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우의 한 컷 만화, 진보정당 STORY] 82. 스크린쿼터 73일 시대

민주노동당, “스크린쿼터 강화와 한국 영화 내부의 다양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안 찾아야”

 

 

 

 

 

2006년 6월 멀티플렉스 스크린은 <다빈치코드>와 <미션임파서블3>가 장악했다. 뛰어난 작품성으로 찬사를 받은 국산영화 <가족의 탄생>은 관객 20만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헐리우드 쓰나미에 휩쓸려 가버렸다. <가족의 탄생>을 보러 간 관객은 다빈치와 미션들이 채우고 있는 멀티플렉스 스크린 앞에서 편식을 강요당해야 했다. 오전 8시 20분과 밤 12시에 단 두 회 상영하는데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볼 수는 없었으니까.

 

2006년 7월부터 스크린쿼터 73일이 적용되었다. 그럼에도 8월 개봉된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괴물’같은 저력을 발휘했다. 최단기간 1천만 관객을 돌파한 <괴물>은 스크린쿼터 73일 시대의 슬픈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 괴물은 국내 영화 스크린의 40%를 독식하며 다른 국산 영화의 종다양성을 부지불식간에 파괴했다.

 

2007년 3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순위 1등에서 5등까지 모두 외화가 차지했다. “스케일에 압도된다”는 괴벨스의 나치 홍보물 같은 헐리우드 영화 <300>이 1등을 차지했다. 한미FTA 4대 선결조건으로 스크린쿼터가 반 토막 난 후 1년 동안 한국영화의 스크린 점유율은 헐리우드에 완전히 역전당했다. 7 대 3에서 3 대 7로.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2006년 1월 26일, 노무현 정부는 스크린쿼터를 146일에서 절반인 73일로 줄인다고 공식 발표했다. 헐리우드처럼 천문학적인 자본이 투자되는 블록버스터 자본에 비해 대자본 형성이 안 되어 있던 한국의 영화산업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한국 영화산업은 민주화 이후 검열 제한에서 벗어나 다양한 소재를 다루며 동료시민들의 공감을 얻는 좋은 작품을 양산했다. 관객층이 두터워지면서 <쉬리>와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도 찍을 수 있는 자본이 형성되고 있었고 1천만 관객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만들어낸 작품들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헐리우드 자본력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오히려 한국영화의 강점은 한국 사람만이 공유하는 문화적 코드에 있었으며 문화다양성을 보호하는 스크린쿼터 장치에 의해 꽃피울 수 있었다. 스크린쿼터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자국의 영화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널리 시행되고 있었다. 1967년부터 시행된, 스크린쿼터에 의한 한국 영화의 의무 상영일수는 1년의 2/5인 146일이었다.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라는 미국의 요구는 한미FTA의 선결조건으로 알려졌다. 한미FTA 체결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도 미약한데다 스크린쿼터마저 헐리우드 자본의 제물로 갖다 바치겠다는 발상에 대해서는 국민 대다수가 반대했다. 안성기, 최민식 등을 비롯한 유명 영화인들이 스크린쿼터 축소를 반대하는 시위에 앞장섰고, 민주노동당 또한 “최소한의 제한일수조차 반감하여 초국적 문화자본에 내다바치는 정부는 과연 누구의 정부인지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민주노동당은 더 나아가 상업영화 일색인 영상문화로부터 국내 영상문화의 다양성을 보호하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 헐리우드 말고도 다양한 국적의 영화가 상영되도록 하위 쿼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또한 스타시스템과 상업영화가 독식하는 영화판도 비주류 감독, 기획진, 배우, 스텝들 등 다양한 영화인들의 기회와 권리를 보장되도록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스크린쿼터 강화와 한국 영화 내부의 다양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정부가 스크린쿼터 축소를 발표하기 직전에 통과된 유네스코의 문화다양성 협약에도 부합하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무엇엔가 쫓기듯 서둘려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을 발표했고 국민들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쿼터 축소를 밀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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