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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소장 칼럼

  • [작은 역사 이야기 '오늘'] 12. 5월 26일 ‘공포정치’와 ‘용기 있는 삶과 내부고발자’

 

 

 

조현연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5월 26일 ‘오늘’의 주제는 ‘공포정치’와 ‘용기 있는 삶-내부고발자’ 두 가지다. <공포정치>에서는 ①프랑스 혁명기의 공포정치와 ‘기요틴’ ②부산정치파동과 ‘공포의 시간’ ③‘피의 정복자’ 코르테스와 초콜릿에 대해 이야기한다. <용기 있는 삶-내부고발자>에서는 ①브래들리 매닝 일병의 양심선언과 ②내부고발과 한국사회 현실에 대해 말한다. 맺음말에서는 ‘11년의 세월, 거꾸로 가는 남북관계’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1. 공포정치

 

1) 프랑스혁명기의 공포정치와 ‘기요틴’(길로틴, Guillotine)

 

공포정치(La Terreur, Reign of Terror)란 말 그대로 공포의 동원을 통해 정권을 유지하거나 창출하려는 통치방식을 말하며, 향후 테러리즘의 어원이 된다. 1814년 5월 26일은 프랑스 공포정치를 상징하는 기요틴(단두대)의 제안자인 조세프 기요탱(Joseph Ignace Guillotin) 박사가 사망한 날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발생한 이후 1793년 지롱드당 의원을 국민공회에서 추방하고 권력을 잡은 자코뱅당이 반혁명 용의자에 대한 법령을 제정하고, 공안.보안 두 위원회의 군사.관료 지배체제를 완성한 날부터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혁명정부의 권한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위반자에 대한 처형도 증가되었다. 공포정치 기간 중에 반혁명 용의자로 체포된 사람은 약 30만 명, 단두대에서 처형된 사람은 대략 1만 7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자코뱅당의 철저한 공포정치로 대외전쟁은 성공적으로 추진되었고 재정위기도 극복했으나, 국민들의 반감을 극복할 수는 없었다. 1794년 7월 ‘테르미도르의 반동’(Thermidorian Reaction)으로 독재자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됨으로써 공포정치는 막을 내렸다.

 

기요틴은 프랑스혁명 당시 사용한 사형 기구로 1792년 정식 사형 도구가 되었다. 1791년에 프랑스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계급에 상관없이 참수형에 처할 죄수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왕의 주치의이자 외과학회의 사무국장이던 안토닌 루이 박사와 파리 의료기기부의 해부학 교수이자 의사인 기요탱 박사를 중심으로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회는 이전처럼 무딘 도끼나 교수형으로 사형수의 형을 집행하는 것은 인도적이지 않고, 형 집행자들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주기 때문에, 사형수들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기구를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끔직한 기구는 1791년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는 때 사형에 처할 죄수들을 아이러니하게 최대한 고통을 덜 주기 위해 고안해 낸 것이다. 실제로 이 기구의 설계에 기요탱 박사의 공헌은 미미하고, 안토닌 루이 박사가 기요탱 박사가 제안한 생각을 발전시켜 설계한 뒤 이 기구를 만들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도,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인 당통도, 과학자 라부아지에도 단두대로 죽었다. 단두대로 많은 사람을 처형한 로베스피에르도 이 기구로 죽었다. 단두대를 고안한 기요탱도 단두대에서 죽었다고 전해지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는 1814년 5월 26일에 자연사하였다.

 

프랑스에서 기요틴의 사용은 1977년이 마지막이었으며, 1981년에 사형제가 폐지되며 기요틴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기요틴은 히틀러가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데 사용하였으며 그 수만 2만명을 넘는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 때도 남베트남 간수들에 의한 포로 처형 기구로 사용되었다.

 

2014년 11월 15일 호주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의 안전과 생명에 관련 없는 핵심 규제들을 중심으로 부처가 그 존재 이유를 명확하게 소명하지 못하면 일괄해서 폐지하는 ‘규제 길로틴’을 확대해서 규제혁명을 이룰 것”, “국민의 생명·안전과 관련 없는 규제를 올해까지 10%, 2017년까지 20%를 일괄적으로 축소할 예정”, “규제 타당성 여부를 조속히 검토해서 일자리 창출과 투자를 가로막고 있는 규제들은 한꺼번에 단두대에 올려서 처리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규제 길로틴’. 뭔가 섬뜩하다.

 

아니나 다를까, 12월 28일 박근혜 정부는 국무조정실 주관으로 ‘민관합동회의’를 열고 모두 114개의 ‘규제 기요틴 과제’를 범정부적으로 폐지 또는 완화하겠다고 발표한다. 이에 대해 정의당 정책위원회(의장 조승수)는 바로 다음날 <재벌과 경제단체의 민원을 전격 수용한 ‘규제기요틴(단두대)’>란 제목의 정책논평을 통해 핵심을 찌르며 이렇게 비판한다.

 

“규제 기요틴(규제 단두대)이란 규제를 단기간에 대규모로 개혁하는 방식으로, 말 그대로 재벌과 경제단체에 연말 선물을 듬뿍 안겨주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박근혜 정부는 규제를 무슨 암덩어리로 규정하고 ‘규제완화’를 경제혁신의 지름길이라고 떠들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재벌과 기업의 부담을 완화해주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재벌 대기업들의 부담을 완화해주는 것이 투자 및 고용확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정부 주장의 근거가 대단히 취약하다는 것은 이미 수년간 확인되어 왔다. 오히려 친기업적 규제완화가 경제양극화를 심화시키고 국민경제의 후생을 후퇴시켜왔다는 것이 공통된 견해다.… 정부는 재벌 대기업의 숙원을 속도감 있게 해결하기 위한 ‘친재벌 기업친화적 규제기요틴’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2) 부산정치파동과 ‘공포의 시간’

 

부산정치파동이란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재선을 확실히 하고, 독재의 기반을 굳히기 위해 한국전쟁 중인 1952년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폭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국회의원을 연행하고 구속한, 일련의 정치적 파행을 말한다.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장기집권을 위한 첫 번째 개헌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임시수도 부산에서 시작됐다. 부산일보사의 <임시수도 천일>(1985)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여느 때보다 일찍 찾아든 초여름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52년 5월 26일 임시수도 부산의 아침이었다. 동래 온천장을 출발한 국회 통근버스는 광복동 동아극장 앞에서 국회의원 30명을 더 태워 모두 47명을 싣고 임시의사당이 있는 경남도청 정문을 들어서려다 집총 헌병들의 검문을 받았다. 26일 0시를 기해 발동된 계엄령 아래선 어떤 차량도 일단 검문을 받아야 한다는 헌병들의 주장에 맞서 1시간을 버티던 국회 버스는 결국 군용 크레인에 의해 사람이 탄 채로 헌병대에 끌려가 몇몇은 국제공산당 음모사건 피의자로 구속됐고, 이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었던 골수 야당의원 30명은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아 한여름 내내 숨어 지내야 했다.

 

이로부터 꼭 39일 만인 7월 4일 야당의원이 제의한 내각책임제 개헌안과 정부 제안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교묘히 혼합 절충한 이른바 발췌개헌안이 온갖 위협과 탄압에 의해 통과됐다. 이 무덥고 지루했던 39일간의 정치적 혼란이 좁은 의미의 부산정치파동이었다. 이 개헌으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국민 직선으로 재선됐으며, 1960년 4.19로 인해 하야할 때까지 12년 장기집권의 기틀을 다지게 됐다.”

 

당시 이승만 행정부는 한국전쟁 발발로 부산에 피란중인 가운데, 전쟁 중 터져나온 행정상의 무능력과 부정부패,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민간인학살 사건 등은 이승만 대통령의 권위를 실추시켜 다가온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연임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대통령 재선이 현행 간선제로는 불가능해지자 이승만은 재집권을 위해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의 상하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그러나 52년 1월 국회에 상정된 개헌안을 재석 163명 중 가 18, 부 143, 기권 1로 부결시킴으로써 정부와 국회간의 알력이 표면화되었다.

 

이승만은 국민회.조선민족청년단(족청).대한청년단.노동총연맹 등 어용단체를 총동원해 관제데모를 부추겼고, 정치깡패집단인 백골단.땃벌떼.민중자결단 등의 이름으로 된 벽보.전단이 부산시내를 뒤덮었다. 국회 해산을 요구하는 ‘관제민의’를 동원하여 국회의원을 위협한 것이다. 이어서 이승만은 장면 국무총리를 해임하고 신라회를 이끌던 장택상을 임명, 개헌 지지 쪽으로 끌어들였다. 5월 25일 국회 해산을 강행하기 위하여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의 23개 시.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범석을 내무장관에, 원용덕을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에 임명하였다.

 

5월 26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 통과를 강행하는 한편, 내각제를 주장하는 야당 의원 50여 명을 헌병대가 연행하였고, 이 가운데 정헌주, 이석기, 서범석, 임흥순, 곽상훈, 권중돈 등 12명을 ‘국제공산당 사건’을 조작해서 구속시키는 정치파동을 일으켰다. (당시 헌병대가 야당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통째로 끌고 사라지는 모습은 이 사건을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으로 남아있다.) 이에 대해 부통령 김성수는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위’라고 반발하면서 사표를 제출하였다. 정치 파동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 여론이 쇄도하자 이승만은 6월 4일에 국회 해산을 보류한다는 입장을 표명한다.

 

이처럼 정국의 혼란이 가중되자 6월 20일 이시영.김성수.장면.조병옥.김창숙 등 야당의원 60여 명은 국제구락부에서 <호헌구국선언>을 꾀하였으나, 괴한들의 습격으로 무산되었다(‘국제구락부 사건’). 6월 25일 ‘자작극’ 의혹을 산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또한 6월 30일에는 민중자결단이라는 관제조직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하고 80여 명의 국회의원을 연금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장택상을 중심으로 한 신라회가 주축이 되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안과 내각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안을 발췌해 혼합한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제출했다. 7월 4일 군?경들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국회의원들은 기립하는 방식으로 투표하여 출석 의원 166명 중 찬성 163표, 반대 0표,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개정 헌법은 7월 7일 공포되었다.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의 계엄군 부산파병 거부, 국회의 계엄해제 결의에도 불구,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욕구를 충족시킨 7월 28일에 이르러서야 계엄을 해제했다.


3) ‘피의 정복자’ 코르테스와 아즈텍 제국의 멸망, 그리고 초콜릿

 

페르난도 코르테스 몬로이 피사로 알타미라노(Fernando Cortés Monroy Pizarro Altamirano)는 멕시코지역의 아즈텍 문명을 정복한 스페인의 정복자이다. 정복자들은 하나같이 원주민을 살해하거나 노예로 삼고 문화를 말살했으며 재물은 유럽으로 옮겨 현지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코르테스는 ‘최악의 학살자’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기묘하게도 잉카 제국을 무너트린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먼 친척관계이기도 하다.

 

코르테스는 유카탄 반도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스페인 탐험대장으로 내정되었다. 그러나 그의 승승장구를 두려워한 쿠바 총독 벨라스케스가 이를 번복하자, 1519년 병사 508명과 말 16필을 11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독자적으로 유카탄 반도에 상륙하였다. 코르테스는 멕시코 최초의 스페인 식민지인 베라크루스라는 마을을 건설하였고, 유카탄 반도의 마야족들과 전투를 벌이면서 부족들을 점령해나갔다. 총과 대포, 말이나 군견에 관해서 듣도 보도 못한 원주민들은 쉽게 항복하였고 그 과정에서 약탈과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1921년 5월 26일 코르테스는 아즈텍 왕국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으로 진군을 시작해 75일의 전투 끝에 이를 정복하였다. 아즈텍의 왕인 몬테수마 2세를 체포하고 금과 보물을 찾기 위해 왕을 고문한 뒤 살해하였다. 1522년 코르테스는 테노치틀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공포정치 속에서 아스텍 문명은 멸망했다. 총인구 500만, 수도 30만명의 거대한 제국이 코르테스와 600여명의 침략자들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한 것이다. 또 스페인의 정복자들에 의해 옮겨진 천연두가 창궐하면서 수많은 아스텍 인들이 죽어나가기도 했다.

 

1540년 코르테스는 예순에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유럽에 초콜릿을 처음으로 전파했다. 중앙아메리카를 점령한 스페인 정복자들이 유럽에 초콜릿을 소개한 뒤 그것은 유럽의 왕과 귀족의 입맛을 단숨에 사로잡아 그들이 가장 즐기는 음료수가 되었다. 피의 정복과정에서 발견한 선물이 바로 달콤한 초콜릿이었던 것이다.

 

마야 족에게 카카오는 인간의 심장을 의미한다고 한다. 호수 주위의 기름진 땅에서 카카오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면 카카오 열매가 갈색으로 변하는데 그 열매를 따서 속을 파내고 그 안에서 씨를 뽑아낸다. 1개의 카카오 열매에는 30~40개의 아몬드 모양의 씨가 들어있는데 그 씨를 곱게 갈아 열을 가하면 걸죽한 액체가 된다. 코르테스가 아즈텍을 공격하는 중에 한 인디언이 지쳐있는 병사들에게 검은 물을 주었는데 그 음료수를 마신 병사들이 금방 기운을 회복했다고 한다. 카카오를 으깨서 만든 그것이 바로 고대 마야와 아즈텍의 마시는 초콜릿이었다.

 

인디언들은 그 검은 물을 하느님께서 주신 음료수라며 굉장히 귀하게 여겼으며 스페인어로 초콜라테(chocolate)라고 발음되는 이것의 어원은 멕시코 인디언 말인 초코라틀(chocolatl)에서 유래되었다. 초콜(chocol)은 ‘뜨거운’이란 뜻의 마야 언어이고 아틀(atl)은 아즈텍 말로 ‘물’을 의미했다. 이 두 단어가 합쳐져 ‘뜨거운 물’이라는 뜻으로 ‘초콜라테’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에는 구한말 고종황제 시절, 고종의 음식 시중을 들었던 손택이라는 여인이 초콜릿을 진상함으로써 처음으로 초콜릿이 소개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초콜릿이 일반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해방 후 미군정 시대 때부터이며 본격적으로 보급된 된 것은 한국전쟁 때였다. 맥아더 포고령 1호에 따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지역을 점령한 미군들이 나눠주는 달콤한 초콜릿을 처음 맛본 아이들이 미군을 보면 “헤이, 기브 미 쪼코렛!”을 외쳐댔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슬픈 역사의 한 장면이다. 당시 미군의 배낭에는 피로 회복과 에너지 충전을 위해서 허쉬 초콜릿이 비상식량으로 들어 있었던 것이다.

 

달콤한 초콜릿, 그 뒤에 숨어있는 고대 마야와 아즈텍, 그리고 해방정국과 한국전쟁기의 쓰라린 비극의 역사를 알게 되면 그 맛은 좀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2. 용기 있는 삶-내부고발자

 

1) 브래들리 매닝 일병과 양심선언

 

5년 전인 2010년 5월 26일, 브래들리 에드워드 매닝(Bradley Edward Manning) 미 육군 일병이 이라크 바그다드 현지 군부대에서 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미군 교도소에 미결수로서 수감되었다. 그는 최대 규모의 미국의 군사 기밀 사항이 포함된 내부 자료를 위키리크스에 제공한 내부고발자이다.

 

매닝은 지난 2007년 미국 육군에 입대하여 2009년 10월에 제10산악사단에 배속되고서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정보분석병으로 근무하는 동안 국방부의 내부 전산망에 접속해 기밀문서를 유출하여 위키리크스에 제공하였다. 내용은 물론 그 양에 있어서도 사상 최대의 기밀 유출 사건이었다. 기밀문서에는 2007년에 미군의 아파치 헬리콥터가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에서 민간인을 학살하는 영상,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미군 군사작전 일지가 담겨 있었다.

 

2010년, 위키리크스의 잇단 폭로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특히 4월 5일 공개된 <부수적 살인(Collateral Murder)> 동영상은 충격적이었다. 아파치 헬기의 30mm 기관포가 불을 품었다. 지상에 있던 일군의 사람들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미군의 타깃이었다. 쓰러진 이들을 살피러 접근하던 일군의 민간인들과 그들이 타고 온 봉고차에도 총격이 가해졌다. 헬기의 병사들은 그들이 위협적인 존재라며 ‘사격 인가’를 내려줄 것을 거듭 요청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들이었으며 아이들까지 있었다.

 

공개된 동영상을 보면 미군 헬기병들은 마치 게임하듯 사격했다. “계속 쏴”, “잘했어” “저 XXX들 죽는 것 좀 봐”…. 총기를 가지고 있다고 오인한 2차 사격 결과 그들이 비무장 민간인들이었으며, 아이들까지 부상한 것으로 확인되자 그들은 부모 탓을 했다. “왜 아이들은 데리고 와서….” 그 가운데 2명은 로이터통신 기자였다.

 

<부수적 살인> 동영상 공개로 위키리크스와 그 대표 줄리아 어산지(Julian Paul Assange)는 단숨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일지(war log), 미 국무부 외교전문 공개는 전 세계를 뒤흔들어놓았다. 매닝이 희망했던 대로 세계는 그가 공개한 것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의 공개는 ‘아랍의 봄’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튀니지와 이집트로 그 불똥이 튀었다. 통치자의 정치부패와 추악한 검은 뒷거래 실상이 드러나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것은 들불처럼 예멘, 리비아, 시리아 등으로 확산되었다. 미국 정부는 어산지를 ‘미국의 공적’으로 선포했다.

 

2013년 2월 28일 메릴랜드 주 포트미드 군사법원에서 브래들리 매닝은 <부수적 살인(Collateral Murder)>이라는 영상자료와 전쟁 일지와 국무부 외교 전문을 위키리크스에 제공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재판관의 우려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두진술에서 35쪽 분량의 내용을 읽어 나가면서 자료를 유출한 경위와 이유를 상세히 밝혔다. 2013년 8월 21일 매닝은 미국 메릴랜드주(州)의 포트미드 군사법원에서 간첩법 위반과 절도 등 20개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어 징역 35년형을 선고받았다.

 

국제앰네스티는 오바마 대통령이 매닝 일병이 선고 받은 형기를 그가 이미 복역한 기간으로 감형하여 즉각 석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미국 정부는 그에게 사실상 무기징역형을 내려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신에 잘못된 대테러 전쟁 상황에서 벌어진 인권 및 인도법 침해 사례를 조사하는 데 집중했어야 했다”고 전한다.

 

재판 전에 이미 매닝 일병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그가 공익을 위해 행동했다는 증거를 제출할 수 없다고 규정한 재판관의 주장에 대해, 위드니 브라운(Widney Brown) 국제앰네스티 선임국장은 “매닝 일병이 이미 정보 유출에 대한 유죄를 인정했기 때문에 미국은 계속해서 그를 스파이 법에 따라 기소하고 심지어는 그에게 ‘이적행위’ 혐의까지 씌우고 있으며 이는 정부의 부정행위를 폭로하려는 사람 모두에 대한 가혹한 경고로 비춰질 뿐”이라고 말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이 사건은 미국의 구식 스파이 법을 수정하고 대중이 알아야 하고 또 알 권리가 있는 정보를 밝히려는 사람들에 대한 보호를 강화해야 할 긴급한 필요성을 보여준다”고 전한다.

 

2) 내부고발.양심선언과 한국사회 현실

 

내부고발이란 단체나 조직에서 저질러지는 부정부패 같은 부조리를 내부 구성원이 알게 되어 공익적 목적을 위해 이를 폭로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개인의 양심적 판단, 전문 직업적 윤리, 사회 일반에 대한 책임 등에 토대를 둔 윤리적 행위로 양심선언, ‘휘슬 블로잉’(Whistle-blowing)이라고도 한다. 내부고발자는 딥스로트(Deep Throat)라고 하는데, 익명의 제보자를 뜻하는 딥스로트는 닉슨 행정부 당시 워터게이트 사건의 내부고발자의 암호명으로 사건 후에 고유명사처럼 사용되기 시작했다. 

 

1987년 이후 민주화 진전과 함께 본격화된, 세상을 바꾸고 사회를 뒤흔든 내부고발의 역사는 1990년 5월 이문옥 전 감사관의 양심선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직 구성원이 내부의 부정부패, 비리, 불법, 비윤리 행위를 알리는 행위’로 정의할 수 있는 내부고발은 1990년대 초만 하더라도 양심선언자라는 표현이 더 익숙했으며, 그때 내부고발 선구자인 1세대가 자리 잡고 있다. 이문옥 전 감사관 외에 1990년 10월 국군보안사령부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윤석양 이병, 1992년 3월 제14대 총선 때 군 부재자투표 부정을 고발한 이지문 중위, 같은 해 8월 14대 총선 당시 자행되던 관권선거를 폭로한 한준수 전 충남 연기군수가 바로 그들이다. 내부고발자 중에 한 사람인 이지문은 이렇게 말한다.

 

“지난 20년간의 내부고발 역사를 돌아보면 이러한 내부고발이 없었다면 이들이 제기한 부정과 비리, 예산 낭비, 불법이 과연 세상에 제대로 알려졌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부고발은 누구보다 문제와 잘못을 잘 아는 내부인에 의한 고발이라는 점에서 ‘적발’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부고발의 중요성은 사후 적발의 의미보다 누구든지 비리나 부패 등을 저지르면 언젠가는 적발된다는 사실을 각성시킴으로써 사전 예방의 의미가 더 크다는 데 있을 것이다.”

 

내부고발자의 역할이 국가권력의 부패나 반인륜범죄 등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건이라고 할 때, 전도된 상벌 처리는 문제를 더 악화시킬 따름이다. 즉 내부 고발의 경우 상을 주는 것이 마땅함에도, 오히려 조직 내에서의 파면, 직위 해제, 승진 불이익 또는 집단 따돌림 등의 보복을 받아 왔다. 또 민형사상의 법적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도 대단히 크다.

 

이문옥 감사관의 경우는 공무원 기밀 누설죄로 구속되고 파면 처분을 받았다(이후 6년간의 법정 투쟁 끝에 1996년 4월 대법원으로부터 이를 공개하는 것이 공익에 부합하다면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윤석양 이병은 양심선언 이후 특수군무이탈의 혐의로 수배, 2년만에 체포되어 2년형을 받았다. 이지문 중위는 투표 부정 고발 직후 이등병 파면 처리되었다(이후 4년간의 법정 투쟁 끝에 1995년 2월 파면처분취소 확정 판결을 받아 중위 신분으로 명예 전역했다). 한준수 군수의 경우는 선거법 위반을 이유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파면처분취소 소송에서도 패소했다.


3. 맺음글 : 11년의 세월, 거꾸로 가는 남북관계

 

1) 2004년 5월 26일 북측 금강산초대소. 남북 간의 실질적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을 목적으로 제1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이 열렸다.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은 대한민국 국방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무력부 간에 이루어지는 회담을 말한다. 1차 회담은 6.15 남북 공동선언이후 군사 분야에서 실질적인 진보가 없었음을 지적하며 남북간 군사적 긴장완화를 위해 최초로 열린 회의이다. 이 회담에서는 서해상의 우발적 무력충돌 방지 및 군사분계선 지역에서의 선전활동 중지 및 선전수단 제거에 관한 기본입장을 교환했다.

 

이후 2007년 7월까지 총 6차례의 장성급 회담을 개최했다. 6차례의 회담에서 양측은 군사적 긴장완화를 위한 실질적 사안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으며, 서해상우발적 무력충돌 방지, 군사분계선 지역에서의 선전활동 중지 및 선전수단 제거, 공동어로수역 설정문제, 철도.도로 통행의 군사보장합의서 채택 문제, 남북간 경제협력.교류 사업을 위한 군사적 보장 문제 등이 주요 의제였다.

 

6월 3일 설악산에서 열린 제2차 회담에서는 21시간에 걸친 난항 끝에 <서해 해상에서 우발적 충돌방지와 군사분계선 지역에서의 선전활동 중지 및 선전수단 제거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는 등 진전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제3차 회담부터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의 양국간 해상 불가침 경계선 설정 문제가 핵심 쟁점으로 부각되면서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 그럼에도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완화와 신뢰구축을 위한 실무 차원의 구체적 논의를 진행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2) 11년의 시간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한반도 상황은 노무현 정부 때와는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최근 북한의 도발적 행동과 북한 내부의 극도의 공포정치가 알려지면서 많은 국민들이 경악하고 있다.” 지난 5월 15일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공개 처형 첩보를 근거로 박근혜 대통령이 한 공개 발언이다. 이에 대해 북한은 불행한 가족사까지 언급하면서 박 대통령에 대한 거친 독설과 살벌한 표현으로 되받아치고 나왔다.

 

권력 기반의 불안정성 때문인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군사적 모험주의’가 계속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이를 최대한 악용하여 이른바 ‘안보장사’를 통해 공포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긴장과 대결의 고삐를 늦추지 않으면서 오히려 이를 부추기고 있는 듯한 양상을 띠기도 한다.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와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한반도 배치 추진 등에서 엿볼 수 있듯이 안보장사는 군비 증강과 직결되기 때문이라서 그런 걸까?

 

박근혜 정부 하에서의 남북관계에 대해 전문가들은 대체로 비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다. “올해 남북관계는 사실상 끝났다. 남북관계 개선 희망을 접고 남북한 간 긴장고조가 가져올 수 있는 군사적 충돌 가능성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적대적 상호의존’의 갈등관계 속에서 불붙은 쌍방의 협박과 위협의 정치에서 죽어나는 것은 남과 북의 평범한 서민들이다.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돌파구를 찾아내지 않으면 반복되는 대결의 악순환 속에서 모두에게 불행인 역사가 되풀이될 따름이다. 좋은 방안은 이미 오래 전부터 논의되었고 또 많이 나와 있다. 문제는 한반도 평화를 향한 양측 최고 권력자의 실천 의지와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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