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민심을 배반하는 낡은 선거제도 개혁을 외치다.
진보정의당은 존재하지만 마치 존재하지 않는 ‘유령’취급을 받았고, 원내 소수 정당이라는 이유로 거대 정당의 틈바구니에서 정치적 ‘을’의 지위를 강요당해왔다. 그래서 진보정의당은 정치의 세계에서 유령이고 을이었다. 당연히 정의당의 ‘존재 이유’는 유령의 존재를 찾아주는 것이고 갑질 횡포에 맞서는 을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랜 퇴적물처럼, 혹은 화석처럼 눌어붙어 있는 보수양당체제에서 진보정의당은 좀처럼 변화의 기포를 일으킬 수 없었다. 국민들이 염증을 느끼고 있는데도 양당체제가 공고히 유지되는 것은 유권자들의 선택을 왜곡시키는 선거제도가 큰 구실을 하고 있었다. 흔히 ‘지역주의적 투표 행태’가 한국정치를 가장 큰 문제라고 얘기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왜곡된 선거제도와 그로부터 고착된 보수 양당 정당체제가 빚어낸 결과물이지, 지역주의 자체가 정치 왜곡의 원인은 아니다.
실례로 새누리당이 의석을 거의 싹쓸이한 부산과 경남에서 새누리당의 지지율은 60% 내외였다. 나머지는 야당을 지지한다는 얘기인데 그 나머지 40%의 표심은 현행 선거제도에서는 완전히 사표가 되어버린다. 승자 독식의 소선거구 다수대표제가 가진 맹점 탓이다. 의석 배분이 유권자의 지지율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는 것을 먼저 문제로 삼아야지 거꾸로 지역주의적 투표행태를 문제삼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뒤바꾼 것이다. 따라서 지역주의 투표행태만을 비판하는 것은 민의를 왜곡하는 정치제도의 문제점을 은폐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진보정의당은 정확히 이 문제를 지적했고, 민의가 정확히 반영되는 선거제도, 즉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의 온전한 도입을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 정치에서 선거제도 개혁의 칼자루는 국회의원들에게 있고, 기성 정치인은 자신의 이해관계 때문에 선거제도를 더더욱 기형화할 뿐, 비례대표의 확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다. 다만 지난 2012년 18대 대선에서 진보정의당과 정책연대를 했던 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가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해 지역구 2 대 비례 1의 비율로 선거제도를 개혁하자는 입장을 내놓는 정도에 그쳤다. 민주당 의원들 또한 현행 선거제도에 기득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유권자의 표심을 왜곡하는 선거제도 사수에서는 새누리당과 연정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가운데 국민들은 정치적 변화에 대한 열망과, 기대를 배반하는 정치에 대한 실망을 거듭하면서 정치로부터 멀어져갔다. 진보정당에마저 실망한 국민들이 의지할만한 정치란 어디에 있는가? 갈수록 투표율이 떨어지는 것은 정치에 대한 실망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보여준다.
그러나 악연과 같은 정치로부터 국민들은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리고 어떤 정치적 선택에 따라서는 무상급식과 같이 자신의 생활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국민들은 정치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을 수 없었다. 정치판 전체를 엎을 것처럼 부풀어 올랐던 안철수 현상은 정치를 통한 변화를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었다. 제대로만 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안철수는 ‘안철수 현상’을 담아낼만한 그릇이 못 된다는 걸 여러 차례 드러냈다. 한 예로 국회의원 정수 축소를 마치 정치개혁인양 포장했고, 이런 포퓰리즘을 동원해 정치의 실종을 부채질 한 것이다.
진보정의당은 달랐다. 진보정의당 심상정 원내대표는 2013년 6월 11일 국회 비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국민이 갑이 되는 정치개혁을 위해 정치적 ‘을’의 연대에 앞장서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심상정 의원은 정치의 기능은 확장하고 특권은 줄이는 ‘정치개혁 3대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첫째, 유권자의 표심이 왜곡 없이 그대로 의석수에 반영되는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과,
둘째, 단순다수대표제의 단점을 보완하며 정당의 대표성과 책임성을 높일 수 있도록, 대통령 선거,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 결선투표제 도입,
셋째, 국회 운영의 민주성을 가로막고, 국회의원의 입법권을 훼손하는 교섭단체제도 폐지와 국회 운영위원회 정상화이다.
그러나 심상정원내대표의 제안에 거대 양당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건드리는 그 어떤 개혁에 대해서도 일체 함구하고 무시하는 것이 저들의 공통된 입장이었다. 진보정의당으로서는 답답한 일이었지만 다시 여론이 분출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