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38강. 강한 국가-약한 사회-무기력한 개인
1) 38번째 시간이다. 이제 강의 연재도 거의 끝을 향해가고 있다. 지난 시간 이야기한 대로 세월호 사태를 통해, 우리 정치의 여러 문제를 생각해볼 시간을 갖자.
세월호 사태는 우리의 민주 정치가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가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 계기였다. 당시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어떻게 ‘체제’와 ‘피해자’가 이토록 무매개적이고 원초적으로 대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학생단체가 없는 것은 그렇다 쳐도, 교사단체도 노동조합도 시민단체도 종교단체도 정당도 지방자치단체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관련 피해 당사자 중에는 분명 교회 다니는 사람도 있고 노조에 가입한 사람도 있고 교사도 있고 특정 정당의 당원이나 지지자도 있을 것이고 또 사안이 사안인 만큼 시민운동과 경기도교육청의 역할도 중요했을 텐데, 이들 중간 결사체들의 집단적 목소리와 조직적 행위가 체제와 피해자 사이를 중첩적으로 채워주지 못했다. ‘체육관의 피해자 가족’이라는, 마치 설정된 상황 같은 현실이 모든 것을 말해준 것 같기도 하다.
2)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당사자들에게 수용소 같은 형태의 공간이 제공되어야 했을까. 온종일 무방비 상태로 노출 될 수밖에 없는, 저 유리처럼 약한 공간을 우리는 어떻게 허용하고 말았을까. 국가와 피해자가 직접 마주 서야 하고 원망이든 기대든 분노든 모두 국가의 역할을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그 ‘전도된 국가주의’는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집단의 이름도 소속 조직도 내세울 수 없는 자원봉사자 개인 이외 누구도 허용되지 않는, 이 기묘한 비정치적 공간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그 어떤 의도도 이해관계도 웃음도, 라면도, 커피도 있을 수 없는 무균실 같은 절대 도덕의 공간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무기력한 시청자 개개인으로 흩어져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에 휘둘릴 수밖에 없도록, 시민을 극도의 소극적 처지에 빠지게 한 것은 누구였는가.
3) 국가와 개인만 있고 그 사이가 텅 빈 공간처럼 되어 있는 사회는 권위주의나 전체주의에 취약하다. 다양한 자율적 결사체들이 국가와 개인 사이에서 중간집단 내지 매개집단의 역할을 얼마나 풍부하게 할 수 있느냐에 따라 민주주의의 질은 결정된다고도 할 수 있다. 모든 문제를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사회에서 시민 권력이라는 민주주의의 동의어는 듣기만 그럴싸한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 개인화된 대중사회에서 그 공허함을 채우는 것은 여론이 되는데,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결사체의 기반이 약할수록 맹목적 도덕주의가 여론을 지배하게 된다. 역설로 들리겠지만, 도덕을 강조하는 사회일수록 더 도덕적일 가능성은 줄어든다. 죄의식과 선의가 인간 공동체의 토대가 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개인의 내면적 결단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동원되고 강요될수록 선한 사회의 기반은 약해진다.
4) 언론만 보면 우리 사회처럼 도덕성과 죄의식, 선의가 강한 사회는 없어 보인다. 그런 보도 태도가 진짜였다면 오늘의 한국사회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보일 리 없고, 가난 때문에 가족이 같이 죽는 비극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26명이나 죽는 비극도 허용되었을 리 없었으며, 어쩌면 세월호 사건도 없었을지 모른다. 피해자에 대한 선의나 도덕적 공분을 앞세우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다 했다고 여기는 저널리즘이 지배하는 곳에서, 개선해야 할 사태가 냉정하고 끈기 있게 추적되고 조명되기는 어렵다. 우리의 언론이 진정으로 타인의 비극과 제대로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지, 저널리즘이 견지해야 할 윤리성이 이렇게 쉽게 무너져도 되는지,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다.
5) 정당이나 관련 사회단체들의 잘못도 크다. 언론이 아무리 피해 현장에 가는 것을 정치적 의도나 이해관계 때문으로 해석하고, 도덕적 공분을 일으킬 기삿거리를 찾으려 한다 해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참여해서 사태를 개선할 수 있는 길을 개척했어야 했다. 그게 본인들의 역할이고 의무라고도 할 수 있다. 프랑스 정치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알렉시 드 토크빌이 강조했듯이, 현대 민주주의는 결사의 자유와 그들이 만들어내는 결사의 예술 위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 지금 그 중간 집단들의 역할이 무너지고 나니 남는 것은, 여전히 강한 국가와 더 무기력해진 개인, 그리고 개인과 국가가 함께 튼튼한 기반을 내려야 할 사회가 깨지기 쉬운 유리판처럼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이 무기력해지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6) 세월호 사고 자체도 비극이었지만 그 뒤 특별법을 둘러싼 사태 역시 비극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사회로부터 위로와 치료, 보호를 받아야 할 유가족이 사태의 당사자-해결자-입법자의 역할까지 요구받게 된 현실을 우리는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당들이 그런 비극과 맞서 싸우면서 민주정치의 힘도 보여주고 공동체의 덕목도 다져가면서 더 나은 사회로의 전망을 발전시킬 수는 없었을까. 인간의 삶에서 슬픔과 고통은 피할 수 없다지만, 그럼에도 좌절을 넘어 더 단단한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갖게 하는 계기가 될 수는 없었을까. 사태가 꼭 그런 식으로 전개되었어야 했을까.
7) 세월호 사고는 ‘합의 쟁점’으로 다뤄졌어야 했다. 이념이나 계층, 세대에 따라 서로 다른 입장을 가져야 할 ‘갈등 쟁점’도 아니었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갈등 쟁점이란 선거 경쟁을 통해서건 아니면 여론 동원을 통해서건 정당 간 다툼을 필요로 한다. 반면 합의 쟁점이란 정당들 사이에 ‘공동의 통치 공간’을 필요로 하는 사안을 말한다. 어느 특정 정당도 쟁점의 점유권을 두고 배타적인 영향력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서, 해결책을 찾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갈등 쟁점의 경우는 정당 간 경쟁의 결과에 따라 사후적으로 해결책을 결정하는 것에 비해, 합의 쟁점의 경우는 정당 간 경쟁 이전에 처음부터 조정의 방법으로 공동의 해결책을 만들어간다는 차이가 있다.
물론 합의 쟁점이냐 갈등 쟁점이냐가 고정적으로 나눠지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합의 쟁점이 갈등 쟁점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정당 간 경쟁을 통해 자연스럽게 다수결로 수렴되는 지점을 최선의 공익으로 본다면 모든 사안을 갈등 쟁점으로 다룰 수 있다. 그럴 경우 정치의 적극적인 조정자 역할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반면 갈등 쟁점으로 다뤄질 경우 사회통합이 크게 위협된다면, 정치가 갖는 조정자 역할을 통해 합의 쟁점으로 전환시켜 공익적 결과를 의식적으로 창출하려 할 수도 있다. 다소 복잡한 이야기 같지만 본 강사가 말하려는 바는 단순하다. 정치란 갈등과 통합의 변증법을 다루는 기예를 말한다. 모든 사안이 다 다툼의 소재가 될 수는 없다. 갈등 쟁점으로 다뤄져야 할 사안이 인위적으로 합의 쟁점이 되는 것도 문제지만, 역으로 합의 쟁점이 되어야 할 사안이 갈등 쟁점이 될 때 그 부작용도 만만찮다. 세월호 특별법을 둘러싼 사태만큼 이를 잘 보여주는 것도 없었다.
8) 우리가 지금 민주주의 체제에서 살고 있다면, 어떤 경우든 정치의 역할이 중요하다. 합의 쟁점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사건 초기 실종자 가족을 도우러 온 사람들 가운데 “정치인이 있다”고 공격한 한 종편 채널의 보도는 큰 잘못을 저질렀다. 정치인이 그럼 달리 어디에 있어야 할까. 더 안타까운 것은 다른 언론의 역할도 별다르지 않았거니와, 해당 정당은 문제가 된 사람을 영구 제명함으로써 세월호 사고를 순수 비정치적 의제로 만드는 데 공조했다는 사실이다. 처음부터 정당 간 공동 대응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그 기초 위에서 시민사회의 참여를 결합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사태는 정반대로 진행되었다.
정치를 배제한다고 사안이 순수해지지는 않는다. 큰 사건일수록 더 그렇다. 국가와 가족 사이에 있어야 할 정치가 그 외부에서 제3자로 머물게 되면, 갈등은 조정될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를 이어가게 된다. 여야 지지자 사이 나아가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사태의 해석을 두고 전개될 적대적 갈등을 누가 조정할 수 있겠는가. 시간이 지나면서 여론은 분열되기 시작했고, 구원파로 책임을 돌리려는 집권파의 노력이 이어졌으며, 지방선거를 거치면서는 여느 파당적 갈등 쟁점과 다르지 않은 사안이 되고, 집권당의 ‘경제 살리기’와 야당의 ‘세월호 책임론’이 맞붙은 보궐선거에 이르러서는 세월호 사태의 미래가 선거 승패에 딸린 문제로 치환되어 버린 그간의 상황 전개 과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도 남는다. 정말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9) 예기치 않았던 죽음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안녕이란 말도 못하고 헤어질 수도 있다는 자각 때문인데, 그러면서 혹 상처 줬던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했는지, 호의나 은혜를 입은 분들께 고맙다고는 했는지를 살피게 되고, 가까운 사람들에겐 당신이 옆에 있어줘서 내가 얼마나 든든했는지를 잊지 않고 말하고, 늘 좋은 일만 있진 않았지만 삶이 외롭고 고독하지 않았던 건 당신 덕분이라는 표현도 자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극심한 고통 앞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는 인간의 운명이 얄궂지만, 사실 인간 사회의 발전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면이 분명 있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 되지 못했다. 무엇 때문에 왜 그런 비극이 일어났는지를 지금 우리는 충분히 알게 되었는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려면 어떤 공동의 노력을 어떻게 기울여야 하는지를 두고 우리는 어떤 사회적 합의를 갖게 되었는가. 평화롭고 안전하고 자유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하면서 타인에 대해 좀 더 관용적이고 부드러운 시민성을 갖게 되었을까. 비극으로부터 우리사회는 무엇을 배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10) 정치란 시민 개개인이 ‘좋은 삶’을 살 수 있도록, 공동체라고 하는 ‘공통의 조건’을 좋게 만드는 일을 과업으로 삼고 있다. 국가 관료제가 공익을 위해 제대로 기능하는지를 관장하는 일도, 시장체제가 독점적 사익 추구의 사냥터가 되지 않도록 하는 일도, 재난으로부터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효과적인 제도와 예산을 뒷받침해주는 일도 민주주의에서라면 정치의 역할을 통해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정부와 집권당이 그런 과업에 무능력하고 무책임하다면 야당을 통해 견제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야당을 포함한 정치권 전체가 제 역할을 못한다면 다양한 결사체들이 움직여 시민적 압력을 행사하는 것도 모두 다 민주정치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야권과 사회운동도 그런 역할을 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게 되어 있는 상투적 구호와 늘 하던 대로의 전형적인 행동을 반복하면서 누군가를 향해 증오와 규탄, 분노의 언어를 앞세우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다 했다는 것 이상 무엇을 성취했다고 할 수 있을까.
11)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동안 견디기 어려웠던 일은, 두 정부와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동료 시민들이 보였던 과도한 공격성과 노골적 적대감을 마주할 때였다. 두 정부와 두 대통령을 지지해주길 바란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정치적 의견은 다를 수 있고 지지 정당이 다 같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상대에 대해 함부로 할 권리까지 가질 수는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태 때 야권이나 사회운동권에게도 같은 걸 느꼈다. 정치적 판단은 달리할 수 있지만 인간적 선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과 보수적 시민들 모두 비극적 죽음을 가슴 아파하며 이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본다는 점마저 의심하고 부정하는 일은 자신의 영혼만 상하게 만드는 일이다. 박근혜 정부를 궁지로 몰려는 열정이 지나쳐서 악마화하는 일을 쉽게 해버리면 변화는 없다. 이번에는 어찌어찌해서 그런 공격이 효과를 보았다고 치자. 또 어찌어찌해서 다음번에는 야권이 집권하는 데 성공했다고 치자. 그래도 달라질 것은 없다. 증오의 정치 언어는 역할만 바뀌어 이제 보수 쪽에서 들고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반복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 사이 이런 정치에 실망한 시민들의 이탈은 늘 수밖에 없고, 분노하는 시민들을 더 사나워지기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권이든 야권이든 진보적 사회운동이든 보수적 시민집단이든 누구든 더 인간적이고 더 잘해서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싸웠으면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는 사회통합과 병행할 수 있다. 전쟁이 아닌 평화와 공존, 설득의 가치가 더 호소력을 갖는 유일한 체제가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12) 제대로 잘 싸우는 것, 그래야 사회가 더 평화적이 되고 더 공동체적이 된다는 것, 민주적 정당정치론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