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을 모르는 이들을 향한 정치
이재랑 (정의정책연구소 청년위원)
군대에서 2016년 총선을 맞았다. 사회과학을 전공한 이래로 총선을 그렇게 조용히 겪어본 적이 없다. 진보 정당을 지지한다는 성향이 군에서 들킬까 아무래도 더욱 움츠리게 되었다. 선거 자체보다는 그래도 투표하기 위해 외출했다는 것이 나름 하루의 이벤트여서 저녁 점호를 기다리는 중에 투표 얘기가 나왔다. "집에서 야당 찍으라고 했는데, 어디가 야당이고 여당인지 몰라서 제대로 못 찍었습니다." 한 후임의 얘기가 귓가에 거슬렸다. "혹시 누구 찍었는지 기억나?", "음, 하 뭐시기인가 그랬는데"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 친구의 집은 부산 해운대니까, 그곳에서 하 씨 성을 가진 후보라고 한다면… 잠시만, 야당을 찍으라 그랬는데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을 찍었다고? 새누리당이 여당이구나, 멋쩍어하는 후임을 보며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웃음의 끝맛이 떫었다. 여당, 야당을 구분 못 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내 무의식 속의 안일함이 부끄러웠던 까닭이다. 약자를 대변한다는 진보 정당의 지지자를 자임하면서도 정작 주변 세계에는 무관심한 나의 자폐적 세계관을 들킨 것 같아 남몰래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 경험 이후, "서민과 약자를 진정으로 대변하는 것은 바로 우리"라고 하는 진보 정당의 언어 앞에서 나는 자주 멈칫거렸다. 그것이 만약 대중과 괴리된 우리들만의 자폐적 세계관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진정 약자를 대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탈리아의 사회학자 피초르노는 말한다. "민중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정당은 그 민중의 정체성을 명확히 표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대변하고자 하는 민중에 대해 정확히 알고는 있는 것인가?
민중은 여당과 야당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무지하지만 한편으로는 날카로운 감각으로 시대를 선도하는 물결을 만들어낸다. 촛불을 들어 거대 권력을 일거에 무너뜨리지만 공공연히 독재 시기를 그리워하는 반동적 질서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민중은 이 모든 것이다. 그런데 진보 정당이 "촛불 시민의 뜻을 받들어 국정농단 세력인 자유한국당을 심판하겠다"고 말하는 순간, 진보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그리고 진보 정당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시민들은 반촛불-국정농단 세력과 한 편에 놓이게 된다. 특히 양강구도로 재편된 선거일수록 이런 발화의 경향은 더욱 심해진다. 지지층을 결집시키기 위한 제도 정치의 언어이다. 그러나 그건 정확히 시민의 절반만을 대변하겠다는 언어이다.
중요한 선거를 이기기 위한 수사임을 모르지 않음에도 이리 박하게 말하는 것은 그것이 곧 진보 정당의 존재 이유와 맞닿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 진보 정당의 필요는 다른 정당이 할 수 없는 일을 진보 정당이 해낼 때에만 증명된다. 그것은 민주당을 견제하는 것도, 자유한국당을 꺾을 수 있는 것도 아닌 그동안 기성 정치가 품지 못한 계층을 대변하고 조직하는 일이다. 정치가 없다면 당장의 생존을 위협 받는 계층을 이 나라 정치의 주인으로 일떠세우는 일이다. 더 민주적이고, 진보적이며, 계급적인 정당으로의 길이다. 진보 정당이 대변하고자 하는 계층은 진보 정당을 지지하지도,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 이 때 대중의 무지를 탓하고 싶은 유혹은 쉽게 찾아온다. 그러나 더 나아가 우리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에게 지지 받기 위한 어려운 길을 걷지 않는다면, 우리의 존재 이유 역시 사라진다. 그렇게 된다면 선거제 개혁도 재보궐 선거의 승리도 또 다른 기득권 나눠먹기로 비칠 뿐이다.
"시인에게는 동시대인들 중 가장 잊어지고 착취당한 이들에게 자신을 이해하게 만들 수 없는 무능 외에는 다른 어떤 심각한 적도 없습니다." 가장 시적이어야 할 노벨문학상 수상 순간에 파블로 네루다의 언어는 가장 정치적이었다. 그건 정치인의 언어가 곧 시인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사회주의 정치가로서 네루다의 통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고 노회찬 의원의 지역구였던 창원에서 치러진 이번 4.3 재보궐 선거에서, 그의 뒤를 이어 출마한 정의당 여영국 후보의 각오는 "노회찬의 꿈을 이어가겠다"는 것이었다. 아니다. 여영국 후보의 또 정의당의 길이란 노회찬의 꿈이 아니라 '노회찬을 모르는 이'들의 꿈을 잇는 것이 되어야 한다. "9시 뉴스도 보지 못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심상정을 모르고 이 노회찬을 모르는" 그러나 "대한민국을 실제로 움직여온 투명인간"들이 "냄새 맡을 수 있고 손에 잡을 수 있는 곳으로 이 당을 가져가겠다"는 것이 바로 노회찬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노회찬의 꿈은 노회찬을 모르는 이 사회의 수많은 투명인간들의 꿈이 이뤄질 때야 마침내 완성된다. 그의 말처럼, 더욱 낮아지겠다는 각오 없이 더욱 넓어지는 대중적 진보 정당의 건설은 요원하다. 우리의 언어 역시, 거대 양당을 흉내내는 적대적 공생의 언어가 아닌 담대한 시인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우리에겐, 이 사회에서 가장 잊히고 착취당한 이들에게 제대로 다가가지 못하는 무능 말고는 그 어떤 심각한 적도 없다.
4.3 재보궐 선거에서 여영국 후보가 근소한 표차로 당선되었다. 아슬아슬했고, 그만큼 소중한 승리였다. 자유한국당의 독주를 막았고, 노회찬의 지역구를 수성했다. 그러나 이 승리가 우리의 승리만이 아닌 온 시민들의 승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 행보의 옳고 그름은 진보 정당의 이름으로 국회의원이 된 이후의 모습에서 진정으로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여영국 당선인의 국회 입성은 투명인간들이 승리하는 세상을 향한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또 다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