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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강. 고대 민주주의와 현대 민주주의

 

3부. 정당의 민주적 기능과 역할

22강. 고대 민주주의와 현대 민주주의

 

2월 10일 오후 4시, 박상훈 학교장이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정의당 중앙당 회의실에서 만납시다.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
박상훈 학교장님께 직접 질문하세요! 


1) 22번째 시간이다. 곧바로 주제에 들어가겠다. 2천 5백 년 전 고대 그리스에서 실천되었던 민주주의는 일종의 자족적 체제라고 할 수 있다. 행정과 정치는 구분되지 않았다. 폴리스의 운영을 맡은 행정관도 추첨으로 선출되었고 연임은 할 수 없었으며 임기도 1년으로 짧았다. 당연히 전문 관료제도 없었고, 독립된 제도적 실체로서 국가도 없었다. 독립된 법원도 없었고, 정당도 없었고 시민사회도 없었다. 정치가 곧 사회였고 사회가 곧 정치였다. 모든 것은 시민들이 돌아가면서 통치자, 행정관, 법관의 역할을 맡는, 일종의 일원체제였다. 다음 쪽에 있는 그림은 아테네를 기준으로 고대 민주주의 체제가 어떤 구조와 과정을 가졌는지를 표현한 것이다.

2) 일원체제로서 고대 민주주의에서는 시민이 참여하는 것만으로 체제가 작동했다고 할 수 있다. 가장 큰 도시국가였던 아테네의 경우, 인구 30만 안팎에 시민이 3만 명 정도였던 매우 작은 규모였고, 외국인은 물론 이주민들에게도 시민권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그렇기에 고대민주주의는 매우 동질적인 시민구성 위에서 작동했던 매우 특별한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시민들이 전문 관료나 조직, 대표 없이 스스로 정치공동체를 운영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현대 민주주의와는 달라도 아주 다른 체제가 아닐 수 없는 바, 그리스 시민이 타임머신 타고 와서 조직과 대표, 정당, 관료제 등으로 움직이는 오늘의 민주주의를 본다면, “이게 민주주의라고? 그렇다면 참으로 괴이한 민주주의다!” 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웃음) 그만큼 고대민주주의는 지금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3) 고대 민주주의는 정치로부터 국가나 사회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던 매우 흥미로운 체제였다. 당연히 정부 역시 시민으로부터 독립된 통치체 내지 조직의 특징을 갖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규모의 작음과 시민 구성의 동질성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남성 가부장이 중심이 된 시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여가를 가질 수 있도록, 생산은 노예가 재생산은 여성이 맡아주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4) 이와는 달리 현대 민주주의는 국가와 정치사회 그리고 시민사회가 분리되어 있을 뿐 아니라, 국가 권력 역시 입법-행정-사법부로 분리되어 있다. “참여의 포괄성”을 특징으로 하는 시민권의 원리 그리고 부서들 각자가 가진 자율성의 원리와 함께 견제와 균형의 원리 또한 중요한 것이 현대 민주주의이다. 정부는 시민으로부터 분리된 대규모 관료제의 형태로 조직되어 움직이는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그럼에도 제도적으로는 서로 분리된, 국가-정치사회-시민사회를 연결하는 핵심 제도로 복수의 정당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림에서 보듯, 정당은 정부 안에도, 정당들 사이에도, 시민사회 안에도 존재하며, 참여와 대표, 책임의 원리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민주주의에서는 시민이 입법(민회와 500인위원회), 사법(배심원), 행정(행정관)을 직접 관장했지만,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정당이 시민사회와 정치사회 그리고 국가의 영역에서 참여를 조직하고, 대표의 체계와 정부를 매개하고, 궁극적으로 책임성의 규범을 감당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이야말로 이번 강의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요점이다. 그리고 위 그림에서 수강자 여러분이 주의 깊게 확인해야 할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5) 현대 민주주의는 국가나 정치로부터 자율적인 시민사회 위에 서 있다. 또한 (고대 민주주의가 가졌던) 공동체에 대한 규범적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개인 인권과 재산권이 중심이 되는) 사적 공간 위에 서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는 입헌주의와 보편적 시민권의 원리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기초 위에서 자율적 경제, 자율적 시민사회, 국가 관료제 등의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민주주의의 원리와 병행, 결합하게 할 것인지가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입헌주의 없는 민주주의, 자율적 시민사회 없는 민주주의, 관료제나 법의 지배 없는 민주주의를 추구할 수는 없다. 아무리 자유주의 대신 공화주의를 말하고, 개인주의 대신 공동체주의를 말하고, 정당 중심의 민주주의 대신 급진 민주주의를 말해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6) 공동체에 대한 충성과 정치참여를 강제적 의무로 부과하는 민주주의도 불가능하다. 경제를 정치의 하위체계로 재편하려 했던 실험 역시 국가 관료제와 공산주의 계획경제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사적 삶과 공적 삶을 어떻게 양립가능하게 할 수 있는지, 개인적 권리와 공적 책임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뒷받침할 것인지, 공정하고 자율적인 경제를 어떻게 만들고 관리할 것인지, 법의 지배와 민주주의 사이의 충돌하는 원리는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국가 관료제의 역할과 선출직 시민대표의 역할 사이의 좋은 결합은 어떤 것인지 등등이 우리가 개척해야 할 세계이자 영역이지, 사적 삶 없고 개인적 인권 없고 시장경제 없고 법의 지배 없고, 관료제 없는 민주주의를 상상한다면 그건 현실이 될 수 없고 혹 실현이 된다면 필경 전체주의일 것이다. 전체주의란 위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은 다원적 기구와 영역들의 자율성을 폐지하고 강제적으로 일원 체계를 실현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7) 전체주의는 민주주의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상존하는 위험이자 병리현상이란 점을 이해해야 한다. 전체주의는 대규모 대중 동원에 기반을 둔 정치 현상이며, 따라서 민주화 이후에만 가능한 현상이다. 즉, 민주화 이전에는 전체주의적 현상이 나타날 수 없었다는 말이다. 전체주의적 위험이 민주주의 안에 늘 상존하는 것은, 다원주의가 전제하는 부분체제들 사이의 긴장을 싫어하면서 완전한 통합을 지향하고자 하는, 인간의 갈등 회피적 열망 또한 강렬하기 때문이다. 위기와 분열의 위험이 없는 인간 사회는 없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뭔가 완전하게 통합된 사회나 공동체를 바라는 대중 심리를 동원하고자 하는 정치적 시도는 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제아무리 민주주의가 잘 실천된다 해도 다원주의에 반하는 좌와 우의 전체주의적 열정은 완전히 사라질 수가 없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북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도 극우와 극좌는 10% 안팎의 지지를 늘 향유해 왔다.

8) 민주주의를 이상과 같이 이해한다면, 고대 민주주의와 현대 민주주의를 직접 - 간접 민주주의로 나누는 것이 얼마나 단순한 일인지를 생각할 수 있다. 고대 민주주의와 현대 민주주의의 차이를 시민이 직접 통치하느냐 간접적으로 통치하느냐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못해 오해를 낳을 정도로 잘못된 이해 방식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대 민주주의에 기초를 둔 직접 민주주의관이 가진 문제는 그것이 좋냐 나쁘냐를 떠나 대규모의 국가관료제와 다원적 이익과 열정으로 이루어진 자율적 시민사회가 있는 현실에서 실천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시민이 직접 공적 결정을 하고 공적 업무를 담당하려면 여가가 있어야 한다.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에서처럼 노동자가 생산의 역할을 대신하고 여성이 재생산의 역할을 맡아 주거나 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기준에서 노동자와 여성을 시민에서 배제하고, 독립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을 정도의 교육을 받고 남에게 종속되지 않을 재산을 가진 중산층 시민으로 직접민주주의를 하자고 한다면 정신 나간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옛날이야기인 것만은 아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재정을 위기에 빠뜨린 것은 여가를 가진 중산층들이 지배하는 타운미팅과 주민 투표가 당장의 이익을 위해 감세를 결정해 왔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경우 이주민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안이 의회를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번번이 부결시킨 것은 주민 투표였다. 기껏해야 네 개밖에 안 되는 이슬람 사원들이 첨탑을 세우고자 했을 때 이를 금지시킨 것도 스위스의 주민 투표였다.

시민이 스스로 직접 한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다. 치과 의사를 믿고 치아를 맡기듯, 내가 좋아하고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이 없다면 시민의 역할은 영 재미가 없다. 당원도 되고 선거운동에도 참여할 열의를 가질 수 없다. 직접민주주의론이 정치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데 기여하거나 좋은 정당을 만드는 일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쉽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의회와 정당, 선거의 역할을 줄이고 이를 대체할 민주주의가 있다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직접민주주의 찬양론이 기존 정치의 독점 구조를 방치하거나 더 강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현실이 될 수 없는 아름다운 상상이나 종교적 가르침이 부조리한 삶 속에서도 살아갈 힘을 내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럴수록 현실을 바꿀 인간 스스로 의지와 노력은 약화되듯이, 직접민주주의론과 시민 정치론, 운동 정치론이 자칫 현실의 정치를 회피하게 만들고 자신의 운명과 무관한 정치 세력들에게 무망한 기대만 갖게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9) 가끔 “급진민주주의론”을 앞세우며 “정당이냐 운동이냐”라는 이분법적 문제 제기를 하는 진보파 지식인들의 주장을 듣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질문일 수밖에 없다. 앞서 그림에서 보았듯이, 운동의 위치는 시민사회의 수준에서 ‘참여’의 한 내용일 수는 있어도 그 어떤 체계적 특성을 갖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운동으로 민주주의를 운영할 수 있을까? 어려울 것이다. 민주주의도 하나의 통치체제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이룰 수 있는 미래는 없다. 운동이 활성화되어야 민주주의가 활성화 된다고도 말하기 어렵다. 인과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운동이 활성화되는 경우가 더 현실에 가깝다. 그렇기에 운동을 통해 민주적 충격을 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정당 정치를 활성화시키는 계기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기존 체제의 낡은 질서를 유지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운동 그 자체만으로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촛불집회”에 대해 다루면서 다시 강조하겠다.

 

 

10) “이견과 복수의 의견 사이의 공익적 경쟁”이라는 표현을 강조하고자 한다.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은 여기에 있고, 각 정당들은 이 문제에서 유능함을 발휘해야 한다. 현대 민주주의의 문제는 한 개인이나 집단이 감당할 수 없다. 일정 기간 전체 체계를 운영할 정도의 유능한 팀과 조직이 있어야 하고, 그래야 결과에 대해 책임성을 갖는 정치도 실천할 수 있다. 대중 참여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현대 민주주의이다. 대안 형성자 내지 대안 정부로서의 복수의 정당이 기능해야 시민 권력은 강해진다는 것이야말로 현대 민주주의가 기초를 두고 있는 가치 판단의 토대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이를 표현한 것이 “정당 정부(party government)"이고 야당을 기준으로 말하면 대안적 정당 정부를 준비하는 "예비내각(shadow cabinet)"이다.

인민 주권 내지 시민 권력의 정당성을 추구함에 있어 정당 정치와 경쟁했던 다른 길은 많았다. 비스마르크 같은 “관료정치”, 프랑스 혁명 등 “운동정치”, 무소속 돌풍 등으로 나타난 “시민정치”, 베를루스코니와 같은 “여론정치” 등의 실험이 대표적이다. 그런 정치가 왜 지속될 수 없었는지 생각해야 한다. 대의민주주의의 극복을 앞세웠던 새로운 사회운동의 지도 엘리트들 대부분도 결국엔 왜 정당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지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당 정치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정당 정치가 아닌 길로 현대 민주주의에서 승리하기도 어렵고 또 좋은 성과를 내는 정부를 만드는 일도 어렵다.

11) 이제 마칠 시간인데, 오늘날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특징을 이해하고 그 위에서 현실적 최선을 추구하려 해야 한다는 말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현대 민주주의가 고대민주주의보다 우월한 이상적인 체제여서가 아니다. 현대 민주주의도 한계가 있고 제약도 있지만, 그것이 갖는 장점도 있고 또 그것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는 여러 지점도 있음을 알아야 현대 민주주의를 유익하게 다룰 수 있다. 이 말로, 긴 강의를 끝낸다. 다음 시간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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