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연 (정의당 부설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6월 30일 ‘오늘’은 두 편의 글로 준비했다. 이 글은 그 첫 편으로서 1년 전 정의당의 ‘당과 당원이 함께 만드는 온라인 뉴스공동체’인 <정의온>의 요청으로 작성했다가 <정의온>이 문을 닫는 바람에 묵혀놓았던 글이다. 당시의 상황 및 문제의식과 지금의 그것을 차분히 비교해보기 위해 1년 전의 글을 그대로 싣는다. 2015년 6월 30일 오늘, 정의당은 당대표를 비롯한 동시당직선거 운동이 활기를 띠며 진행 중이다.
6월 30일 ‘오늘’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936년 6월 30일 오늘은 마거릿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가 출판된 날이다. 미국 남북전쟁 전후의 남부를 무대로 스칼렛 오하라라는 여성이 겪은 인생역정을 통해 생존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낸, 생명력이 넘치는 대하소설이다. 출간 6개월 만에 백만 부가 넘게 팔린 이 소설은 비비안 리와 클라크 게이블 주연의 영화(1939년)로도 잘 알려져 있다.
책에 대해 미첼은 이렇게 말한다. “주제는 생존이다. 재난을 만나도 쉽게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능력 있고 강하고 용감한데도 굴복하고 마는 사람이 있다. 모든 격변에서 그렇다. 살아남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의기양양하게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없는 특징이란 무얼까? 나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말하는 ‘불굴의 정신’이 무엇인지 알 뿐이다. 그래서 불굴의 정신을 지닌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다른 맥락이지만 <식객>의 허영만 화백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식객 13편>을 보면 시련에 부딪혔을 때 사람은 세 가지 유형을 보인다고 한다. ‘맞서 싸우기’, ‘아무 것도 하지 않기’, ‘도망가기’. “우리 조리사들은 첫째 유형이어야 한다. 완성된 맛을 위해서 끝없이 도전하고 좌절하고 또 도전하고….”
지금/여기 진보정치는 혹독한 시련기를 경과하고 있다. 짧게 보면 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와 2013년 이석기 사태가 던진 충격의 여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길게 보면 그것은 정체성을 찾지 못한 채 헤매면서 대중의 삶 속에 뿌리내리는 데 실패한 결과이기도 하다. 지난 6.4 지방선거에서 진보정당의 초라한 성적표는 그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진보정당은 여전히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제 진보정당의 독자적 존립은 아무런 의미도, 소용도 없게 된 것일까? 이대로라면 진보정당의 미래는 어둡다는 것이 중론이다. 25년여 가까운 시간을 함께 해온 좋은 후배이자 동료인 한 정치학자가 있다. 6.4 지방선거 직후 그가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재 같으면 진보정치의 길은 없다. 이는 지난 세 번의 선거에서 나타난 유권자의 평결이다. 진보정당에는 ‘전환기적 변화’가 필요하다. 다당제를 염두에 둔 진보정당의 정치적 기획은 한 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으며, 차라리 양당제적 구조 속에서 주류의 일원이 되는 경쟁을 벌이는 방안을 생각해봐야 한다.” (2014.6.13)
당시 인터뷰 기사를 읽고 나서 많이 아프고 쓰렸다. 진보정당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잘 알고 있기에 그의 실망이 가볍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이대로라면 희망이 없다’는 그의 말을, 진보정당의 현주소에 대한 애정어린 쓴소리로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진보정당에는 ‘전환기적 변화’가 필요하다”, “진보정당이 구체화해놓은 진보가 무엇이고, 왜 진보정당이 필요한지 제대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지적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하는 고민이 더 크게 다가온다.
진보정당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대중적 회의의 확산되면서, 이제는 진보정당에 대해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2004년 전후의 비록 짧았지만 빛났던 시간이 ‘상처뿐인 영광’으로 빛을 바래고 말았지만, 우리 사회에 진보정당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역사와 전통을 뽐내는 거대한 두 정당으로는 채울 수 없는 넓은 빈 공간이 존재하며 그것을 채워야 하는 것은 진보가 해야 할 역할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진보정당의 쇠락과 존재감 상실은 한국 정치의 퇴조와 민주주의 전반의 정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런 현상이기도 하다. 추락하는 한국 민주주의, 그 핵심 원인은 정치적 대표 체제가 좁은 이념적 범위 안에서 자기들만의 보수적 경쟁에 안주하고 있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체제가 사회의 다양한 요구와 변화하는 현실에 응답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즉 “한국의 정당체제가 구시대의 이념적인 틀에 얽매여” 있음으로 인해 “탈냉전과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문제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야와 언어를 요구하는 데 반해 한국 정당 체제의 틀과 언어는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때 진보정당은 보통사람들의 생활에 뿌리내린 미래지향적 정책과 의제들을 발굴하고 선도하면서 변화들을 이끌어내는 결실을 맺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진보정당의 쇠락 속에서 정당정치의 의미 있는 변화는 사라졌다. 외부로부터의 긴장이나 자극이 없으면 변화와 혁신의 흐름을 거부하는 것이 기성 보수정당들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기존 정당들과는 다른 색깔을 지닌 정당의 충격이 여전히 중요하다. 진보정당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때,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에서 의미 있는 정치적 지각변동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한국에서 진보가 집권하려면, 그리고 집권 후 제대로 성과를 만들어내려면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민주당’ 범위 안의 진보적 자유주의 세력이 연대하는 길밖에 없다고 할 때, 그 역도 역시나 마찬가지로 성립하기 때문이다. 얼마 앞으로 다가온 7?30 재보선에 대한 판단과 선택도 이와 같은 정치적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울러 우리의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조건 위에서 실천될 수밖에 없다면 노동문제가 그 핵심일 수밖에 없다. 노동문제는 진보적 이슈이기에 앞서 보편적 이슈이며 민주주의의 기본을 구성한다. 노동문제가 나쁘면 공동체적 기반을 튼튼히 할 수 없다. 노동은 모든 사회 구조물의 기반을 이루는 힘으로, 노동이 배제되면 노동자만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주요 이익 모두가 배제되기 때문이다. 이 과업을 노동의 가치에 기반을 둔 진보정당이 책임질 때 더 나은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 나아가 노동을 배제하는 정도가 덜할수록, 그리고 진보정당들이 상당한 득표를 하고 집권의 전망도 밝은 나라일수록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평화롭게 나누며 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역사의 경험적 진실이다.
희망의 역설과 ‘스톡데일 패러독스’
그렇다면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앞서 살펴본 마거릿 미첼과 허영만의 말을 엮으면 이렇게 될 것이다. ‘불굴의 정신으로 시련에 맞서 싸우자.’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만 제대로 된 싸움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도한 좌절감과 마찬가지로 과도한 희망 역시 현실을 돌파해나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은 이른바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를 통해 알 수 있다.
스톡데일 패러독스란 역경에 처하게 됐을 때 그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 대응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 반면, 조만간 일이 잘 풀릴 거라고 낙관하면 무너지고 만다는 ‘희망의 역설’을 뜻한다. 제임스 B. 스톡데일(James Bond Stockdale)은 베트남 전쟁 당시 포로수용소에 1965년부터 73년까지 8년간 갇혔다가 구사일생으로 생환한 미 해군 제독이다. 생환한 후에 스톡데일은 이렇게 증언한다.
“불필요하게 상황을 낙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전에는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다가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부활절이 되기 전에는 석방될 거라고 믿음을 이어 나가고 부활절이 지나면 추수감사절 이전엔 나가게 될 거라고 또 믿지만 그렇게 다시 크리스마스를 맞고 반복되는 상실감에 결국 죽게 됩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얘기인데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무언가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고 버티는 것과, 아무리 가혹한 현실이라도 그것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인 것입니다.”
스톡데일의 증언이 주는 시사점은, 아무리 어려워도 결국에는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이 무엇이든 눈앞에 닥친 현실 속의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이것이지 않을까 싶다.
진보의 ‘정당 만들기’
“여전히 좋은 진보정당을 기대하는 시민들은 존재한다.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찬 인간미 없는 좌파를 싫어하고 민주적 가치를 농단하는 비이성적 진보를 인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민주적 좌파의 길 나아가 인간적 진보의 길에 대한 기대마저 접은 것은 아니라고 본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정의당이 새롭게 거듭나는 진보정당이 되어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가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나온 과거에 대한 성찰과 혁신이라는 균형잡힌 양 날개다. ‘혁신 없는 성찰은 공허하고, 성찰 없는 혁신은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끝없는 추락으로 귀결된 진보정치 1기 실험은 이제 확실하게 종언을 고했다. 2004년을 ‘상처뿐인 영광’으로 만들어버린 원인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었다. 소모적인 낡은 정파 대립구도, 패권주의적인 당 운영 행태, 책임정치의 실종, 미래 비전과 가치의 정책화 능력의 축소, 대중적 지지의 철회 등. 그것은 민주주의와 민주화 이후 정치에 대한 철학 및 이해력의 빈곤과 함께, ‘정당 만들기’의 실패가 빚어낸 참담한 결과였다.
지난 6.4 지방선거는 한국의 진보정치에 총체적 재구성을 핵심 과제로 던졌다. 투표장에서 진보정당들 간의 차이를 구별할 줄 아는 유권자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닥치고 통합’이나 ‘묻지마 헤쳐모여’는 해법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와 유사하게 소모적인 갈등과 분열의 씨앗이 되기 쉽다. 특정 정당이 진보대표정당으로서의 역할을 하려 한다면 이제 다른 진보정당들과의 쓸데없는 경쟁이나 또는 답 없는 지루한 통합 논의로 시간을 소모할 일이 아니다. 그 기본 방향은 능력을 키우고 실력을 갖춰가면서 여러 진보 정당‘들’ 가운데 주도적 또는 지배적 정당이 되는 것에 있어야 할 것이다.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은 제대로 된 좋은 정당 만들기, 강하고 멋진 정당 만들기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실패한 진보의 정당 만들기를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당이란 특정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집단이며, 리더십·당관료·활동가·당원이 동심원을 그리며 체계적으로 연계된 조직이다. 또 주요 정치 사안에 대해 집단적 결정과 실천을 하고 그 과정과 결과에 따라 시민과 지지자, 당원에 책임을 지는 규범적 실체이기도 하다.” 정당이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관건이 미래의 가치를 보여주는 대안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다는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다. 대안을 정의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권력수단이며, 민주화 이후 그것은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정당의 고유한 역할이기 때문이다.
한편 정치학자 키(V. O. Key)에 따르면 정당의 기능은 세 가지로 구성된다. 조직으로서의 정당(party as organization), 유권자 속의 정당(party in the electorate), 정부 속의 정당(party in government)이 그것이다. 조직으로서의 정당이란 당원과 지지자들을 폭넓게 조직하고 그들의 가치와 이해관계를 집약?표출하면서 정치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그리고 당의 리더와 의원 등 지도자 및 당의 관료조직을 발굴?훈련?교육하는 정당의 능력을 말한다. 유권자 속의 정당이란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이들의 선호를 이끌어내는 능력에 관한 것이다. 유권자의 선호를 이끌어 내기 위해 정당은 사회 안의 갈등과 균열을 딛고 서야 하고, 자신이 대표하고자 하는 계층의 이해와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 이념을 제시해야 한다. 정부 속의 정당은 정부와의 관계, 즉 정부에 대한 비판과 견제와 함께 대안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진보정치에서 정치에 대한 다양한 문제를 제기해 온 정의당이 문제의 해결자로 결실을 맺고 성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정부 속의 정당’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져야 한다.
사실 정의당은 그동안의 진보정당들 가운데 가장 자유로운 정당이며 그렇기 때문에 발전 가능성이 있는 정당이다. 자유롭다는 의미는 과거의 운동정치, 신념에 대한 과도한 절대화가 불러온 도그마나 성역이나 금기들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다. 정치에 관한 한 어디서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귀기울이며 들을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 있고, 생각의 차이로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핏대를 올리며 싸울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런 만큼 약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다. 보통사람들이 꿈꾸는 미래는 정치라는 관문을 거침으로써 비로소 현실이 될 수 있다. 미래를 예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 그 자체를 창조하는 것이며,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강하게 담금질하고, 능력을 갖추고, 대중적 신뢰를 쌓아가고, 좋은 리더를 만들어가면서 그것을 준비하는 것이다.
한편 진보가 정당 만들기를 통해 새로운 정치의 문을 연다고 할 때 연합정치에 대한 양 극단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예컨대 ‘연대는 선, 분열은 악’이라거나, ‘연합정치는 망하는 지름길’이라는 일면적이고 기계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승리를 위한 정치주체들의 합리적이고 자연스런 행위로서 연합정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연합정치에 대한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윈-윈’(win-win)할 수 있는 다양한 연합정치 방식에 대한 새로운 구상과 전략적 실천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익숙한 방식으로서의 일상적 정책공조 수준의 연합정치나 선거연대 차원의 연합정치와 함께, 당의 정체성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의 공동정부 구성까지도 하나의 시나리오로서 그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보통사람들의 삶과 대중의 눈높이
국민행복시대를 주창하며 등장한 박근혜 정부, 그러나 많은 국민들은 행복해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보통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회가 되었을까? 무엇이 평범한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질이 점점 피폐해지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일까? 그간 많은 연구와 조사들은 낮은 행복지수의 주범으로 소득 불평등(계층간 소득격차)과 사회 양극화, 고용 불안을 꼽고 있다.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것은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한국인의 일상적인 마음의 행로(habits of the heart)를 변화시켰다는 사실이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등장한 한국사회의 재구조화는 시장화 체제로의 진입을 가속화시키면서 믿어야 하는 규범은 경쟁밖에 없다는 인식을 사회 전반에 각인시켰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격랑이 거칠고 거세게 한국사회를 강타한 것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의 가장 특징적인 변화를 꼽으라면 신자유주의의 가치가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정치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다.
진보정치가 고민해야 할 또 하나의 것은 ‘대중의 눈높이’에 대해 지속적이고도 깊은 천착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진보정당 활동의 기본 노선은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정치의 방법으로 다수의 보통사람들의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생활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필요하다. 이와 함께 “현실적으로 통용되는 가치와 규범을 면밀하게 살피고 존중하지 않으면, 보통 사람들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민주화 이후 우리의 역사는 기성 정치에 실망하고 좌절한 보통사람들의 세계에, 한국정치를 늘 예측불가능하게 하고 다이내믹하게 만드는 매우 강력한 에너지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보여줘왔다. 대중의 열망과 절망의 이 이율배반적 공간은 어쩌면 진보의 이념과 비전과 가치를 정치의 방법으로 실천하는, 진보정당이 성장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이들을 ‘정치의 세계’로 초대할 것인가?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정당이 소통과 공감의 스토리, 자신만의 브랜드와 매력적인 캐릭터를 갖출 때야만 비로소 이들은 초대에 선뜻 응할 것이다.
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면서 한 분의 원로 정치학자가 이렇게 말했다. “현실에서 진보는 죽었다. 진보가 완전히 재구성되지 않는 한, 한국 사회와 정치에서 기여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로부터 얼마 후 출간된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의 말미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당신들은 누구를 대표하는가? 그에 기초해 어떤 한국 경제, 어떤 한국 사회를 만들려 하는가? 지난 실패를 딛고, 노동문제를 포함해 사회경제적 사안들을 좀 더 잘 다루고 유능하게 집행할 대안적 정부가 될 수 있는가?”
다가오는 2016년과 2017년 총선과 대선, 그것을 통한 정치적 판갈이와 ‘새로운 대한민국’을 준비해나가는 과정은 이 물음에 대한 답과 해법을 하나하나 발견하고 실천해나가는 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랬을 때 비로소 무기력에서 탈출하는 진보정치의 힘찬 비상과 부활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라 믿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글을 작성한지 딱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지난 1년 동안 정의당은 위 물음에 대해 잘 답하면서 실천해가고 있는가? 앞서 언급한 동료 정치학자는 2015년 2월에 이렇게 말한다. 약간 긴 내용이지만 함께 읽어보자. 신영복 선생이 말씀한 ‘3독’(三讀), 즉 텍스트를 읽고, 저자의 생각을 파악하고, 그런 다음에 나를 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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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년 간 지금의 정의당은 성장한 측면이 분명히 있다. 공동대표제와 최고위원제가 폐지되었고, 이는 정파들의 부정적 역할을 줄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당직자들 사이의 표정도 많이 밝아졌고, 점차 정당의 정체성도 서서히 형성되는 느낌이다. 신입당원이 빠르게 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신강령도 새로 만들어 토론되기 시작했고, 당원 교육의 중요성이나 시도당 체제로의 발전 전망에 대한 합의도 튼튼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더 좋아져야 하고, 그런 점에게 남은 과제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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