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야권연대로 치러진 2010년 지방선거
: 전략의 승리와 전략의 패배
2010년 지방선거는 진보양당체제 하에서 진보정당 대표선수를 가리는 최초의 진검승부처였다.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을 ‘진보하지 않는 진보’로 규정하고 민주노동당을 넘어 대표 진보정당으로 나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분당 이후 민주노동당 또한 내부 혁신을 통해 민생정당의 면모를 강화했다. 광우병 촛불집회를 거치며 이정희와 강기갑이라는 대중적 진보정치인을 키워낸 것이 민주노동당의 저력이었다.
노회찬, 심상정 같은 국민적 인지도가 높은 후보를 보유하고 있는 진보신당은 광역단체장 선거를 중심에 두고 정당 득표율을 끌어올린다는 전략이었고, 권영길, 이정희, 강기갑 등 인지도가 높은 정치인들이 국회의원 신분으로 있던 민주노동당은 기초단체와 기초의회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낸다는 전략이었다.
이명박정권에 대한 심판 선거로 치러진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는 최초로 본격적인 야권연대 테이블이 만들어졌다. ‘5+4’라는 야권연대 테이블에는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과 4개 시민단체가 참여했다. 광역단체장 선거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던 민주노동당으로서는 야권 단일후보로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을 확보할 수 있는 확실한 기회였다. 그에 반해 진보신당은 기초 보다 광역단체장 선거에 비중을 두고 있었으므로 광역단체 어느 한 곳도 보장되지 않는 야권연대 협상은 일종의 계륵 같은 것이었다.
진보신당의 노회찬이나 심상정 등은 광역단체장 후보로 손색이 없다고 할 수도 있었으나 정당 지지율이 떠받쳐주지 않는 조건에서 후보만으로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야권연대를 통한 후보 단일화를 통해 야권 단일후보를 보장받아야 하는데 제 1야당인 민주당은 그럴 의사도, 정치적 조정력도 갖고 있지 않았다. 민주노동당과의 ‘진보연대’를 통해 우선 진보후보 단일화라는 사전 과정을 거쳐서 진보진영의 힘을 하나로 모으려던 노력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 기초를 중심으로 판을 짜던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서는 진보연대 보다 더 큰 야권연대만으로도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기에 굳이 호의적으로 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득표력 있는 진보신당 광역단체장 후보들이 부담스러웠던 민주당은 민주노동당을 지렛대로 진보신당 후보를 야권연대 틀 안에서 누르고자 했다. 진보신당과 진보 대표 정당을 두고 겨루는 입장에서 선거 이후 ‘누가 진보대통합을 주도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두고 봤을 때 진보신당 광역단체장 후보의 파괴력이 커지는 건 민주노동당에 달가운 게 아니었다.
진보신당으로서는 보병전보다 고공전에 유리한 화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광역단체장 후보 방송토론회 등으로 진보신당 인지도와 지지도를 끌어올리면 비례대표 득표율에서 민주노동당을 넘어서는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그것은 ‘야권연대’라는 격랑 앞에서 후보 사퇴 압력에 시달릴 것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주관적 전략에 불과했다. 심상정이 후보 수락 이전에 기초단체장(고양시장) 후보로 나서는 문제까지 검토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광역단체장 중심 후보 전략을 추진하던 중앙당 방침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로 나아가지 못했다. 결국 심상정은 경기지사 후보로 나섰다. 부산에서는 김석준, 울산에서는 노옥희, 대구에서는 조명래, 광주 윤난실, 전북 염경석 등이 광역단체장후보로 나섰다. 노회찬 대표는 서울시장후보로 출마해 최전선에 섰다.
선거 결과 민주노동당은 광역의원 24명, 기초단체장 3명, 기초의원 115명을 당선시키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진보신당은 광역의원 3명, 기초의원 22명에 불과했다. 기초 중심의 민주노동당 전략은 성공했고, 풀뿌리 기초가 아직 여물지 않은 상태에서 전국적 지명도를 가진 인물 중심의 광역단체장 후보 전략을 구사했던 진보신당은 실패했다. ‘5+4’ 협상에서 우왕좌왕하던 진보신당은 결국 협상테이블을 박차고 나오며 독자완주라는 독배를 들었다. 그러나 일부의 선택은 달랐다. 경기지사 후보 심상정과 부산시장 후보 김석준은 이명박정권을 심판하는 야권연대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심과 민심이 서로 상충할 때 정치적 리더는 모종의 결단을 요구받는다. 심상정은 후보를 사퇴했고, 김석준은 민주당 김정길 후보와 후보 단일화를 끝까지 추진했다. 심상정과 김석준은 민심의 흐름을 거슬러 가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고 당원들을 설득했지만 진보신당 지방선거 전선은 당 전략의 실패로 말미암아 선거 막판으로 가면서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흐트러졌다.
야권연대의 요구는 한나라당과 야권의 1 대 1 구도를 강제하는 것이었다. 노회찬과 심상정은 후보의 개인기만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급속한 지지율 하락을 경험하게 되었으며 후보단일화에 나서지 않을 경우 그간 쌓아온 국민적 지지를 일거에 반납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내몰렸다. ‘5+4’협상테이블을 박차고 나온 진보신당은 야권연대를 거부한 정당으로 비판을 받았고, 초박빙 접전 끝에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가 한명숙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승리하자 두 후보의 표차(2만6000표)보다 많은 14만 표를 얻은 노회찬 후보에게는 한나라당에 어부지리를 준 장본인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물론 한국 정치에 진보세력의 씨앗을 뿌리려던 이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동정론도 없지 않았으나 대중정치인으로서 노회찬은 힘든 시기를 견뎌야 했다. 중도에서 후보를 사퇴한 심상정후보는 또 다른 방향에서 비난을 받았다. 심상정후보는 독자 완주의 당론을 어겼다는 이유로 결국 징계위원회에 회부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진보신당 광역단체장 후보의 처지는 한 마디로 ‘죽거나 나쁘거나’ 둘 중 하나였던 것이다. 결국 노회찬 대표는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으며 진보신당은 이후 진보대통합 논의로 분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