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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소장 칼럼

  • [추도사] 노회찬을 기억한다, 김정진 정의정책연구소장
노회찬을 기억한다


김 정 진(정의정책연구소장)

0. 현실과 초현실의 사이 속에서

나에게는 5일간의 장례식이 초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그의 죽음을 들었을 때부터 그가 마석에 안장될 때까지 나의 영혼과 육체는 따로 놀았던 것 같다.

방귀께나 뀐다는 사람들이 조문을 와서 슬픈 척할 때도, 조문행렬이 영안실에 끝도 없이 늘어져 있을 때도, 나의 옛동지들이 심야에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릴 때도, 열혈시민들이 빈소에 조문 후 “타살이야”라고 외칠 때도, 발인 전날 나도 취해 노회찬 서거를 야기한 5적이 누구인가를 정신 없이 토해낼 때도, 작렬하는 태양 아래에서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 진행된 국회의 영결식에 바라본 타는 듯한 태양과 노회찬의 거대한 영정사진이 마치 지구 최후의 날을 연상시킬 때도, 화장장을 거쳐 마석 모란 공원에 도달하여 거기 영면해 있던 옛 동지들의 묘역을 둘러 볼 때도, 땀에 절어 소금기가 흘러내릴 것 같은 양복을 둘러메고 집으로 돌아올 때도, 이 모든 일은 하나의 꿈인 것 같았다.

무슨 말도, 행동도, 평가도, 글도 가능하지 않은 1주일이었다. 영안실에 모인 나와 옛동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약간의 헛소리와 약간의 주정과 약간의 회고와 가끔 자연발생적으로 분출하는 눈물과 그리고 끝없는 자책이 전부였다. 떠나간 동지들에 대한 여러 추도사를 써 보았지만 이 번에는 할 말도, 쓸 글도 없었다. 거대한 진공상태가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 같았다.

노회찬 총장을 처음 만난 것은 17년전 어느 날이었지만 그 때가 마치 1년 전인 것 같았다. 한 동지는 시공을 초월하여 옛 양복을 꺼내입고, 2002년도 민주노동당 뱃지를 달고 노회찬을 추모하러 오기도 했다. 그래도 오열이 터지는 것은 통제가 되지 않았다. 노회찬 총장의 친동생을 부둥켜 안고 오열했고, 연세대에서 열린 추도식 마지막 부분에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다.

그래도 누군가가 필시 노회찬 의원의 평전을 쓸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분에 대한 기록은 남겨 놓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역사는 냉정한 것이니 후세가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나의 주관적 기억을 남겨 놓아야 하는 것이 의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회찬은 한 개인이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인류의 DNA에 각인되어 있는 평등과 해방의 염원이 체화되어 있는 시대가 낳은 인물이다. 이러한 인물에 대해서 여러 기억을 수집하여 기록하는 것은 그나마 동시대인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최소한의 의무가 아닐까. 내 기억은 국회의원으로서의 노회찬보다 사무총장으로서의 노회찬에 머물러 있다. 그만큼 그 때의 기억이 강렬했다.



1. UN 사무총장이 경쟁상대인 원외정당 사무총장

내가 민주노동당에서 일하려고 결심한 것은 2001년 말 경인데, 내 사수였던 고 이재영 동지를 통하여 노회찬 총장을 알게 되었다. 내가 만난 당 인사 중에 양복을 입고 다니던 몇 안되는 분이기도 했다. (이 번에 알려진 것이지만 운명하실 당시 양복이 단 두 벌 뿐이었다는 것 또한 황망했지만 어찌보면 노회찬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노회찬 총장은 사석에서는 사실 그다지 말이 많은 분은 아니었고, 일반적인 정치인과 달리 들이대거나 과도한 자신감에 사로잡혀 있는 그러한 성격도 아니었다.

당시에는 민주노동당 부대표를 맡고 있었는데, 초지일관 진보정당을 일구어온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내 위상은 아주 높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또한 노회찬다운 일이었다.) 노총장은 2002년 초반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대의원대회에서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유세 당시 자신의 경쟁상대는 “민주당 사무총장도, 한나라당 사무총장도 아니다”라고 하여 다들 ‘그럼 뭐지?’하는 의문이 자연스럽에 들게하였는데, 자신의 경쟁상대는 ‘유엔사무총장’이라고 하는 것 아닌가.

다들 웃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 진보정당의 답답한 상황을 극복해 보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당시 노총장에 대한 반대표가 거의 40%에 달해 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찬반 투표에서 반대표라고 하는 것이 후보자가 무슨 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한 10~20% 정도에 불과한 것인데, 이 결과를 보고 내부에 적이 많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원외정당 사무총장은 별다른 할 일이 없다. 누가 불러주지도 않고 당시 민주노동당은 1970-80년대 대한민국에서 형성된 진보 쪽의 거의 모든 정파가 참여하고 있어 말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정말로 힘만 들고 빛도 안나는 자리였다. 당시 민주노동당의 모습은 소설로 치면 삼국지 이전의 수호지 양산박 같은 형상이었으니 108호걸까지는 아니었어도 70-80호걸이 진치고 있는 형국이라 그 복잡함을 그래도 무난하게 대표한 것이 권영길 대표였다면 그 복잡함 속에서 일을 이루어 낸 것은 노회찬 총장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당시 내가 느꼈던 노회찬 총장의 덕목은 ‘항상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원외 정당 사무총장은 나태해질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쟁점과 사회 이슈에 대한 해박한 인식과 당 정책에 대한 숙지는 일상적인 노력의 결과였으며 정책실에 정책적 이슈에 대해서 토론과 자문을 구하는 거의 유일한 진보정치인이었다.

당시 들었던 일화는 라디오 시사프로 등에서 패널이 펑크가 나면 방송 10분 전에 노회찬 총장에게 양해를 구했는데 대북, 통일, 노동 등 기본 이슈에 대해서 질문지를 미리 받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막힘없이 답변을 하여 방송사 관계자들이 나중에 ‘감사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2004년에 노회찬의 화려한 언변은 순발력에 기인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랫동안 준비된 것이었고, 정책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나온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2. 선당후사하는 민주주의자

노회찬 총장은 생전에 자신이 진보정당의 원천기술자라고 여러차례 밝힌 바 있다. 이 말은 정말로 맞는 말이다. 진보정당의 ‘ㅈ’도 꺼내기 어려운 시절, 진보정당 노선의 기치를 건 이래 그는 민주노동당, 정의당까지 진보정당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그 길은 불가능한 길이었다.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는 당대의 운동가들로부터 동의를 얻지 못하는 길이었다. 그 수십년 동안의 과정에서 노회찬은 그들을 설득해 냈고, 결국 불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되던 진보정당의 창당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노회찬 총장의 당내 입지는 탄탄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선구자답게 그는 끊임 없는 견제와 근거없는 비판을 받았고, 원천기술자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노회찬은 내부 투쟁에서 공격적으로 나가 승리하기보다는 조직의 파이를 키워 조직과 자신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이었다.

2004년 총선 당시 비례대표 8번은 의도된 것이 아니라 노회찬이 가지고 있는 당내 조직표가 그만큼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노회찬은 자신에게 불리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농민회 총연합과 연대관계 수립에 주저하지 않았고, 비례대표 선거 결과 노동자대표, 농민대표 등에게 모두 상위 순번을 내주고 본인은 당선권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8번의 순번을 받았을 뿐이다. (모 단체에서 자신들이 미는 후보가 하위순번을 받았다고 노회찬 총장에게 항의를 하였다고 하는데 모 단체에서 미는 후보는 사실 노회찬보다 상위순번이었던 것이다. 그 모 단체에서는 노회찬이 순번을 다 조정하는지 알았다는 것이 후문이다. 당시 옆에 있던 다른 후보가 ‘이 사람은 8번이니 순번이 높은 나에게 항의하게!’ 하였다고 한다.) 과거 노회찬의 비판자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비판하던 노회찬의 노선에 동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회찬 의원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는 민주주의자로서의 능력이 있다. 노회찬 의원은 회의진행에 발군의 기량을 가진 사람이다. 회의진행을 잘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룰인 회의 규칙에 정통하다는 것이고 그만큼 복잡다단한 이해관계 조정을 잘 한다는 것이다. 밤샘 회의를 하기 일쑤인 민주노동당 시절, 그 복잡다단한 의견을 제출하는 수많은 정파들의 이해를 조정하는 안을 제출하는 것은 노회찬의 몫이었다. 졸린 눈을 보고 바라보아도 그 광경은 영화 메트릭스의 네오가 총알 피하면서 목표를 향해 가는 그것과 동일하다고 생각되었다. (민주주의자로서의 노회찬 의원의 능력을 사실 20%도 발휘되지 않았다. 만약 노회찬 의원이 나중에 상임위원장이나 국회의장 또는 합의제 관청이나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면 아마 누구보다도 협치의 달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3. 진보정당의 야전사령관

진보정당의 대표가 되면서 다소 어색한 표현이 되어 버렸지만 나는 노회찬 의원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 ‘진보정당의 야전사령관’이라고 생각한다. 군대용어라고 싫어할 분도 있지만 선거는 총을 들지 않는 전쟁이고, 진보정당 창당과 유지, 발전과정도 마찬가지로 치열한 격전과정이기 때문에 다른 용어를 찾기 어려운 것 같다. 일단 그의 머리 속에는 당의 모든 인력과 재정 등 당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에 대한 재무제표가 그대로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사실 그 재무제표는 기성 정치세력의 100분의 1, 아니 1000분의 1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도저히 승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력과 기획으로 활로를 열었다. 1인 2표제 기획 위헌 소송(민주노동당에서 노회찬을 위시한 사람들이 이것을 기획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과 진보정당의 대통령 후보를 대선 티브이 토론에 출연시키기 위한 총력전까지.

당시 민주노동당은 13척이 아니라 단 1척의 배도 없이 널빤지로 대양을 건너려고 하는 ‘맨주먹 붉은 피’였을 뿐이다. 당시 ‘맨주먹 붉은 피‘들은 책상이나 집기가 없어 증권회사에서 버리고 간 책상을 노조의 협조를 얻어 업어오기도 했으며, 서버가 없어 열혈지지자의 도움으로 유수의 통신회사에서 쓰고 버린 것을 가져오기도 했다. 언론에 100번의 보도자료를 뿌려도 한 자도 보도가 되지 않았지만 보도자료 한 장을 총리실 기자실에 전달하기 위해 수십 통의 전화와 경비업무를 보는 사람에게 몇시간에 걸쳐 되지도 않는 읍소를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생쇼를 하더라도 누군가는 그것을 모아 결과를 낼 것으로 활동가들 모두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기껏해야 3-4명의 당선될 것으로 예상했던 2004년 총선에서, 진보정당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야전사령관으로 노회찬이 그동안 쌓여 왔던 모든 내공과 개인기를 녹여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른바 ‘불판을 바꾸자’는 그의 세력 교체론은 민주노동당의 존재의의와 정당성을 너무나 대중적으로 표현한 정치선동의 결정판이었다. 2004년 총선 전 벚꽃 축제에 실제 고기 불판을 들고 노회찬 총장을 따라 나선 나를 포함한 당직자들은 시민들이 보인 폭발적 반응에 크게 고무되었다.

잘 회자되지 않은 삼국지의 마지막 부분에 공명이 아꼈다는 강유가 나온다. 이미 사세는 기울었고 유비의 멍청한 손자는 환관이 전횡을 하는 폭정을 하여 촉나라 국민들이 위나라 병사들을 꽃을 들고 맞이하는 상황이 오는데 강유는 벼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위나라에 대항하다가 결국 패배하여 위나라 군사들이 그의 간을 씹어 먹는다. 이것이 삼국지의 마지막인데 나는 당시 노회찬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불리한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한 전략과 기획을 포기하지 않는 강유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나의 이러한 허황된 생각이 비극의 단초였을까. 자책하고 또 자책한다.



4. 인민의 호민관, 서민의 보호자

연전에 빠리 외곽에 가니 프랑스 정치가 장 조레스에 관한 기념물이 있었다. 짧은 불어로 제목을 보니 ‘인민의 호민관, 서민의 보호자’라는 말이 나왔다. 한국의 진보정치와 진보정치인이 가야할 길도 이 방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노회찬 총장의 평생 행보는 ‘인민의 호민관, 서민의 보호자’라는 문구로 표현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그 면모를 추모하고 있으니 여기서 더 덧붙이지는 않겠다. 노회찬 총장이 가는 날까지 선당후사한 것은 인민의 호민관은 개인이 아니라 정당이 될 수 밖에 없음을 옛날부터 갈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생물학적 생명은 얼마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정신과 이성, 의지는 정당이라는 현대의 군주로 계속 계승 발전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적 과업과 사명은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5. 비루한 삶은 지속된다

오늘도 우리의 비루한 삶은 지속된다. 인간의 비루함은 숙명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 비루함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일상을 넘어설 수 있는 결단과 실천, 의지와 낙관, 이런 것이다.

이러한 속성을 모든 사람이 가지지는 못한다. 인간 노회찬은 이러한 고귀한 속성을 가진 몇 안되는 존재였다. 그 존재를 다시 만들지도, 대체할 수도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아 남은 자의 숙명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인간 노회찬처럼 결단과 실천, 의지와 낙관이 없더라도 그래도 머리를 굴려가면서 상황을 반전시키는 사소한 노력이라도 하면서 이 분노와 공허를 뚫고 가야 하는 것 아닌가.

노회찬 동지, 잘 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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