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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소장 칼럼

  • [작은 역사 이야기 '오늘'] 22. 8월 3일 ‘박정희와의 악연’

조현연 (정의당 부설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8월 3일 ‘오늘’은 <박정희와의 악연>을 메인 주제로 해서 경주 최부잣집과 장도영을 통해본 박정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 데 이어 <8.3조치와 베블런의 유한계급>에 대해 살펴본다. <죽음과 삶>에서는 ①‘결정적 순간’과 “죽어서 전설이 된” 사진가 브레송 ②‘러시아의 양심’ 작가 솔제니친을 찾아가려 한다.

 


1. 박정희와의 악연

 

1) 독립운동 자금줄 백산상회와 강탈당한 대구대학교
1943년 8월 3일 독립운동가 백산(白山) 안희제가 사망했다. 백산은 1914년 부산에 사무소를 둔 백산상회를 설립.경영하면서 실제로는 독립운동 자금 마련 및 항일투쟁을 위한 비밀공작원의 연락거점 역할을 했다. 1943년 순국할 때까지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한 애국자였다. 백범(白凡) 김구, 백야(白冶) 김좌진, 백산 안희제 등 세 사람을 두고 ‘삼백’(三白)으로 부르기도 한다. 백산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면, 훗날 안희제가 세상을 떠나고 백범이 경주 최부자를 만나 독립자금과 그에 관련된 영수증을 보여주며 고마움을 전하게 되었는데, 당시 백산에게 전달했던 자금과 영수증은 한 푼도 오차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정확했다고 한다.

 

안희제와 함께 백산상회를 운영한 사람은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인 경주 최씨의 마지막 부자 최준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경주 ‘최부잣집 육훈’은 이렇다. : ① 벼슬은 하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② 만석 이상의 재산은 쌓지 마라 ③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④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⑤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⑥ 시집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최준은 임시정부 재정부장을 맡아 안희제와 함께 독립운동 자금줄 역할을 했다. 경북 경주시 교동의 최부잣집은 구한말 의병과 일제 때 독립운동가의 은신처가 되었다. 이 집을 거쳐 간 인사는 최익현, 신돌석, 박상진(대한광복회 총사령관), 동학의 2대와 3대 교주인 최시형과 손병희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해방 이후 최준은 전 재산을 기부해 대구대학교를 세워 최고의 대학 만들겠다던 삼성 이병철에게 무상 양도했다. 그러나 이병철은 약속을 저버렸다. 이병철은 사카린 밀수 사건 이후 대구대를 포기,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에게 헌납했다. 박정희는 대구대와 청구대를 합병해 영남대를 만들었다. 대구대가 영남대로 바뀌면서 최씨 집안의 고택·논·선산 등 모든 재산은 영남대 소유로 넘어갔다. 전두환의 일해재단(현 세종연구소)처럼, 영남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퇴임 후 뒷자리로 봐둔 곳이라는 설이 파다했으며, 통합 작업은 정부 주도로 이뤄졌다.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의 회고록을 보면, 이후락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삼성에게 대구대를 넘기라고 했다는 증언이 나온다.

 

“박정희, 이병철이 정경유착해서 남의 것 빼앗고 나라 팔아먹은 사람들 아니냐….”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하겠습니다.” 1970년 서울 무교동의 한 주점. 당시 서른일곱이던 최염(최준의 손자)이 동창생 두 명에게 말하자 조금 있다가 들이닥친 경찰관이 한 말이었다. 경찰서에 끌려간 뒤 구둣발로 차이고 실신하고 밤새 조사를 받았다. 완력으로 지장을 찍었고, 80일 구치소에 있다가 1심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풀려나게 된다. 최염 씨는 경주 최부자의 정신을 유일하게 이어온 종손이자, 일제와 군부독재 시대 경주 최부자의 도전과 핍박 역사의 산증인이다.

 


2) 장도영과 박정희의 악연
2012년 8월 3일 장면 내각의 두 번째 육군 참모총장이자 5.16 군사쿠데타 직후 초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지낸 장도영이 사망했다. 장도영과 박정희와의 첫 인연은 이러했다. 1946년 7월에 귀국한 박정희는 국군 장교로 지내며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다가 1948년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에서 여수·순천 반란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는다. 이후 일본 육사 출신 백선엽, 장도영 등의 구명운동과 남로당 군 조직에 대하여 자백함으로써 간신히 사형을 면하게 된다. (만약 이때 박정희가 선고대로 사형을 당했다면,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는 어떻게 진행됐을까?)

 

한국전쟁 당시 장도영은 육군 정보국장이었다. 정보국은 작전정보 활동에 박차를 가했지만 이를 실행할 장교가 부족했다. 장도영은 육군본부 정보상황실 한쪽 구석에서 낡은 민간 작업복을 입은 채 근무에 열중하고 있는 박정희에 주목했다. 장교가 부족한 상황에서 그를 계속 문관으로 둘 이유가 없다고 판단,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박정희의 현역 복직을 계속 건의했다. 신성모 국방부 장관의 승낙을 받아 박정희가 소령으로 복직된 것은,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과 함께 파면형을 선고받은 지 1년5개월여 만이었다. 장도영은 9사단장 시절 박정희 중령을 참모장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장도영은 그렇게 박정희와 인연을 맺었다. 장도영이 없었더라면 이후의 박정희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1년 5월 9일 5·16 군사쿠데타 일주일 전 장면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을 불렀다. 장면이 입수한 정보는 박정희 소장을 주동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 모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장면은 자신이 입수한 정보를 장도영에게 전하고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라고 물었다. 장도영은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박정희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대답만 반복할 뿐이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가 성공하자 장도영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계엄사령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부 장관으로 추대되었다. 한 달 뒤인 6월 장도영은 해임되었고 중장으로 예편되었다. 이후 박정희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혁명’ 혐의로 기소되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군부세력은 단일한 세력이 아니었다. 김종필 중심의 육사 8기생 중심의 세력이 박정희 소장과 연합하여 주류를 이루고는 있었지만 비주류 세력의 힘과 영향력도 만만치 않았다. 이에 주류 세력은 10여건 안팎의 반혁명 사건을 조작, 반대파를 하나씩 제거해나기기 시작했다. 첫 번째 반혁명 사건은 5·16쿠데타 이후 불과 두 달도 되기 전인 1961년 7월 9일 발표된 장도영 제거 사건이었다.

 

장도영과 주요 관련자들의 고향이 평안도 일대였기 때문에 일명 ‘텍사스 토벌작전’으로 불리기도 하는 장도영 제거는 이미 쿠데타 초기부터 준비된 것이었다. 이 때 장도영을 체포 연행한 사람은 현역 대위 노태우였다. 5.16쿠데타 당시 실제 병력을 동원했던 문재준 대령과 공수단의 박치옥 대령도 반혁명 사건 음모 혐의로 구속하여 제거하였다. 박정희는 직접 재판정에까지 출두하여 장도영의 반혁명 음모에 대해 증언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장도영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석방 이후 장도영은 미국으로 넘어가 이후 남은 생을 그곳에서 마쳤다.

 

장도영은 2001년 자전적 회고록 <망향> 출판기념회에서 “쿠데타를 사전에 알고 방조했다는 주장은 쿠데타 주체세력의 간계이며 모략에 불과하다”면서 “육군을 지휘하는 책임자로서 쿠데타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쿠데타가 일어난 뒤에도 이유가 어찌됐건 진압하지 않았다. 그뿐이랴. 사태를 수습해 조속히 원상으로 복귀시키려 했던 일마저 실패했다. 즉 나는 참모총장으로서 연달아 세 번이나 실패를 범한 것이다. 이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되고 말았다”고 후회했다. 이어서 그는 “당시 쿠데타를 진압하지 못한 것도 북한의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군인들끼리 피를 흘리는 상황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2. 8.3조치와 베블런의 <유한계급>

 

1)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제 15호’(8.3조치)
1972년 8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제 15호’를 발표했다. 이른바 ‘8.3조치’가 그것이다. 긴급명령(emergency order)은 제3공화국 헌법이 인정했던 제도로, 내우외환·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 시에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긴급한 조치가 필요하고 국회의 소집을 기다릴 여유가 없을 때에 한해 대통령이 발하는 명령을 말한다. 평상시의 헌법상의 기본원칙에 대한 중대한 예외로서 국민의 기본권을 법률에 의하지 않고 명령으로써 제한할 수 있는 법률적 효력을 가진다. 이는 국회의 승인을 얻은 경우 확정적으로 유효하나 국회의 승인을 얻지 못한 경우는 그 때부터 효력을 상실한다. 8·3조치의 내용은 이러했다.
① 기업은 사채의 상환을 중단하고 사채규모를 정부에 신고해야 하며,
② 기업은 사채를 월리 1.35%,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의 조건으로 사용하고,
③ 금융기관은 2천억 원의 특별금융채권을 발행하여 기업의 단기고리대출금의 30%를 장기저리대출금으로 바꾸어 자금을 방출하며,
④ 정부는 기업의 투자촉진을 위해 법인세와 소득세를 감면하고 교부세의 법정교부율을 폐지한다는 등이다.

 

1972년 8월 3일부터 81년 7월 20일까지 집행된 이 8.3조치는 일반 서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대기업의 위기를 정부가 타개해 준 것으로 국가권력의 폭거이자 ‘경제 쿠데타’라고 할 수 있다. 8.3조치의 배경은 1960년대 이후 미국과 일본의 외자 도입으로 고도성장을 기록하던 외자 기업들이 성장 한계에 다다르고, 인플레와 물가 인상으로 부실기업이 속출하면서 강구되었다. 정부는 이 조치를 통해 이들 기업의 재무 구조를 개선해 주시 위해 사채를 동결 조정하였다. 이 조치의 결과로 기업의 사채이자부담 일시에 약 3분의 1로 경감되었고, 사채 또는 은행으로부터의 단기 고리 대출금을 장기저리대출금으로 전환되었다.

 

8.3조치는 대기업이 빌려 쓰고 있는 고리 사채를 동결하여 대기업의 자본과 기업활동을 도와 경제 성장을 발전하겠다는 명분을 대외적으로 천명했다. 그러나 실제 8.3조치는 박정희 정권과 기업유착의 정점을 찍는 재벌을 향한 엄청난 특혜였다. 박정희 정권은 8.3조치를 위해 2000억원의 특별 금융채권, 200억원의 긴급 금융, 500억원의 합리화 자금을 투입했다. 이 자금을 통해 대기업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기존의 사채를 정리하거나 새로운 자금을 사채가 아닌 은행에서 대출받을 수 있게 됐다. 기업은 36.5%의 고금리 사채나 시중은행 대출금리 18%의 반도 안 되는 8%로 대출을 받아, 이자 지출이 3분의 1로 줄었다. 또한 원금상환 일정이 최장 8년 뒤로 유예되어 대기업 입장에서는 지출이나 현금 유동성 면에서 속칭 로또를 맞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기업들의 사채를 신고받고 보니, 신고 사채의 3분의 1에 가까운 돈이 사채업자의 돈이 아니라 기업주의 돈이었다. 즉 기업주가 자기 돈을 자기 소유 기업에 빌려주고 고리 사채 대금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체 사채의 60%를 대기업과 공기업이 사용했으며 대기업의 타자본 의존도가 79.5%였다는 사실은 기업주의 방만하고 불법적인 경영방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채 때문에 기업 운영이 힘들다고 했던 기업주들이 실제로는 자신들의 돈을 불리기 위해 위장사채를 운영했으며, 박정희는 이들을 위해 엄청난 특혜를 베푼 것이다. 1천억 원~1천8백억 원 규모로 예측되던 사채규모 3천4백56억 원으로 신고(통화량의 80%)되었고, 과점주주가 사채권자인, 이른바 위장사채가 총 신고사채의 3분의 1인 1천1백37억 원에 이르렀다.

 

이 재정긴급명령의 발동으로 3,500억원 규모의 사채가 동결되고, 1,460억 원의 일반대출과 520억 원의 특별대출, 350억원 이상의 산업합리화 자금을 공급받는 등 기업들은 엄청난 특혜를 누린 반면, 사채를 빌려주었던 소자산가들은 순식간에 자신의 재산을 강탈당하고 은행대출의 증가에 따른 물가상승의 압박이 서민에게 전가되는 등 중산층과 서민들은 이 조치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2) 베블런의 <유한계급>과 ‘탈진사회’
1929년 8월 3일 노르웨이계의 미국 사회학자이자 제도경제학과 기술결정론적 진화이론의 선구자인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Bunde Veblen)이 사망했다. 1899년 그의 대표적인 저서이자 최고의 역작인 <유한계급론>(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이 출간되자 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부자가 부자인 이유는 그들이 금욕적이고 절제할 줄 알기 때문이며 가난한 자가 가난한 이유는 눈앞의 쾌락 앞에서 절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당시의 지배적인 학설을 산산조각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존의 고전경제학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던 두 가지의 교조적 진리, 즉 ①자본가의 이익은 사회의 이익과 일치한다는 논리와 ②경쟁체계는 경제를 진보시키는 역동성을 제공한다는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블런은 ‘부자들이 나머지 우리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한, 그리하여 과거와 다를 바 없는 미래가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한 지속적으로 읽힐’ 책 한 권을 써냈다고 평가된다. 이후 <기업론>(1904)을 통해 미국의 기업제도에 이단적이라고 할 만한 직격탄을 날리고 그는 더욱 유명해졌다.

 

유한계급이란 생산적 노동을 멀리하고 과시적 소비행태를 보이며 예술.오락 등 비생산적인 한가한 일에만 탐닉하는 인간집단을 뜻한다. 유한계급은 환경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기 때문에 변화하는 상황에 기민하게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발전을 퇴보시키는 것이다. <유한계급론>을 통해 베블런은 “참된 성공은 유한계급의 구성원이 되는 것에 있다”는 견해에 대해 공격을 가한다. 그는 미국 자본주의와 자본가 계급을 통렬히 비판했는데, 즉 미국 경제의 성장은 자본가가 아닌 기술자와 경영자들이 주도해온 것으로, 자본가란 과시적 소비와 맹목적 축재만을 추구하는 사회의 비생산적 계급일 뿐이라는 것이다.

 

특히 책의 내용 가운데 19세기 말의 유한계급 사이에 만연한 속물주의와 세속적 겉치레, 즉 부유층의 과시적 소비행태에 관한 비평은 오늘날까지 설득력을 잃지 않고 많이 인용되고 있다. 이른바 ‘베블런 효과’(Veblen Effect)가 그것인데, 가격이 오르는 데도 일부 계층의 과시욕이나 허영심 등으로 인해 사치와 수요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증가하는 현상을 지칭한다. 남들이 구입하기 어려운 값비싼 상품을 보면 오히려 사고 싶어하는 속물근성에서 유래한 ‘속물효과’와도 비슷한 면이 있다.

 

사회철학자 루이스 멈퍼드는 “베블런은 우리의 경제질서에 내재한 사회적 모순을 마르크스 이후 가장 선구적으로 분석한 학자였다”고 회고하면서 “그의 저서들은 실로 막대사탕 포장지에 감싸인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인격을 반영하는 듯하다”고 평가했다. 또한 뉴딜정책을 주창한 경제학자 스튜어트 체이스는 “미래세대가 나아갈 궤도를 그려보인 천문학자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베블런을 칭찬했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의 시대에나 그 이후에도 금전 자체가 아닌 금전을 획득하려는 남자들과 여자들의 행동방식을 그처럼 냉철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꿰뚫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편 베블런은 (응당 진보적이어야 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보수화와 탈정치화를 ‘탈진’으로 설명한다. 매일의 노동에 모든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에, ‘더 나은 내일을 생각할 만한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베블런의 생각을 이어간다면 지금/여기 한국 사회는 ‘피로사회’를 훌쩍 뛰어 넘어서 ‘탈진사회’인 것 같다. 대다수 보통사람들의 경우 자신의 에너지를 완전 연소해야만 남보다 앞서기는커녕 겨우 제자리에라도 서 있을 수 있고, 완전 연소하지 않으면 곧바로 추락하면서 탈락하는 삶이 이들의 일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탈진사회에서 매일의 일상을 소진해가고 있는 ‘이들을’ ‘누가’ ‘어떻게’ ‘정치의 세계’로 초대할 수 있을까? 청년세대에 주목해온 구본기(구본기재정안정연구소 소장)는 “정말 청년세대의 탈정치화가 문제인가?” 반문하면서, “그렇다면 ‘재미’라는 키워드를 꽉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3. 죽음과 삶-죽음으로 되돌아보는 삶

 

1) ‘결정적 순간’, “살아서 신화였고 죽어서 전설이 된” 위대한 사진가 브레송
2004년 8월 3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진작가로 손꼽히는 프랑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HCB)이 세상을 떠났다. 수많은 ‘결정적 순간’을 목격하고 포착했던 브레송이 사진과 인연을 맺게 배경에는 바칼로레아(대학입학 자격시험)에 세 번이나 연거푸 낙방한 뒤 대학 진학을 포기한 게 작용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사진과 인연을 맺는 데는 1931년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를 여행하며 이국적인 풍물을 촬영한 게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에 구입한 신제품 라이카 휴대용 카메라는 크기가 작고 조작이 간편해서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데 기여한 일등공신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1944년에 파리가 해방되자 브레송은 그 환희와 감격의 순간을 생생한 사진으로 남기며 본격적으로 포토저널리즘의 세계에 입문한다. 1947년에 뉴욕 맨해튼에서는 ‘매그넘 포토스’(Magnum Photos)라는 이름의 사진 전문 에이전시가 창립된다. 사진작가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공조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헝가리 출신의 저명한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의 주도로, 그의 절친한 친구인 브레송과 침(데이비드 세이무어)이 의기투합해 창립 멤버가 되었다. 이후 필립 할스만, W. 유진 스미스 같은 저명한 사진가들이 속속 가담함으로써, 매그넘 포토스는 당대 최고 사진작가들의 공동체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매그넘 내부에서는 예술성과 상업성의 조화와 공존에 관한 논란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고, 1966년에 이르러 브레송은 결국 매그넘을 탈퇴하고 만다.)

 

1952년 브레송은 20년 간 찍은 사진 중 126장을 골라 <재빠른 이미지>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내며, 여기에 ‘결정적 순간’(L'instant Décisif)이라는 제목의 서문을 덧붙였다. 어떤 상황이나 인물의 진수라 할 만한 순간을 직관적으로 포착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 서문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사진예술론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었다. 나아가 이 책의 미국판이 아예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면서, ‘결정적 순간’이란 단어는 브레송과 그의 사진예술관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다.

 

브레송은 사진을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은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위대한 사진작가라고 칭송을 듣는다. 그가 본격적으로 사진작가의 길에 뛰어든 1930년대에만 해도 사진은 아직 완전한 예술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술사가인 E. H.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에 사진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수록된 그의 작품 <아킬라 데글리 아브루치>(1952)를 가리켜 “많은 공을 들여서 부지런히 그린 그림에 필적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영혼의 시선>의 서문에서 제라르 마세는 그를 가리켜 “자(尺)를 지니지 않은 기하학자임과 동시에 사격의 명수”라고 칭했다. 하나같이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브레송의 능력을 강조한 표현이다.

 

피에르 아술린은 “사진작가는 소매치기”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드라마의 현장에 슬그머니 잠입해서 생생한 모습을 포착한 다음, 자기가 영혼을 빼앗을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뒷걸음친다.…브레송은 심지어 정물사진을 찍을 때조차 발끝으로 살그머니 접근한다.” 아술린은 브레송의 ‘행운’보다 ‘노력’에 주목하라고 지적하면서 “그가 보이는 집중력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훈련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다. 그는 재능보다는 노력을 믿으며, 다재다능한 재주꾼을 불신하는 사람이다.” 라고 강조한다.

 

브레송은 우연에서 비롯된 사진을 더욱 좋아했고, 연출된 사진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테크닉보다는 스타일을 중시했으며, 컬러 사진보다는 흑백 사진을 선호했고, 플래시를 “야만적인 행위”라며 지극히 혐오했으며 카메라는 평생 라이카만을 고집했다. 그는 초상사진 분야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여럿 남겼지만, 정작 본인은 남의 사진에 찍히는 것을 극구 피했고, 심지어 자화상 사진도 거의 찍지 않았다.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항상 은밀하고도 신속하게 움직여야 하는 사진작가로서는 이런저런 사진에 등장해서 얼굴이 팔려서는 안 된다는 특유의 지론 때문이었다고 한다.

 

브레송은 늘 카메라를 삶과 마주한 눈의 연장으로 생각했으며, 사진을 일기이자 삶의 메모라고 생각했다. 그의 사진적 철학이 내재된 ‘결정적 순간’이란 삶의 한순간을 예리하게 관통하는 의식과 인식의 상호작용이며, 사진가와 대상이 찰나적으로 하나가 되는 생의 순간이다. 내용과 구성이 가장 조화로운 순간, 절제된 구성과 기하학적 구도로 귀결되는 최상의 순간을 발견하여 타이밍에 맞추어 이것을 촬영하는 것이다. ‘살아서는 신화, 죽어서는 전설’이 된 그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서, 오직 우리의 죽음만이 붙잡을 수 있을 따름이다. 사진은 영원을 밝혀준 바로 그 순간을 영원히 포획하는 단두대이다.”

 

 

2) <수용소 군도>와 ‘러시아의 양심’ 솔제니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련의 작가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이 2008년 8월 3일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형생활을 겪은 뒤 복권되어 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1962년 발표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통해 그는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부상하였다. 당대의 소련 사회뿐만 아니라 현대의 상황을 예술적으로 고발한 명작으로 평가받은 이 책은, 평범한 농민 슈호프를 주인공으로 하여 교정수용소의 가혹한 현실을, 그러나 그곳에서도 없어지지 않았던 인간애에 초점을 맞추어 담담하게 그려냈다.

 

얼마 후 솔제니친의 반체제 비판의 경향이 당국의 눈에 거슬려 작품 발표의 길도 막혀 버렸다. 이에 항의하여 1967년 소련작가대회에 ‘검열 폐지’를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지만, 이 무렵부터 본국에서 발표하지 못한 그의 작품—소비에트 체제의 허구성 폭로한 <암병동>(1968년)은 러시아문학의 정점으로 평가—이 해외에서 잇달아 간행된 것을 이유로 작가동맹에서 제명당한다. 그런 가운데 강제노동수용소의 내막을 폭로한 <수용소 군도>(1973년)의 국외 출판을 계기로 1974년 반역죄로 강제추방을 당한다.

 

<수용소 군도>는 스탈린 통치 하에서 자유 탄압과 피의 숙청을 고발한 자서전의 성질을 띠고 있는 다큐멘터리이자 반체제 저항문학 작품이다. 1945년에서 1953년까지 자신의 수용소 체험을 바탕으로 소련 수용소의 구조와 역사 및 그 실상을 서술하였는데, 1973년에 제6부까지 탈고하였다. 작품 원제는 ‘아르히펠라크 굴라크’(GULAG)로 집단 노동수용소 중앙관리 본부의 약칭이다.

 

추방 이후 미국에서 살다가 소련 붕괴 후인 1994년 20년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러시아 시민권을 회복하였다.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솔제니친은 “공산주의는 치료할 수 없는 미치광이 병”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귀국 이후 그는 서방 물질주의를 비판하면서 전통적인 애국주의로의 회귀를 촉구했다. 자본주의 체제로의 급격한 경제 개혁을 단행한 보리스 옐친 행정부를 강력히 비판하기도 했다. 1998년에는 옐친 행정부가 그에게 성 안드레이 페르보잔노보 훈장을 서훈하기로 하였음에도 그는 “몇몇 권력자들 때문에 러시아는 실패한 국가로 전락해버렸다. 나는 이 상은 수여받을 수 없다”며 수상을 거절하기까지 했다. 그는 조국 러시아의 부활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2007년 6월 러시아는 그에게 예술가들의 최고 명예상인 국가공로상을 수여하였다.


※ 한 번 상상해보자. 솔제니친이 만약 1970년대 대한민국에서 작가로 살았더라면 그에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박정희 유신독재 하에서의 솔제니친? 과연 어떤 작품이 나왔을까? 민주주의가 질식되고 체제에 저항하는 것이 곧바로 죽음의 공포를 떠올리게 하는 암울한 세상, 아마도 소설이 채 나오기도 전에 이른바 ‘남산’으로 끌려가 모진 고문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리고 고문에 의해 조작된 강제 자백을 근거로 해서 사법부에 의해 판에 박힌 ‘정찰제 판결’이 내려진 뒤 오랜 시간 영어의 몸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으로도 안 되면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을 지도 모른다. 1975년 8월 17일 포천 약사봉에서 장준하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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