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왜 정당인가
5강. 우리의 정당 정치, 왜 나빠졌을까
1) 다섯 번째 시간이다. 지난 시간 강의에 대해 이런 질문을 받았다. “정당들 간의 ‘체계’와 한 정당 내부의 ‘조직’이 서로 다른 원리로 작동하고 따라서 서로 다른 원리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하지만, 조직과 체계가 너무 경직되게 구분된 게 아닐까? 정당 조직 안에도 체계의 문제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옳은 생각이고 좋은 지적이다. 조금 학문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겠지만, 워낙 중요한 문제라서 간단하게라도 답변을 하고 시작하겠다.
첫째, 조직 내부에도 기능과 체계의 문제가 있다. 그렇지만 그 전에 분명히 해 둘 것은, 체계는 조직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이다. 정당론에서 과거 오래 전에 있었던 중요한 논쟁은 “하나의 정당으로 민주주의는 가능한가”를 둘러싼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일당제도 그 한 정당 안에 다원적 요소를 삽입할 수 있다면, 민주주의 체제의 한 유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나의 정당으로 이루어진 체계, 즉 “일당제 민주주의”는 불가능한 꿈일까? 그 정당 내부를 민주화하고 다원화하면 더 안정적이고 일관된 민주주의 체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일당 체계” 내지 “일당제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는 모순이다. 민주주의는 복수의 정당들 “사이”에서의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지, 제아무리 한 정당을 개방적이고 다원적인 조직으로 만든다 해도 그 하나의 정당만으로 민주주의 체제가 될 수는 없다.
둘째,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정당 조직 내에 존재하는 체계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당연히 당내 다양한 기능을 체계화해야 하고, 내부의 여러 이견과 다원적 요구를 수렴하는 “당내 민주주의”를 확대해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당내 민주주의를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하나의 정당은 체계보다 조직으로서의 측면이 우선이다. 따라서 조직으로서의 측면이 단단한 기반을 갖는 것에 비례해서, 그 내부의 이견과 다원적 요구를 수렴할 수 있는 체계의 능력을 발전시켜야지, 그 역이 될 수는 없다. 당내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민주주의는 정당체계 차원에서 작동하는 원리이고, 당내 조직의 차원은 “민주성”보다 “유기성”이 먼저다.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조직의 기반 위에서 점차적으로 민주적이 되고 개방적이 되고자 해야 한다. 민주성과 개방성은 당 조직이 유기적으로 기능하는 데 기여해야 하는 “하위 가치”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당 조직이 더 잘 기능하도록 하기 위해 당내 민주주의를 해야지, 당내 민주주의를 앞세워 정당 조직을 망가뜨리는 것은, 그야말로 정당 이론에 반하는 것이자 현실에서도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이상과 같은 정당론의 원리를 우리 현실 속에서 살펴보자. 오늘은 먼저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우리의 야당이 “정치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와 정당의 문제를 잘못 다루어왔음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2) 그간 야당이 실천했던 민주주의를 특징화하라면, 솔직히 말해 그건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였다고 답하겠다. 기업이 외부 신용평가기관의 주도로 시장가치와 경쟁력을 높이고자 구조조정을 한 것이 결과적으로 경제구조를 나쁘게 하고 노동자의 삶의 기반만 파괴하는 일이 많았듯이, 야당 역시 정당 이론과는 아무 상관없이 신자유주의적 개방의 논리로 개혁을 추진한 결과 정당 조직은 망가졌다. 그렇다고 정당체계로서의 민주주의가 좋아진 것도 아니다. 결과적으로 정당의 역할이 약해지면서 시민들이 정치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는 일만 보게 되었을 뿐이다.
관치경제를 자유 시장 원리에 바탕을 둔 세계화 추세에 개방하듯이,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그럴듯한 논리로 정당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말해 “여론이 지배하는 정치”였다. 여론조사가 무소불위의 힘을 갖게 되면서 시민을 구성하는 계층과 집단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고 무정형의 “국민여론”만 부각됐다. 여론조사는 참조할 만한 “소극적 지식”일 뿐 그것이 시민의 의사결정을 대신할 수 없음에도, 일이 그렇게 됐다.
민주주의에서 정당들은 시민의 의사를 이념과 계층적 특성에 따라 서로 나눠서 대표하게 돼 있다. 그게 민주주의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의 지도부와 공직 후보자를 당의 대의기구와 당원에 의해 선출하는 것을 무슨 잘못된 죄악처럼 스스로 취급했다. 여론조사와 함께 “국민”경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렇게 해서 정당과 정치인의 인기가 “정치시장”에 상장된 기업의 주가처럼 유동하는 동안 당원은 소외되고 시민은 소비자가 되었다. 당연히 권력은 여론 동원 능력을 가진 사람이 지배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급기야는 정치 경험이 없는 것을 정치가의 좋은 자질로 자랑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게 뭔가.
3) 1987년 민주화된 이후 2015년 현재까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했던 정당만 120개 가까이 된다. 의원을 보유했던 정당도 40개가 넘는다. 놀라운 일이다. 그 대부분은 기존 정당이 파산해 재편하거나 이름만 바꾼 경우다. 정당들은 이름을 바꿀 때마다 “국민의 여망에 부응”해 “백년 가는 정당”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을 배출한 새정치국민회의는 이후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대통합민주신당·통합민주당·민주당·민주통합당·새정치민주연합으로 바뀌었는데, 이제 쓸 만한 당명이 뭐가 더 남았을까가 궁금하기조차 하다.
정치인 교체도 단연 세계 최고다. 선거 때마다 평균 절반이 바뀌었다. 변호사·판사·검사·교수·시민운동가·기업엘리트·고급관료·의사·약사·건축가·배우가 들어왔다. 그러나 정당은 계속 파산을 거듭해 왔다. 냉정하게 말하면 그간의 인물교체론 내지 “물갈이” 주장은 당 밖 엘리트들의 정치 진입 욕구를 정당화해 주는 일종의 “엘리트순환론” 이상은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당원인 적이 없었다. 그런 그들을 심사한 당의 공천심사위원들도 거의 대부분 당원이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공천을 받고 국회의원이 되어 이런저런 계파나 정파 사이에서 기회주의적으로 유동해 온 것이 그간의 정치 신인들이었다.
정당이 무슨 기업도 아닐 텐데 외주 주듯 공천심사하고 구조조정하듯 인물교체를 하는 것도 우스꽝스럽지만, 당의 얼굴인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 역시 무슨 인터넷 쇼핑몰이나 가수 경연에서 승자 결정하듯 “흥행”에 성공했느니, 안 했느니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게 끝이 아니다. 선거 전에는 정당 이름만 바꾸는 신장개업으로 시민을 우롱한 뒤에도, 책임 있는 정치 주체는 보이지 않는다. 선거운동은 사적 인맥집단인 캠프로 나뉘어 치러진다. 선거 전략 역시 당이 아니라 사기업인 선거전문 기획사가 주도한다. 고비용의 여론조사와 광고 등 자본집약적 운동방식에 대한 의존은 심화돼 과거 영세 인세업자에게 의존했던 홍보물 인쇄조차 사라졌다. 선거 후에는 승자의 캠프가 청와대가 되고 정부가 되어 집권당과는 별 상관없이 인사와 정책을 전횡한다. 그리고 집권 후반에 들어서 대통령 측근들이 줄줄이 사법 처리되고 대통령의 안위마저 검찰이 좌우하게 되면, 대통령과 거리두기가 시작되고 다시 선거가 다가오면 정당들의 신장개업이 악순환처럼 반복된다. 매년 정치개혁을 하고 매년 제도를 바꿨는데도 결과가 이렇다. “세계 유례없는 정치혁명”이라던 모바일투표 도입은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을 위기로 빠뜨린 것 말고 그 무슨 혁명적 결과를 가져왔는가.
4) 병의 원인을 제거한다며 자해할 수는 없듯이, 민주주의를 잘하고 정당이 잘 되기 위해 개혁해야지 민주주의를 없애고 정당을 작동 불능으로 만들기 위해 개혁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야당 안에서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한국의 야당은 거의 매년 “혁신 단행!”을 했다. 그렇지만 당 체질은 계속 나빠졌다. 혁신위, 비대위가 일상화되다시피 했지만, 잘못된 정치를 따져 물을 대상만 모호해져 책임정치로부터 멀어지기만 했다. 혁신을 주도한 사람들이 행복해진 것도 아니다. 그들 역시 뒤이은 혁신에 또 다른 희생자가 되었다.
그간의 야당 정치를 요약하면 이렇다. 시끄럽고 격렬한 다툼은 계속되고 외양의 변화는 잦다. 그런데 그런 소란이 지나면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낡은 구조가 건재함을 과시한다. 그 사이사이에 비극적으로 퇴장한 정치인들의 목록만 즐비하다. 그런 무덤 위에서 내일은 자신이 제물이 될 거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지극히 단기적인 열정을 동원하는 데 매몰되어 있는 사람이 많다. 정당 내부로부터 진지한 공적 토론이 전개되고 사회적으로 확산되기는커녕 여론에 끌려 다니기 급급하다. 당내 구성원들 사이에 협력의 기반도 약해졌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연결되어 있는 추종자들의 반응을 관리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는 정치가는 많다. 개인 소통은 좋아졌는지 몰라도 조직으로서 정당은 공허해지고 있다. 회의나 모임에 나와서도 테이블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려 자신이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다는 단문 메시지 올리는 사람도 많다. 상황이 이런데 무슨 백년 가는 당을 말할까. 그간 야당의 정당 개혁은 스스로를 자해한 것에 다름없었다.
민주주의란 ‘야당이 있는 정치체제’라 할 수 있다. 이때의 야당이란 반대당(opposition party)의 역할을 하면서 향후 집권당이 될 대안 정부(alternative government)를 뜻한다. 오늘의 야당이 내일의 여당이 될 수 없는 체제, 혹은 여당으로 대표되지 않는 사회적 요구를 야당이 효과적으로 조직하지 못하는 체제를 정치학에서는 “제한된 다원주의’(limited pluralism)”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에서 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는 기간을 거치면서 우리는, 정권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야당 스스로의 무능력에 의해 유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을 보게 된다. 야당에 실망해 정치로부터 이탈하거나 “집권은 무슨, 야당이나 잘하라”는 사람들도 많다. 야당이 정당다운 정당의 역할을 못하는 한 민주주의라는 ‘형식’ 안에서도 얼마든지 권위주의 시대의 ‘내용’이 반복될 수 있다.
5) 그렇다면 대체 정당은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가. 앞으로의 강의를 통해 계속 강조하겠지만, 최소한 다음과 같은 조건은 갖춰야 한다는 것 정도는 확인해 두고 싶다. 우선 정당은 여러 차원을 갖는다.
6) 첫째, 정당은 이념 내지 세계관의 조직자이다. 영국의 보수당을 이끌었던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말했듯, “정당이란 조직화된 의견(an organized opinion)이다.” 정당으로 조직된 사회적 의견이 두 개면 양당제, 그 이상이면 다당제라 부른다. 수많은 이해관계와 열정이 넘쳐나는 사회 속에서 이념 없이 시민들을 넓게 대표하고 조직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야당들은 어떤 사회적 의견의 조직자들인가? 민주당이 발전시키고 있는 가치와 비전은 무엇인가? 제발 더는 당명을 바꿔서 신장개업하고 공허한 구호를 앞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경제정책 하나를 말할 때마다, 교육정책 하나를 검토할 때마다, 사회정책 하나를 새로 만들 때마다 체계화가 가능한 가치와 논리를 축적해 가길 진심으로 권하고 싶다. 그럴 때만이 친노-비노니 하는 ‘불모의 흥분’ 대신, 내용 있는 정당으로의 길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7) 둘째, 정당은 사회갈등의 통합자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모두 자본주의 경제체제 위에 서 있다. 아무리 지역균열, 세대균열, 종교 및 문화 균열 등을 말한다 해도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사회경제적 균열만큼 크고 지속적인 갈등요인은 없다. 그 핵심은 노동 문제이다. 노동 문제가 나쁘면, 그 어떤 인간 사회도 공동체적 기반을 튼튼히 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과 협동해 땀 흘려 일하는 것의 보람을 느낄 수 없는 사회에서 튼튼한 경제의 전망을 가질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민주당의 노동관은 온정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낡은 계급투쟁적 관점에서 노동문제를 바라보는 것도 잘못이지만, 온정주의도 그에 못지않게 유해하다. 오래전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강조했듯, 온정주의는 권위주의의 다른 얼굴일 뿐이다. 민주주의 발전에 유익한 역할을 하는 정당이냐 아니냐를 판단함에 있어 기초적인 기준은, 온정이 아닌 시민권의 관점에서 노동 문제를 통합해내는 실력에 있다고, 본 강사는 본다.
8) 셋째, 정당도 조직이다. 조직이라면 응당 의사결정의 구조가 좋아야 한다. 그래야 책임성이라는 민주적 원리를 실천할 수 있다. 그러려면 리더십이 안정돼야 한다. 정당의 리더십은 대중권력의 요체이다. 리더십이 약하면 계파와 파벌은 당 조직을 농단하는 도당이 된다. 그렇게 되면 집합행동의 딜레마는 극대화되고, 어떤 조직이든 꼭 필요한 “신뢰의 제도화”를 이룰 수가 없다. 당의 분열과 분란은 필연적이다. 안정된 리더십이 기능해야 파벌과 계보도 당내 다원주의의 기반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려면 위로는 리더십이 아래로는 대중적 기반이 튼튼해야 한다. 적어도 시·도당 차원에서는 정당이 시민생활의 조직자가 돼 주어야 정당도 민주주의도 산다. 그래야 지방자치도 의미가 있다. 당비 내는 당원이 중심이 되는 정당이 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국가 예산에 의존하는 정당이라면, 유사 공기업이라고 할 수는 있겠으나 시민의 자발적 정치결사체라고 할 수는 없다.
9) 제대로 된 야당이 없으면 시민주권은 공허한 말이 된다. 사람들이 민주당의 미래, 진보정당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면서도 관심을 끊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누구든 제대로 된 정당 만들기에서 성과를 낼 때 한국 민주주의는 멈췄던 걸음을 이어가게 될 것이다. 이상으로 오늘의 강의를 마친다. 하고 싶은 비판을 자유롭게 쏟아놓고 나니 시원하긴 하다. (좀 미안한 마음에) 민주당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