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라는 애매한 이름 뒤에 숨지 말라
진보정의당의 정체성 찾기 2.
사회의 변화에 대응하는 사회적?정치적 실천을 통해 변혁 이론을 재구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운동권 진보파는 소련?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한편으로는 국가와 제도권 정치에 대한 부정으로 이념적 순수성을 지키는 것을,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조합 대중조직 속에 용해되어 들어가 기업별노조의 조합주의적 이익을 지키는 것을 마치 변혁적 실천인양 자족했을 뿐이다. 이런 가운데 합법 정당운동이 비어있는 공간에서, 전선운동만 덩그러니 남아 반미 자주화 투쟁만 정치 투쟁이고 지고의 가치인양 치부되었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전통 위에서 혁명적인 노동운동과 분단체제 하의 평화 통일운동을 해 온 많은 진보적인 인사들이 하나의 진보정당으로 모였으면서도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에 대해서는 각각 다른 관점을 갖고 있었다. 다른 관점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한국 자본주의와 세계 자본주의가 지구의 자전이나 공전 속도만큼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도 이들의 사회 변혁 이론이나 실천은 그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듯 이론적, 사상적으로 정체되어 있는 채로 진보정당이 창당되었고 의회에도 진출했다.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전민항쟁’을 통한 한국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상상하고 있었으며 민주주의적 정치과정을 통한 변혁은 불가능하다는―극히 일부는 바람직하지도 않다는―신념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미투쟁이 아니라 무상교육, 무상의료와 같은 복지정책의 확대가 진보정당 성장의 중요한 무기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렇듯 민주주의적 정치과정을 통한 변화를 불신하면서도 복지정책의 확대를 통한 정치 개입 전략 사이의 모순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채 얼버무려온 것이 그간의 과정이었다. 이는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더더욱 모호하게 만들었고, 정체성 찾기를 기피하며 미봉해 온 이런 과정이 또 서로에 대한 불신과 반목을 키우고 결국 당의 분열로 이어졌다.
그간 진보정당 운동이 정체하거나 퇴보한 이유를 진단하는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진보정당의 분열이 그 주된 이유로 설명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이 이 분열을 낳은 이유인가에 대한 보다 깊은 해명은 시도되지 않았다. 단지 해묵은 NL과 PD의 반목으로만 해명되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정당을 대표하는 중요한 리더 중 한 사람인 노회찬 공동대표가 입을 열었다.
“진보세력의 이미지는 실추하고 신뢰는 저하되었지만 진보적 가치의 사회적 실현을 향한 시민들의 요구는 날로 커가고 있다. 낡은 진보가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제대로 된 진보정당을 바라는 요구는 반대로 커가고 있다. 이제 새로운 진보정당은 진보라는 애매한 이름 뒤에 숨지 말아야 하며 사탕을 쥐어주는 대신에 자신의 영혼과 속내와 계획을 당당히 드러내고 심판받길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
진보정의당이 추구하는 가치는 강한 노동과 넓은 복지 그리고 생태와 평화의 존중이다. 민주주의에 철저하게 기반해서 자본주의의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의 원리가 낳는 폐해를 극복하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우리의 신념이다. 현대적 진보정당이 하나의 사상, 유일사상을 강요할 수는 없다. 최대강령으로서의 이념적 지향은 각자의 몫이며 당은 다원적 민주주의로 이의 공존을 보장해야 한다.
동시에 복지국가를 열어나갈 책임있는 진보정당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하나의 정당을 이루는 공통분모이며 국민들에게 약속하는 우리의 최소강령이다.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으로서 우리가 보장하는 한국의 미래 모델과 사회시스템을 만들어 가자. 그것이 바로 한국적 사회민주주의를 정립해 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