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83. 한미FTA 협상 개시

83. 한미FTA 협상 개시
   : 민주노동당은 주권을 건 도박에 단호히 반대

 

 

 

 

 

 

2007년 초 ‘한미FTA 체결 지원위원회’가 만든 TV광고를 보면 대륙을 경영하던 우리 민족에 대한 벅찬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지축을 흔드는 말발굽 소리와 웅혼한 배경음악이 깔리면서 광고가 시작된다. “개척자 광개토대왕처럼, 해상왕 장보고처럼(물살을 가르는 배와 효과음이 보태진다) 우리 민족에겐 뜨거운 도전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 시장을 향한 우리의 끝없는 도전(기마부대가 미국 지도 위를 거침없이 내달린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은 우리가 경제 강국으로 도약할 새로운 기회입니다.(개척자 광개토대왕이 탄 말이 앞다리를 치켜들며 포효하는 장면이 느린 화면으로 처리된다. 마무리는 태극기가 휘날리며) 대한민국의 자부심으로 세계와 경쟁합니다.”

 

노무현 행정부는 제조업에서는 중국에 추격을 당하고 있고 서비스업에서는 미국 등 선진국에 열세인 ‘넛 크래커’ 상황으로 진단했다. 이에 금융서비스를 비롯한 생산자 서비스 분야의 강자인 미국과 FTA를 체결해 동북아 금융허브의 위치를 선점하자는 유혹에 빠져들어갔다. 노무현 행정부에 참여한 인사들은 ‘넛 크래커’론의 영향을 받아 “앞으로 우리 대한민국은 뭐로 먹고 살아야 하나?”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러나 제조업을 경시하는 금융허브 논리는 실물경제와 유리된 거품에 대한 환상이라는 것이 얼마 후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증명되었다.

 

애초 한국 정부의 FTA 추진 로드맵에는 미국과의 FTA 체결은 중장기 과제로 규정되어 있었다. 정태인 전 대통령 비서관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국민경제자문회의 사무차장으로서 FTA 정책 결정과정에 깊숙이 참여하고 있었던 2005년 5월까지도 한국 정부에게 “미국은 맨 마지막” 체결 대상국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러던 미국이 2006년에 들어서는 갑자기 한국의 최우선 FTA 협상국으로 부상했다. 2006년 1월 19일 노무현 대통령은 대국민 신년연설을 통해 뜬금없이 한미 FTA 체결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로부터 2주 후인 2월 3일 한국의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로버트 포트먼(Robert Portman)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함께 워싱턴의 미 의회 의사당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한미 FTA 협상을 개시한다고 전격 선언했다.

 

한미FTA가 광개토대왕처럼 이른바 ‘경제영토’를 확대하는 것인지, 아니면 주권을 팔아넘기는 일인지 논란이 뜨거웠다. 정태인은 한미FTA의 전격 추진 배경에는 집권 3년차를 맞는 노무현 정권이 개혁 성과를 서둘려 내려는 조급증이 있었다고 진단했다. 그에 따르면 노무현 정권이 추진한 사회적 합의에 의한 개혁이 당사자들의 거부로 실패하고, 대연정 제안이 한나라당의 거부로 실패하자 한미FTA라는 외부 충격에 의한 개혁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청와대 내부자의 시선으로 봐도 그것은 위험천만한 문제였다. 준비 안 된 상태에서 자본시장을 개방함으로써 받은 외부 충격으로 인해 국민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것이 지난 IMF식 개혁의 경험이었다. 한미FTA는 한편으로는 미국에 서비스 시장을 개방함으로써 금융과 의료를 비롯한 공공서비스 분야에서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무분별하게 도입하는 구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과의 안보동맹에 경제동맹까지 더해져 한미일 남방 3각동맹을 강화하는 구상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것은 북중러의 북방 3각동맹을 자극해 냉전으로 회귀할 가능성마저 점쳐지는 위험한 모험이었다.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시민사회의 광범위한 저항은 당연한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은 한미FTA가 무역수지 적자, 금융투기화와 종속, 공공부문의 민영화와 질적 저하, 농업 말살, 영화를 비롯한 문화산업 위기, 대미 군사안보 종속의 항구화 등 경제적으로나 군사안보적으로나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고 협상 중단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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