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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강. 정당은 현대 민주주의의 챔피언
 

 

 

2부. 정당 정치의 원리와 역사

12강. 정당은 현대 민주주의의 챔피언

1) 12번째 시간이다. “운동이냐 정치냐”의 문제를 다룬 지난 시간 강의가 사회운동/시민운동에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별로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본 강사가 아는 사회운동/시민운동가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정당이 중요하고 잘 되어야 함을 “격하게 지지한다!”고 말해주었다(웃음).

다만 그래도 사회운동/시민운동이 좀 더 민중적이고 정당은 중산층이나 상층 엘리트에 친화적이지 않은가를 조심스럽게 묻는 사람은 있었다. 지금까지의 우리 현실로 말하자면, 그런 의문은 당연히 가질만한 일이었다고 본다. 확실히 의원을 중심으로 말한다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어느 정도는 현실로 분명해지고 있기도 하고 앞으로 더 뚜렷해지겠지만, 정치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2) 우선 당원이나 회원과 같은 참여자 일반 내지 평균적 참여자를 기준으로 본다면, 정당이 시민운동보다는 훨씬 더 민중적인 것은 틀림없다. 문제는 이슈 중심의 시민운동과는 달리, 빈민운동처럼 이해당사자 집단 스스로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사회운동의 경우는 좀 다르다. 그렇지만 그런 사회운동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진다. 이를 이렇게 단순화해서 설명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발전할수록 공공 정책의 도움 없이 가난한 시민을 보호하기는 점점 힘들어진다. 빈민운동도 결국 정책과 제도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게 불가피하고 또 자연스럽다. 엄밀히 말하면 그 어떤 시민집단도 공공 정책의 변화를 통하지 않고는 스스로의 삶을 보호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게 민주주의다. 요컨대 민주화 이전에는 국가에 항의하는 운동이 지배적이지만, 점차 공공 정책의 효과적 통제자인 정당과 정당의 정부를 통해 정책적, 입법적 요구를 전달하고 제도화하는 방향으로의 변화는 거의 필연적이다.

3) 이해당사자 중심의 사회운동과는 달리, 공적 이슈를 다루는 시민운동은 어떨까? 시민운동의 강점은 역시 단일 이슈(single issue)에 집중할 때인데, 대개 그런 이슈는 인권이나 환경, 여성과 같이 매우 포괄적인 특징을 갖는다. 당연히 참여자들은 교육, 의식, 소득 수준이 높고 여가를 가질 수 있는 중산층을 중심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이들 공익적 시민운동의 재정 역시 처음에는 자발적 후원에 의존하게 되지만, 그 기반을 지속하기 만만치 않게 되면서 변호사나 전문가가 중심으로 소송과 정부프로그램에 대한 의존이 심화된다. 이상과 같은 경향은 어느 사회에서나 나타나고, 그런 점에서 시민운동 역시 정당보다 더 민중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시민운동과 관련해 한 가지 더 살펴봐야 할 것은, 한국의 경우 “참여연대”처럼, 다루는 이슈가 단일하기보다는 종합적인 시민운동이 활발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변호사 등 전문가 집단의 역할이 주가 되기보다는 회원과 활동가가 중심이 된다는 점도 특별하다. 활동의 범위도 단순히 의제 형성 및 압력 전달에만 있지 않고, 때로 입법안을 만들고 정당 및 정부와 교섭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 점도 특별하다.

이를 “시민운동의 한국적 특이성”으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관점을 달리해 볼 수도 있다. 즉, 우리의 정당들이 사회적 기반을 갖지 못한 것 내지, 정당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해서 생긴 일로 보는 것이다. 그럴 경우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는 사실상의 정당 내지 준-정당으로 정의될 수 있다. 유럽의 기준에서 볼 때 참여연대는, 공직 후보를 공천하고 선거에 출마시키는 기능을 제외하면, 정당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지역 조직이 약해서 그렇지, 중앙의 조직을 기준으로만 말하면 독립된 건물도 있고 급여를 받는 상근자의 규모도 상당하다는 점에서 사실 놀라운 조직이다.

결국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참여연대는 다른 시민운동과 경쟁하기보다는 정당과 경쟁하는 특별한 시민운동이다. 정당이 제 기능을 할수록 영향력이 약해지거나, 반대로 정당으로 전환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정당에 준하는 시민운동이자, 넓은 의미에서 한국 정당정치의 특성을 보여주는 한 요소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한마디로 말해 시민운동으로서의 참여연대라는 좁은 시각에서만 이해할 일이 아니며, 그런 운동이 잘 된다고 해서 꼭 좋은 일만도 아니라는 점을 같이 고민해주었으면 한다.

이상 본 강사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했지만, 과연 참여연대 사람들 스스로는 동의하지 않을 것 같다(웃음). 어쨌든 관찰자의 입장에서 자유롭게 생각해 본 의견이니 관용해주지 않을까 싶다.

4) 자 이제 예정된 강의 주제로 들어가자. 오늘은 정당정치를 빼고는 현대 민주주의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살펴볼 생각이다. 바로 시작하겠다.

정당은 그 자체로 매우 근대적인 현상이다. 17세기 이전까지 정당(party)이 정치적인 용어나 개념으로 사용된 적은 없다. 달리 말하면 현대 민주주의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정당은 그 운명을 나란히 함께 했다는 것이다. 처음 정당이라는 정치 용어가 등장한 뒤에도 오랫동안 정당은 긍정적으로 수용되지 못했다. 정치철학의 고전에서 완전히 누락되어 있는 주제가 있다면 단연 정당이다. 현대 정치철학에서도 정당에 대한 논의는 너무나 빈약하다.

어느 나라의 민주주의에서든 정당은 가장 중요한 정치현실이면서 가장 많은 불만과 냉소의 대상이다. 그러나 인간의 현실에서 중요한 주제들은 한결같이 논란과 갈등의 대상이 아닌가 한다. 인간 삶에서 사랑이 중요한 만큼 때로 애증과 고통의 문제가 아닐 수 없고, 친구란 단어도 정치학 용어의 역사에서는 동맹 내지 우방 등 전쟁 관련 뜻으로 많이 쓰였듯 말이다. 수강자 여러분은 어떤가?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정당을 이론으로나 역사 해석, 나아가 현실 설명에 있어서도 자신 있게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정치철학자들도 잘 하지 않으려는 엄청난 일을 지금 우리가 하고 있다(웃음).

5) 우선 민주주의와 정당 정치가 얼마나 깊은 상관성을 갖는지 살펴보자.

① 첫째, “민주주의는 복수 정당체계”다. :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란 하나의 정당이 아니라 서로 경쟁하는 복수의 정당들이 이끌어가는 정치체제를 가리킨다는 사실이다. 내가 좋아하는 정당만으로 정치가 이루어지고 내가 반대하는 정당들 모두 사라진다고 해서 즐거워할 일이 아니다. 그건 민주주의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짧은 정의는 “복수 정당체계”에 있다.

정당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민주주의라고 하지는 않는다. “일당제” 내지 “당-국가체계”도 분명 매우 근대적인 정치체제이지만, 민주주의라고 하지는 않는다. 사회가 어느 정도만 분화되면, 정당만큼 사회를 동원하는 데 더 강력한 수단은 없다. 군부독재도 전체주의도 정당을 통해 통치했던 사실은, 그래서 중요하다. 어찌되었던 정당이 있다고 민주주의는 아니라는 점, 적어도 2개 이상의 정당들 사이의 실질적인 경쟁이 있어야 민주주의라는 사실이 이제 분명히 이해되었다고 치고 다음 문제로 넘어가자.

② 둘째, “민주주의는 정당이 번갈아 집권하는 체제”이다. : 복수정당체계로서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인상적인 정의는 “오늘의 여당이 내일의 야당이 되고, 오늘의 야당이 내일의 여당이 되는 정치체제”라고 하겠다. 복수의 정당들 간의 경쟁은 있되, 동시에 하나의 정당이 늘 계속해서 확실히 집권한다면 분명 민주적 요건은 충분치 않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인도의 “국민회의당”이나 멕시코의 “제도혁명당”의 사례처럼 선거를 하나마나 같은 당이 집권한다면, 이들을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하긴 어렵다. 전후 장기집권 했던 일본 자민당 일당우위체계의 사례나, 4개정파가 장관직을 나눠 집권함으로써 사실상 정권교체가 없는 스위스의 사례처럼 정당 간 경쟁의 의미가 약한 경우도 생각할 점이 많다. 이를 민주주의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낮은 경쟁성은 분명 민주적 결핍 요인이 아닐 수 없다.

요컨대 민주주의라면 정당 간 경쟁의 결과가 확정적이면 곤란한데, 그런 의미에서 폴란드 출신 정치학자 애덤 셰보르스키(Adam Przeworski)가 민주주의를 “불확실성의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 of uncertainty)”라고 부르고, 어느 정당이 승리할지가 고정적이지 않은 정당체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설득력이 있다.

③ 셋째, “민주주의는 정당 간 평화적 정권교체”를 가능케 한다. : 정권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정당 간 평화적 정권교체”는 인간의 역사에서 놀라운 변화이자 거대한 진보가 아닐 수 없다. 근대 이전의 정치변화는 기존 통치 집단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폭력이 동반된, “정변”을 통해 이루어졌다. 같은 군주정 안에서 같은 혈연관계를 갖는 집단 간 정권교체마저도 엄청난 피를 불러왔다.

더 폭력적이었던 것은 정체(polity; 政體)의 변화를 동반할 때였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와 같이 자유 시민이 있었던 정치체제에서도 민주정이 과두정이나 참주정으로 바뀌거나 참주정과 과두정, 민주정이 서로 바뀔 때마다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렇기에 현대 민주주의가 안착되기 이전의 정치사란, 19세기 초에 활동했던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니 도살장 같았다”라고 한 말에 가까운 현실이었다. 현대 민주주의가 무력을 독점한 군을 병영 안에 확실히 묶어두고 “문민통치(civilian control)”의 우위를 제도화한 것, 그 기초 위에서 권력의 교체가 정당들 사이에 평화적으로 관리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현대 민주주의가 일궈낸 가장 대단한 성취가 아닐 수 없다.

6) 정당 정치가 가져온 유익한 효과를 하나 더 이야기해보자. 그것은 정치적으로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평화의 효과를 갖는다는 데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정당들 간의 싸움은 사회를 내전으로 이끌지 않는다. 계층, 지역, 인종, 종교, 문화 등 제아무리 강력한 사회적 갈등이라도 민주적 경쟁이라는 틀 안에서 묶어둘 수 있는 것은 정당 정치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이 또한 현대 민주주의의 놀라운 성과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본 강사는 아무리 현실의 민주주의가 형편없는 정당 정치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현대판 귀족정의 논리라 할 수 있는 “전문가주의”나 “비정치적 행정주의”, 현대판 군주정의 논리라 할 수 있는 “국민후보론”이나 “시민정치론” 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이 대목에서 수강자 여러분 가운데 당혹해 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당파적 열정에 휘둘리지 않는 전문가 내지 선한 통치자가 무당파적으로 공익에 헌신하고 오로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것, 그것이 왜 문제라는 것일까? 그것도 군주정이나 귀족정의 원리라니?

솔직히 말해 본 강사는 우리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말하고 좋은 정치를 희망하지만, 실제로 그 내용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다원주의적 정치가 아닌 선한 군주정이나 공익에 헌신하는 엘리트주의와 구분되지 않을 때가 많다. 정치에 있어서 군주정이나 귀족정의 이상적 비전은 강력하다. 그런 비전은 옛이야기만이 아니라 현존하는 도전이자, 다양한 변형 논리를 통해 늘 재생산되며, 엄밀한 의미에서 현대 민주주의 역시 부분적으로 귀족정과 군주정의 요소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수강자 여러분은 민주주의자인가? 민주주의자라면 어떤 의미에서 민주주의자이고, 공공심을 갖는 전문가들이 파당적 갈등 없이 최선의 공익을 실천하겠다는 귀족정의 논리나, 국민 모두의 이익을 대변하는 선한 통치자가 되겠다는 군주정의 논리와 대비해 민주정의 우월성을 어떤 방법으로 옹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14강, 15강, 16강에서 살펴볼 텐데, 수강자 여러분 스스로도 숙제처럼 풀어보길 바란다.

7) 끝으로 정당 정치가 “현실주의적 최선”을 위한 길을 연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상주의적 접근과는 달리, 이기적인 생각과 당파적 이해관계에 매몰된 사람이 정치를 한다 해도, 나아가 설령 악마가 정치를 한다 해도 민주정치의 규범에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접근이 훨씬 더 유익하고 필요한 일일 때가 있다. 정치학이 갖는 최고의 가치가 있다면 바로 이 지점에 있지 않나 싶다.

민주적 정당 정치는 옳은 것은 하나가 아니라 복수라는 다원주의, 인간의 행위를 이끄는 동인에는 반드시 선한 것만 있지 않다는 현실주의의 기초 위에서 서 있다. 그렇지 않고 오로지 선의에 의존해 체제를 운영하고 최고의 도덕률을 실현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과 인간의 정치 현실을 다룰 수 없게 하고 결과적으로 정치가 갖고 있는 위험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8) 인간의 역사에는 이런 사례들이 즐비하다. 16세기 초의 급진적 종교개혁운동의 한 사례로서 북독일의 도시 뮌스터에서 있었던 재세례파들의 실험이 하나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재세례파는 죄를 고백하고 신앙 안에서 다시 태어나겠다는 것을 자각한 사람, 즉 일정 나이 이상의 성인에게만 구원의 세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유아 세례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들 가운데 일부가 1534년 뮌스터 시정부를 장악해 새로운 천년왕국 수립을 실천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뮌스터를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보고 대거 이주해오기도 했다.

문제는 이들이 인간의 이기적 욕구를 배제하고 오로지 불편부당한 최고의 도덕적 기준에 따라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현실의 체제를 운영하려 했다는 데 있었다. 구원의 결과로 주어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삶이 강조되다보니, 현실의 인간이 가진 한계는 모두 있어서는 안 될 육신의 지배이자 죄악이 되었고 폭력으로라도 억제되어야 했다. 화폐도 폐지했고 어떠한 생산자 집단도 단체를 결성할 수 없었다. 재산공유제가 강행되었고, 성서를 제외한 일체의 서적과 문서가 불태워졌다. 약 7,500명 정도가 모여서 시작한 자치의 실험이 역설적이게도 시간이 지나면서는 가장 폭력적인 공포정치로 발전한 것이다.

신교와 가톨릭 모두가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해 군대를 동원하자 뮌스터 시는 포위망 속에서 고립되게 되었는데, 굶주림과 공포정치 속에서 내부혼란은 극심해지고 폭력의 행사는 일상화되었으며, 결국 1535년 6월 25일 뮌스터 시는 무력으로 제압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 뮌스터 시의 실험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희생되는 비극으로 끝났다.

9)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적 최선이 있고 그것이 하나의 유일한 원리에 의해 인도될 수 있다고 보면, 이상하게도 실제 정치는 사나워진다. 그런 이상이 실현될 수 없는 인간 현실에 대해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태도 내지 공격성만 늘기 때문이다. 정치를 통해 인간 사회를 선과 악의 싸움으로 이끄는 것도 위험하다. 그건 정치를 성전(聖戰), 즉 성스러운 전쟁으로 만드는 일이 된다. 제아무리 바람직한 신념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의 이기적 욕구와 병행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이런 정치관의 뒷받침 없이 그 어떤 공동체의 평화도 질서도 유지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그러한 정치관 위에 서 있고 이를 제도화한 것이 정당 정치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윤리적으로 옹호하는 일? 어렵다. 현대 민주주의를 도덕적으로 옹호하는 일? 훨씬 어렵다. 그 가운데서도 정당 정치를 규범적으로 옹호하는 일? 더 더욱 어렵다. 지금 우리가 그런 어려운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 보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마친다. 다음 시간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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