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산으로 가는 길
이재랑 (정의정책연구소 청년위원)
학생들과 논술 수업을 할 때 가끔 내는 퀴즈가 있다. 누군가 당신에게 "너희 집에 살고 있는 바퀴벌레는 너희 가족이야"라고 말한다면 이 주장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효과적으로 반박할 수 있을까? "음, 같이 산다고 해서 꼭 가족은 아니라고 생각해." 학생들은 열심히 반박을 궁리해보지만 아무 소용 없다. 상대방이 바퀴벌레의 의미, 즉 주장의 논거만 뒤틀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한 바퀴벌레는, 집에서 밥이나 축내며 기어다니는 바로 너야!"
이 퀴즈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떤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선 그 주장의 근거를 꼭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거를 확인하지 않고 섣불리 반박을 시도했다간 상대에 대한 반박이 아니라 상대 주장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들킬 뿐이다. 그렇게 해서는 논쟁의 주도권을 내가 가지고 올 수 없다. 근거를 확인했다면, 반론에 임하는 가장 좋은 태도는 상대방의 근거를 통해 그 주장을 부정하게 만드는 '자가당착'에 빠뜨리는 것이다. "아, 그렇다면 너희 가족 중에도 바퀴벌레 한 마리가 있구나?" 상대는 주장을 취소하거나 아니면 자신 역시 바퀴벌레로 인정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자가당착을 유도하기 위해 해야할 것은 먼저 상대방의 입장에서 문제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상대방이 내린 정의에 입각하여 상대의 근거를 끝까지 밀어붙이다보면 그 주장의 허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령 ‘5.18은 폭동이다’라는 주장이 있을 때 거기에 대해 ‘5.18은 민주화운동이다’라고 답하는 것은 올바른 반박이 못 된다. 상대가 ‘5.18’과 ‘폭동’을 나와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보고 있다면 말이 통할 리가 없다. 물론 그리 차분하게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5.18이 민주화운동이라는 것은 우리의 공화국이 큰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이루어낸 합의이다. 여전히 5.18의 아픔은 현재진행형이고 그래서 이를 ‘폭동’이라는 말로 비하하면 자연스레 반발심이 들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반박한다. '시민들이 무력을 행사했다고 하여 꼭 폭동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유린한 군부 정권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방어적 무장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상상을 초월한다. '5.18에는 북한군이 개입했다.'
이쯤되면 상대방이 5.18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5.18을 북한군까지 개입한 일종의 내란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란’을 ‘진압’한 계엄군의 만행은 정당화된다.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사실은 어느 하나 입증되지 않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5.18은 내란이라고 하는 그 멘탈리티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소위 민주 세력은 5.18을 선으로 규정하였고, 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으로 ‘가짜 유공자’들을 만들어서 이 사회의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5.18에 대한 ‘진정한’ 진상규명을 막는 문재인 정부야말로 북한의 사주를 받은 친북 정부라는 식이다.
그렇다면 5.18은 내란인가. 상대방의 입장에서 문제를 생각해보자. 광주에서 시민들이 무기를 들고 소요 사태를 일으켰다. 모든 도시가 신군부의 통치 아래 숨죽이고 있던 당시, 광주만이 유일하게 신군부에 대항했던 도시였다.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했고 정당성 없는 5.17 비상계엄확대 조치를 통해 정권 장악을 시도한 신군부를 막아선 것이 바로 광주였다. 그러니 5.18은 실제로 쿠데타군과 시민군이 맞서 싸웠던 내란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내란의 주동 세력은 누구인가. 이 나라의 민주공화정을 유린하고 파괴하고자 군사를 일으킨 세력은 과연 누구인가. 이는 5.18 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말해준다. “12·12 군사반란을 통하여 군의 지휘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함과 아울러 국가의 정보기관을 완전히 장악(…), 이른바 예비검속,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국회의사당 점거·폐쇄, 광주시위진압,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운영, 정치활동 규제 등(…) 피고인들이 행한 위와 같은 일련의 행위는 국헌문란에 해당된다(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그러므로 5.18은 폭동이다. 그리고 그 폭동의 주동자는 바로 신군부 세력이다. 차라리 여기까지만 말할 수 있다면 그냥 시덥잖은 논술 수업을 하고 말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5.18을 폄훼하고, 심지어는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주장하는 태극기 부대의 역사 인식에 대해 자유한국당의 원내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제1야당의 원내대표가 이들의 역사 인식에 그런 공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순간,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정치의 언어는 ‘내란’의 수준으로 격화된다. ‘우리가 열심히 싸우더라도 민주적 질서는 지켜야 한다’고 하는 최소한의 합의를 죄다 내버리고, 광주 시민들의 희생으로 간신히 몰아낸 신군부의 망령을 다시금 정치의 영역에서 부활시켜버렸다.
그러니 진정 ‘자유한국당은 내란 선동을 획책하는 세력’이다. 5.18 진압의 정당성을 주장하게 되는 순간 이 땅의 정치는 다시 내란의 정치로 회귀해야 한다. 물론 반박하고 싶을 것이다. '태극기 부대를 비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할 따름이다.' 그러나 태극기 부대의 역사 인식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여지가 그 정당에 남아있는 한, ‘내란군’의 정당성을 공공연히 주장하는 세력에게 제도 정치 내에서 스피커를 쥐어준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자유한국당은 자신들이 내란 선동을 부추기고 있음을 인정하라. 아니라고 한다면 태극기 부대의 역사 인식을 정당의 이름으로 단호히 부정하라.
온갖 엽기적, 퇴행적 발언으로 점철된 자유한국당의 전당대회는 단지 자유한국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제1야당이 가진 품격의 문제이며, 또한 우리 정치가 가진 품격의 문제이다. 이 사회의 한 축인 합리적 보수 유권자들을 자유한국당이 품지 못하고 무너진다면, 그만큼의 자리를 정치혐오 세력에게 내어주어야 한다. 우리는 대체 언제까지 내란의 시대를 살아야 하는가. 정치가 이렇게 굴러가고 있는 마당에 어찌 제1야당을 합리적 파트너로 인정할 수 있으며 국민들에게 이 땅의 정치를 믿고 함께 앞으로 나아가자고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전당대회를 지켜보는 마음이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 이 땅의 정치가 국민들에게 신뢰를 잃고 파산하게 된다면, 지금 한국당의 모습이 가장 먼저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