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정당 정치의 원리와 역사
14강. 정당정치에 대한 도전 1 : 시민정치론
1) 14번째 시간이다. 오늘은 시민정치론이 왜 정당정치의 원리와 충돌하는지와 관련해 생각해볼 시간을 갖는다. 바로 시작하겠다.
2) 현대 민주주의는 시민의 직접지배가 아니라 “시민의 동의에 의한 정치가의 지배”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시민이 자신의 대표를 선출해 입법과 통치를 맡기는 체제이다. 그러나 이 정의만으로는 부족하다.
① 시민 각자가 나름의 선호를 갖고 있고, ② 선출직 후보들이 그런 다양한 선호를 잘 대표하고자 경쟁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정당이라고 하는 매개 조직은 필요 없을지 모른다. 시민의 참여에만 의존해 민주주의를 이론화하는 것이 낳는 이런 문제는 마치 “신고전 경제학의 일반균형이론” 안에서 기업의 역할이 부재한 상황과 유사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업 조직이 거래비용(transaction cost)을 최적화해주지 않으면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의 현실도 그러하다. 시장체제조차 경제행위의 조직자로서 기업과 노조가 필요한데, 시장체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민주주의는 말할 것도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조직과 결사의 역할 없이 시민의 참여와 대표라는 두 요소만으로 민주주의가 작동될 수 있다면, 아마 그건 전체주의에 가까운 상황으로 쉽게 퇴락할 수도 있다.
3)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두 종류의 민주주의를 생각해보자. ① 하나는 시민의 뜻을 모으는 것으로서의 민주주의이다. 보통 정치학에서는 “시민 선호 결집적 민주주의(aggregative democracy)”라고 말한다. ② 다른 하나는 시민의 선호가 정치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계발되는 민주주의이다. 이는 “시민 선호 형성적/계발적 민주주의(formative/developmental democracy)”라고 말한다.
민주주의가 시민의 선호만 반영하고 대표하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그때의 민주주의는 시장체제처럼 작동해도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면 복잡하게 정당 정치를 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시민의 의견을 물어서 결정하는 방식, 즉 여론조사로 대표를 뽑아도 되고, 정치 주식시장을 열어 개별 정치인에 대한 평가와 책임을 묻는 것이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장경제나 여론조사의 경우 행위자의 선호는 주어진 것으로 가정되지만, 민주주의의 핵심은 “시민의 선호란 정치 과정을 거치며 형성” 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한다.
인간이 만든 그간의 체제 가운데 오로지 민주주의만이 시민의 의지와 체제의 목표를 “불확정성의 원리(principle of indeterminacy)”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기에 정당성을 갖춘 절차와 과정 없이 시민의 의지나 공익의 내용이 정의될 수 없다는 원칙은 오로지 민주주의에서만 적용될 수 있다. 고정된 신민의 역할과 체제 운영 원리를 가진 군주정이나 봉건제는 물론, 공산주의 역시 억압도 착취도 없는 평등 사회를 만들겠다는 “실질적 민주주의(substantive democracy)”를 앞세워 얼마든지 “절차적 민주주의(procedual democracy)”를 무시할 수 있었다는 사실과 비교해보면, 정당 간 다원적 경쟁과 절차적 정의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의 가치는 잘 드러난다.
4) 좋은 시민이 좋은 정치를 만드나 아니면 좋은 정치가 좋은 시민을 만드는가? 플라톤이 이 질문을 제기한 이래, 정치가 인간사회에 필요한 이유를 후자에서 찾는 일은 자연스러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인간은 정치적 동물임을 말했을까? 그것은 가족이나 친족, 마을 같은 소규모 공동체가 아닌 정치 공동체, 그것을 도시라 부르든 국가라 부르든 그런 정치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 한, 인간은 목적 있는 삶 내지 윤리적으로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정치 공동체 없이 살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인간 이하이거나 인간 이상”일 거라는 것, 그래서 좋은 삶을 생각하는 인간이라면 개개인이 터 잡고 있는 공통의 사회적 조건을 좋게 만드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것이 정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민주정치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다. 정치를 통해 공적 규범과 공익의 내용이 형성되는 과정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 공익이 무엇인지는 사전에 정의될 수 없다는 것, 다양한 시민 의견 사이의 논의와 경합을 거쳐 공익으로 인정될 수 있도록 정당성을 갖춘 정치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정치는 그 나라 시민의 평균 수준에 불과하다”는 말 혹은 “시민성이 이 모양인데 뭘 더 바라냐”는 식으로 자조하거나 냉소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모두가 높이 평가하는 스웨덴의 시민성은 사민당이 중심이 된 정치의 긍정적 역할을 통해 사회가 좋아지고 복지 국가의 기초를 넓혀가는 과정을 거치며 형성된 것이지, 애초부터 좋았던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나라의 시민성은 그 나라 정치의 수준을 반영한다고 말하는 것이, 시민성을 개탄하는 것으로 일관하는 것보다 더 정확하기도 하고 실천적으로 더 유익하기도 하다.
5) 정당 없는 민주정치는 어떨 것인가. 완전 국민경선제를 하고 시민에게 공공 정책의 결정권을 돌려 준다했던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실험은 살펴볼만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결과는 어땠을까? 정당체계가 붕괴되고 포퓰리즘이 심화되고 감세에 따른 재정 붕괴가 이어지고 그 고통은 전기, 수도, 공교육 분야에서 하층의 시민들에게 집중적으로 전가된 것으로 나타났다.
공직 후보와 정책, 법안을 정당 정치의 매개 없이 시민들에게 직접 결정하게 하면 좋지 않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정당의 가장 큰 역할은 “선택을 구조화하는 것” 즉, “대안을 정의해주는 것”에 있다. 공공 정책을 시민 개개인이 분석하고 평가하고 책임 있게 결정할 수는 없다. 효과적인 판단에 필요한 지식과 정치의 선별과정을 누군가 대신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게 정당이다. 정당들이 그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연히 언론과 전문가 집단이 주도하는 여론 시장의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 여론 시장은 어느 사회든 지배적 가치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영역이다.
6) 정치에서 정당들은 시민이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정보비용을 최적화해주는 역할을 한다. (앤서니 다운스가 멋지게 설명했듯이) 정당들은 “확신의 딜레마”를 해결해주는 “합리적 지름길(rational shortcut)”을 제시해준다. 이를 통해 시민들은 과도한 정보비용을 줄일 수 있다. 정당들이 적절한 정보 처리 과정을 조직화해주지 않아서 시민 스스로 상황과 대안을 따져보고 분석해서 판단해야 한다면 당연히 시간과 정보 능력, 지식 능력이 큰 계층에게 유리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결국 정당 정치의 역할이 없다면 정보처리 능력을 돈으로 구매할 수 있는 상층에 편향적이 되거나 교육받은 중산층 편향적인 결과를 피하기 어렵다.
“욕구는 기회의 함수”이다. 좋은 정당대안 없이 좋은 시민의 역할은 불가능하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자장면만 선택할 수 있다면, 음식에 대해 소비자가 갖는 권능은 고작 완두콩 올린 자장면인가, 오이 올린 자장면인가, 고춧가루 뿌린 자장면인가와 같은 형편없는 선택 상황에 내몰릴 수밖에 없게 되듯이, 정당들이 단순화해 준 복수의 대안들이 좋은 선택의 구조를 만들어내야 그 기초 위에서 시민의 권능도 발휘된다.
7) 이런 관점에서 시민정치론의 문제를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시민 선호나 참여 중심의 접근이 갖는 문제는 다른 무엇보다도 정당과 정치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을 강화시킨다. 이는 전형적으로 “선량한 시민과 사악한 정치가(정당)”의 행위 모델을 전제로 한 접근으로, 당리당략과 이기적인 욕구를 가진 정치가나 정당의 특권을 없애고 시민에게 공천권과 정책참여권을 주고 손쉬운 인터넷을 활용해서 시민 의견을 많이 관여시키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이해방식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시민의 의식은 독립되어 존재하는 객관적 소여가 아니다. 시민의 의사 형성에 자본주의 경제체제나 국가 관료제, 언론사와 같은 거대 조직과 기구들 모두 영향을 미치려 한다. 이들과 경합해 시민 의식 형성에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할, 강하고 효과적인 조직의 권위적 역할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참여를 강조하고 개방하고 널리 시민 의견을 구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한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가 갖는 우월적 지위는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참여와 의견 형성에는 비용이 들고 여가를 필요로 한다. 참여의 문턱을 넘어 들어오는 시민 의견은 직업, 소득, 교육, 연령 등 수많은 요소로부터 불평등한 영향을 받는다. 정당 정치의 가치와 역할은 그런 불평등성을 견제하고 완화하는 데 있다.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현대 민주주의가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규범적 주장을 우리는 다음처럼 단순화할 수 있다. 정당 정치의 민주적 역할이 낮을수록 상층 편향적이고 교육받은 중산층 중심의 정치가 될 수밖에 없다. 참여의 비용을 낮춰주고 의견 및 대안 형성과 관련해 확신의 딜레마를 해결해줄 수 있도록 잘 조직된 “강한 정당이 있어야 가난한 시민들에게도 평등한 기회를 주어지는 민주 정치가 가능하다.
8) 끝으로, 쉽게 오해되는 용어 사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것은 참여(participation)와 동원(mobilization)이다.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할 때 “정치에서 참여와 동원은 백지장 한 장 차이, 혹은 참여의 다른 면은 곧 동원”이라고 배운 적이 있다. 동원을 나쁜 의미로 알고 있었기에 처음엔 이해가 안 되었지만,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다음 비로소 정치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시민들은 참여의 기회가 주어지면 당연히 참여한다. 그러니 개방만 하면 된다.” 라고 보는 것은 그야말로 비현실적이다. 앞서 말했지만, 참여도 당연히 비용이 든다. 누군가 참여의 비용을 줄여주거나, 누군가 대신 그 비용을 제공해주거나 아니면 참여가 혜택이 될 때 참여가 가능해진다. 이를 가리키는 말이 동원이다. 따라서 “동원 기능을 감당할 조직 기반이 없으면 참여도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이다. 예를 들어, 정당이 조직 기반이 파괴되어, 선거 유세 때마다 젊은 사람 몰려 있는 홍대 부근이나 대학로 부근에서 확성기에만 의존하는 정치를 한다고 해보자. 이런 경우는 아예 동원도 참여도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계속 강조하지만, 정당은 조직이 생명이다. 정당이 가난한 시민의 생활 세계 곳곳에서 강력한 동원자 역할을 해 줘야, 그들의 참여를 이끌 수 있고, 실제 그들의 생활 지킴이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말을 끝으로 오늘의 강의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