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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소장 칼럼

  • [작은 역사 이야기 '오늘'] 14. 6월 9일 ‘독재통치와 민주화의 여정’

 

조현연 (정의당 부설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6월 9일 ‘오늘’의 주제는 <독재통치와 민주화의 여정>으로, ①김영삼의 단식농성(1983년)과 이한열의 죽음(1987년) ②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와 2개의 재야 대선 준비모임 ③아스투리아스의 <대통령 각하>와 ‘폭군’(?) 네로 등 세 가지를 이야기한다. 맺음글에서는 1870년 오늘 세상을 뜬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보통 사람들에 대한 공감능력’에 대해 살펴본다.

 

1. 김영삼의 단식농성(1983년)과 이한열의 죽음(1987년)

 

1) 김영삼의 23일간 단식투쟁


전두환 군사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3년. 5·18 3주년을 맞아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는 언론통제의 전면 해제, 정치범 석방, 해직 인사들의 복직, 정치활동 규제의 해제, 대통령 직선제를 통한 개헌 등 민주화 5개항을 내걸고 단식에 들어갔다. 그의 근황은 외신을 통해 국제사회의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지만 국내에서는 보도통제로 한동안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정치문제가 된 이후에 비로소 ‘어느 재야인사의 식사문제를 둘러싼 현안’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보도되었다.

 

8일째인 5월 25일 전두환 정권은 사복경찰과 정보요원을 투입, 단식으로 심신이 쇠약해졌음에도 치료를 거부하는 김영삼을 강제로 서울대 병원에 입원시킨다. 그러나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고서도 일체의 치료 행위를 거부, 의사들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경고에도 김영삼은 “의식이 살아있는 한 나의 투쟁은 중단될 수 없다”며 의지를 꺾지 않았다. 5월 26일에는 상도동계 의원 23명이 동조 단식에 들어갔다. 신민당과 학생운동가들은 체포, 구류 등을 당하면서도 릴레이식으로 김영삼 단식의 실황과 함께, 김영삼의 사진을 인쇄한 유인물을 서울 각지로 살포했다.

 

5월 27일 권익현(민정당 사무총장)이 병상을 찾아와 단식을 중단해줄 것을 촉구하는 전두환의 의사를 전했지만 김영삼은 이를 거절하였다. 5월 28일과 5월 29일 권익현은 다시 서울대 병원으로 찾아갔지만, 김영삼은 “나를 해외로 보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를 시체로 만든 뒤에 해외로 부치면 된다”고 하면서 되돌려보냈다. 김영삼은 6월 9일까지 23일간 단식을 계속했고 단식투쟁을 통해 가택연금 해제라는 효과를 얻어낸다.

 

2) 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 이한열


1987년 6월 9일 오후 5시 연세대학교 정문.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하루 앞두고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개최되었다. 대회를 마치고 시위 도중 연세대 학생인 이한열(경영대 86, 동아리 ‘만화사랑’ 회원)이 전경이 쏜 최루탄 SY44를 맞고 쓰러져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 7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은 87년 6월 민주항쟁의 거대한 물결을 일으킨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로이터통신의 사진기자 정태원이 찍은, 최루가스와 땀으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같은 대학 학생—기록에는 도서관학과의 이종창과 경영대 1년 선배인 김종원 등 두 명이 등장하는데, 이종창이 맞다—이 피를 흘리며 고개를 떨어뜨린 이한열을 안아 옮기는 강렬한 이미지의 사진 한 장은 전두환 독재정권의 폭력성과 함께 6월항쟁의 역사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 사진은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보도사진에 선정되기도 했다.) 6월 11일 신문에 실린 최루탄 피격 현장 사진을 본 최병수 화백은 곧장 연세대로 달려가 만화사랑 동아리 학생들과 밤새워 그림을 그려 다음날 학생회관 건물 외벽에 내건다. 1987년 6월민주항쟁의 상징이 된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가 탄생한 것이다. 가수 안치환의 곡 ‘마른잎 다시 살아나’는 이한열 추모곡이다.

 

7월 9일 ‘민주국민장’이라는 이름의 이한열 장례식은 연세대 본관→신촌로터리→서울시청 앞→광주 5·18묘역의 순으로 이동하면서 진행되었다. 당시 추모 인파는 서울 100만, 광주 50만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이었다고 한다. ‘우리 시대의 광대’이자 창작 판소리 명창인 임진택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이한열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그날, 87년 7월 9일 연세대 교정에는 거대한 걸개그림과 수백개의 만장들이 세워졌다. 최민화의 ‘이한열 부활도’와 더불어 최병수의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압권이었다. 특히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을 부축한 친구의 모습을 그린 최병수의 그림은 그 자체로 거대한 깃발이었다. 깃발로 흔들어 불러일으키는 항쟁의 절정이었다. 그림이 말을 하고, 그림이 외치고, 그림이 절규하고, 그림이 통곡하고, 그림이 분노하고, 그림이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 이한열의 주검을 실은 거대한 상여를 풍물패와 상여꾼이 운구하는데, 뜻밖에 소복한 어떤 여인 하나 튀어나와 몸부림으로 춤을 추며 베를 갈라 죽은 이의 넋을 걷어내니, 춤꾼 이애주였다. 백기완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썽풀이춤’이다. 그날 우리는 민중문화와 민중예술의 어떤 신명이 거대한 시민항쟁의 분노 함성과 일치하면서 최고의 정치적 경지에 이르는 순간을 분명히 목격했다.”

 

이한열이 쓰러지고 1년 뒤인 1988년 9월 14일. 연세대 총학생회는 뜻있는 이들의 성금을 모아 이한열을 추모하는 기념비를 세운다. 위치는 학생회관 남쪽의 작은 동산, ‘한열동산’이라 불리던 곳이다. 기념비에는 그가 남긴 시가 새겨져 있다. “그대 가는가 / 어딜 가는가 / 그대 등 뒤에 내려 깔린 / 쇠사슬을 / 마저 손에 들고 / 어딜 가는가 / 이끌려 먼저 간 / 그대 뒤를 따라 / 사천만 형제가 함께 / 가야하는가 / 아니다 / 억압의 사슬은 두 손으로 뿌리치고 / 짐승의 철퇴는 두 발로 차버리자 / 그대 끌려간 그 자리위에 / 민중의 웃음을 드리우자”

 

2.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와 2개의 대선 준비모임

 

1992년 12월 18일은 14대 대통령 선거가 예정된 날이다. 14대 대선을 6개월 앞둔 6월 9일 재야는 서로 다른 정세판단과 입장 속에서 2개의 대선 준비모임을 발족한다. <민주대개혁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회의> 준비모임과 <민중대통령후보 추대와 민중의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민중연대> 준비모임이 그것으로, 전자는 ‘범민주 단일후보’로 김대중을, 후자는 ‘독자적 민중후보’로 백기완이라는 서로 다른 정치적 선택을 하며 대선을 준비한다.

 

1) 9월 26일 오후 3시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 <국민회의>는 각계 민주운동단체 회원과 시민·학생 등 2천여명이 모인 가운데 정식으로 발족한다. 이돈명 박형규 권종대를 공동상임의장으로, 김근태를 집행위원장으로 한 국민회의는 전국 18개 도시에서 대회를 열고 ‘공정선거실천운동본부’(본부장 함세웅)를 발족해 ‘국민주권 바르게 행사하기’와 ‘공정보도 실현’ 운동을 적극 전개한다. 이와 함께 국민회의는 김대중 후보 지지 운동을 펼친다.

 

국민회의는 ‘민중 주도의 민주대연합을 통한 민주정부의 수립’이라는 목표 아래 민주당과의 ‘민주대개혁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연합’을 추진했다. 핵심 논리는 범민주세력의 단일전선 형성과 그에 기초한 ‘범민주 후보단일화’를 도모하는 속에서, 민주대개혁을 할 수 있는 민주후보이자 당선가능한 민주후보로서 김대중을 내세운다는 것이었다. DJ로의 범민주 후보단일화를 주장한 김근태는, “‘승리할 수 있는 민주대연합 후보’를 세워내고자 한다”면서 “민주대연합 내부에서 민주당 후보가 현재로선 유일하고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그것을 이런 논리로 옹호한다.

 

“바로 직전의 총선에서의 독자정당과 독자후보 실험이 완전히 침몰하였으며, 그러한 실험을 둘러싸고 재야세력은 격렬한 진통을 겪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기의 통일된 독자후보를 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이런 상황을 넘어설 수 있기를 희망하였으나 운동 내부의 다수의 견해를 고려할 때 독자적인 후보의 출마는 가능하지 않았다. 그래서 차차선으로 후보가 없는 정치연합이 불가피하였다.”


“우리의 꿈은 자유?민주주의?통일 실현과 민중의 참여가 보장되는 제도 아래에서 민중 삶의 개선이다. 이러한 우리들의 오래되고 깊은 꿈은 민주대연합의 승리를 통한 민주정부의 실현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이것은 지난 80년 광주 민주화운동과 87년 민주항쟁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김근태의 말과는 다른 경과로 진행되었고 결과도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즉 민주당과의 정책연합은 가장 핵심적 쟁점이 배제된, 좋게 말해 극히 ‘제한적인 정책연합’, 나쁘게 말해 ‘일방적’인 민주당 정책을 수용한 데 불과했다. 그 과정 역시 공개 제안, 비공개 공식협상, 공개 타결이라는 당초의 원칙마저 포기한 채 대표자 서명도, 완전 공개 타결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민주당은 예정된 공동기자회견도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리고 정치연합을 평가절하 내지는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결국 ‘민중 주도의 민주대연합’은 설사 ‘민주대연합’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을 해준다 하더라도, ‘민중 종속의 민주대연합’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2) 6월 9일 김진균(서울대 교수), 오세철(연세대 교수), 김철수(민중진영 단일정당 추진위원장) 등 각계인사 99명은 기자회견을 통해 <민중연대> 준비모임 발족 선언을 한다. 기자회견을 통해 “민중진영은 이번 대선을 노동자와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계기로 삼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민중진영의 대통령 후보가 독자적으로 출마해야 한다”며 준비모임 산하에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연석회의’(가칭)를 설치하기로 했다. 87년 백기완 후보 추대와 비슷한 맥락에서 출발했지만 ‘중도사퇴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모임의 운영위원장으로는 오세철을 선출했다. 진보정당 무용론이나 시기상조론과는 달리, 이들의 정세판단은 대체로 이러했다.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 특히 1987년 6월항쟁에서 얻어낸 대중적 정치공간의 확대를 주요하게 받아들이며, 활성화하고 있는 기층대중운동의 성장을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그 위에서 현단계 민주화운동의 ‘위기’는 성장하고 있는 운동세력과 대중의 진출이 의회민주주의의 틀 내에서 그것을 수렴할 믿음직한 ‘대체 정치세력’의 부재―대안의 부재―로 인해 기회주의적인 제도야당에 의해 농단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연유한다고 본다. 따라서 민주화의 단기적 과제인 ‘군정 종식’을 위해서는 책임있는 대체 정치세력이 합법 진보정당의 결성을 통해 대안을 제시하여 ‘광범위한 대중을 새로 결집하고 훈련’해낼 수 있어야 하며, 운동역량을 볼 때 이를 위한 물질적?이념적 및 인적 자원의 동원에 한계를 느낄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민중연대는 ‘전면적 독자후보론’을 주장하면서 백기완을 민중독자후보로 선출하였다. 전면적 독자후보론은 “기존 야당의 보수화와 한계 속에서 야당의 승리와 민간민주정부의 수립 가능성은 기대할 수 없으며, 범민주 후보단일화론이나 야당과의 연합을 목표로 하는 전술적 차원의 개방적 독자후보론은 결국 부르주아 야당에 대한 지지 내지는 추종론에 불과한 것”이며, “승산에 관계없이 야당과의 차별화 전략과 사퇴하지 않는 전면적 독자후보전술을 통해 민족민주운동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이루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자적 민중후보 전술을 주도한 세력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사회당추진위원회(사추위), 민중회의, 전국노련 등 운동진영의 비주류 소수파였다. 백기완 후보진영은 1992년 대선의 주된 목표로, ①그동안 분열되어 있던 좌파진영을 선거투쟁을 통해 하나로 묶어내어 단일한 진보정당 결성을 위한 기초작업을 벌이며, ②보수 대 진보의 대립점을 부각시킴으로써 대선 후에 예상되는 정계 개편에 대비한다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선거 선전활동을 통해 진보세력을 확산시켜 이를 표로 묶어냄으로써 그 세를 확인하고 선거의 쟁점을 만들어내어 ‘정치지형’의 변화를 도모한다는 것을 부차적인 목표로 설정하였다.

 

민주대연합 노선의 중심 세력인 전국연합은 독자후보전술을 ‘분열주의’로 규정하는 한편, 전국연합 참관단체인 민중회의, 진정추 등을 내규 위반을 이유로 그 자격을 박탈하였다. 또한 민중후보로 추대된 백기완 후보는 전대협 등 전국연합 소속 단체회원들에 의해 유세장에서 사퇴 압력을 받기도 했다.


3. 아스투리아스의 <대통령 각하>와 ‘폭군’(?) 네로

 

1)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의 대표작 <대통령 각하>


1974년 6월 9일 노벨문학상(1967년)을 받은 과테말라 출신의 작가이자 외교관.언론인인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Miguel Ángel Asturias)가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 문학이 세계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이자 라틴 아메리카의 마술적 사실주의 문학을 세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마야인들의 신비주의와 저항의식을 결합시킨 그의 작품은 과테말라인들의 사회적·도덕적 갈망을 집약해서 표현한 것이다.

 

아스투리아스의 대표작 <대통령 각하>(1946)는 수십년간 독재로 얼룩진 과테말라의 역사적 현실을, 가상 국가의 독재자를 둘러싼 사회의 모습을 통해 초현실주의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즉 작품의 배경은 가상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1892년부터 1920년까지 22년간 과테말라를 독재 통치한 에스트라다 카브레라(Manuel Estrada Cabrera) 정권이 소재임을 암시하고 있다. <대통령 각하>는 대학생이던 1922년 초안을 구상하기 시작해 1932년 프랑스 파리에서 탈고했지만, 1946년에야 멕시코의 작은 출판사에서 출간할 수 있었다. 최하림의 <김수영 평전>에 따르면 “어두운 시대를 밝힌 20세기 대한민국의 시성” 김수영이 마지막으로 번역을 검토한 것이 바로 이 <대통령 각하>다.

 

아스투리아스의 <대통령 각하>에는 사탄과 천사의 두 얼굴을 가진 대통령의 심복 미겔 카라 데 앙헬, 아무도 믿지 않고 교활하고 치밀한 감시망을 통해 통치하는 대통령 각하, 대통령 각하의 정적인 카날레스 장군과 카르바할 변호사, 장군의 딸인 카밀라, 독재의 하수인으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국방 법무감, 한때 자신을 구해 주었던 앙헬을 체포함으로써 출세를 도모하는 파르판 소장, 각하의 적이 된 형을 부인하고 조카를 외면하는 후안 카날레스, 친구와 함께 당국에 체포되었다가 앙헬을 감시하라는 제안을 받고 파르판 소장의 조수로 일하게 되는 로다스 등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공통의 코드는, 비열하고 잔인한 권력의 속성과 그런 권력에 대한 공포와 생존 본능으로 지탱되는 대통령 각하의 지배체제다.

 

1960년부터 1996년까지 36년간 지속된 과테말라 내전 과정에서 숨진 사람들의 수만 따져도 어림잡아 20만 명. 그밖에 어디론가 끌려가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실종자가 5만 명, 고문과 폭력으로 인해 훗날까지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또 수십 만 명. 과테말라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비극적인 역사의 배경에는 독재자 카브레라가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카브레라는 가난한 농민들의 땅을 빼앗아 소수의 대지주들과 미국의 유나이티드 프루트 사를 비롯한 외국 투자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정책을 폈다. 그리고는 ‘짐승보다는 조금 낫지만, 그렇다고 사람은 아닌’ 마야 선주민들을 강제로 데려다가 바나나와 커피 농장에서 노예처럼 부리게 했다.

 

카브레라가 몰락한 뒤에도 권력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1944년 전국적인 총파업과 농민들의 시위로 우비코 장군의 독재정권이 마침내 쫓겨나고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들의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민주정부가 잇달아 들어섰다. 훗날 이야기하는 ‘10년간의 봄’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1954년 미CIA(당시 국장은 앨런 덜레스)가 훈련시킨 망명객들을 주축으로 한 군사 쿠데타가 발생, 과테말라의 민주정부는 바닷가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린다.

 

1954년 쿠데타로 집권한 친미우익의 독재정권에 의해 과테말라 시민권을 박탈당한 뒤 아스투리아스는 아르헨티나와 칠레, 그리고 유럽에서 망명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이후 그는 1966년에 과테말라 정부로부터 프랑스 주재 대사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에 소련 정부로부터 ‘진보와 평화를 위한 레닌 상’을 수상했다. 아스투리아스는 라틴아메리카 소설은 “이 대륙의 사회, 정치적 지형도가 되어야 하며 소설가들의 임무란 적절하게 구성하고 평가하고 비판하는 일이다”고 말한다.

 

2) 로마 황제 ‘폭군’(?) 네로와 인식의 교정


68년 6월 9일 로마제국의 5대 황제 네로(Nero)가 자살로서 삶을 마감한다. 네로하면 첫 번째 떠오르는 것은 ‘폭군’의 이미지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단편적인 사실과는 달리 네로는 꽤 인기가 있던 황제였다. 황제가 될 때 나이가 17살로 최연소 황제라는 것도 한몫했고 세네카(Seneca)라는 유능한 조언자가 옆에 있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로마의 숙적 파르티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 때문이다. 

 

네로는 평화를 회복했고 로마시민들은 이를 환영했다. 또한 네로는 인기 유지의 일환으로 하위계층의 권리보호 정책을 전개했다. 한 예로 서민들을 위해 모든 간접세를 폐지하려 했는데 상원의 반대로 세율을 낮추는 데서 그친다. 55년부터는 행정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60년까지 최고 관직인 콘술(consul, 집정관/통령) 지위를 직접 맡기도 했는데, 당시 역사가들은 그의 행정력이 상당했던 것으로 평가한다. 또한 부패방지는 네로의 핵심통치 이념이었는데 뇌물을 먹거나 부패한 행정가들을 단호하게 자르기도 했다. 그의 인기 상승에는 대규모 축제행사나 건물건축 또한 빠질 수 없는데, 수많은 체육관 시설과 극장이 건설되었고 최대 규모의 격투사 행사도 벌어졌다.

 

네로를 미친 황제로 각인시킨 그 유명한 로마의 화재사건도 후세에 잘못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64년에 일어난 9일간의 대화재로 기록에 따르면 로마시내 14개 구역중 4개가 완전히 전소되고 7개 역시 상당히 파괴되었다고 한다. 로마시는 화재가 잦았으며 당시 정황상 화재는 단순한 발화물 사고로 일어났을 가능성이 컸다. 로마에서 56km 떨어진 악티움에서 휴휴가를 즐기다가 화재소식을 들은 네로는 로마로 급히 돌아와 구제노력에 힘을 썼고 자기 돈을 내놓기도 했다. 또한 그는 집을 잃은 자들을 위해 궁전을 개방했고 음식을 제공하기 했으며 재건축계획을 세워 로마를 재건했다. 결국 ‘네로=방화범’이라는 것은 단지 이후 역사가들이나 소설가들이 네로를 악마화하기 위한 조작이었던 것이다.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많은 기독교인들을 처형했다. 이런 종교적 탄압 때문에 이후 서구 기독교사회에서 네로를 악마로 지목해서 방화범으로까지 만들었지 않을까 싶다.

 

67년 내란이 발생하고 그 혼란을 틈탄 네로의 적들이 마침내 로마에서 모반을 감행한다. 68년 6월 원로원은 스페인 총독 출신인 갈바(Galba)를 황제로 선출하고 오히려 네로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한다. 6월 8일 로마를 탈출한 네로는 마지막까지 그의 편에 있던 해방노예 파온의 별장에서 자살한다. 황제에 오른 지 14년, 31살이었다. 당시 역사서에 따르면 네로의 죽음을 반긴 로마 원로원과 귀족계층과는 달리 평민계급은 분노했다고 한다. 

 

이후 로마는 황제가 되기 위한 내전, 즉 “Year of the Four Emperors”가 시작된다. 1년 동안 4명의 황제가 갈린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네로의 인기는 계속 되었는데 특히 동부 그리스, 터키 지방 사람들은 네로의 즉음을 믿지 않은 채 그의 복위를 기다리기도 했다. 더욱이 네로라고 주장하면서 황위를 이으려는 자들이 있을 정도로 네로의 인기는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3. 맺음글 : 찰스 디킨스와 ‘보통 사람들에 대한 공감능력’

 

“그는 가난하고 고통 받고 박해 받는 자들의 동정자였으며 그의 죽음으로 인해 세상은 영국의 가장 훌륭한 작가 중 하나를 잃었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시인들의 묘역에 안장된 찰스 디킨스(Charles John Huffam Dickens)의 묘비에 적힌 글귀다.

 

1870년 6월 9일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 디킨스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노동자들은 주막에서 “우리의 친구가 죽었다”하면서 슬퍼했다고 한다. 그의 사망 소식에 당시 신문과 잡지들은 며칠 동안 그의 일대기로 지면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한 신문의 부고는 디킨스의 소설이 갖는 시대적 의미를 보여준다. “디킨스가 써서 유통한 소설은 정말 그날의 토픽이었다. 그의 소설은 정치나 뉴스와 거의 흡사하게 보였다. 마치 그게 문학에 속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사건인 것처럼.”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올리버 트위스트> <크리스마스 캐럴> <데이비드 코퍼필드> <위대한 유산> <두 도시의 이야기> 등이 있다. 디킨스는 특히 가난한 사람에 대한 깊은 동정을 보이고, 빅토리아 시대의 빈곤과 사회의 악습에 반격을 가하면서, 사회에 대한 실제의 일들의 묘사를 이야기 형식으로 완성했다. 디킨스는 상류사회에 대한 회의를 간직하고 있었다. 한 예로 영국 귀족주의의 속물근성에 대한 그의 풍자—그는 그의 작품 속에서 그러한 인물을 “고귀한 냉장고”라고 부른 바 있다—는 놀라울 정도로 익살맞다.

 

그의 전 작품을 통해, 디킨스는 특히 보통 사람들에 대한 공감을 유지하고자 했다. 돈을 벌기 위해 12살 때 런던의 한 구두약 공장에 견습공으로 취직하여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루 10시간의 노동을 해야 했다. 이 경험은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으며, 자서전적인 소설인 <데이비드 코퍼필드>에는 중산층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어린 찰스가 노동자로 전락하여 느끼는 고통스러운 좌절감이 잘 그려져 있다.

 

디킨스의 탁월성은 대중성과 사회 현안에 대한 성찰에 있다. 디킨스의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보통 사람들과의 충심어린 연애였다. 그는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소설 낭독을 위해 영국 곳곳과 미국을 여행했다. 가는 곳마다 대대적인 성공이었고 대중들의 눈물 어린 환대를 받았다. 그의 낭송 여행은 개인적 이벤트로 생각되지 않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공적이며 국제적인 행사로 받아들여졌다. 디킨스에 대한 대중의 사랑은 평생 변함이 없었다. 디킨스는 소설가로서 놀라울 정도의 대중적 인기를 누렸고, 현대 주요 일간지가 사회 현안에 미치는 영향만큼이나 그의 의견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물론 30년 동안 당대의 최고 작가로 활동한 그에 대해 비판이 없을 수는 없다. 컵 안에 물은 반‘만’ 차 있는 것일까, 아니면 반‘이나’ 차 있는 것일까? 함께 고민해볼만한 한 가지 비판을 소개하는 것으로 오늘의 글을 마무리한다. “디킨스는 근본적인 감수성과 관점에 있어 민중문화의 상상력에 친근했으나 결코 역사적 변혁의 현실적인 세력으로서 민중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고 그렇게 됨으로써 시민문학으로서의 그의 궁극적인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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