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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소장 칼럼

  • [작은 역사 이야기 '오늘'] 20. 7월 21일 <새로운 시작과 도전하는 삶>

조현연 (정의당 부설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7월 21일 ‘오늘’의 주제는 <새로운 시작과 도전하는 삶>이다. ①세기의 재판, ‘원숭이 재판’ ②정의당의 출범, 노회찬의 “6411번 버스 이야기”와 천호선의 “힘없는 ‘을’들을 위한 정당”에 대해 이야기한다. 맺는 글에서는 <정의당, 두 거장의 삶에서 배우기>를 주제로 ‘현대 광고의 아버지’ 데이비드 오길비와, ‘끊임없는 실험정신으로 영화음악의 지평을 넓혀나간 개척자’ 제리 골드스미스의 삶에 대해 알아본다.


1. 세기의 재판, ‘원숭이 재판’

1925년 7월 21일 미국 테네시 주의 작은 마을 데이턴에서 ‘스콥스 재판’(Scopes trial)이 열렸다. 이 재판’은 ‘원숭이 재판’이라 불리며 세기의 재판으로 지금도 가끔씩 회자된다. 피고는 원숭이가 아니라 테네시 주가 금지한 진화론을 가르친 생물교사이자 미식축구 교사인 존 스콥스(John T. Scopes)였다. 테네시 주가 통과시킨 ‘버틀러법’(진화론 교육을 금지시킨 반진화론법)을 어긴 혐의로 시작된 이 재판은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결 이상의 의미를 지닌 역사적 사건이었다.

 

재판이 열린 1925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년째 되던 해로, 참혹하게 끝난 전쟁은 불안정한 평화, 전통적 가치의 붕괴, 국제 공산주의의 대두, 세계적 차원의 노동의 불안 등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보수 기독교인들에게도 문화적 위기가 닥쳤다. 화석의 발견 등 인류 기원에 대한 다윈적 시각에 힘을 실어주는 일련의 증거가 쏟아져 나오면서 반진화론자들의 반발을 촉발시켰다. 기독교 원리주의 운동의 선도자이자 세 번이나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바 있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은 창조론을 대변하는 거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공립학교 학생들이 진화론을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그는 진화론이 성경의 창조론에 위배되고 적자생존 법칙은 타인에 대한 사랑을 파괴한다고 생각했다.

 

진화론을 지지하는 이들의 목소리도 커져갔다.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운동가들은 버틀러법이 개인의 자유를 위협한다고 생각했다. 이 단체는 버틀러법을 법정으로 갖고 감으로써 언론과 세간의 관심을 극대화해 법안의 비합리성을 폭로할 수 있다고 보고 자원자를 찾았다. “이 법을 어겨 달라. 우리가 당신 편이 되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자원자가 바로 스콥스였다. 미국 최고의 형사변호사이자 반교권주의 투사 클래런스 대로(Clarence Darrow) 역시 전통적 도덕성과 종교 개념에 맞서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갈등은 종교 문제를 넘어 교육과 세금 문제까지 복잡하게 얽히고설켰다.

 

“우리가 원숭이 자손이냐?”와 “그럼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냐?”가 맞선 원숭이 재판의 법정 대결에서 검찰측 대표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변호사는 당시 명망이 드높았던 클라랜스 대로였다. 대로의 판단에 따르면 이 재판은 스콥스에 대한 재판이기보다는 성서의 첫 구절, 즉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이념공방이었다. 클라랜스 대로는 엉뚱하게도 검찰측의 브라이언을 변호인측 증인으로 신청한 뒤 문답을 통해 성서 무오류의 신념, 즉 성경 글자 하나하나가 움직일 수 없는 진리라는 논리에 균열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라디오로 생중계가 되는 가운데, 브라이언은 과학과 역사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드러냄으로써 법률적 궁지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1심 재판은 스콥스에게 유죄를 선고, 벌금 100달러의 형벌을 내린다. 원고는 ‘판결’에서, 피고는 ‘명분’에서 이기는, 절묘한 균형을 맞춘 것이다. 몇 년 뒤 열린 항소심에서 원고 측은 “삶의 법칙이 밀림의 법칙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허락한다면 공산주의를 수용하고 심지어 살인을 옹호하는 지경까지 사람들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이라며 진화론자를 공산주의자, 살인자와 동격에 놓고 공세를 펼치기도 했다. 대법원까지 올라간 끝에 벌금이 지나치게 과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지만 버틀러법의 완전 폐기는 그로부터 무려 40년이 더 흐른 뒤에야 가능했다. 진화론과 반진화론 운동은 대결을 거듭했다. 반진화론 운동은 미국 보수 기독교 하위문화에서 계속 성장했으며, 인종차별단체 KKK도 이 운동에 결합했다.

 

“악법은 어기는 것이 법”이라는 스콥스의 용기 있는 선언은 권력에 억눌리고 폭력에 좌절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겠다. 2015년 대한민국의 현실이 원숭이 재판이 상징하는 현실보다 한걸음 더 전진해 있다고 보는가? ‘원숭이 후손’으로 고통받는 또 다른 희생자는 과연 없는 걸까?

 

2. 정의당의 출범, “6411번 버스 이야기”와 “힘없는 ‘을’들을 위한 정당”

 

2013년 7월 21일 경기도 일산 킨텍스 제2전시장 이벤트홀 6홀, ‘2013 진보정의당 혁신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당원총투표 결과 진보정의당에서 정의당으로 당명이 변경, 정의당이 출범의 돛을 힘차게 올렸다. 당 대표로는 천호선 최고위원이 선출되었으며, 부대표로는 이정미, 김명미, 문정은 후보가 선출되었다. 전임 노회찬 대표의 고별사와 신임 천호선 대표의 취임사와 퇴임사, 그리고 2년 후 박상훈 박사의 소감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정의당 출범과 그 후 2년의 경과에 대한 이야기를 대신할까 한다.

 

1) 2013년 7월 21일 노회찬 전임 대표는 “진보정의당 대표직을 마치며 드리는 <고별사>”를 통해 퇴임의 소회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 전문은 http://www.justice21.org/19486)


“지난해 10월 21일 진보정의당이 창당하는 자리에서 저는 당대표 수락연설을 통해 6411번 버스 이야기를 꺼냈습니다.…이분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이 버스를 타고 새벽 5시 반이면 직장인 강남의 빌딩에 출근해야 하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한 달에 92만원 받는 이분들은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투명인간들입니다.”

 

“수많은 투명인간들은 여전히 피곤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지만 이분들이 필요로 할 때 이분들이 손에 닿는 거리에 아직 우리는 없었습니다. 이 분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우리의 신념과 의지는 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분들과의 거리 또한 변하지 않고 있다는 괴로운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정의당의 앞길에는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기만 하면 되는 철로는 놓여 있지 않습니다. 진보정당의 앞길에는 이정표도 신작로도 없습니다.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선 우리는 더 바뀌고 더 채워야 합니다. 우리는 혁신의 주체이지만 동시에 우리 스스로가 혁신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할 때 우리는 조금이라도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에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 가장 소중한 사람은 함께 손을 잡고 그 길을 걷는 길동무들이라 합니다.”


2) 천호선 신임 당대표는 “참여정부 청와대 대변인이라고 알려진 제가 진보정당의 대표가 되었습니다”라는 말로 시작된 취임연설을 통해 대표로서의 소임과 당의 진로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 전문은 http://www.justice21.org/19499)

 

“대안이 없다면 진보정당이 아닙니다. 비전이 없으면 미래를 개척할 수 없습니다. 국민을 설득할 자신이 없다면 정치를 떠나야 합니다. 실현가능하고 설득가능한 우리 당의 비전을 내놓겠습니다. 이념의 완고함을 버리고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설계도를 내놓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를 위한 복지 국가, 평화로운 한반도가 그 기본방향입니다.”

 

“모든 일하는 사람들 위한 정당, 힘없는 ‘을’들을 위한 정당이 될 것입니다.…야권혁신을 당당하게 주도하는 선명야당이 되겠습니다.…국민의 어떠한 질문이라도 또렷하게 답하지 못한다면 정당의 자격이 없습니다. 시민들이 참여하는 데 불편함이 있다면 그것은 대중정당이 아닙니다. 유쾌한 웃음이 사라지고 미래세대가 함께하길 꺼려한다면 그 당은 죽은 정당입니다. 비전과 방식과 문화의 대혁신을 이루고 청년들이 거침없이 날개짓하는 정당을 만들겠습니다.”

 

새로운 돛을 달고 정의당이 출항한지 2년이 지났다. 2015년 7월 16일 천호선 대표는 ‘자랑스러운 정의당을 자신있게 내어놓습니다.’는 제목의 퇴임사로 대표 임기를 마무리했다. 퇴임사에서 천 대표는 이렇게 소회를 밝히고 있다.  

(☞ 전문은 http://www.justice21.org/50159


“저는 정의당이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진보정당으로 진화했다고 생각합니다. 감히 말씀 드리지만 진보정치의 2기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가치와 노선을 떠나 다른 원내정당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유일한 정당, 시민이 참여하고 당원이 주인인 단 하나의 정당입니다.…이제 국민여러분께 자랑스러운 정의당을 자신 있게 내어놓습니다. 무엇보다 서민을 위한 가장 좋은 정당이 될 것입니다. 변함없이 바른 정당정치의 모범이 될 것입니다. 저는 감히 정의당이 지지받는 만큼 대한민국의 정치가 혁신될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정의당이 뛰면 뛸수록 국회가 서민과 가까워질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3) 천호선 대표체제가 2년의 임기를 ‘무사히’ ‘잘’ 마치고 3기 지도부에게 바톤을 넘겼다. 천호선 대표체제 2년에 대해 박상훈 박사(정치발전소 학교장)은 “하나의 꿈, 하나의 팀”(경향신문, 2015.7.5.)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이렇게 평가한다. 
(☞ 전문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7052116255&code=990308)

 

 

“필자가 만난 당직자들이 하나같이 꼽는 (정의당) 변화의 중심에는 천호선 대표가 있었다. 그는 참여계 출신이지만 모두에게 공정했고 인간적이었다고, 당직자들은 말한다. 전국의 당원 모임을 다니면서 그는 늘 ‘하나의 비전, 하나의 팀’이라는 목표 의식을 힘주어 강조했다고 한다. 그 말이 현실과 무관한 구호가 아니라 적어도 당 안에서는 어느 정도 현실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이제 필자는 가진다. ‘정당 간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그 전에 하나의 꿈을 갖는 하나의 팀으로서 제대로 된 정당 만들기가 선행돼야 한다’는 정당이론의 고전적 요청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이런 변화의 보이지 않는 이면에는, 지난 2년간 정의당이 쌓아올린 무형의 자산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정당이란 공동의 정견을 가진 시민들의 연합체이자 하나의 팀’이어야 한다는 비전은 분명해졌다. ‘오래 걸렸지만 오래 갈’ 진보정당의 전통 하나를, 이제 임기를 마칠 천호선 대표가 세웠다. 이로써 한국 민주정치 발전에 의미 있는 기여를 했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3. 맺는 글 : 정의당, 두 거장의 삶에서 배우기

2년 전 오늘인 2013년 7월 21일 정의당이 2기 지도부와 함께 새롭게 출범했다. 2년 후 그제 정의당 3기 지도부가 출범했다. 정의당이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오늘 타계한 두 거장, ‘현대 광고의 아버지’ 데이비드 오길비(1999년)와, <빠삐용>과 <에일리언> 등 ‘영화음악의 거장’ 제리 골드스미스(2004년)의 삶에서 뭔가를 함께 찾아보자.

 

1) “나는 광고로 세상을 움직였다”, ‘현대 광고의 아버지’ 데이비드 오길비


1999년 7월 21일 1950년대 이후 광고계 번영을 이끈 ‘현대 광고의 아버지’, ‘20세기 가장 창조적인 카피라이터’, ‘브랜드 이미지 전략을 체계화시킨 광고전략가’ 데이비드 오길비(David Ogilvy)가 세상을 떠났다. 오길비는 스스로 “한번 비즈니스맨은 영원한 비즈니스맨이다”라고 되뇌며 파리의 한 호텔의 요리사를 거쳐, 오븐 방문판매원, 갤럽에서의 조사연구 경험 등을 토대로 ‘상업’예술의 꽃인 광고를 완벽한 성공 비즈니스로 우뚝 세운 사람이다.

 

오길비가 만든 광고는 조사를 기반으로 한 철저한 사실(fact) 추구와 명료한 이미지 표현으로 정평이 나 있다. 좋은 광고를 만들기 위해서는 예술적이며 천재적 소질보다 사실을 바탕으로 구체화된 일반적 창작법칙을 적용하면 된다는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오길비를 가리켜 “크리에이티브의 제왕”이라 칭했다. 2004년 미국의 광고주간지 <애드위크>(Adweek)가 업계 사람들에게 “광고계에서 일하도록 영감을 준 사람이 누구냐”는 설문조사를 했을 때 첫손으로 꼽혔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1962년에는 <타임>의 표지인물로 오르기도 했다.

 

“이 남자 고용할 광고대행사 어디 없나요? 나이는 서른여덟이고 실업자예요. 대학은 중퇴했어요. 요리사, 세일즈맨, 외교관이기도 했고, 농사도 지었어요. 마케팅에 대해선 하나도 모르고, 카피는 한 줄도 써 본 적이 없어요. 광고 일을 직업으로 삼기를 원하는데, 연봉 5천 달러를 주시면 일할 생각이에요.” 참으로 별난 구직광고다. 이 사람을 채용할 광고대행사가 있을까. 런던의 한 광고대행사가 고용한 그는 3년 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카피라이터가 되었으며 이후 세계에서 열 번째로 큰 광고대행사를 설립했다. 이 문구를 쓴 사람이 바로 오길비다,

 

오길비가 이룬 성과는 참으로 눈부시다. 100년 동안 무명에 가까운 상표였던 ‘해서웨이 셔츠’를 일약 미국의 ‘국민 브랜드’로 만들었으며(‘검은 안대를 쓴 모델의 독특한 이미지를 통한 호기심 극대화’), 도브(Dove) 비누를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의 하나로 키웠다(“자기야, 나 지금 생애 최고의 경험을 하고 있어”). 해서웨이 셔츠의 경우 광고의 인기가 폭발함에 따라 독점적으로 광고를 게재한 <뉴요커> 구독률까지 동반상승했으며, 모방광고만 백 가지가 넘게 나왔다고 한다. 상품광고뿐 아니라 공익광고에도 그의 재능은 여지없이 빛났다. 미국인들에게 지저분한 나라로 알려졌던 푸에르토리코의 이미지를 순식간에 개선한 일이나, 서유럽 쪽에 미국이 가볼 만한 곳이라는 인상을 심어준 것도 그였다.

 

오길비는 과학적 조사와 자기 체험을 기초로 만든 크리에이티브 제작 원칙을 견지했고, 이를 부하 직원들에게 철저히 요구한 원칙주의자였다. 제일 유명한 것은 신입사원 교재로 쓰기 위해 30년 광고 인생의 노하우를 총결집한 크리에이티브 가이드북, <매직 랜턴(Magic Lantern)>이다. 크리에이티브의 어두운 앞길을 비춰주는 등불이라는 뜻이다. 이 문서는 수 천 개가 넘는 광고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오길비의 창작원칙들, 예컨대 헤드라인과 바디카피 쓰는 법, 일러스트레이션 창작, TV광고 구성법, 콘셉트 도출법 등이 내용이 체계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어떻게 말하는가보다 무엇을 말하는가가 중요하다. 사실을 말하라, 소비자는 바보가 아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읽고 싶어하는 광고를 만든다. 텅 빈 교회에서는 영혼을 살릴 수 없다. 당신의 가족이 읽지 않았으면 하는 광고는 만들지 마라….”

 

오길비의 광고철학은 “무조건 팔아라”였다. 아무리 폼나고 멋진 광고라도 상품이 안 팔리면 헛수고라고 봤다. 그의 철학을 그대로 딴 책 <무조건 팔아라>에서 오길비는 “광고는 소비자를 재미있게 만들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비자를 설득해 상품을 사도록 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만약 소비자들을 즐겁게 하는 목적으로 광고비를 쓴다면, 원하는 만큼 제품을 팔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지난밤에 광고주가 텔레비전에 나와 한 농담 때문에 새로 나온 세제를 사지는 않는다. 제품의 혜택을 약속해야 물건을 팔 수 있다.”


오길비가 남긴 유산은 ‘소비자 중심주의’다. “소비자는 지적인 존재”라고 선언한 그는 “소비자에게 만족감과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광고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명언에 이 뜻이 함축되어 있다. “소비자는 멍청이가 아니다. 당신의 아내다. 그녀를 속이지 말고 그녀의 지적 능력을 무시하지 마라.”

한편 “모든 광고는 브랜드의 개성에 대한 장기 투자”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오길비는 브랜드 이미지 전략(brand image strategy)의 창시자이다. ‘브랜드 이미지’란 특정 브랜드에 대하여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가지는 인상을 말한다. 고급 패션, 명품, 보석, 화장품 등 고관여 감성 제품이나 위스키, 담배 등 타사에서 쉽게 모방 가능한 기호품의 경우 차별적 특성이나 고유한 편익을 찾아내기 어렵다. 이런 경우 광고를 통해 자기 브랜드가 경쟁사보다 뛰어나다는 이미지를 소비자 마음속에 심어주고 선호도를 높이는 전략이 효과를 발휘한다.

 

브랜드 이미지 전략은 소비자 심리 속에 브랜드를 차별화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이 최종 목표다. 여기서 말하는 차별화란 실질적 제품 특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소비자가 특정 브랜드에 대해 지닌 주관적 인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기술 발전으로 상품들이 점점 비슷해지자 성능이 아닌 브랜드가 광고의 중심이 되고 있음을 직감한 결과다. 그는 헤드라인에 브랜드명을 반드시 넣고, 독자들에게 즉시 이해되는 카피를 썼다. 절대로 돌려 말하지 않고 판매를 촉진하는 단어를 썼다. 한마디로 ‘명쾌하라’는 것이다. 이런 카피 철학을 꿰뚫은 역작이 바로 “시속 60마일로 달리는 신형 롤스로이스에서 들리는 가장 큰 소리는 전자시계 소리”였다. 이 카피는 자동차 광고 역사상 가장 유명한 문구로 기억된다.

 

현대 광고의 표현 경향을 혁신적으로 바꾼 브랜드 이미지 전략은 광고 작품에 숨어 있는 스토리 어필을 중시한다. 오길비가 어느 날 출근길에 만난 노숙자가 쓴 “저는 장님입니다. 제발 도와주세요”라는 표지판을 보고, “화창한 날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라고 고쳐 써 줘 많은 적선을 받도록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처럼 스토리는 사람의 감정에 이입 되는 설득력과 소구력이 강하다.

 

그렇다면 스토리텔링 마케팅의 성공적 조건은 무엇일까. 성공적 스토리텔링의 기본적 프레임워크가 ‘STORY’다. 이는 간결성(Simplicity), 진정성(Truth), 목적성(Objective), 현실성(Reality), 역동성(Youth)의 머리글자다. S는 고객들이 공감하고 기억하기 쉽도록 이야기를 단순화하고 간결하게 구성하는 것이다. T는 이야기가 과장되거나 인위적(허구성)이지 않고 고객이 신뢰할 수 있는 창의적 콘텐츠여야 한다. O는 고객에게 제공하는 차별화된 가치(UVP, Unique Value Proposition) 전달을 목표로 하여야 한다. R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스토리가 아닌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이야기의 구성이다. Y는 젊은이들처럼 생동감 넘치고 재미와 갈등이 내재된 생생한 이야기여야 한다.

 

칸트는 “감각이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이 없는 감각은 맹목적”이라고 했다. 스토리텔링은 AIDMA(구매행동 단계: Attention, Interest, Desire, Memory, Action)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객가치(제품 컨셉트 등)와 검증된 가설(우호적인 감각과 인지)들을 STORY 원칙에 따라 통일감 있게 감각적 언어로 표현하는 마케팅 기법이다. 마케팅의 현실은 고객의 마음 속에 있고, 마케팅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고객의 인식이다. 스토리텔링은 구체적인 심리적 욕망(Wants)을 자극하는 수단으로 다양한 브랜드 요소(로고, 디자인, 광고, 평판 등) 중 가장 강력한 메시지 전달수단이다.

 

오길비의 자서전 <나는 광고로 세상을 움직였다>(Confessions of an Advertising Man)의 번역자인 한동대학교 강두필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비즈니스 철학을 급변하는 현대의 비즈니스 현장에 바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기본에 충실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그의 역동성만은 우리의 환경에 적용하는 데 지금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

 

지금/여기 정의당은 어떤 이미지 브랜드 전략과 스토리를 갖고 있으며, 어떤 스토리텔링을 통해 그것을 유권자들에게 어필하려 하고 있나?


2) ‘끊임없는 실험정신으로 영화음악의 지평을 넓혀나간 개척자’, 게리 골드스미스


도라 도라 도라(1970), 패튼 대전차 군단(1970), 혹성탈출(1971), 빠삐용(1973), 차이나타운(1974), 바람과 라이온(1975), 오멘(1976), 데미안: 오멘 II(1978), 에일리언(1979), 스타트랙(1979), 오멘 III(1980), 람보(1982), 환상특급(1983), 그렘린(1984), 어메이징 스토리(1986), 그렘린 II(1990), 적과의 동침(1991), 원초적 본능(1992), 콩고(1995), 에어 포스 원(1997), 뮬란(1998), 미이라(1999), 할로우맨(2000), 타임라인(2003)의 공통점은? 등장하는 음악을 만든 작곡가가 동일인물이라는 점이다.

 

2004년 7월 21일 ‘영화 주제음악의 거장’ 제리 골드스미스(Jerry Goldsmith)가 타계했다. 그는 18번 아카데미 상 후보로 노미네이트되었으며, 4번 에미 상을 수상하였다. 현대 영화음악 역사상 존 윌리암스와 함께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인 그의 음악은 전세계에서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TV나 극장가에서 연주되고 있다는 찬사를 듣는다. 40년 가까이 헐리우드의 정상급 작곡가로 활동한 그는 약 170여 편의 영화와 TV 시리즈 음악을 작곡했으며, 주로 액션, 서스펜스, 공상 과학, 공포 영화의 음악이 많다. 다작의 비결에 대해 그는 영감(inspiration)을 신봉하지 않는다는 것을 꼽는다. 앉아서 펜을 끄적거릴 기력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내 또래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제리 골드스미스의 영화음악 작품을 꼽으라면 아마도 <빠삐용>과 <오멘>이 아닐까 싶다. 그의 이름은 모르더라도, <빠삐용>의 주제음악 ‘바람처럼 자유롭게’(Free as the Wind)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선율이다. 그리고 <오멘>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만드는 힘은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그의 장중한 음악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골드스미스의 부인 캐롤은 “남편은 자기 작품 가운데 특별히 좋은 것을 고르라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모든 작품에 심혈을 기울였고, 특히 영화음악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 시간을 아낌없이 보내기도 한 자상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수많은 헐리우드 명작의 주옥같은 음악으로 대중의 심금을 울린 제리 골드스미스. 그의 이름이 영화음악 역사에 더욱 길이 남는 이유는 그가 ‘끊임없는 실험정신으로 영화음악의 지평을 넓혀나간 개척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음악계에서 항상 앞서가는 인물로 정평이 나 있으며, 새로운 테크닉과 실험적인 사운드를 도입하고, 오케스트라 사운드에 전자사운드를 첨가하는 새로운 방식을 택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영화음악상 가운데 하나인 ‘제리 골드스미스상’은 헐리우드 음악감독의 등용문으로 알려져 있다.

 

2001년 암 투병 중인 그를 기리며 주최된 ‘BMI 제리 골드스미스 콩쿠르’에서 초대 우승자는 천재 작곡가 지박(Ji Bark, 박지웅)이다. 쟁쟁한 현역 영화음악가들을 제치고 우승을 한 23살의 동양인 청년을 보고, 제리 골드스미스는 “젊은 나이에 상상할 수 없는 뛰어난 테크닉과 완벽한 표현력을 지닌 천재 작곡가”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 지난 2014년 7월 24일 세월호 100일을 맞아 지박은 추모곡 <Dear. Mom>을 헌정했다. ‘엄마 울지 마세요. / 저는 잘 있어요. / 괜찮아요 / 비록 지금은 우리가 떨어져 있지만 / 저는 항상 엄마 마음 속에 있을 거에요’의 뜻이 담긴 가사로 시작하는 이 곡은 세월호 희생자를 위로하는 기존의 추모곡들과는 달리,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아이가 슬퍼하는 엄마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는 내용이 담겨 있다. 지박은 “세월호의 아픔을 기억하며, 미증유의 대참사가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이 곡을 무료로 공개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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