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혁신하지 않는 진보에겐 미래가 없다
: 2007년 민주노동당 대선 참패
2007년 대선은 노무현정권 심판 선거였다.
민주정부 10년 집권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갈수록 고달파졌다. 서민들의 입에서는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나”라는 말이 쉽게 튀어나왔다. 기대를 배반하는 정치, 열망과 실망의 지겨운 싸이클이었다. 노무현은 권력을 쥐고서도 기득권층의 반발을 달래려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고 고백해야 했다. 분양원가 공개는 스스로 나서서 반대했다. 시장권력, 관료권력, 사법권력, 언론권력 등 사회 권력들이 기승했다. 거시경제 지표를 관리해야 하는 국정 책임자의 중압 때문일까? ‘기업이 투자를 해야 일자리가 는다’는 시장의 협박에 밀렸다. 정치권력은 무기력했다. 비정규직은 갈수록 늘어났다. 시장권력에 맞설 노동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대통령은 양극화에 속수무책이었다.
노무현 집권 후반기에 불만이 집중적으로 터져 나왔다. 잘못된 일은 모두 노무현 탓, 노무현 때리기가 ‘국민스포츠’가 되었다. 보수언론을 비롯한 보수세력은 노무현 정권을 좌파라고 공격했다. 민주노동당은 노무현정권을 신자유주의라고 각을 세웠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던 노무현은 스스로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푸념했다.
대통령 지지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민주노동당 지지율도 동반 하락했다. 노무현정권을 진보로 치부하던 국민들은 진보세력 전체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억울했다. 원내교섭단체에서 배제되어 국정운영에 개입할 수 없었던 소수정당이 왜 정치 실패의 책임을 져야 하느냐? 거대 여당과 거대 야당의 대립 때문에 교착된 정치를 민주노동당에 묻는 건 분명 과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수정당으로서 한계를 뼈저리게 실감했다는 말은 변명이 될 수가 없었다. 2007년 대선을 앞둔 민주노동당도 이미 기성 정당이었다. 2004년 총선에서 10석을 얻으며 일약 3당으로 도약해 원내 정당이 된 민주노동당은 지난 3년간 대국민 정치활동을 평가받아야 할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한 때 20%를 넘나드는 지지를 받기도 했던 민주노동당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열린우리당 ‘2중대’ 소리를 들으며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것은 원내교섭단체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기성정치의 장벽 탓도 있었겠지만 민주노동당 스스로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독자적인 진보정치의 컨텐츠를 만들어내지 못한 탓도 있었다. 한 석만 있어도 정치가 바뀔 것이라던 호언장담은 10석을 가지고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원내 정당이지만 원외의 재야 운동권과 무엇이 다른 지 원내 진보정당으로서의 효능감을 국민들에게 제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원내 입성 이후 3년간 민주노동당은 노회찬과 심상정이라는 탁월한 대중정치인을 배출해냈으며 이런 저력에 힘입어 2006년 지방선거에서 정당 지지율 12%를 지켜냈다.
민주노동당에겐 2007년 대선이 반전의 기회였다. 일심회 사건, 북핵의 자위력 인정 발언 등으로 고립의 늪에 빠지고 있던 민주노동당을 구출할 수 있는 구명줄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배출해 낸 새로운 대중 정치인을 전면에 내세워 혁신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당내 후보 경선과정에서 권영길후보가 자주파와 손잡으면서 변화된 당의 모습을 기대하던 민심은 정파 선거의 벽에 부딪혔다. 결선에서 혁신을 내세운 심상정후보는 통합을 내세운 권영길 후보에게 패했다. 52 대 48, 이 수치는 지난 당 대표 선거에서 문성현과 조승수가 얻은 표와 겹친다. 그때도 52 대 48이었다. 흔쾌하지 못한 결과였다.
5년 전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라고 묻던 권영길은 여전히 참신했다. 그러나 2007년은 달랐다. 이미 생물학적 나이도 70대로 ‘다음’을 기약하기 힘든 마지막 선거였다. 경선 때부터 따라붙었던 대선 3수생이라는 꼬리표가 권영길후보의 발목을 잡았다. ‘식상하다’는 것이었다. ‘화합과 통합’의 리더십을 들고 나왔지만 자주파라는 패권정파의 등에 업혀 민생문제와 다소 거리가 느껴지는 ‘코리아연방’과 같은 선거슬로건을 내세운 것도 오히려 당내 갈등을 부추기는 요인이었다. 게다가 후보로 선출된 9월 이후 한 달간 선대위도 꾸리지 못하고 허송했다. 고질적인 정파 대립 구도로 당력 결집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대선 후보라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도 그간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온 당 혁신의 요구에 부응하지도 못했다. 그 사이 전통적인 민주노동당 지지층은 문국현 후보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10% 득표를 목표로 내세웠다.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었다. 일찌감치 이명박후보가 고공 지지율을 보이면서 민주노동당 사표론이 먹혀들 여지도 적었던 선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권자는 냉정했다. 혁신하지 않는 진보에게 가차 없는 회초리를 들이댔다. 권영길후보는 문국현후보에게도 뒤지는 5위를 기록했고, 선거기간 중의 지지율인 5% 선조차 무너진 3.1%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