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법치를 조롱하는 일당 5억 ‘황제노역’
: 정의당 서기호 의원, 황제노역 개선을 위한 형법 개정안을 발의하다.
2015년 4월 12일 박근혜 대통령은 ‘성완종 리스트’에 대해서도 예의 “검찰이 법과 원칙에 따라 성역 없이 엄정히 대처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렇듯 박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법치주의를 강조했다. 그러나 ‘박근혜식 법치주의’는 노동조합이나 정권의 비판자에게만 넘치게 관철될 뿐, 삼성과 현대와 같은 재벌 대기업의 천문학적인 탈세와 횡령에 대해서는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했다. 성완종 회장의 경남기업 수사와 같이 가끔 이명박 정권의 ‘자원외교’ 비리를 노무현 참여정부와 결부시킬만한 건덕지를 찾아 만만한 희생양을 하나 찍어서 사정정국에 써먹기 위해 털어대는 예외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법치주의와 법 앞에서의 평등은 민주정치의 핵심 요소이며 경제민주화를 이루기 위해서도 반드시 관철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한국사회는 오랫동안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마치 상식인양 통용되어 왔다. 법 자체가 지배하는 것(rule of law)이 아니라 자본과 권력의 시녀로 길들여진 고무줄 잣대의 ‘법관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미국은 거액의 분식회계를 자행한 엔론 회장에게 종신형을 때리는 것처럼 기업범죄에 대해 ‘성역 없이 엄정하게 대처’하는 관행을 일찌감치 정착시켜왔다. 삼성의 이건희나 현대의 정몽구, 한화의 김승연, SK 최태원 회장 같은 이들이 미국에 살았다면 아마 종신형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오늘은 과거 미국의 강도 귀족(robber baron)과 같은 초법적 자본권력들이 지배하고 있다. 노회찬은 이를 일컬어 “대한민국은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한 것이 아니라 만 명만 평등하다”고 말한 바 있다. 기업범죄에 대해서는 수천억을 횡령하고 탈세했다 하더라도 약속이나 한 듯이 한결같이 ‘3-5제’(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가 적용되는 현실에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항상적으로 위협받고 있었다.
2014년 3월 국민들의 귀를 의심케 하는 판결이 있었다. 대주그룹의 전 회장 허재호씨가 254억원의 벌금형을 선고받고 벌금 대신 노역형에 처해졌는데 노역 일당이 골프 황제 타이거우즈의 일당 보다 많은 5억이라는 사실이 공개되었다. ‘황제노역’이라며 검찰과 재판부(광주고법 장병우 부장판사)를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재판과정을 보면 1심에서 특정범죄가중법 위반(조세), 특정경제범죄법 위반(횡령)이 전부 유죄로 인정됐다. 광주지법은 "이 사건 조세포탈 범행은 국가의 과세권을 침해하고, 조세정의 내지 조세형평에 대한 많은 국민의 신뢰를 훼손한 것으로서 포탈액수가 합계 508억5천4백73만4,920원에 이르러 그 죄질이 매우 좋지 않다"고 평가했다. 특정범죄가중법(8조)은 포탈세액이 연간 10억 원 이상이면 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 특정경제범죄법(3조)도 횡령, 배임 등 이득액이 50억 원 이상일 때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형이다. 족히 10년은 넘게 징역을 살아야 하는 중범죄였다. 그러나 법원은 기업범죄 양형의 법칙(?)에 따라 3-5제를 적용했고, 벌금 508억 원을 선고했다.
허씨는 오히려 형량이 과중하다며 항소했고 검찰은 항소를 포기해줬다. 항소심에서는 허씨에게 신세진 것도 있던 광주지역의 ‘향판’ 장병우 부장판사가 벌금을 절반으로 깎아주고 ‘노역’으로 환산한 일당을 5억원으로 책정했다. 51일만 노역하면 벌금을 다 갚는 것이다. 대법에서 최종 형이 확정된 2011년 12월 이후 허씨는 해외로 도주해 카지노를 들락거리며 호화생활을 하다 2014년 3월 22일 귀국했다. 벌금 미납으로 수배 중이던 그는 벌금 납부 대신 노역을 선택했다.
건강이 안 좋다는 이유로 노역장에서 하루 두 시간씩 쇼핑백 접는 가벼운 노역이 5억이라니? 종신형도 시원치 않을 판에 ‘황제노역’에 분노한 여론이 해일처럼 일었다. 여론이 흉흉해지자 3월 28일 대법원이 황제노역의 문제점을 개선하겠다며 고액벌금 미납자에 대해 노역 기간의 하한선을 정해 고액 일당이 부과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대법원이 밝힌 기준에 의하면 벌금형 50억 이상∼100억 원 미만은 700일, 100억 원 이상은 900일 등으로 노역장유치의 하한선을 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당 서기호 의원은 “노역 일당이 수천만 원에 달하는 이른바 ‘귀족노역’은 여전히 나올 수 있고, 벌금을 탕감하는 것에만 초점이 있을 뿐 미납벌금 회수는 안중에 없다”며 대법원의 개선안을 비판했다. 서 의원은 “본래 노역장유치제도는 가난하여 벌금을 납입하기 어려운 사회적 약자나, 비교적 가벼운 범죄에 대한 벌금을 탕감해주는 차원에서 마련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금납부 능력이 충분한 재벌이나 죄질이 중해 10억 원 이상 고액 벌금형이 선고되는 경우조차 벌금 탕감에 초점을 맞춘 것이 문제였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노역장유치제도 도입 취지를 살리고 황제노역 등의 폐해를 막기 위한 「형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개정안은 △ 벌금 대체 노역장유치 환산금액을 1일 100만 원 이하로 제한하고, △ 최장 유치일수를 초과하는 벌금액이 있을 경우 이를 별도 납입해야 하며, △ 별도 납입금이 완납되지 않으면 기존의 노역장 유치일수도 공제하지 못하는 내용의 신설조항을 포함하고 있었다. 서 의원은 “대법원의 방안은 일당과 기간에 상관없이 노역장유치로 벌금을 모두 탕감해주게 된다. 그러나 벌금납부 능력과 죄질에 따라 노역을 하더라도 벌금 미납이 있을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이는 반드시 납부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 법 정의에 합당한 것이다”고 언급했다.
허씨의 ‘황제노역’ 소동과 대법원의 개선안 마련, 서기호 의원의 법률 개정안 발의 등의 국면을 거치면서 황제노역은 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귀족 노역’은 남았다. 재벌 기업들이 ‘귀족 강도’로 활개칠 수 있는 ‘3-5제’의 사법환경이 바뀌지 않는 한 법치와 법 앞의 평등은 희화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