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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강. 선거제도론 비판
 

 

 

 

5부. 어떻게 하면 정당 정치를 좋게 만들 수 있을까

 

35강. 선거제도론 비판

 

1) 35번째 시간이다. 오늘은 선거제도 문제를 살펴보려 한다. 선거제도를 비례대표제(대표적으로 독일식 정당명부제), 중대선거구제(한 선거구에서 2 내지 5인을 단순다수제로 뽑는 선거제도) 등으로 바꾸거나 혹은 선거제도를 이슈로 정계개편 시도를 하려는 접근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점이 많다.

 

2) 선거제도는 크게 비례대표제와 단순다수제로 나눌 수 있고, 그 아래 여러 하위 유형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두 유형에 들어갈 수 없는 제도도 있고, 두 유형을 혼합한 또 다른 유형도 별도로 따져볼 일이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논의해야 할 것까지는 없다고 본다. 이번 강의에서 본 강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선거제도와 관련된 여러 오해들, 나아가 지극히 단순화된 생각들에 대한 것이다. 단순다수제와 비례대표제는 그 나름 장점과 단점을 나눠 갖고 있다. 달리 말하면 절대적 제도 우위를 구분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례대표제를 선호하는 사람들 가운데 단순다수제나 소선거구제를 마치 “문제의 근원” 내지 “악의 제도”처럼 설명하는 경우를 보는 데, 그것만큼 황당한 일은 없다고 본다. 사실 단순다수제는 정치에 있어서 지배적인 결정 방법이다. 민주주의는 다수지배의 원리 위에서 실천되며, 비례대표제 하에서 연립정부 형성에 있어서든, 법안 통과에 있어서든 최종적으로는 단순다수의 원리가 작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3) 선거제도 사이의 제도 우월성을 따져보기 전에 먼저, 어떤 선거제도를 택하든 강한 정당에게 유리한 효과를 갖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전면적인 비례대표제를 하더라도 약한 정당은 불리하다. 불리한 정도를 최소화하려 할 수는 있지만, 완전히 없앨 방법은 없다. 군소정당을 지지한 지지표가 사표가 되는 등 단순히 제도의 “기계적 효과(mechanical effect) 때문만이 아니라 제도 외적인 "심리적 효과(psychological effect)" 또한 강하다. 누구든 자신의 표가 최종적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기를 바라며, 전체 의석수 분포나 집권당 여부 등등에 무관하게 선호 그 자체를 표출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시민은 많지 않다. 따라서 정당 스스로를 단단히 하는 것 없이, 막연한 제도 효과에 의존해서 정당 정치를 이렇게 저렇게 바꾸고 좋게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낭만적이다 못해 순진한 일이다.

 

4) 비례성을 기준으로 선거구 크기를 말하라면, 비례대표제는 선거구 크기를 키울수록 비례성이 높아지고 단순다수제에서는 선거구 크기가 작을수록 비례성이 높아진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실 단순다수제를 하는 한 (한 선거구에서 1인을 선출하는) 소선구제만이 고려될 수 있을 뿐, 중대선거구제는 어떤 선거제도 연구자도 추천하지 않는다. 비례성도 문제지만, 사악한 정치 전략을 조장하는 면도 크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살펴보자.

 

우선 선거구 크기를 중대선거구로 늘릴수록 사표의 크기는 줄지만 표의 비례성은 낮아진다. 이 점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사표의 크기가 줄어도 비례성은 수학적으로 얼마든지 낮아질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 비밀은 소선거구제에서는 가장 이득률이 높은 당이 제1야당(제2당)인데 반해 선거구 크기가 늘수록 그 이득률은 집권당(제1당)에게 체계적으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요컨대 제2당 이하의 비례성이 낮아지는 것의 효과를 제1당이 향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전략적으로도 부정적인 효과가 큰데, 집권당은 야권 분열을 통해 이득을 더 늘리려 하는 반면, 제1야당의 경우는 분열을 통제할 내적 유인이 약해진다. 이 때문에 선거구 크기가 늘수록 정당의 수는 늘어나는 결과가 나타난다. 전국적으로는 기반이 약해도 특정 지역에 강한 기반을 갖는 세력들이 살아날 가능성을 높이는 것도 중대선거구제다. 아마도 단순다수제 하에서 강한 조직력을 갖는 제1당이 장기집권 기회를 늘리고자 한다면 즉 1당 우위체계를 만들고자 한다면, 중대선거구제가 유리하다. 소선거구제는 제1야당에 유리하기에, 정권교체를 용이하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다른 무엇보다도 3당 이하 규모의 정당들에게 제1야당과 협력할 것을 강요하는 제도효과가 매우 강렬하기 때문이다.

 

5) 그에 비해 비례대표제는 정당의 수를 늘이는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중대선구제와 유사점이 있으나 제1당에게 이득률이 체계적으로 이전되는 효과는 현저히 약해진다는 차이가 있다. 제3당 이하의 정당들에게 야권단일화, 야권연대의 압력도 낮아진다. 또한 제1당이 과반수 정당이 될 가능성은 단순다수제에 비해 비례대표제에서 훨씬 낮아진다.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데, 강한 정당이라는 조건이 없을 경우 비례대표제는 정치체계를 안정적으로 통제할 수렴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비례성도 정치에서 중요한 가치이지만 통치가능성이나 안정성도 중요한 가치이다. 프랑스 3-4공화국, 독일 바르마르공화국은 모두 정당 간 비례성은 높았지만, 정치는 몹시 불안정해 내각의 잦은 교체와 정당의 분열, 대립, 적대가 빈번했다. 결국 정치체제 자체가 붕괴를 맞게 되었다. 우리의 경우 여당에 비해 야당들의 조직력이 훨씬 약하다. 따라서 분열 가능성은 야권 안에서 더 크게 작용할 텐데, 그것의 귀결이 정치체제에 어떤 부담을 가져다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6) 선거제도를 바꿔 정당 정치를 좋게 만들고자 할 때에도 정당 스스로 자신을 단단하게 결속시키는 과제를 어떻게 병행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점을 경시한 채, 오로지 새로운 선거제도가 어떤 효과를 가져다줄지의 관점에서만 모든 문제를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붕괴론”과 “형성론”은 이론적으로나 실제에 있어서나 일치하지 않는다. 대안형성에 대한 고려 없이 기존 정당체계의 붕괴와 해체만 생각한다면, 최종적 승자는 조직력이 강한 정당이 되거나, 아니면 모두가 그나마 있는 조직력을 잃고 정치체계 전체를 실험 대상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는 더 잃을 게 없는 군소정당은 환영할 일일지 모르나, 정치체계 전체의 관점에서는 위험한 일이고 결코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7) 아마도 선거제도가 비례대표제로 바뀌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큰 정당들이 응할 가능성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에서는 대개 혼합형이라고 불리는 유형이 늘어나고 있다. 즉 우리나 일본처럼 단순다수제의 틀 안에 비례대표제적 요소를 도입하거나 늘리는 방식, 혹은 독일의 사례처럼 비례대표제라는 틀 안에 단순다수제적 요소를 결합하는 방식 등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선거제도 변화는 어려워도 변화“론”을 통해 정계개편을 기획할 수는 있겠다. 이는 제도 그 자체보다는 제도론을 매개로 한 새로운 연합정치를 모색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필요를 갖는 정치세력 입장에서는 당연히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제도론 자체로도 정당성을 갖출 수 있어야 한다. 단순다수제나 소선거구제에 정치가 나쁜 것의 모든 책임을 돌리고, 비례대표제가 모든 문제의 대안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 “제도 연합”을 매개로 새로운 정치 연합이 실현된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라면 제도 논쟁에 정치 에너지를 과도하게 지출하는 게 좋은 일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8) 앞서도 말했지만, 정치를 정치학과 대학원생들 세미나처럼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정치가들이 선거제도론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다보면 잘못된 지식과 오도된 해석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지만, 왜 그런 법-제도론에 과도하게 집착할까 의아할 때가 많다. 꼭 해야겠다면 선거에서 공약으로 걸고 시민주권을 위임받아서 실천하는 것이 옳지, 정파나 정당을 초월한 듯한 “이상적 제도론”을 설파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차라리 정당 차원에서 다음 선거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 더 나을 듯싶고, 경쟁력 있는 출마자를 어떻게 선발하고 어떻게 각자의 인지도와 주목도를 높여줄지, 당원을 어떻게 늘리고 교육하고 참여시켜서 자부심을 갖고 선거 운동에 뛰어들 수 있게 할지 등등,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들에 더 많은 열정을 쏟고 헌신을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비례대표제가 아니어서 지금의 정당 정치가 이렇게 되었고, 그래서 먼저 비례대표제로 바뀌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되는 것일까? 그간 비례대표제 이야기는 수 없이 했지만, 그래서 얻은 것이 무엇인지도 돌아볼 일 아닌가 싶다. 처음부터 정당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꾸준히 해왔더라면 다른 정당들과의 연합이나 제도 여부에 자신의 운명이 종속되는 일은 줄었을 것이고, 지금부터라도 그런 자세로 당에 헌신할 때만이 정당으로서 미래가 있지 않을까 한다.

 

9) 정당을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 때 어떤 선거제도든 그 효과도 누릴 수 있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강조하면서 오늘 강의를 마친다. 제대로 된 정당이 없다면 천상의 헌법을 가져다준들, 이상적 선거제도를 가져다준들 그 혜택을 향유할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럼 다음 시간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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