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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소장 칼럼

  • [작은 역사 이야기 '오늘'] 9. 5월 3일 ‘새로운 시작, 그 이후’

 

조현연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5월 3일 ‘오늘’의 글 제목은 <새로운 시작, 그 이후>로, ①일본 헌법기념일 ②68혁명의 점화 ③1986년 5.3인천투쟁 등 세 가지를 이야기 소재로 한다. 맺음글에서는 ①‘세계 언론 자유의 날’ ②마키아벨리와 ‘콘비비오’(convivio) ③강한 정당과 ‘득도다조’(得道多助) 등 세 가지를 살펴본다.


1. 5월 3일은 일본 헌법기념일

 

1945년 9월 2일 포츠담 선언으로 패전국가 일본은 주권을 박탈당한다. 이어 더글러스 맥아더를 사령관으로 하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General Headquarters)에 의해 일본 제국 헌법이 개정되어 1947년 5월 3일 시행되었다. 이 신헌법 반포와 국가발전을 기념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5월 3일을 ‘헌법기념일’(Constitution Memorial Day)로 지정, 법정공휴일로 했다. 이 날은 보신전쟁(무진전쟁)에서 에도 성이 함락, 도쿠가와 막부가 소멸된 날(1868년 5월 3일)로부터 정확하게 79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일본국 헌법은 일본 천황을 ‘국가의 상징이자 국민 통합의 상징’로 규정하고 있으며, 천황은 국사행위 등의 일부 권한만 인정되는 상징 천황제를 채택하였다. 일본 특유의 평화주의를 대표하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 제2장 9조로 인해 일명 ‘평화 헌법’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 ①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에 의거한 전쟁 및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② 전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및 그 이외의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 역시 인정치 않는다.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한 인정, ‘반성과 사죄’는 역사 인식의 근간이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정치의 새로운 출발점이다. 그것을 표현한 것이 바로 평화헌법인 것이다. 1995년의 무라야마 담화(“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줬다. 의심할 여지없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한다”), 1993년의 고노 담화(‘위안부’ 관련 일본 정부의 개입 인정 및 사과)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헌법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을 정치인생 최대의 과업으로 삼고 있는 정치인이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현 일본 총리가 바로 그 사람이다. 일본에서 아베의 힘은 굳건하며 자민당에서도 강력한 ‘아베 1강체제’가 구축되어 있다. “전후 체제 탈피”와 “전쟁할 수 있는 ‘보통 국가’”를 추진해왔던 아베 신조 정권은 평화헌법에 대한 해석을 변경해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한다는 계획이다. “전후 70주년을 맞아 일본이 추구하는 국가의 모습을 세계에 알려 새로운 국가 만들기를 향해 강력한 출발을 하겠다.…일본은 과거 전쟁을 깊이 반성하며 세계 평화와 번영에 공헌해 왔다.” 아베 총리가 2015년 신년사에서 한 말이다. 문제는 깊이 반성한다는 것이 침략의 역사에 대한 반성인지, 아니면 태평양전쟁 패전에 대한 반성인지 모호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정치 행보를 보면 그의 반성은 전자보다는 오히려 후자에 가깝다.

 

2015년 3월 8일 열린 자민당 당대회에서 자민당의 향후 활동 방침이 발표됐다. 재정 재건과 경기회복을 우선시하는 한편, 헌법개정 찬성자 확대운동에 돌입하겠다는 내용이었다. 2016년 양원 동시선거 실시 후 헌법9조 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는 정치 시나리오다. 헌법 개정에는 중의원과 참의원 각각 3분의 2 이상의 찬성표, 이어서 국민투표에서 과반수 찬성표를 획득해야 한다. 지금 이대로 상황이 지속된다면 개헌은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 않다.

 

일본 사회는 종전 7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거대한 과거사 논쟁으로 빨려 들어가는 형국이다. 도쿄 전범재판의 정당성을 부인하고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아베 진영과 이를 비판하는 일본 왕실의 갈등이 표면화하고 있다. 헌법상 일왕이 현실정치에 관여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만큼 공식적인 반대를 하지는 못하지만 우회적으로 압박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의 역사학자 및 시민들도 아베 진영의 역사인식에 반발해 평화헌법 수호운동을 본격화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지난 4월 27일 미국과 일본이 자위대의 미군에 대한 군사적 후방지원 활동을 일본 주변에서 전세계로 확대하는 내용의 새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에 최종 합의했다. 이로써 종전 70년만에 일본은 ‘패전국’의 지위에서 사실상 미군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는 ‘동반자’로 그 위상이 전환됐다. 미국은 교전권을 포기하는 평화헌법을 재해석해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나아가려는 아베 총리의 정책을 공식 추인했다. 이에 따라 한반도가 일본 군사대국화의 직간접적인 영향권에 들어가는 게 아니냐는 것과, 한국이 전시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지 않아 한반도 유사시 미군의 요청으로 일본이 개입할 경우 막기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2. ‘68혁명’의 점화

 

1968년 5월 3일 파리 낭떼르 대학의 3.22운동 와중에 대학당국이 일시적 학교 폐쇄조치를 취하자 이에 항의하여 소르본 대학의 학생들이 광장으로 나와 라틴 지구를 장악하는 일이 터졌다. (파리 6구와 5구의 서쪽 지역이 바로 라틴 지구로, 라틴 지구라는 명칭은 1789년 혁명 전에 명문 고등학교나 소르본 대학을 포함한 권위 있는 대학들이 라틴어를 사용한 데서 유래하였다.) 프랑스 드골 정부의 실정과 사회의 모순에 대한 저항운동과 총파업투쟁으로 시작되어, 기성의 낡은 가치와 질서에 저항한 세계사적 사건으로 비화된 ‘68혁명’(일명 ‘프랑스 5월혁명’)이 점화된 것이다. 파리에서의 학생, 노동자의 시위와 파업은 6월 들어 베를린과 로마로 퍼져나갔고 전 세계로 급속히 확산되어갔다.

 

드골 정부는 초기에 경찰력을 동원해 진압하려고 했으나 이는 운동의 열기만 확산시킬 뿐이었다. 공화국 기동 경찰대(CRS)가 무력으로 개입하자, ‘우리들의 동무를 해방시키자’라는 구호를 일제히 외치며 학생들의 평화적 시위는 곧 ‘폭동’으로 바뀌었다. 경찰들의 무력 진압에 분노한 시민들도 학생들의 편을 들었다. 우물쭈물하는 노동조합을 제치고 1천만명의 노동자가 총파업과 공장 점거에 돌입한 5월 10일 ‘바리케이트의 밤’에서 사람들은 100년 전의 파리꼬뮌을 기억해내기도 했다. 바리게이트의 밤의 분위기는 엄숙하고 살벌하다기보다는 훨씬 유연하고 개방적이었으며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

 

드골은 독일군 주둔의 비행 기지로 잠시 피신하기까지 할 정도로 혁명적인 상황이었지만,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5월 30일 드골은 의회를 해산하면서 “드골이냐 혼란이냐”를 물었다. 드골의 ‘위대한 프랑스’ 설교는 신비한 마력처럼 ‘인터내셔널’가가 합창되던 거리에 ‘라 마르세예즈’를 울려퍼지게 했다. 시위가 지속되는 가운데 시민들과 언론은 점점 무질서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 반발심리로 곧 이어진 총선에서는 우파가 대거 득세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68혁명 주도세력들은 생활 속 민주주의 또는 일체의 권위를 거부하는 평등주의를 제창했으며, 자본주의 소비체제의 물신주의, 물질숭배, 인간소외를 거부하면서 사람 사는 세상, 인간다운 삶을 요구했다. 당시 요구하고 주장한 내용들은 실로 파격적이고 혁명적이었다. 구체적인 구호는 이러했다. : “행동하라”, “더 많이 소비하라, 더 빨리 죽으리니”, “일하지 말라”, “열정을 해방하라”,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금하는 것을 금하노라”, “파괴는 창조의 열정이다”, “사랑할수록 더 많이 혁명한다”, “굶주릴 지라도 권태로운 것은 못 참는다”, “선거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투쟁은 계속된다.”

 

시위 주도자들에게 68년 5월혁명은 실패였으나, 그것이 사회적으로 미친 파장과 영향은 엄청났다. ‘실패한 68혁명’이 세상을 바꾼 것이다. 68혁명은 유럽정치와 정치문화에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으며, 진보의 다원적 구축은 유럽사회에 큰 활력소가 되었다. 또 일상에서 소외되어 살아가던 평범한 시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삶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현실사회주의의 오류를 모두 극복하고 더 나은 삶과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인류의 영원한 이상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68혁명의 시작은 프랑스 파리가 아니었다. 이 저항과 혁명의 거대한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베트남전쟁, 베트남 인민들의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이었다. 68혁명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의식과 사고는 새로운 삶을 지향했다. 녹색당과 그린피스 같은 환경운동, 국경 없는 의사회 같은 인권운동 등은 68년의 토양 위에 성장했다.

 

3. 1986년 5월 3일 인천투쟁, ‘반체제운동’의 중요한 전환점

 

“‘미제국주의’와 종속적 자본주의의 발전에 반대하는 급진 이데올로기의 좌파적 표현들, 혁명적 변혁을 지지하는 전투적 전략, 제도권 야당의 능력을 능가할 정도로 민중부문을 동원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은 이들의 존재를 분명히 구분지을 수 있는 몇 가지 특징들이다.…이제 1980년대로 들어오면서 대중 참여의 정도와 목표, 이념, 전략상의 전투성과 급진성의 정도 그리고 그것의 급속한 증폭이라는 측면에서 반체제운동은 급진적 민중주의적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인용문은 1989년 원로 정치학자인 최장집 교수가 반체제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86년의 5?3 인천사태에 대해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책에 쓴 문구다.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졌길래 저런 표현을 사용한 걸까?

 

1986년 5월 3일 인천 주안동 시민회관 옆 광장과 도로. 수만 명에 달하는 대중들이 감동으로 물결치면서 힘찬 함성과 노래 소리로 가득 덮인 그 날 그 곳은 일종의 해방구이자 ‘한국의 뻬뜨로그라드’를 방불케 했다. 각종 운동권 단체 명의로 40여종에 가까운 유인물들이 거리를 수놓았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엄청 살벌하고 또 생뚱맞기도 하지만 기억 환기 차원에서 당시 유인물들의 제목을 훑어보면 이렇다.

 

“군사독재 타도하고 민주정부 수립하자”, “삼반정권 타도하고 해방된 민중의 새 세상을 건설하자”, “삼반정권과 야합하여 이 땅의 노동자.농민.빈민의 투쟁을 외면하고 개헌을 사리사욕적 집권놀음에 악용하는 신민당에게 민중의 이름으로 경고한다”, “군사독재 타도하고 민주정부 수립하자”, “전국의 일천만 노동자여 미 제국주의 축출과 예속군부정권 타도의 하나된 것으로 총집결하자”, “삼반정권과 신민당의 타협을 배후조종하는 미제국주의 몰아내자”, “속지말자 신민당, 쟁취하자 민중정권.”

 

‘개헌’과 ‘민주화’ 문제는 1985년 하반기부터 이른바 ‘운동권’이 치열한 논쟁과 토론을 통해 씨름해 온 주요 쟁점 가운데 하나였다. 유화국면 이후 활성화되어 간 민주변혁운동은 1985년 2.12총선 이후 보다 명확한 ‘변혁지향적 투쟁’으로 자신을 정립시키면서, 투쟁의 지평을 ‘반파쇼, 반외세, 민중혁명’ 등의 수준으로 고양시켜 갔다. 이 과정에서 군부독재 타도/퇴진이라는 운동의 이슈는 군부독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5공 헌법문제’로 집약되어 나타났다.

 

한편 이름 없는 수많은 민초들은 개헌투쟁을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를 쟁취하는 싸움으로 자각하고 1986년 초부터 전개된 신민당의 개헌현판식 집회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것이 비록 제한된 개헌 공방의 장이었다 하더라도 민중들에게는 그들 스스로의 민주화투쟁의 열려진 장이었던 것이다. 3.11 서울, 3.23 부산, 3.30 광주, 4.5 대구, 4.19 대전, 4.26 청주, 5.3 인천, 5.10 마산, 5.31 전주대회로 이어지는 이 집회에 자발적으로 참석한 연인원 50~70만명에 달하는 대중들의 숫자는 그것을 가늠케 해준다. 

 

1986년 5?3 인천투쟁은 민주변혁과 인간해방을 향한 한판 굿이었다. 서울과 인천의 운동단체들이 총집결하다시피 한 이날 집회의 주요 골자는 ‘반미, 반독재, 보수대연합 성토’ 등이었다. 특히 시위대는 개헌투쟁과정에서 연대했던 신민당을 기회주의집단으로 규정, “신민당은 개헌싸움의 주체일 수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오후 1시 무렵 인천 시민회관 앞 4거리를 메운 5만여 명의 노동자, 학생, 시민들의 구호와 함성 소리, 노동해방가와 광주출정가의 노랫가락이 울려퍼졌다. 시위대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가자 전국 각지에서 지원받은 73개 중대 1만여명의 경찰병력은 악명 높은 백골단을 앞세운 채 최루탄을 무차별 발사하면서 전쟁 상황을 방불케 하는 폭력진압에 나섰다. 

 

투쟁의 여파는 레드 콤플렉스라는 공포의 동원전략 속에서 대대적인 검거선풍으로 이어졌다. 전두환 정권은 저녁 7시 뉴스를 시작으로 불타는 경찰 차량과 분노와 열정에 찬 ‘험악한’ 시위대의 모습을 연거푸 보여주면서 이날의 투쟁을 ‘5?3소요사태’라고 부르며 ‘좌경 용공 극렬 폭력’으로 매도했다. 80년 5월 광주 이후 최대 규모의 구속과 수배가 뒤따랐다. 투쟁의 현장에서 연행된 4백여 명 가운데 1백33명이 소요죄와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수배자는 50여 명에 달했다. 수배자의 검거과정에서 이른바 ‘부천서 성고문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신민당은 “5.3 신민당 개헌추진위 인천 경기지부 결성대회의 무산은 전적으로 현 정권의 치밀하게 계획된 조직적 공작에 의한 결과”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또 운동권 일각에서는 “대중의 정서를 무시한 모험적이고 관념적인 충격요법식 투쟁 전개”, “운동권의 분열과 혼란의 극대화된 표출”, “정권에 대한 투쟁보다는 신민당과 민추협에 대한 공격이나 투쟁 강조”, “미제 축출이라는 원론적 차원의 구호에만 머문 반미운동” 등을 근거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눈과 귀를 닫아서는 안 될 것이다. 운동단체들은 처음부터 제각기 자신의 깃발을 들고 나와 일정한 선전효과는 거두었는지 모르겠지만, 대중 동원이나 자발적 참여는 거의 완전히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5?3인천투쟁이 지닌 의의마저도 폄훼하는 것으로 나아가서는 안 될 것이다. 1986년 5.3인천투쟁은 80년 5월 광주와 87년 6월 민주항쟁 사이에 있었던 가장 큰 반정부 민중투쟁이자, 당시 김수환 추기경의 말을 빌자면 “겨레의 아픔을 함께 하고 있고 고통받는 자들과 진정으로 그 고통을 나누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거짓에 대한 분노와 불의에 저항하는 용기와 열정을 원동력으로 하는, 독자적인 실체로서 스스로를 정립해낸 민주변혁운동의 주체선언이기 때문이다.


4. 맺음글

 

세월호 참사, 정윤회 파문, 성완종 리스트라는 초대형 악재에도 불구하고 4.29 재보궐선거는 정부여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알맹이 없는 ‘정권심판론’은 민심을 파고들지 못했다. 정부여당의 능수능란한 위기대처법을 공격할만한 예각적인 전술도,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전략이나 정치적 상상력도 부재했다. 

 

탄식의 한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지만 분노의 목소리는 크지 않다. ‘득표 결과는 긴 과정의 마지막 세리머니(ceremony)’라는 말처럼, 이미 상당 부분 예견된 결과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더 나은 대한민국을 향한 새로운 시작은 여전히 요원하게만 느껴진다. 5월 3일 오늘은 ‘세계 언론 자유의 날’이다. 우리의 언론 환경은 무력감을 증폭시킨다. 언론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핵심 보루로서 제 역할을 하기는커녕 그것에 역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강자의 횡포에 맞서 싸울 수 있을까?’ 마키아벨리식 해법인 ‘콘비비오’(함께 살자)에서 그 작은 실마리를 찾아본다.

 

1) 5월 3일 오늘은 ‘세계 언론 자유의 날’

 

(1) 5월 3일 오늘은 언론 자유의 기본적인 원칙인 ‘빈트후크 선언’이 채택된 날이자, ‘세계 언론 자유의 날’(World Press Freedom Day)로 유엔이 지정한 국제 기념일이다. 1991년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수도 빈트후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미나 ‘아프리카 언론의 독립과 다양성을 위하여’의 마지막 날인 5월 3일, 언론인들은 ‘표현의 자유를 위해서는 미디어의 독립과 다원주의가 필수적’이라면서 ‘빈트후크 선언’을 발표한다. 빈트후크 선언은 독립적 저널리즘과 참여민주주의의 성공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확인하고, 자유로운 언론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핵심 보루라는 점을 강조했다.

 

한편 유엔은 유네스코의 추천을 받아 1993년 12월 20일 유엔 총회에서 많은 나라에서 신문과 미디어에 대한 정부의 억압으로 언론의 독립성이 위협받고 있으며, 많은 저널리스트들이 일반인들에게 뉴스를 전달하기 위해 진실을 밝히는 와중에 생명마저 위협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매년 5월 3일을 세계 언론자유의 날로 선포하였다.

 

(2)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더 나은 대한민국을 향한 새로운 시작이 요원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4월 15일 ‘오늘’>의 언론수호선언과 ‘언론인의 히포크라테스 선서’에서도 이미 말한 것처럼, 한국의 언론 현실은 매우 심각하다. 참고로 ‘국경 없는 기자회’가 매년 각 국가별 언론의 자유 점수를 매겨 순위를 발표하는 보고서인 세계언론자유지수(Press Freedom Index)에 따르면, 2014년 우리나라의 세계언론자유지수는 25.66점으로 57위를 기록해 전년에 비해 7단계 하락했다. 1위는 6.4점을 받은 핀란드다.

 

2012년 한국언론진흥재단의 ‘기자 의식조사’를 보면, 언론의 자유를 제약하는 요인을 꼽는 문항(총 3가지 선택)에서는 광고주라는 응답이 65.3%로 가장 많았고, 정부와 정치권력(65.2%)이 1위와 다름없는 2위를 기록했다. 이어 사장·사주(48.8%), 보도국 간부(41.5%) 순이었다. 정부와 정치권력을 언론자유 제약 요인으로 지목한 비율은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 34.3%, 2007년 23.3%를 기록했으나 이명박 정부 임기인 2009년 56.7%로 오른 뒤 2012년에 65.2%로 상승했다.

 

(3) 미국의 경우를 보면, 언론매체의 자본주의화, 언론의 횡포 같은 비판적 여론 속에서 1942년 언론자유위원회(The Commission on Freedom of the Press, 일명 ‘허친스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회가 출범할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 정부가 언론 검열을 자행했고,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언론의 소유 집중화와 상업화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선정주의와 판촉을 둘러싼 신문전쟁―시카고의 경우 언론사간 총격전을 할 정도로 격렬했음―이 일어나던 상황이었다. 위원회는 4년에 걸친 연구조사의 결과로 1947년 <자유롭고 책임있는 언론>(A Free and Responsible Press)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자유로운 사회가 자유로운 언론을 요구한다고 전제하면서, 언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한 필수적인 5가지 요구사항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첫째, 언론의 사명은 매일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정확하고 진실되며 종합적인 보도를 해야 한다. 이는 허위보도가 아닌 정확한 보도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사실(fact)과 의견(opinion)을 분명히 구분, 혼동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으로서 이 위원회는 사실을 그저 객관적으로 충실하게 보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건의 의미를 알 수 있는 문맥적 진실보도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사실보도나 객관적 보도는 절반의 진실 혹은 미완성의 보도가 되기 쉬우므로 보다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진실보도를 강조한다.

 

둘째, 언론은 다양한 설명과 비판이 제안되고 교류되는 광장 즉 공론의 장이어야 한다. 신문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토론과 논쟁을 다각도로 공평하게 게재할 책임을 지니며 자신의 입장에 반하거나 대립되는 것까지도 보도함으로써 이른바 아이디어의 자유롭고 공개적인 시장임을 보장해야 한다.

 

셋째, 언론은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의 대표적인 의견과 입장을 반영해야 한다. 언론이 특정 계층이나 집단의 입장을 왜곡하거나 편파적으로 보도함으로써 계층과 집단들간의 긴장과 대립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넷째, 언론매체는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나 목적을 명확하게 제시해야 한다. 다섯째, 언론매체는 매일매일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이른바 정보의 자유 또는 알권리를 충족시켜야 한다.


2) 마키아벨리와 ‘콘비비오’(convivio)

 

1469년 5월 3일은 이탈리아 사상가인 마키아벨리가 태어난 날이다. ‘악덕의 스승’, ‘권모술수의 대명사’ 같은 말로 혹평을 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공화주의의 대변자’, ‘최초의 근대인이자 혁명가’로 마키아벨리를 칭송하는 사람도 있다. 출간 때부터 논란을 일으킨 그의 명저 <군주론>은 지금까지도 뜨거운 논쟁거리다.

 

“마키아벨리는 착한 심성을 가진 선량한 사람이었고, 르네상스 정신의 근간을 제공했던 인문학의 정수에 도달한 탁월한 인문학자였으며, 무엇보다 이 세상 모든 약자들을 품에 안으며, ‘울지 마라, 인생은 울보를 기억하지 않는다’고 위로하고 격려하던 약자들의 진정한 수호성자였다.” <마키아벨리-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현자>의 저자인 연세대 김상근 교수가 한 말이다.

 

정치를 통해 ‘새로운 시작’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특히 중요하다. 정치의 새로운 시작이 ‘어떻게 하면 우리 시대의 약자들이 강자들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할 때, 마키아벨리를 우회하거나 회피해서는 안 된다.

 

정치를 도덕의 세계로부터 분리해 독자적인 탐구대상으로 삼은 점에서 마키아벨리는 최초로 ‘근대’를 사유한 르네상스인이다. 그의 이름에서 파생된 단어를 보면 마키아벨리안은 ‘권모술수에 능한’이라는 형용사로, 마키아벨리즘은 ‘정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상’을 의미하는 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정의가 철저하게 왜곡된, 진실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사람이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안’과 ‘마키아벨리즘’은 어떻게 재정의되어야 할까. 김상근 교수의 답은 이렇다.

 

“콘비비오(convivio)라고 할 수 있어요. 단테의 작품 <향연>의 라틴어 제목이 콘비비오에요. 플라톤이 제자들과 모여서 토론한 ‘심포지움’을 단테가 번역한 거죠. 해석하면 ‘같이 살자’는 뜻이에요. 단테도 마키아벨리와 거의 비슷한 삶을 살았어요. 쫓겨나고 떠돌아다니면서 죽을 고생을 했어요. 그런데 그런 단테가 했던 말이 ‘함께 살자’는 거예요. 그게 잔치고 향연이라는 거죠. 단테와 같이 질곡의 삶, 추방의 삶을 살았던 마키아벨리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우리 함께 살자, 강자와 약자가 함께 살자’는 거죠. 콘비비오, 이것이 바로 마키아벨리즘을 대신할 단 한 가지 단어죠.”

 

마키아벨리는 약자로 태어나 가난 속에서 살다 간 인물이었다. 가난한 이들 안에서 살아가며 강대국의 침략과 지배 앞에 무력한 자국의 모습을 지켜봤던 마키아벨리는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된다. “왜 우리는 늘 당하고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이렇게 자문한다. “어떻게 하면 강자의 횡포에 맞설 수 있는가?” 실마리와 해답을 찾기 위해 주목한 것이 바로 강자의 힘과 권력의 속성이었다. 강자의 움직임과 생각을 읽는 것이 생존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에게 세상은 소수의 권력자와 다수의 힘없는 자들 사이의 투쟁이 계속되는 긴장과 갈등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3) 강한 정당과 ‘득도다조’(得道多助)

 

500여년 전 마키아벨리는 콘비비오의 세상을 꿈꾸며 군주의 역할을 강조했다. 1513년 출간된 그의 <군주론>에는 군소국가들 간의 대립, 외세의 침략 등 혼돈의 상황에서 메디치 가문이 강력한 군주로 등장해 백척간두에 선 조국 피렌체를 구원해 줄 것을 염원하는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다.

 

오늘날 ‘현대판 군주’는 바로 정당이다. 즉 좋은 정당은 통치자로서의 유능함을 발휘하는 동시에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반이 강화될 수 있게 하는 ‘현대판 군주’(modern prince)이자 ‘민주주의의 엔진’이다. 강한 정당은 사회에 뿌리를 내린 정당이다. 평소에 함께 하는 사람들,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은 정당이다.

 

얼마 전에 오랜 친구가 힘내라며 보내준 ‘득도다조’라는 글귀로 맺음말을 대신할까 한다.


 

 

도다조(得道多助)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도와주는(助) 사람이 많은(多)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고,
그 사람이 쓰러지지 않기를 응원해주는 사람이 많으면 그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주위에 도와주는 사람이 많은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이 많게 되기 위해서는 인심(人心)을 얻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평소에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득도다조(得道多助)’라고 합니다.

 

평소에 사람의 마음을 얻은 사람이라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 되어도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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