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정당의 민주적 기능과 역할
21강. 정당은 현대 민주주의 최고의 발명품
2월 10일 오후 4시, 박상훈 학교장이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 |
1) 이제 3부의 강의를 시작할 차례다. 3부에서는 총 7번에 걸쳐 “민주주의에서 정당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살펴보게 될 것이다. 오늘 강의를 시작으로 “22강. 고대 민주주의와 현대 민주주의, 23강. 대의정치에 대한 도전 : 촛불지상주의, 24강. 다른 무엇보다도 정당은 자율적 결사체다, 25강. 정당이 공익에 기여할 수 있는 이유, 26강. 정당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는가, 27강. 정당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로 이어질 것이다. 오늘은 서론 격으로, 지금까지의 강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이야기의 실마리를 잡아보는 것까지만 다루겠다.
2) 앞서 강의에서, 정당은 오로지 현대 민주주의에서만 정당화되었던 매우 새로운 현상이자, 정당 정치를 이해하는 문제는 곧 현대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문제에 버금간다는 사실을 강조해 말했다. 정당은 현대 입헌 민주주의 국가에서, “누가 시민 권력 혹은 인민 주권을 위임받을 수 있는 정당한 주체일 수 있을까” 하는 질문과 함께 등장했다. 즉, 혈통과 가문, 종교에 기반을 둔 권력의 정당화 시대가 종결된 이후, 그렇다면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를 둘러싼 오랜 논쟁의 산물이었다.
영국의 경우를 보면, 1688년 명예혁명으로 입헌주의와 의회주권은 자리를 잡게 되었지만, 여전히 권력은 군주에게 있었다. 즉 입헌군주정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입헌군주정에서도 권력을 정당화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의회와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19세기 초 시작된 선거권 확대는 이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 뒤 정부를 이끄는 내각의 권위가 국왕이 아닌 선거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원리가 실천되기 시작한 것은 1867년 선거에서부터였다. 이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선거가 정부를 선택하는 기능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명예혁명이후 무려 2백년이 지나서야 의회 주권이 “정당 정부”의 원리에 의해 실천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당이 정부가 됨으로써 그 이전에 있었던 “영국에서는 여자를 남자로 바꾸고 여자를 남자를 바꾸는 것을 빼고 의회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속담은 이제 “영국에서는 여자를 남자로 바꾸고 여자를 남자를 바꾸는 것을 빼고 정당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로 바뀌게 되었다.
3) 입헌군주정과의 경쟁 이후에도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정치관은 혁명적 민주주의, 생디칼리즘, 전체주의의 비전과 경쟁하면서 최종적으로 현대 민주정치의 승자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 있는데, 아무튼 정당은 종교 개혁을 필두로 한 다원주의적 세계관의 성장, 국가 주권에 대한 자유주의적 도전과 입헌주의의 형성, 의회에 대한 내각의 책임성 확립, 정당이 정부가 되어야 한다는 관념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오랜 시간에 걸쳐 제도화된, "현대 민주주의가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귀족들과 철학자들은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정당의 등장 역시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점차 투표권을 갖게 된 일반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동원하기에 정당보다 더 효과적인 조직 수단이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4) 우리는 어땠을까? 아마도 정당의 정당성이 처음으로 자연스럽게 표현된 것은 1945년 해방이후 자주적 독립 국가를 만들고자 나섰던 “제 정당 및 사회단체”의 활동이 아닐까 한다. 1946년 2월 미군정 법령 55호 “정당에 대한 규칙”은 정당의 정당성을 제도적으로 공인한 한편, 이후 국가가 정당을 통제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뒤이어 등장한 1공화국에서 이승만 정권은 사실상 정당 없이 집권했고, 1951년 대통령 직선제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나서야 자유당을 마치 “관제여당”처럼 창당했다.
이 짧은 역사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의 경우 정당정치는 군주정으로부터 민주정으로의 긴 전환 과정을 이끌었던 갈등 없이, 위로부터 제도적 형식만으로 주어진 측면이 더 크다. 그 뒤 정치체제가 권위주의화 되면서 정당 정치의 위상 역시 쉽게 무시되었다. 야당 역시 권위주의 체제를 구성하는 인사이더였을 뿐이었고, 또 그런 의미에서 “제도 야당” 내지 “보수 야당”으로 불리곤 했다.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강제적으로 배제되거나 탄압받아 타협적이 되거나 침묵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국정치에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이끈 것은 정당이 아니라 대학생이 중심이 된 운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말 민주화가 되었다지만 한국 정치가 가졌던 이런 기본 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87년 대선과 88년 총선을 전후해 정당들이 경쟁적으로 대중적 기반을 동원했지만, 그런 노력이 지속된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90년 “3당합당”으로 전체 의석의 70% 이상을 독점한 거대 여당의 출현이 한국 정당정치에 미친 부정적 영향은 그야말로 재난적이었다. 한편으로 정당정치가 사회로 내려가기보다 국가권력에 다시 매달리게 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92년 대선에서 패한 김대중을 “사실상 정치적 망명”을 하게 하는 등 야당을 약체 정당으로 몰아가려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민주화이후에도 여전히 정당 정치는 대통령직선제 같은 제도에 매달려 있는 측면이 더 컸지, 사회 속에서 자율적 기반을 갖고 있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요컨대 우리의 정당 정치는 사회 속에서 갈등의 비용을 치루는 긴 과정 없이 보통선거와 함께 제도적으로 거의 거저 주어졌기에, 그로 인한 사회적 내용의 빈곤함을 채워나갈 긴 노력을 사후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분단과 전쟁 등, 한국정치사의 특수성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정당 정치를 내용적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과제나 비용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민주적 정당정치는, 그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는 긴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나름 보편성을 갖는 것이 아닌가 한다.
5)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이어지는 강의에서는 정당 정치가 민주주의 안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앞서 강의에서도 부분적으로 언급은 했지만, 현대 민주주의 안에서 정당이 차지하는 위상과 기능, 역할에 대한 논의는 이제부터가 본격적이 될 것이다. 우선 다음의 세 테제를 먼저 살펴본다. ① 정당은 현대 민주주의의 중심적 주권 기관으로서 등장한 새로운 제도다. ② 정당은 어느 인간 사회에나 있는, 그런 정치 집단이나 당파, 파벌과 다르며, 이익집단과도 다르고 사회 운동과도 다르다. ③ 그 어떤 제도나 기구도 시민주권의 주체로서 정당을 대신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이제 이 이야기로 넘어갈 텐데, 그러려면 현대 민주주의가 갖는 특징을 비교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 그래서 흔히 직접 민주주의라고 일컬어지는 고대 민주주의를 불러들여, 그것과의 비교 속에서 현대 민주주의에서 정당의 위상을 하나씩 살펴볼까 한다. 그럼 다음 시간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