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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7강. 전문가-지식인 중심의 정치쇄신 국민운동론 비판
 

 

 

 

 

5부. 어떻게 하면 정당 정치를 좋게 만들 수 있을까

 

37강. 전문가-지식인 중심의 정치쇄신 국민운동론 비판

 

1) 38번째 시간이다. 오늘은 정치를 정당들에게 맡겨서는 안 되고 오히려 정치 밖에서 정당들을 계도할 수 있는 국민적 힘을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살펴볼까 한다.

 

우선, 그 논리를 분해해보면 ① 첫째, 정당 정치 밖에서, ② 둘째, 공익적 지향을 갖는 지식인과 전문가들이 모여, ③ 셋째, 우리사회가 실천해야 할 보편적 과제와 대안을 조사 - 연구 - 구체화하고 ④ 넷째, 이를 사회적으로 공론화하고 국민운동적 방법으로 확산해 ⑤ 다섯째, 기존 정당 정치가 바뀌도록 압력을 조직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 흐름은 그간 “진보적 싱크탱크론” 등 다양한 형태로 모색되어 왔고, 기존의 “반정당적 운동론”의 변형된 측면도 있고, 언제든 제3정당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어 보인다.

 

2) 이런 접근에서 기존 정당의 실패는 ① 정책 능력의 부재, ② 지식과 이론의 실패, ③ 공익 정신의 부재, ④ 시대정신을 따르지 않은 계파와 정파들의 분열주의 등등으로 이해된다. 이런 이해 방식은 타당한 것일까?

 

3) 앞서도 계속 강조했던 이야기를 다시 해야겠다. 우선 다른 무엇보다도 정당을 잘 운영하는 데 필요한 “조직화의 비용”을 감당하는 문제에서의 실패가 가장 크고 중요하다. 이론적 무능력이나 정책 능력 부재 내지 계파 분열주의 역시 계파 때문이 아니라, 당내 리더십 기반의 약화 내지 그것의 다른 짝으로서 당내 다원주의의 기반이 약한 것의 결과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계속 강조했지만, 리더십이 약해지면 다원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붕당과 계파 내지 도당이 판친다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한다. 리더십은 강하고 분명한 역할과 권한이 주어져야 하며, 그럴 때만이 견제나 책임성을 부과할 수 있다. 리더십의 기반이 약하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만 모호해지고, 당연히 일반 대중의 힘은 약해지는 반면 잘 조직된 정파나 계파의 횡포만 심화된다.

 

4) 흔히들 정책 능력이 약한 것의 대안을 전문가 참여에서 찾는데, 이 점도 생각할 것이 있다. 정책 대안을 만드는 데 있어서 다른 무엇보다도 정책의 수용자 역할이 중요하다. 정책 청문회(hearing)의 애초 취지도 정책의 수용자, 내지 수요자의 요구를 듣는 것에 있다. 그들의 요구가 공익과 충돌하지 않는다면 이를 수용해 법안과 제도를 만들어주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정치 엘리트들이 일방적으로 정책이나 법안을 만들어 그 수용자들에게 온정 베풀 듯 홍보하는 접근이어서는 안 된다. 이해당사자들 만큼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 잘 아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해야 하고, 그들의 참여를 통해 함께 정책과 법안 만들어가는 것이어야 한다. 입법과 관련해 최고의 전문가 가운데 하나는 이해당사자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따라서 정당의 정책 능력이 약한 것의 문제는 사회적 갈등이 정당 통로를 통해 표출되기 어려운 것, 정당이 그런 갈등을 대표하고 조직하는 데 무능한 것에 있지, 정책에 필요한 지식 그 자체의 부족 때문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사안을 너무 쉽게 보는 것이다. 요컨대 정당의 사회적 기반이 약한 것은 정책 능력에서도 큰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말이다. 한국정치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법률가와 언론 엘리트, 시민운동가, 학자 내지 연구자, 고학력의 운동권 출신 등을 포함해 각 분야 전문가들이 어느 정당이든 최대 집단을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변화가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이지, 전문-지식엘리트의 투입이 적어서 문제는 아닌 것이다.

 

5) 국민 운동적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점이 많다. 권위주의와의 싸움에서라면 몰라도, 민주주의에서 국민운동의 역할은 제한적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운동은 시민 참여의 기반을 풍부하게 하는 것에는 기여할지 모르나, 국민적 운동으로 정치의 문제를 대신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를 국민 참여로 단순화하는 것은 좋지 않다. 계속 강조했지만, 민주주의가 단지 시민의 선호나 시민사회적 요구를 반영하고 대변하는 것에 그친다면 그건 시장원리와 큰 차이가 없게 된다. 민주주의는 공익적 시민 선호를 형성하고 계발하고, 그에 병행해 참여를 조직하고, 공공정책의 내용을 심화시키고, 그것의 사회적 결과를 깊고 넓게 확산하고, 결과적으로 시민의 질을 높이는 긴 순환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누가 그 역할을 하는가. 민주주의라면 그 중심은 정당일 수밖에 없고, 정당들이 제 역할을 못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개선할 방법을 찾으려 고민해야 할 것이다.

 

6) 정치인들 개별의 평균적 능력과 덕성은 우리사회 평균적 엘리트들보다 못하지 않다. 문제를 이를 조직하는 데 있어서 실패한 것에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개개인이 문제가 있다고 그간 계속 “물갈이” 하고 전문 지식인의 투입을 늘려왔지만 결과는 지금처럼 되었다. 개인의 발전과 조직 전체의 발전이 병행될 수 있도록, 당 내부에서 활동가와 정치 엘리트, 리더십이 교육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정당은 성공할 수가 없다. 정치 밖의 전문가가 곧바로 정치에서 필요한 역할과 기능을 잘 할 수가 없다. 당 생활에서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하고, 상임위 활동을 성실하게 하면서 통치 엘리트로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집권해도 국가와 사회를 운영할 종합적 실력을 갖출 수 있지, 그저 전문가나 지식인을 정치에 투입을 한다고 잘 될 일이 아니다. 정치는 역시 정치답게 해야지, 정치가 나쁘다고 비정치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7) 정당이 조직화 문제에서 큰 성과 없는 것에는 운동가적 행태의 무능력에도 큰 원인이 있다. 그간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게 있다면, 도덕적/규범적 우월성의 자세를 갖는 것만으로 정당을 잘 운영하고 정치의 긍정적 역할을 조직하기는 어렵다는 교훈일 것이다. 정치는 옳음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결과로 말해야 하는 측면이 큰 분야이다. 성과를 내는 것은 선의만으로는 어렵고 상황을 이해하고 이견과 대화하고 조정을 통해 가능성을 찾아가는 실력을 필요로 한다.

 

8) 국민 운동론이 다원주의를 기초로 하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와 양립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정당정치가 좋아지는 것 없이 민주주의 발전은 어렵고, 정당정치가 좋아지려면 사회 각 분야의 결사체적 기반 내지 다원적 기반이 좋아져야 한다. 그것 없이 국민 총동원식의 압력 동원을 반복하는 것으로 민주정치가 좋아지지는 않는다.

 

9) 사익에 대한 관심 없이 오로지 공익과 전체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삶은 군주정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탁월한 자들이 자신의 자산과 능력의 일부를 공익을 위해 헌신케 하는 것은 귀족정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가치는 현대 민주주의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재생산되고 있다. 전문가주의나 공익적 지식 전문가들의 국민운동론도 넓게 보면 현대판 귀족정이나 군주정적인 요소가 많다. 이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민주주의의 원리와 충돌하는 지점이 있고 특히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10) 고전 정치철학자들은 민주주의(demokratia)란 말을 사실상 욕으로 사용했다. 현대에도 민주주의의 별칭이라 할 정당 정치를 욕으로 사용하는 사람들 많다. 그러나 아무리 불만스럽고 문제가 많다 해도 정당 정치를 대신할 수 있거나 이보다 우월한 민주주의론 내지 공동체 운영원리는 아직 없다.

 

 

11)인간사에서 중요한 것은 대개 애증과 상처, 고통을 동반한다. 사랑도 그렇다. 애증의 상처와 고통을 주었다고 사랑 없는 삶을 주창할 수는 없듯이, 정당 정치도 유사한 인간적 요소 갖기에 그것이 가치 있는 만큼 욕도 많이 먹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요컨대 정당 정치를 좋게 만드는 문제는 거의 민주주의를 좋게 만드는 문제와 맞먹는 크기 갖는 바, 이를 정치 외부에서 혹은 정치 위에서 계도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현실적이지도 않다고 본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정당 정치가 사회적 내용을 좀 더 풍부하게 안게 될까 하는 방향에서 고민하고 접근하는 것은 그래서 더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 아닌가 한다.

 

12) 우리 사회 전문가들이나 엘리트들은 마치 국민의 뜻이나 시대정신을 자신들이 대변하고 있는 듯이 말하고 처신하는데, 사실 그 자체부터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본 강사가 아는 사람 가운데, 직업이 자문위원”이라 불린 대학교수가 있었다. 정치권의 국정자문위원이나 정책자문위원, 나아가 시민단체의 자문위원 이름으로 발 넓게 활동했다. 그는 당적을 가져본 적이 없다. 정당의 자문위원을 오래 했는데도 그런가를 물었더니, 해달라기에 했을 뿐 그 때문에 당원 가입을 해야 했다면 자문위원 수락을 안 했을 거란다. 공천심사위원을 했던 다른 교수 역시 당적은 생각도 안 해봤단다. 또 다른 교수는 자신의 SNS 사이트를 통해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발언을 해왔다. 그 또한 당적은 없다. 아마도 자신은 특정 정당을 넘어 정치 전체의 계도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언론사나 기자 역시 파당적인 효과가 큰 의견을 초당적으로 말한다. 당연히 당적은 없다. 대부분은 회사 내규로 당원 가입을 금지하고 있다. 시민운동가는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당적을 기피한다. 변호사는 정당 가입 경력이 있으면 특검 참여를 못하는 등 불이익이 많다고 말한다.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모두가 당적을 가져야 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우리의 지식사회는 좀 심하다. 그들에게 정당은 영향력 행사의 도구일 뿐, 정당이 사회에 뿌리를 내려야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은 무시해도 좋은 일이 되었다.

 

13) 당원이 되는 일은 불편하다. 괜한 오해나 편견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 가치 있는 일이란 대부분 그렇다. 비용을 치르는 일 없이 얻기만을 바랄 수는 없다. 당적을 갖지 않아야 좀 더 중립적이고 보편적이 되는 것도 아니다. 복수의 정당으로 조직된 그 어떤 의견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되면, 사람들은 정치 전체를 대상화해 냉소적인 말을 쏟아내기 쉽다. 지식인도 다를 바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심하다. 이견과 차이가 있어야 합의도 조정도 의미가 있다. 처음부터 국민적 합의나 전체 의사를 앞세워 내 주장의 옳음을 강변하면, 목소리는 커지고 갈등은 더 격화될 뿐이다. 당적을 갖는 사람과의 대화가 반드시 대립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말과 의견이 더 부드러울 수도 있다. 서로의 정치적 차이를 고려해 최대한 설득력과 보편성을 갖춰 말하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당도 완벽할 수 없고 이런저런 문제를 안고 있기에, 상대 정당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일도 자제한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좋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없던 애정도 생기고 책임감도 갖게 된다.

 

14) 부드럽고 보편적인 정치 언어를 갖는 문제가 당적 여부보다 개개인의 특성에 더 많이 좌우된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어느 사회의 정치 담론이 갖는 과도한 격렬함의 문제는 정당이 시민 삶 속에 얼마나 잘 안착해 있느냐와 깊은 관련이 있다. 말과 글을 다루는 지식인 집단 속에서 정당이 안정된 시민권을 갖는 문제는 특히나 중요하다. 정당을 자기 밑으로 내려다보는 무책임한 언어 습관이 지식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과도한 도덕적 우월감을 주체하지 못해 가르치려 드는 경향이 강한 것도 잘못이다.

 

15) 우리 지식사회의 그런 풍토는 헌법재판소의 정당해산 결정과 정신적으로 상응하는 면이 있다. 정당을 우습게 알고 당적 갖는 것을 기피 내지 경원시할 일로 만들기 때문이다. ‘네이버 열린 연단’에 실린 최장집 교수의 에세이 <한국의 헌법재판소와 민주주의>에 따르면, 독일의 경우 지금껏 역임한 헌법재판관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당적이 있었다. 아직 실감하긴 어렵겠지만, 정당 친화적인 사회가 오히려 더 평화롭고 말의 내용도 더 풍요로울 수 있다. 민주주의란 의견이 다른 정당이 번갈아 집권하는 체제인데, 당적을 갖는 일을 모두가 회피하는 사회가 된다면 대체 무슨 재주로 민주주의를 좋게 만들 수 있을까? 모두가 당원이 될 이유는 없지만, 지금보다는 좀 더 자유롭게 당원이 되고 당 생활에서 참여의 보람도 찾는 일이 가능했으면 한다. 지식인들부터가 그래야 한다.

 

16) 이상으로 5부의 강의를 마친다. 학문으로서의 정당론과 우리의 정당정치 현실을 소재로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수강자 여러분에게 얼마나 유익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강의를 하는 나 자신은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이제 마지막 두 시간은 2014년의 한국사회를 슬프게 만든 세월호 사건을 둘러싸고 우리의 민주정치가 보여 준 여러 문제를 느낀 대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고 끝내겠다. 그럼 다음 시간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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