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0일, 박상훈 학교장이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 |
2부. 정당 정치의 원리와 역사
18강. 정당정치의 역사 2 : ③ 결사의 권리 ④ 갈등과 싸움을 이해하는 방법
1) 18번째 시간이다. 지난 시간에는 입헌주의와 대의제를 중심으로 정당이 등장하게 된 초기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았다. 오늘은 세 번째 맥락으로 결사의 권리를 갖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부터 이야기하겠다.
2) “결사의 권리” : 입헌주의와 대의제가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결사의 자유, 즉 집단과 조직을 만들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 것에 있었다. 프랑스 혁명의 사례는 흥미롭다.
혁명파들은 오로지 일반의지만을 추구해야 하고 부분이익의 출현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당에 대한 태도 역시 극단에 가까울 정도로 부정적이었다. 비단 정당만이 아니라 조직 자체에 대해서도 그랬다. 그런 생각으로 그들은 결사금지 혹은 집단이기주의 금지법이라 할 만한 르샤플리에법(1791년)을 만들었다. 영국도 콤비네이션법(1779년)을 통해 유사한 규제를 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었을까 하겠지만, 자율적 집단을 만들 권리를 갖게 된 것은 인간의 역사에서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며, 그만큼 정말로 대단한 변화였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어찌되었든 이런 법들이 폐지되고 결사의 자유가 확립되고 나서야 노동조합도 시민권을 갖게 되었고,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의 길도 시작될 수 있었다.
3) 이 관점에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는 것도 흥미롭다. 민주화이전 권위주의 시기 가장 혐오스러운 느낌을 만들고자 동원된 단어 가운데 하나는 “조직”이었다. 학생들이 결사를 만들어 반독재투쟁을 하려했을 때 이들을 처벌하면서 규정된 명칭은 “조직 사건”이었다. 그만큼 조직은 권위주의가 가장 불온시한 단어였다. 같은 이유로 여전히 충분한 시민권을 못 가진 말이 있다면 갈등과 집단, 파당 등이 아닌가 싶다.
오늘날에도 “갈등 극복”은 공식 담론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갈등은 없애고 극복될 수 없다. 단지 줄이고 완화하고 절약할 수 있을 뿐이다. 오히려 갈등을 공존 가능한 "이견(dissent)"으로 다루게 될 때 민주주의의 내용은 풍부해 진다. “집단 이기주의”라는 말도 부정적으로 사용되는데, 이 또한 불합리한 일이다.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집단을 만드는 것이거늘, 그걸 이기적이라고 몰아붙이면 기성 질서의 수혜자들만 살아남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언론의 정치기사를 보면 “당리당략” 때문에 큰 문제라는 주장이 비판의 규범적 근거로 앞세워질 때가 많은 데, 정당이 당리당략을 추구하지 않는 결사체라면 그때의 정당은 대체 뭐란 말인가? 당리당략은 당연한 것이며, 다만 그것이 공익과 충돌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생각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일 뿐이다. 이처럼 민주주의를 위해 꼭 필요한 용어와 단어들이 모두 부정시되는 환경에서 정당 정치가 잘 자리 잡기는 어렵다. 다원적 결사와 조직화의 자유가 현실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시민권을 확고히 가져야 정당 정치가 산다.
4) “갈등과 싸움을 이해하는 방법” : 민주주의에서라면 갈등과 싸움은 없앨 수 없다는 이야기를 앞서 했다. 이제 이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우선 인간의 정치에서 싸움과 갈등은 없앨 수 없다. 현실주의 정치철학의 냉정한 관점에서 보면, 정치란 인간이 가진 싸움의 본능을 처리해 사회가 내전이나 무정부 상태로 퇴락하는 것을 막는 기능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란 (앞서 언급했던 [절반의 인민 주권] 저자 샤츠슈나이더가 말했듯이) “갈등을 둘러싼 갈등의 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나아가 민주정치란 (미국 정치학회와 사회학회 회장을 역임했던 립셋 Seymour Martin Lipset이 말했듯이) “갈등과 통합의 변증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사에서 공적 선택을 둘러싼 갈등은 제거될 수 없다. 모두가 동일한 의견을 갖도록 하거나 모두를 이타적 존재로 바꿀 수도 없다. 보수와 진보가 추구하는 가치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으며, 그들 사이의 불완전한 상호이해는 인간의 정치가 갖는 고질적인 요소다. 그러나 그러한 불일치와 불완전한 이해는 그것에 맞추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할 조건이지 좋은 사회로의 길을 방해하는, 단지 극복돼야 할 장애물이 아니다.
갈등을 없앨 수는 없으나 줄일 수는 있다.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는 갈등조차도 다루기에 따라서는 조정 가능한 공통의 의제로 만들 수 있다. 차이를 없앨 수는 없어도 서로에게 구속력을 갖는 정당한 절차와 과정에 합의할 수는 있다. 많은 사람이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상대 파당을 대화불능자로 규정하곤 한다. 그러나 때로 그것은 의견을 달리하는 동료 시민에게 자신이 주장하는 문제의 중요성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하는 데 있어 게으르거나 불성실하다는 것을 의미할 때가 많다. 갈등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일을 해 나가려면, 성실한 준비와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반면 갈등을 부정하면 극복하자는 비현실적 주장만 소리 높여 내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다 했다는 식이 된다.
갈등과 싸움에 대한 이상과 같은 생각을 이끈 것이 바로 정당이었다. 처음 정당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자칫 사회가 더 분열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실제로는 큰 갈등들이 정당들로 나눠 대표되면서 오히려 사회가 더 통합되고 안정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정당 간 갈등은 소란스럽긴 해도 사회를 내전으로 이끌지는 않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큰 사회 갈등일수록 정당에 의해 다뤄지게 되었다. 서구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어느 사회도 피해갈 수 없는 경로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요컨대 정당정치가 안착될수록 사회 갈등의 강도를 줄일 수 있다는 것, 그래야 사회가 더 튼튼하게 통합될 수 있다는 것이다.
5) 우리 현실 속에서 좀 더 이야기를 해보자. 최근 종편 채널이 주도하는 정치담론을 지켜보면서 그들이야말로 정치에서의 싸움을 온통 게임의 언어 혹은 이해관계나 전략의 문제로 환원하는 남다른 재능을 발휘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정치담론이 유해한 것은 그들이 단지 싸움과 숨겨진 이해관계와 파당적 전략을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민주정치 안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냉소 혹은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이유는 당리당략과 전략적 이해관계를 가진 정당들이 공적 논쟁을 잘 이끈다면 사안에 대한 명료한 이해와 더불어 공통의 이해 범위를 넓힐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아가 민주적 싸움의 절차와 규범을 준수해 구속력 있는 공적 결정에 도달함으로써 상호 조정과 협동하는 것이 서로 갈등하기만 하는 것보다 유익할 때가 많다는 생각을 키워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싸움과 갈등, 파당적 이해관계와 전략적 고려가 불가피하다고 해서, 그 때문에 정치란 늘 파당적 싸움에 골몰하고 서로 싸우기만 하는 세계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이견을 통해 배우고 서로 연결된 삶을 풍부하게 만들고 사회를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낫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민주적 전망을 폐쇄시키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치에서 싸움을 피할 수는 없으나 잘 싸울 수는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6) 정치가 결사체적 기반을 상실하고 개인화될수록 사회는 불평등해진다. 민주주의는 시민을 위한 시민의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이 많아져서가 아니고, 갈등하는 이해당사자들 사이에서 다원적 결사체들이 “사회적 균형(social equilibrium)”을 형성할 수 있을 때 좋아진다. 비정규직이든 빈곤층이든 그들이 향유해야 하는 결사의 자유와 교섭 능력이 좋아지는 것 없이, 제아무리 개인적 야심 없는 정치가를 선출하고 그들이 시민을 위한 행정을 펼친다 한들 사태가 개선되지는 않는다.
우리사회의 경험을 돌아보더라도, 그간 복지예산은 계속해서 늘었지만 빈곤과 불평등 문제는 악화됐다. 정규직으로의 전환 사례는 늘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비정규직 문제는 더 나빠졌다. 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 관련 제도도 확장됐지만 한국경제가 자유롭고 공정해지지는 않았다. 무상급식도 실시되고 학생인권조례도 만들어지고 대안학교나 혁신학교와 같은 실험이 있었지만 교육문제가 좋아진 것도 아니다.
아마 앞으로도 서민을 위하고 비정규직을 보호하고 빈곤층과 약자를 대변하겠다는 정치가들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정책의 수요자로서 이해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조직할 권리는 강화되지 않은 채 정책의 공급자가 갖는 선의만 앞세워진다면, 그것이 온정주의(paternalism)일 수는 있어도 민주주의와는 관련이 없다. 온정주의는 오히려 권위주의의 다른 얼굴일 때가 많다.
7) 이제 오늘 강의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늘 강조하는 것이지만, 다시 또 말하겠다.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자원이 결코 평등하게 분배되어 있지 않은 조건에서 시민이 개인으로 참여하고 투표하는 것에 그친다면, 민주주의에서도 소수의 사회적 강자들이 승자가 되는 결과가 얼마든지 만들어진다. 어떻게 해야 갈등하는 이익들 사이에 결사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국가 관료제와 법인기업이라고 하는 거대 조직들 속에서도 평등한 시민권이 실현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정당들이 시민 권력의 조직자이자 책임정치의 보루가 될 수 있을까?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의 최대 과제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데 있지, 시민정치니 직접민주주의니 하는 식으로 문제를 모호하게 만들 일이 아니다.
정당정치를 우습게 알기보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할지를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대의제나 정당정치의 한계를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늘 그런 식으로 현실을 회피해, 뭔가 한계도 없고 문제도 없는 완전한 해결책을 찾으려는 식이 되면 변하는 건 없다. 대의제와 정당정치를 민주적 가치에 상응하게 제대로 잘하게 하는 노력 속에서, 제도의 한계가 있다면 그것과 진짜로 대면해볼 정도로 실천하는 훨씬 더 유익한 일이다. 이 점을 다시 강조하면서, 오늘 강의를 마친다. 다음 시간에 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