자기 연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만하자. 남성 청년들은 정말로 아프다. 관념적인 구조와 언어를 동원하기 전에 부디 눈앞에 있는 청년들의 절박한 삶을 보라. 사회의 곤란함을 청년 남성들 개개인의 곤란함으로 전가하지 말자.

 

미러링, 잔인하게 실패한 기획

그래서, 20대 남성 청년들이 고단하고 아프기 때문에 약자인 여성들을 공격하고 혐오하는가? 그렇지 않다. 취업난과 불황이 장기화되는 시대지만, 남성 청년들이 지금처럼 유례없이 사무치게 페미니즘을 증오한 적은 더 없었다. 원인이 무엇일까. 우선 정치인들과 언론들의 분석대로 20대 청년들은 극한 경쟁에서 상처받고 지쳤다. 길어지는 실업난과 높은 실패 위험으로 동요하고 있다. 사회 진출이 늦어지고, 아무런 보람도 없는 독박 군 복무로 피해를 입고 있다. 고시 공부 등으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부쩍 늘었다. 이것은 담백하게 사실이다. 여기에 더해 남성 청년들은 취업난에서 느끼는 삶의 낙차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고통을 잔인하게 짓누르는 것은 근래의 페미니즘이다. 메갈리아, 워마드, 트위터 등지의 적극적인 페미니스트들은 말한다. 가난하고 취업난에 허덕이는 남성들은 아무짝에 쓸데없으니 하루빨리 도태되어라고 말이다. 장애가 있는 남성들은 위험하고 소름끼치는 괴물일 뿐이다. 지하철에서 일하다 사고로 죽었다고? 꼴좋다. ‘한남으로서 우리 페미니스트들에게 도움 되는 일이다. 자살하라고 한다. 재기하라고 한다. 너희는 필요 없는 존재이니 빨리 죽어서 사라지라고 한다. 그것만이 여성들의 해방을 돕는 일이라며, 너희가 자살하면 진심으로 기뻐하겠다고 한다. 기성세대와 달리 청년세대는 정말로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 의문을 표하며 스스로를 잉여라고 느끼는 좌절감에 익숙하다.

 

메갈 워마드 등 기성 진보단체가 지지하고 응원하던 적극적 페미니즘 커뮤니티의 영향을 받은 무수한 온라인 글들. 구의역 참사 희생자나 자살한 남성 연예인 김종현 등의 죽음에 대해 환호하고 기뻐하며, 읽는 사람이 최대한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그 좌절감에 폭력적인 모멸감을 덧씌우는 것이다. 수천 개, 수만 개의 트윗이 있다. 여권신장의 결과 우리는 부자 남편을 원해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는 이들은, 남성 약자들에게 집요하게 언어폭력을 행한다. 약자이기에 겪는 연쇄적 고통들의 뒤끝에서 새로운 사상을 위해 인격적 모멸감을 감당해야 하는 고통까지 안아야 하는 것이다.

 

아직 페미니즘 단체가 분명한 힘이 없을 때는 이렇게 말했다. 페미니즘은 모두에게 좋은 것이고, 남성도 항상 강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 없이 지치고 힘들 때는 안겨서 울어도 된다고 말이다. 그러나 막상 페미니즘의 주머니에 몇 줌의 권력이 들어서자, 정말로 주저앉아서 울고 싶은 남성들에게 유례없이 가혹하게 대한다. 꼴좋다며, 어서 죽어 없어지는 게 여성인권을 위해 좋은 일이라고 말이다.

 

이런 모습에 대해 남성 청년들은 분노했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그냥 인터넷 악플러들일 뿐이지 않은가. 하지만 무엇보다 약자 보호에 앞장선다던 진보 측 기성세대가 이 목소리들을 찬양하며 용기 있다고 격려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정으로 상처를 받았다. 그런 상처를 호소하면 진보 어른들은 다 너희가 정신 차려야 할 일이라고 꾸짖을 뿐이었다. 바로 그때가 기점이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돌이킬 수 없는 분노와 상처가 20대 남성들 대부분의 삶을 장악했고, 여전히 계속 지속되는 우울감을 낳았다. 페미니즘이라는 사상 전체에 대한 신뢰도 사라지고, 호감도는 곤두박질쳤다.

 

청년의 아픔에 공감한다고, 힘내라고, 우리가 잘못된 구조를 바로잡아주겠다며 격려하던 어른들이 어느새 취업 못한 나에게 아무짝에 쓸모없으니 자살하라는 이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것이 새로운 용기라고 말했던가, 미래를 바꾸고 있다고 말했던가. 내가 군대에서 선임의 군홧발에 걷어차이는 순간을 군캉스라며 즐거웠겠다고 조롱하는 이들의 메시지가. 취준생 시절 도무지 돈이 없어서 여자친구가 사준 밥을 먹었던 나를 루저라며 무례하게 깔보던 메시지가. 취업 준비 기간이 길어지며 괴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던 나에게 도태되어라, 자살해라며 윽박지르던 목소리가. 남자들도 경력단절 같은 문제가 해결되면 좋겠다고 느끼지만, 현실적으로 20대들은 힘이 부족하다고 글을 쓰니 열댓 개의 댓글에 어쩌라고 한남 재기해!” 같은 댓글이 달렸다. 그것이 미래를 바꾸는 용기인가. 이것은 고통이 아닌가? 왜 기성세대는 여전히 머뭇거리며 그 사이트들이 논란이 있을 수도 있겠지라고 말하는 데서 그칠 뿐일까.

 

다 미러링일 뿐일까. 미러링이라는 방법이 처음 등장했을 때, 딱히 페미니즘을 우리보다 더 이해하는 것 같지도 않던 기성세대 어른들은 미러링을 통해 기울어진 운동장이 회복되고 나면 모든 혐오가 사라질 것이라며, 메갈리아의 운동은 훌륭한 전략일 뿐, 진심은 아니라고 했다. 우리에겐 욕 실컷 듣고 반성이나 하라고 했다.

 

그리고 4년이 지났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미러링의 효과가 충분히 나타날 만큼 긴 시간이다. 이제 어떻게 변했을까. 대한민국의 온라인은 유례없을 정도의 혐오로 얼룩졌고, 도저히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은 상황이 되었다. 그때 나도 메갈리아다!”라며 미러링을 찬양하던 기성세대는 이제 미러링이라는 간판을 내리고 숨겨놓게 되었다. 더 이상 누구도 미러링은 효과적인 전략이다 같은 소리는 하지도 못한다.

 

이전에 미러링에 박수 보냈던 여성부는 이제 허겁지겁 남성들의 페미니즘에 대한 비난을 유튜브 검열 등 규제적 방법으로 틀어막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곤 이제 와서 페미니즘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끔 설득하겠단다. 애초에 미러링에 호응하지 않고, 메갈리아는 우리가 지향하는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처음부터 단호히 선을 그었으면 안 그래도 됐을 일들이다. 미러링의 결과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이 극에 다다른 젠더 갈등일 뿐이다. 무언가가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보다 더 극명한 사례가 더 있을까. 미러링에 안주한 페미니즘은 청년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실패했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한 여학우가 메갈리아에 대해 발표하면서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지금 이렇게 폭력적인 방법으로 페미니즘을 유행시켜 놓으면 나중에 온건한 페미니스트들이 등장해서 알아서 페미니즘을 진정시켜 줄 거라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의 고통을 자양분으로 성장한 페미니즘이 어느새 우리의 고통은 기득권의 가증스러운 기만이라고 말하며 점잖은 체한다.

 

정말로 약자의 고통에 민감하다면, 이제는 이러한 세력들과는 연대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밝혀야 한다. 또 청년 남성들에게 이야기해줄 필요가 있다. 사회는 너희들이 남자라는 이유로 자살하고, 힘들어서 다치고 죽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함께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자고 말이다. 기나긴 취업난과 경제적 부담으로 고통받아 온 끝에 생존의 고통이 새로운 사상의 성장을 위한 자양분으로 짓밟히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말이다.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자행된 언어폭력에 대해 사과와 위로가 필요하다. 장담컨대 그런 단순한 이야기 하나하나에 큰 치유감을 느낄 것이다. 그렇게 하면 청년 남성들도 움츠린 마음을 다시 펼치고 주위 또래 여성 친구들의 삶을 둘러 볼 여유도 가질 테다. 물론 찬물 끼얹듯이 하지만 너네도 남자니까 가해자고, 죄책감을 잊지 말고 살아라같은 불필요한 충고는 안 해줘도 된다. 페미니즘 운동이 새롭고 가치 있음을 이제는 보여줬으면 한다. 지난 4년간의 실패한 요식행위는 그 전 20년 간 청년 남성들이 들어온 메시지보다 더 새로울 것도 없었다.

 

정치인들이 20대 남성에게 곤란함을 느꼈다면 당연한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단순한 정책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지금 청년 정책을 논의하며 수선을 떠는 정치인들이 정말로 자신들이 꺼내놓는 문제의식에 진정성을 갖고 있다면,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미러링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언어폭력에 대해 반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쉬운 방법으로 청년 남성들에게 신뢰를 주고 지지를 회복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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