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왜 정당인가
2강. 부분(들)의 미학
1) 두 번째 시간이다. 첫 번째 지상 강의를 읽은 사람들로부터 문체가 딱딱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휴우?(한숨). 구어체 문장을 의식적으로 써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잘 될지는 모르겠다. 암튼 노력하겠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복수의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는 정당 정치의 유익함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국민총화단결”을 주장하면서 모두가 “국가와 국민을 앞세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렇게 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사회를 오히려 더 분열시키는 일이 되는지를 생각해볼 시간이 된다면 좋겠다. 서로 다른 이념과 가치를 가진 정당들이 경쟁할 때 사회가 더 넓게 대표되고 더 깊이 통합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한다.
본 강사는 197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고, 그때는 모두가 총화단결을 위해 헌신하자는 다짐을 했었다. 그때의 기준으로 본다면, 부분과 이견을 중시하는 생각으로의 전환은 거의 혁명적인 일에 비견할만하다. 오늘날에도 우리 사회는 “국가주의”가 여전히 강한 데, 그런 기준에서 보더라도 부분과 이견을 강조하는 본 강사와 같은 생각은 분열주의로 간주될지 모른다. 사실 본 강사는 국가라는 말이 많이 사용될수록 민주정치는 어렵다고 보는 입장이다. 미국이나 영국처럼 국가관료제가 강력하게 제도화되기 이전에 민주주의를 시작했던 나라들은 국가(state)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정부(government)라는 말을 쓴다. 미국의 경우 state라고 하면 주(州)를 가리키는 경우가 일반적이지, 우리처럼 “시민사회로부터 자율적인 충성의 실체”로 인식되는 정도는 매우 낮다. 아무튼 복수의 정당이 정부 운영권을 두고 경쟁하는 정치가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오늘 강의만으로는 충분히 말할 수는 없을 것이기에, 앞으로도 계속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해 나가겠다.
2) 정당은 정치철학자들에게 가장 홀대받았던 주제다. 정말 그랬다. 정당을 다룬 사람도 별로 없지만 정당을 긍정적으로 말한 철학자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가? 없는 것은 아닐지 모르나 그런 사람들 역시 정당을 정말 마지못해 인정했을 뿐이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년 - 1776년)과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1751년 - 1836년),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년 - 1859년)이 대표적인 데, 정당의 태동기에 활동했던 그들은 정당을 자유로운 사회라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할 “필요악”으로 보았다.
정당이 필요악에서 “민주주의에 필수적인 중심 제도”로 자리 잡기까지는 매우 긴 시간이 걸렸다. 정당(party)의 어원은 ‘부분’을 뜻하는 ‘part’에서 온 것인데, 누구든 공공선, 일반의지, 전체이익을 말하며 자신의 선한 의지를 드러내고 싶어 하지, 파당과 부분이익을 현실로 인정하고 또 그것의 긍정적 효과를 이론화하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발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파당적 갈등 때문에 큰일”이고 “당리당략이 끼어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은 정당이 민주정치의 중심적 위치로 발돋움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지배 담론으로 작용할 때가 많았는데, 이런 생각을 넘어서지 않는 한 민주정치의 발전은 어렵다.
3) 정당을 긍정한다는 것은 “부분(들)의 미학”을 다루는 일에 비견될 만하다. 옳은 것은 하나가 아니라 복수이며, 그런 복수의 부분(들) 내지 복수의 가치(들) 사이의 차이가 인정될 때 전체도 그 내용이 풍부해진다. 그것에 반대되는 태도는 “일원주의(monism)” 내지 “옳은 것의 전체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전체를 위한 것은 옳고 또 그런 옳은 것은 하나이며, 전체의 선(善)을 위해 모든 부분이 존재해야 한다면, 그것의 궁극적 지향은 “완전함에 대한 숭배” 내지 앞서 말한 총화단결(總和團結; Gleichschaltung)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신이 아니며, 그렇기에 누구도 인간의 완전함을 전제할 권리가 없다는 전제 위에서 정치와 민주주의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아무리 뛰어난 사람이 있고 또 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정치체제를 운영하는 것과 관련된 궁극적 판단의 문제는 “보통의 평균적 시민(ordinary people)"의 한계 위에서 논의되고 결론이 내려져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선악의 인간론을 말하며 좋은 인간임을 과시하려는 “착한 정치론” 내지 “도덕주의적 우월론자”들은 정당을 냉소한다. 인간은 선한 요소와 함께 악마적 요소도 갖고 있음을 직시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좀 더 선한 의지가 작용하고 좀 더 바람직한 사회적 결과를 낳을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사람이라야 정당을 부여잡는 일을 덜 두려워한다, 그런 사람만이 정당을 민주주의의 중심 기관으로 생각하고, 이견을 갖는 것을 시민 됨의 권리로 인정하며, 그런 이견들의 다원적 기초 위에서 사회를 좀 더 낫게 움직여갈 방법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4) 결국 정당은 “다원주의”의 기초 위에서만 작용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기에 근대 이전 일원주의적 사고가 지배하던 시기에는 정당은 물론, 그 어떤 이견 집단 내지 조직조차 긍정될 수 없었다. 인간의 역사에서 집단 내지 조직을 결성할 자유를 뜻하는 “결사의 권리”가 인정된 것은 18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 그 뒤에도 정당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당을 인정한 철학자들도 기껏해야, “없앨 수만 있으면 좋겠지만 없앨 수 없는, 자유의 비용”으로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정당이 민주정치의 중심 제도로 받아들여진 것은 길게는 19세기 말, 짧게는 2차 대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우리사회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솔직히 아직도 우리는 결사의 자유를 충분히 누리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지난 해 헌법재판소의 정당 해산 결정은, 진보당을 전혀 지지할 의사가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다는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생각이 다르거나 괘씸하다고 해서 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기 시작하면, 민주주의는 존립의 기반을 점점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정당을 조직하고 지지하고 참여하는 것이 시민이 누릴 자연스러운 권리이자 자유로 자리 잡는 일은 결코 간단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곧 현대 민주주의가 자리 잡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만큼 민주주의와 정당 정치는 역사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는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강의 내내 강조해서 말하려 한다. 아무튼 생각과 의견, 신념을 달리 하는 사람과 집단으로 구성된 사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고, 그런 차이와 이견이 사회를 반드시 내전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며 다루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사회 통합과 번영에 기여할 수 있다는 관념을 갖게 된 것은, 인류 역사에서 놀라운 성취 가운데 하나가 아닐 수 없다.
5) 한 가지 오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말해 둘 것이 있다. 다소 이론적인 이야기라 어렵게 느껴지면 부담 없이 뛰어 넘어도 좋다.
6) 앞서 본 강사가 “다원주의(pluralism)”라는 표현을 통해 생각의 차이나 이견 집단의 존재를 관용하는 가치관이나 태도를 말했지만, 사실 그보다는 좀 더 이론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를 간단하게마나 살펴보고 넘어가고자 한다. 정치학의 주제로서 다원주의는 크게 세 갈래로 발전해 왔다고 볼 수 있다.
① 하나는 “이익집단 다원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이는 다양한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들의 존재와 활동, 영향력에 주목해 “누가 공공 정책을 지배하는가(who governs?)”의 문제에 접근하는 분야이다. 한마디로 말해 사회의 다원적 이익의 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에 따라 정부 정책의 내용과 방향이 결정된다는 전제를 갖는 것이라 하겠다. 이에 대한 비판은 여러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우선 이익집단 다원주의 이론이 형성되는 초기 단계에서는 엘리트론 내지 마르크스주의자로부터 공적 의제를 통제할 수 있는 소수의 권력 집단과 지배계급의 영향력을 경시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 뒤에는 국가와 이해당사자의 유기적 역할을 강조하는 코포라티즘(corporatism; 노사정조합주의라고 번역할 수 있는) 이론의 도전에도 직면했다. 이러한 비판과 도전에 대응하면서 다원주의 내부에서도 경제적 자원의 불평등 문제에 초점을 두는 "신(新) 다원주의(neo-pluralism)"로 진화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다원주의의 문제는, 공공 정책을 다양한 이익집단들이 발휘하는 상호 교차적 압력 활동의 벡터(vector) 값처럼 이해함으로써 정치를 사회 집단의 이익 요구에 대응하는 수동적 관점으로 이해한다는 문제가 있다. 나아가 이익 요구의 범위에 제아무리 운동을 통한 요구나 공익 집단의 역할을 포함한다 해도, 사회집단 중심의 다원주의로는 불평등의 문제를 개선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도 본다. (중하층의 요구에 가장 민감한 조직은 정당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절반의 인민주권』저자인 샤츠슈나이더(E. E. Schattschneider)가 매우 단호하게 지적했듯, 이런 종류의 다원주의에서는 상층편향적인 결과를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② 다른 하나는 “입헌적 다원주의”라고 불릴 수 있는데, 넓게 보면 헌법을 통해 사회의 다양한 이해와 요구를 통합하려는 접근이라고 할 수 있고, 좁게 보면 입법-사법-행정으로 나눠진 국가권력의 부서들 사이에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어떻게 부과할 것인가의 문제에 초점을 두는 접근이라 할 수 있다. 늘 논란이 되어 온 “개헌론”도 넓게 보면 입헌적 다원주의에 속할 수 있고, 고전 정치철학에서 중시했던 “혼합 헌법 내지 혼합 정체(mixed polity)", 즉 군주정과 귀족정 그리고 민주정의 장점을 결합하는 접근 역시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입헌적 다원주의 역시 정치를 ”입헌적 구상“에 의해 좌우되는 종속변수처럼 접근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전간기의 독일 ”바이마르 헌법“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좋은 헌법에도 불구하고 당시 독일 정치는 과도하게 양극화된 정당들로 인해 나치즘을 불러왔다. 전후 독일 정치가 안정적으로 발전한 것 역시 ”기본법“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본(Bonn) 헌법“ 때문이 아니라, 기민당과 사민당이 중심이 된 정당 정치가 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경우든 좋은 정당의 뒷받침이 없다면 제아무리 입헌적 다원주의 기획이 훌륭하다 해도 현실에서는 실현되지 못했다. 국가권력의 부서들 사이에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구현하는, ”소극적 의미의“ 입헌적 다원주의는 꼭 필요하지만, 헌법을 통해 정치를 이렇게 저렇게 디자인하려는 ”적극적 의미의“ 입헌적 다원주의는 절제해야 한다고 본다.
③ 마지막으로는 ”정당 다원주의“라고 부를 수 있고, 이번 강의는 바로 이 차원의 다원주의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볼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이익집단이나 공익적 시민운동 등 자발적 결사체들의 역할도 중요하고 입헌주의와 헌법의 역할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이자 중심은 서로 다른 가치와 시민집단의 요구를 조직하고 대변하는 복수의 정당들이 공공 정책의 결정권을 둘러싸고 경쟁하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정당 중심의 다원주의가 발전하지 않는 한, 현대 민주주의는 그 가치대로 실천되기 어렵다. 아무튼 특별한 수식어나 설명이 없는 한 본 강의에서 말하는 다원주의는 정당 다원주의와 연결되는 의미로 이해해주면 되겠는데,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강의를 계속하면서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7) 이상으로 두 번째 강의를 마친다. 강의 후반부를 이해가 쉽지 않은 다소 이론적인 이야기로 마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단순화해서 다원주의란, ① 사회 속에 있는 복수의 이익집단 사이의 다원적 구조, ② (입법-행정-사법이라는) 복수의 국가 권력 부서 사이의 다원적 견제와 균형의 구조, ③ 서로 다른 지지 집단을 가진 복수의 정당 간 다원적 경쟁의 구조를 만드는 문제를 포괄하는 개념이고, 우리 강의에서는 그 가운데 세 번째 정당 다원주의를 중심으로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룬다는 정도만 이해해두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다음 시간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