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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소장 칼럼

  • [작은 역사 이야기 '오늘'] 10. 5월 12일 ‘봉쇄된 자유’와 ‘황우석 게이트와 나이팅게일 선서’

 

조현연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5월 12일 ‘오늘’의 이야기 주제는 두 가지다. <봉쇄된 자유>가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황우석 게이트’와 ‘나이팅게일 선서’>다. 봉쇄된 자유에서는 ①독일 비스마르크 총리의 사회주의자 탄압법과 ②국가보안법의 모태인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살펴볼 것이다.

 

1. ‘봉쇄된 자유’

 

1)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채찍과 당근: 사회주의자 탄압법(진압법)과 복지

 

“당면한 문제들은 오직 철과 피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1871년 5월 12일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가 총리에 취임하였다. 7년 뒤인 1878년 그는 독일 황제 빌헬름 1세 저격사건을 빌미로 ‘사회주의자 탄압법’을 제정하여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정당과 단체를 비롯한 비판적인 단체들을 불법화시킨다. 이 법의 제정으로 ‘불온한’ 정당의 당원들은 정부의 철저한 탄압을 받았다. 독일사회주의노동당(1890년 독일사회민주당으로 당명 변경)과 각종 노동조합이 해체되고 150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국외로 추방되었다.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이 증가할수록 좌파 정당을 지지하는 동조 세력도 늘어나, 1878년에 4만 1500명이었던 지지자들의 숫자가 1890년에는 14만 3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이러한 증가 추세는 비스마르크 퇴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유지, 1912년 의회에서의 사회민주당 의석은 110석으로 늘어나 제1당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자 탄압법의 제정을 통하여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한 사회 도전세력을 강압적으로 억누르는 정책을 전개함과 동시에 노동계급에 대한 국가적 보장 장치를 제공함으로써 혁명의 위험을 사전에 예방하고자 했다. 흔히 비스마르크의 정책을 ‘채찍과 당근’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사회주의자 탄압법은 달리는 말에 가해지는 ‘채찍’이었고, 대중적 저항을 잠재울 ‘당근’은 노동자들의 생존을 보장해 주는 일련의 사회 입법(Bismarck's social legislation)’이었다.

 

1881년 11월에 빌헬름 1세는 노동자에 대한 국가적 보호와 부양 정책의 실시를 역설하는 교서를 비스마르크를 통해 발표하였다. 이후 독일은 세계 최초로 광범위한 사회복지 제도를 실시하는데, 1883년에 ‘의료 보험법’, 1884년에는 ‘산업재해 보험법’, 1889년에는 ‘노령 및 폐질 보험법’이 제정되었다. 이러한 사회 복지 입법의 재정은 노동자와 사용자가 공동 분담하는 원칙이 채택되었으며, ‘노령 및 폐질 보험법’에만 국가의 보조금이 지급되었다.

 

비스마르크의 사회입법에는 4가지 원칙이 존재했다. 광산업, 조선소, 건축업 등에 종사하는 저소득 임금노동자를 의무적으로 가입시킨 강제보험의 원칙, 정부가 보험을 독점하고 엄격한 행정통제를 가하는 중앙통제의 원칙, 보험을 국가의 책임영역으로 간주하고 이윤동기 등이 침투하지 않도록 차단시킨 사보험회사 배제의 원칙, 비용은 고용주가 부담하나 정부의 원조도 요구된 정부보조금 지급의 원칙 등이 그것이다.

 

비스마르크의 사회입법은 그 정치적 의도와는 무관하게 독일 사회정책의 초석을 다졌으며,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게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쳐 복지정책의 기반을 이루게 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회유하기 위한 이러한 복지 정책은 비스마르크가 기대했던 만큼의 정치적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사회주의자 탄압법으로 야기된 국내 정치의 긴장 상태는 해소되지 않았으며,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입법 조치들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2) 국가보안법의 모태, 일제의 치안유지법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공포된 긴급 칙령을 기본으로 해서 1925년 5월 12일 제정된 치안유지법은 ‘국체’(천황 통치체제)를 부정하는 운동을 단속하는 법률이었다. 일제는 당시 일본 국내의 사상범뿐 아니라 식민통치에 맞서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억누르기 위해 독일의 사회주의자 탄압법을 모방해 이 법을 만들었다. 1945년 10월 4일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 총사령부가 ‘정치적, 공민적, 종교적 자유에 대한 제한의 제거에 대한 사령부 각서’에 의해 폐지할 것을 명령함에 따라 같은 해 10월 15일 폐지되었다.

 

1925년 제정되었을 때는 최고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의 처벌이던 조항이, 1928년 개정되면서 최고 사형까지 가능하도록 했다. 태평양전쟁 직전인 1941년 3월 10일 전면적으로 개정되면서 7조에 불과했던 법률 조항을 전면 보강한 65조의 새로운 치안유지법이 공포되었다. 이에 의해 처벌은 더욱 강해졌으며 더불어 ‘예방구금’(형기가 만료된 후에도 개전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을 범죄 예방 차원에서 계속 구금하는 처분)제도도 도입되었다.

 

처음에는 일본 공산당이 적용 대상이었지만 대상은 멈추지 않고 확대하고 사회주의와 노동 운동과 종교가도 경계의 대상이 되었고 나중에는 일체의 반정부적인 언론이 탄압되었다. ‘치안유지법 피해자연맹’은 치안유지법에 의해 고문 또는 처형당한 피해자 수는 일본에서만 75,000명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일제가 만든 치안유지법의 기본 정신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예컨대 치안유지법 제1조 “국체 변혁을 목적하여 결사를 조직한 자”가 국가보안법 제1조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조직을 구성한 자”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사상·양심의 자유 짓밟아온 일제 치안유지법의 잔재>(1993년)에서 동국대 한상범 명예교수는 “1945년 이후 남북분단과 냉전시대의 개막으로 남과 북 어느 곳에서도 사상의 다원주의가 실현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일제가 치안유지법을 통해 이른바 ‘반국가 사범’을 처벌한 방식과 동일하게 이승만 정권은 일제 친일 관료들을 영입해 ‘반공이 곧 애국’이라는 사상을 강요하며 반대파를 모두 빨갱이로 몰아붙였다.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자유민주주의’는 ‘반공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것은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일체 거부했던 일제의 치안유지법에 근본적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의존한 박정희 정권의 등장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와 전시총동원체제를 강화하면서 이런 추세를 더욱 가속화했다. 

 

2. ‘황우석 게이트’와 ‘나이팅게일 선서’

 

1) ‘황우석 매카시즘’과 대국민 사기극과 민주노동당

 

“맞춤형 줄기세포가 없었다.” 2006년 5월 12일 검찰이 발표한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의 줄기세포 논문 조작 사건 최종 수사 결과였다. 황우석에 대해서는 28억원 연구비 횡령 및 사기, 난자 불법 사용(생명윤리법 위반) 등의 혐의를 적용해 불구속 기소했다.

 

1년 전인 2005년 5월 황우석 교수팀이 배아복제를 통한 인간배아줄기세포 추출에 다시 성공했다는 보도는 한국 사회를 열광적인 흥분 상태로 몰고 갔다. 2005년 가장 많이 검색된 인물이 바로 황우석이었을 정도다. 황우석 교수와 그의 연구를 향한 비판은 일시에 잦아들었으며 찬사만이 허용되는 분위기였다. ‘황우석 신드롬’은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래서 찬성한다는 거요, 반대한다는 거요?” 선택지는 단 두개밖에 없었다. 찬성하던지, 반대하던지. 그 사이의 어떤 의견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들으려고 하지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의 연구에 대해서 환영 논평을 내지 않다는 사실만으로 민주노동당은 뭇매를 맞았다. 왜 이 위대한 연구와 영웅적인 연구자를 환영하지 않는 거야? 당시 민주노동당을 공격하는 이들에게는 “왜”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환영하지 않는” 것만이 관심사였고, 과학에 무지하다거나 장애인들의 고통을 모른다는 둥 자기들 맘대로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여야를 불문한 정치권의 ‘황우석 마켓팅’과 대중들의 열광 속에서 ‘황우석 신드롬’은 ‘황우석 매카시즘’으로 나아갔다.

 

이와 관련해 당시 민주노동당 담당 정책연구원으로 고군분투했던 한재각(현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은 “민주노동당이 서 있는 자리는 ‘황우석 매카시즘’을 통해서 이익을 챙기려는 무리들의 건너편인 것”으로, “황우석 교수가 원하기만 하면 모든 예산을 지원하겠다는 초법적 발상의 정부와 여당의 태도, 황우석의 후광을 빌어서 정치적 지지를 얻어보려는 한나라당의 한심하고 기회주의적인 작태(H2O 프로젝트 선언), 합리적 비판과 토론을 질식시켜 버린 채 ‘황우석 영웅 만들기’에 정신없는 대중매체의 맹목과 편향”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검찰 수사 발표 직후 민주노동당은 박용진 대변인의 <‘황우석 게이트’ 검찰조사 발표 관련> 브리핑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오늘 검찰의 최종결과 발표로 ‘황우석 게이트’에 대한 여러 의혹들이 사실로 규명됐다. 황우석 박사 등이 존재하지도 않는 ‘환자 맞춤형 줄기세포’를 가지고 전세계 과학계와 국민을 대상으로 ‘과학적 기만’ 행위를 저질렀다는 점이 다시 한 번 명백히 밝혀진 것이다.…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이번 검찰 수사결과 발표 이후다. 사실 민주노동당은 검찰 수사가 황우석 사건의 정치적 성격을 희석시킬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결국 이번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 내용은 ‘황우석 박사는 속였고 청와대와 정부는 속았다’는 결론에 도달할 뿐이다.…이미 야4당 회담에서 합의된 것처럼 당리당략을 떠나 ‘황우석 게이트’에 대한 국정조사를 즉각 실시하라.”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현 정의당 부설 진보정의연구소 이사장)은 “황우석 사건은 한국 과학계의 큰 상처를 주었다. 그나마 젊은 과학도를 중심으로 조작을 밝혀냈다는 점에서 희망을 본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라도 지금부터 차분히 조작사건의 원인과 그것이 가능했던 환경을 점검해야 한다”고 하면서, “황우석 사건을 통해, 대학연구실의 봉건적인 관계, 연구원들의 낮은 처우 등 열악한 연구환경이 드러났다.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는 연구원들의 인건비마저 횡령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 현실임을 비추어볼 때 젊은 과학도들이 소신과 정열을 갖고 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와 처우개선이 시급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2)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 어떤 상황에서나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 / 나는 간호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겠으며, / 간호하면서 알게 된 개인이나 / 가족의 사정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 나는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며? /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 의사에게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있다면 간호사에게는 위와 같은 ‘나이팅게일 선서’가 있다. 국제적십자에서는 ‘나이팅게일 상’을 마련하여 매년 세계 각국의 우수한 간호사를 선발, 표창하고 있다.

 

1820년 5월 12일은 근대 간호학의 창시자이자 병원.의료제도의 개혁자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이 태어난 날이다. 부유한 상류층 가정에서 자라난 플로렌스는 17세 때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빅토리아 시대까지만 해도 간호사는 비천하고도 부도덕한 직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1854년 흑해 북부의 크림 반도에서는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및 동맹국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사가인 버나드 몽고메리는 “크림 전쟁은 ‘이렇게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적 교훈을 남겼다”고 평했다. 전략과 병참 모두가 지극히 비효율적이어서 사상자의 비율이 월등히 높았기 때문이다. 오스만 측을 지원한 영국군의 경우를 보면 전사자가 5천 명이었던 데 비해, 전염병으로 인한 병사자는 1만5천 명으로 3배에 달했다. 이에 영국에서는 뒤늦게야 부상병 간호를 위한 자원 봉사대가 조직되어 급파되었는데 나이팅게일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크림 전쟁은 나이팅게일의 인생에서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그녀는 38명의 간호사와 함께 전쟁터에 도착해서 영국군 야전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한다. 오늘날은 간호사의 대명사인 나이팅게일이지만, 사실 크림 전쟁에서 그녀가 한 일은 지금 같은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간호’와는 거리가 멀었다. 약품은 고사하고 침대와 이불조차 부족한 상황에서는, 치료에 앞서 청소와 세탁과 조리 같은 허드렛일부터 처리해야 했다. 혼란의 와중에서 나이팅게일은 야전병원의 체계를 하나하나 세워나가는 일에 착수했다.

 

사실 나이팅게일의 탁월한 능력은 간호사로서의 자상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행정가로서의 탁월함이었다. 간호사 직제의 확립과 의료 보급의 집중 관리, 오수 처리 등으로 의료 효율을 일신했다. 오늘날 나이팅게일이라고 하면 ‘백의의 천사’라는 표현이 떠오르지만, 크림 전쟁 당시 그녀의 별명은 ‘등불을 든 여인’(The Lady with the Lamp)이었다. 더구나 흰색이 아니라 짙은 색의 검소한 옷을 입었고, 성격 역시 천사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나이팅게일이 등장한 지 6개월 만인 1855년 봄부터 야전병원의 운영은 훨씬 원활해졌고, 철저한 위생 관리 덕분에 환자의 사망률은 42%에서 2%로 뚝 떨어졌다. 전장은 물론이고 본국에서도 그녀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고, 빅토리아 여왕도 치하를 보냈다. 1860년에는 나이팅게일 간호사양성소(Nightingale Home)를 창설하여 각국의 모범이 되었다. 나이팅게일의 주목할 만한 업적은 통계 분야에서도 이루어졌다. 자신이 조사한 영국군 야전병원의 여러 가지 현황을 한눈에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고안한 새로운 방식의 그래프 작성법으로 호평을 받았고, 이에 여성 최초로 왕립 통계학회 회원이 되기도 했다.

 

나이팅게일의 생일인 5월 12일은 매년 ‘국제 간호사의 날’(International Nurses Day)이자  세계 만성피로증후군의 날(World Chronic Fatigue Syndrome Day)로 기념되고 있다. 후자는 그녀가 만성피로증후군 관련 질병을 앓았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이팅게일은 1975년부터 1994년까지 영국의 10파운드 지폐 뒷면에 등장하기도 했다.

 

 

3. 맺음글 : 황우석과 박근혜

 

황우석 사건이 한국에 남긴 상처는 크다. 돌이켜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하지 못했던 과학자들에게 큰 책임이 있음은 물론이다. “진실보다 애국심이 먼저”라는 말로 충격을 준 상식 이하의 과학자도 있었다. 당시 그를 비호했던 정치인들의 발언과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치인들이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한국 사회를 망칠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황 교수는) 우리나라의 보배 중의 보배다.” ‘황풍’이라는 광풍이 휩쓸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한 말이었다. 2005년 11월 23일 박근혜 대표는 “황우석 교수 연구팀이 난자 채취과정 때문에 논란에 휩싸이지 않고, 연구에만 매진할 수 있어야 한다”며 “아무도 하지 않던 초기 연구과정에서 생각지도 않은 미흡함이 발생한 것은 이해해줘야 한다. 당시에는 제도적 장치도 없었던 것으로 안다”며 그를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12월 13일 동국포럼 강연에서는 “우리 사회는 황 교수 문제까지 이념적으로 풀고 있다. 보수와 진보로 편을 갈라 이념 잣대로 연결하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나”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2007년 4월 7일자 조선일보가 보도한 ‘대선주자에게 묻다’라는 제하의 30문답 가운데 황우석 박사의 명예회복과 과학자로서의 복권 문제를 묻는 문항이 있었다. 이에 대해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무응답,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유보,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반대로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만이 ‘기회 부여해야 한다’라고 답변했다. 

 

2009년 8월 24일 1심 결심공판. 검찰은 “한 연구자의 올바르지 못한 연구태도와 과욕에 의해 실험 자료와 논문을 조작한 것이 이번 사건의 진상”이라며 “그 결과 국내 과학계와 국가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국민들을 크게 실망시켰다”며 징역 4년을 구형했다.  2006년 6월 20일 첫 재판 이후 1심 결심공판이 이루어지기까지 3년 2개월(총 1,162일)이 걸렸으며 총 43차례 공판이 열렸다. 대부분의 형사사건이 6개월을 넘기지 않는다. 2008년 총 형사사건 268,572건 가운데 1,087건(0.4%)만 2년 이상 재판이 진행됐다고 한다.

2014년 2월 27일 대법원 2부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사기)와 업무상횡령, 생명윤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황우석에게 일부 유죄를 인정해 징역 1년 6월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같은 날 대법원 1부는 황우석이 서울대학교를 상대로 제기한 파면처분취소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한다고 밝혔다. “엄한 징계를 하지 않을 경우 과학연구자 전체와 서울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어려운 점 등을 비춰볼 때 파면 처분이 부당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2014년 10월 2일 개봉한 임순례 감독의 <제보자>는 줄기세포 연구 조작과 잇따른 파문에 관한 스토리를 소재로 한 영화로, “진실과 국익 중에 무엇이 중요하냐”고 묻는다. 영화의 자문 역할 한 서울대 의대 황상익 교수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광란의 참사”, “‘황우석 성공 신화’는 온통 거짓 위에 떠 있는 신기루일 따름”이라고 말하면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황우석에 의한, 황우석을 위한, 황우석의 소동’이었습니다. 그가 한 일은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방해하는 일이었죠. 존재하지 않는 복제배아줄기세포를 내세워 호가호위했습니다. 지지자들의 열광적인 규탄집회, YTN의 ‘청부 취재와 보도’, ‘난자 기증자 1000명 돌파 기념 연구복귀 기원 진달래꽃 행사’, 대통령까지 포함된 고위 인사들의 일방적인 황우석 비호, 급기야는 ‘서울대병원 입원극’까지 한국 사회를 온통 광란으로 몰아넣는 일들이 이어졌지요.”

 

“저는 우리나라 줄기세포 연구를 이 지경으로 만든 죄인이라서 한없이 무거운 책임을 느낍니다. 제게 조국을 위해 마지막 봉사를 할 기회를 주신다면 더 없는 영광으로 받아들여 목숨 걸고 빠른 시간 내에 성과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2015년 2월 24일 ‘줄기세포 연구의 영웅’에서 ‘희대의 사기꾼’으로 전락한 황우석이 한 ‘후안무치’한 발언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 국민의 건강과 생명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돈벌이 의료’에만 초점을 맞춘 정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심지어 ‘의료세계화’라는 희한한 구호마저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10년 전 한나라당 대표 시절 ‘보배 중의 보배’이며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고 추켜세웠던 바로 그 사람이 ‘조국을 위해 마지막 봉사를 할 기회’를 달라면서 ‘목숨 걸고 빠른 시간 내에 성과를 내겠다’고 읍소하고 있는 것이다.

 

2007년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이트인 <대한민국 박사모>(http://cafe.daum.net/parkgunhye)에는 “정치지도자의 ‘소신’은 국가적 자존심 문제”라면서 “정치적 상황이 변했다 해서 지도자로서의 소신을 바꾼다는 것이 국가최고 지도자로서의 덕목인지 국민은 평가하게 될 것이다.”라는 글이 올라와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정말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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