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정당 조직과 체계의 변화
29강. 정당조직의 변화 2 : 정체 모를 선거정당으로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1) 29번째 시간이다.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의 야당 정치를 소재로 정당조직론에 대해 살펴보겠다. 바로 시작하겠다.
2) 야당 내 정당 개혁론은 공천권을 행사할 당권과 차기 대선에 나설 대권 후보 선출 문제를 둘러싼 제도 논쟁으로 일관해 왔다. 왜 정당 개혁론을 말하는 누구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하려는 열정적 팀으로서 강한 정당을 만드는 문제, 집권 정부를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실력 있는 야당을 만드는 문제, 유능한 미래 정부가 되기 위해 예비 내각을 갖춘 대안 정당을 만드는 문제, 일상의 시민 삶을 보호하는 생활 지킴이 정당 만드는 문제, 함께 교육하고 함께 정책 만드는 당원과 적극적 지지자들의 자랑스러운 정당 만들기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할까. 참으로 알 수 없는, 본말이 전도된 개혁”론“ 싸움이 아닐 수 없다.
3) 정부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에서라면 “정부도 시민 권력의 일부”라는 생각이 자연스러워야겠지만, 한국정치의 경우 정부는 “어느 정당의 정부”라는 표현보다 박근혜-이명박-노무현-김대중-김영삼 정부라는 명칭이 더 자연스러운, “사인화된 정부”로 기능해왔다. 더 안타까운 일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도 대통령이 당적을 버리고 “개인 대통령”이 된 것이다. “집권당 없는 통치”의 현상은 반복되어서는 안 될 일이 아닐 수 없다.
현대 민주주의는 1) 책임 정부(responsible government : 의회 주권의 성립과 함께 내각이 의회의 신임에 책임을 지는 것), 2) 정당 정부(party government : 선출된 개인이 아닌 선거에서 승리한 정당에게 정부 구성권을 위임하는 것), 3) 반응 정부(responsive government : 대중 정치에 기반을 둔 정당의 등장과 보통선거권의 효과로 다수 시민의 요구에 반응하는 것)로 발전해 왔다.
이에 반해, 우리의 경우 책임 정부와 정당 정부의 원리는 별로 실현되지 않은 채, 선거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정치만 있다. 요컨대 책임정부/정당정부의 규범이 제도화되는 과정 없이 대중 일반에 반응하는 정부만 있는 형국인데, 그래서 모두가 “국민 앞세우는 담론 정치”를 즐기게 되었다. 이것의 또 다른 효과가 “참여와 개방 만능의 정치론”이 무성해진 것이다. 책임 있게 자신의 정당을 운영하는 문제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너무 적다. 그런데 이 문제가 개선되지 않으면 우리의 민주정치가 좋아지기는 어렵다.
4) 정당을 바꾸자는 것의 목적은 응당 “조직적으로 더 강하고 정책적으로 더 유능하고 사회적으로 더 대중적인 정당”이 되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부터 단단해져야 환경 변화에 유능하게 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부를 더 잘 조직하고 지지자들에게 더 잘 어필하고 더 잘 득표하기 위해서라면, 팀으로서의 효과를 잘 발휘해야 한다.
정당의 가장 오래된 정의는 “세계관”(Weltanschauung)이자 “조직된 의견”(organized opinion)이며, 가장 현대적인 "합리적 선택이론"에서조차 “하나의 팀(team)이자 목표를 공유하는 연합(coalition)”으로 정의돼 왔다. 따라서 외부적으로 지지와 득표만을 과도하게 추구하면서 내부적으로 공허해지는 지금까지의 정당 개혁론과는 달리, 내부적으로 안정된 리더십, 응집적인 의사결정구조, 책임 있는 당 상근체계, 그리고 자신의 정당에 당원 내지 적극적 지지자로 활동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하는 방향으로의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5) 2012년 4월 총선 직후 정당 연구를 전공한 정치학자들과 한담할 기회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총선에서 패배한 민주당이 화제가 되었는데, 누군가가 갑자기 “그런데 민주당은 대체 어떤 정당이지?” 하는 질문을 던졌다. 생각해 보니 중요한 질문인데도 깊이 따져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이념적으로는 어떨까. 자유주의 정당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뭔가 공허한 생각이 들었다. 어떤 자유주의를 말하는 걸까. 자유주의와 자유주의가 아닌 것으로 민주당과 새누리당을 구분할 수 있을까. 진보, 보수의 기준으로도 애매하긴 마찬가지였다. 새누리당이 보수라는 데 이견은 없었다. 그럼 민주당은 보수정당인가 아닌가. 진보 쪽으로 많이 옮겨왔지만 그래도 보수정당이라고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고, 이념적인 기준은 상대적인 거니까 이제는 진보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5년 전에는 ‘중도 실용’을 내세우며 보수 쪽으로 갔다가 이번에는 진보로 온 거니까, 실용주의 정당이라고 보는 게 옳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수 실용, 중도 실용, 진보 실용 등 모든 게 다 되는 정당은 대체 무슨 정당인가.
이념적인 정체성 말고 다른 기준을 적용해 보기로 했다. 사회적 기반은 어떨까. 민주당은 누구의 이익과 열정을 대표할까. 민주당 스스로는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을 말하는데, 그 말에 선뜻 동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어떤 계층이 가장 이득을 보았나를 준거로 삼는다면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신용불량자 문제나 비정규직 증가, 불평등 심화, 재벌의 경제력 집중 등이 거론되었는데, 혹자는 아예 삼성이 가장 혜택을 많이 봤고 또 삼성의 보고서에 의존한 삼성 정권이라고 규정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지나친 해석이라고 보는 사람은 누가 재벌의 이해관계를 당내에서 대표하는지를 물었다. 경제 관료 출신의 국회의원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고,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던 사람이 공천에서 배제된 사례도 이야기되었지만, 대체적인 의견은 특정 계층 대표성도 직능 대표성도 분명하지 않다는 쪽으로 모아졌다. 호남이라는 지역 대표성은 분명하나, 서울과 경기 역시 민주당이 강세를 보이는 지역이기도 하다. 2010년 지방선거와 2012년 총선은 특히나 그랬다.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호남이라는 지역 대표성은 약해진 반면 젊은 세대가 민주당으로 몰리고 있다며 ‘2030 정당’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것 역시 설득력이 약했다. 누구나 알다시피 민주당의 최대 문제는 젊은 사람들이 당에 들어오지 않는 데 있기 때문이다.
리더십은 어떨까. 누가 당을 이끌고 있는가. 대부분 ‘친노’라고 답했다. 그런데 친노가 뭘까. 친노와 친노가 아닌 것은 어떻게 구분될까. “그건 당내 권력 자원의 특징을 말하는 것일 뿐, 정책이나 이념은 큰 상관이 없지.”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런데 당 대표와 당 대선 후보를 강제로 분리하는 제도를 본 적이 있는가. 아무도 그런 사례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왜 그런 이상한 제도를 갖게 된 걸까. “누구도 서로를 믿을 수 없으니까. 신뢰가 아니라 신뢰할 수 없음을 제도화한 거지.” 그게 작동이 될까. “안 되니까, 리더십 교체가 계속되는 거지.”
이런 식의 이야기를 계속하다 보니, 결국엔 모두가 지루해졌다. 친노와 비노, 왜 이렇게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가. 왜 민주당 이야기만 하면 사회는 보이지 않는 걸까. 민주당은 누구를 위한 누구의 정당인가. 민주주의 정당 이론을 좌절시키는 이 무력한 현실은 뭔가. 더 안타까운 것은 3년 전에 나눈 이 대화가 지금 생각해봐도 전혀 옛날이야기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2015년 2월 문재인 후보와 박지원 후보가 경합한 민주당 당대표 경선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아, 이게 정당인가”라는 탄식을 안 할 수 없을 거라 본다. 집권 정부와 여당의 지나침 때문에만 존재의 이유가 있는 정당이라면, 반대당으로서의 역할만 잘하면 될지 모른다. 지금의 제1야당,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한다.
6) 한국 정치에서 야당이라는 말은 참으로 묘하다. 이름이 자주 바뀌다보니 당명을 특정해 말하기 어려울 때 하나의 통칭으로 사용되는데, 선거에서 크게 패하거나 ‘만년 야당’ 같은 자조적인 분위기가 되면 더 많이 애용된다. 한때는 ‘보수 야당’이나 ‘제도권 야당’으로 불렸다는 이야기를 지난 강의에서 했는데, 이 두 말 모두 외국어로 옮기기 어렵고 글자 그대로 직역하면 오해를 불러오기 쉬운 매우 한국적인 용어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야당 지지에 대한 주저거림을 표현하는 나름의 의미는 있었다.
진보정당을 만들려 했던 사람들도 기존 정치를 늘 ‘보수양당제’로 비판했고, 자신들은 그들과 ‘종류가 다른’ 정치세력이 될 거라 했다. 그런데 진보정당이 원내에 진출한 뒤 내부적으로 분열의 진통을 겪고 외부적으로는 야당 도움 없이 지역구 당선이 어려운 현실에 직면하면서 ‘야권’이란 표현이 갑자기 많아졌다. ‘야권 후보 단일화’나 ‘야권 단일후보’ 등이 대표적인데, 그러면서 야당은 보수 정당의 이미지를 벗고 진보 세력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이 야권이라는 말도 외국어로 옮기기 어려운 한국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 말이 자주 사용됨에 따라 진보의 의미가 공허해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정당들이 각자의 정체성과 이를 집약하는 자신만의 이름을 간직 못한 채 야당이니 야권이니 하는 추상명사 속에서 뭉뚱그려지는 현상이 계속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7) 야당 내 계파정치의 양상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문제가 적지 않다. 제1야당인 민주당의 경우, 이념적 차원에서 계파를 분류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당내 진보파, 중도파, 보수파로 나누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사회적 기능 분화에 따른 이익정치의 양상을 갖는 것도 아니다. 어느 계파가 자영업의 이익을 대표하고 또 어느 계파가 화이트칼라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지, 농업의 이익과 노동의 요구를 전달하는 계파적 채널은 있는지,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이익갈등과 계파적 차이는 상관성이 있기나 한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과거 ‘3김’처럼 재정 및 지지동원 능력, 나아가 인사권을 배타적으로 행사하는 보스 중심의 계파정치가 지속된 것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의원 개개인의 자율성이 과도하게 향유되는 “파편화된 정당(atomized party)”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잠재적 대선후보를 중심으로 느슨하게 연결된 몇 개의 무리들 같고, 때로는 친노파와 그 나머지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정서의 덩어리로 양극화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 규정하든 좋은 조직의 특징인 ‘신뢰의 제도화’와는 거리가 먼, 서로 신뢰하지 않음을 제도화해 놓은 것이 지금의 야당이란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8) 정치가로서 소명을 가진 사람이라면 늘 ‘어떤 정당인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어떤 가치나 이념을 중시하고 어떤 사회집단의 이익과 열정을 대표하려는지, 그것과 공익을 증진시키는 일이 어떻게 양립될 수 있는지와 같은 가장 기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 않은 채, 소소한 개인 권력에나 매달리고 공천 받고 재선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을 비즈니스라고 할 수는 있어도 정치라고 할 수는 없다. 정치 행동의 규범적 토대가 튼튼해야 그 기초 위에서 제대로 된 정당 정치가 가능하다. 그런 정당이라야 책임 있는 리더십이 형성되고, 개인의 발전과 전체의 발전이 양립하는 당 조직을 발전시킬 수 있다. 또 거대한 국가 관료제를 상대할 수 있는 훈련된 당 관료제를 갖춰야 한다. 그래야 향후 정권을 잡았을 때 부처를 관장할 유능한 예비내각 팀을 준비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정당 정치가 최고의 시민 교육장이 될 수 있다. 의원 각자가 어떤 정당으로 어떤 정치를 하고 싶은지, 그것과 특정 계파에 속해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한 사실은 어떤 인과성이 있는지부터 알 수 있어야, 정당이라고 부를 수 있다.
9) 지금 민주당은 정당인가라고 묻는다면, 주저거리지 않을 수 없다. 정당조직론에 반하는 정당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의미 없는 냉소처럼 보일까 그러지도 못하겠다. 제발 어떤 정당인지, 아니면 어떤 정당이 될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아주길 바라며, 오늘 강의를 마친다. 다음 시간엔 정당체계론을 살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