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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소장 칼럼

  • [작은 역사 이야기 '오늘'] 7 : 4월 17일 “역사 ‘똑’바로 세우기”

 

조현연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80년 5월 광주를 기억하라’며 줄기차게 제기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1980년대를 관통해오던 시대적 요구였다. 이에 화답하듯 김영삼 정부 시절 ‘역사 바로 세우기’란 이름의 개혁 추진이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보복적 한풀이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며 김영삼 정부는 5?18의 평가를 역사에 맡기자는 것을 천명하고 나섰다. 또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검찰의 궤변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에 국민들 사이에는 도둑질이나 강도질을 비롯해 어떤 범죄라도 성공만 하면 처벌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이 터져 나오기까지 했다.

 

4월 17일 오늘의 주제는 ‘역사 바로 세우기’를 약간 비튼 <역사 ‘똑’바로 세우기>로, ①크리스토퍼 콜럼버스, ②전두환-노태우 재판, ③삼성 특검, ④‘최초의 미국인’ 벤자민 프랭클린과 ‘국부’(?) 이승만 등 4가지 소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려 한다.


1.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위대한 탐험가’ No, ‘잔혹한 침략자’ Yes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분이라면 아마도 어린 시절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의 이름만으로도 ‘콜럼버스의 달걀’과 야만을 문명으로 바꾼 위대한 탐험가의 삶을 떠올리며 동경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몇 년 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한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이 콜럼버스를 피고로 한 모의재판을 열었다. 그 결과 무기징역이 그에게 선고되었다. 죄명은 ‘스페인 왕실을 빙자하여 절도를 한 혐의’였다. 그동안 콜럼버스를 건국의 아버지, 위대한 탐험가, 개척의 영웅으로 가르치던 미국의 학교에서 잔혹한 침략자들의 원주민 수탈과 살육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가르친 결과라고 한다.

 

1492년 4월 17일은 콜럼버스가 에스파냐와 아시아로의 항해를 계약한 날이다. 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를 해군 제독에 임명하였고, 그가 발견하는 것의 10%를 콜럼버스의 소유로 한다는 조건 하에 선박 2척(핀타호와 니나호)을 내주고 과거에 죄를 지은 자들은 면죄해 준다는 조건으로 승무원 모집에도 협력해 주었다. 그러나 계약 후에도 이사벨 여왕이 계속 지원을 미뤘기 때문에, 실질적인 항해까지 걸린 시간은 6년이나 되었다.

 

금과 보물에 대한 언급이 10일 분량에 수백 차례나 등장한 그의 항해 일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콜럼버스가 탐험을 시작한 것은 기독교의 전파나 미지의 세계에 대한 순수한 탐구심이 아니라 인도의 교역으로 얻을 수 있는 금과 보물이 가장 큰 이유였다. 또한 이사벨 여왕과의 계약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장 중요한 목적은 부의 축적이었다.

 

콜럼버스는 1506년 죽을 때까지 자기가 발견한 땅을 인도라고 믿었다. 그의 항로 개척으로 아메리카 대륙이 비로소 유럽인의 활동 무대가 되었고, 현재의 미국이 탄생할 수 있던 토대를 쌓았다. 그는 총 4차례 아메리카 대륙을 항해하였는데, 아메리카에 상륙한 것은 그 가운데 첫 번째 항해 때의 일이다. 첫 항해 후 아메리카에서 그가 가져온 금제품이 전 유럽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콜럼버스의 달걀’이란 일화도 이때 생겨났다.

 

두 번째 항해 동안 콜럼버스와 그의 부하들은 역사가들에 의해 ‘홀로코스트’(holocaust)라고 명명되는 정책을 폈다. 원주민들은 이에 저항하였으나 무기가 훨씬 우수한 에스파냐인들을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고, 유럽에서 옮아온 전염병은 그들의 삶을 파괴했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현재 바하마 제도의 와틀링섬에 도착한 것이 바로 1492년 10월 12일이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0월 12일은 ‘콜럼버스의 날’(Columbus Day)이 되었다. 그는 와틀링섬을 인도의 한 부분으로 생각했고, 신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이 섬을 ‘산살바도르’(거룩한 구세주)라고 불렀다. 미국과 일부 남미 대륙의 백인들은 이 날을 건국의 날로 여기며 대대적인 기념 축제를 벌여왔지만, 그러나 원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날은 땅과 생명을 빼앗기기 시작한 비극의 날이다. 콜럼버스의 <항해일지(Dario)>는 그 비극의 씨앗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50명의 남자만 있으면 원주민 모두를 노예로 만들어서, 그들이 가진 황금을 전부 빼앗아버릴 수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 후손이자 미국 중견 토착민 권리운동가인 워드 처칠은 <그들이 온 이후>라는 제목의 책에서 콜럼버스를 서슴없이 ‘원조 나치’라고 부른다. 콜럼버스가 토착민들을 대상으로 벌인 멸종정책의 잔혹성이 나치의 그것과 맞먹기 때문이란다. 신대륙을 발견한 이듬해인 1493년, 콜럼버스는 ‘카리브 제도와 아메리카 본토의 부왕 겸 총독’이라는 직함으로 지금의 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500년 그 지역을 떠날 때까지 지역 토착민을 노예로 만들고 멸종 정책을 시행한 결과 800만명이었던 토착 타이노족은 불과 10만명으로 줄었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의 댄 브룩(Dan Brook) 교수는 ‘학살을 경축하며’(Celebrating Genocide!)란 글에서 백인들의 원주민 학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 “백인들은 ‘야만적인’ 타이노 원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어 버리고, 수많은 원주민들을 고문하고, 노동을 착취하고, 그들의 부를 약탈해서 유럽으로 가는 배에 실었다. 제국주의자들은 원주민들을 착취하는 과정에서, 남성들의 손을 도끼로 자르고, 여성들의 젖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임신한 배를 갈라내고, 아기를 공중에 던져서 땅에 떨어뜨리거나, 칼이라는 이름의 그 이상한 빛이 나는 물체에 꽂아버렸다. 그리고 이 모든 행위는 기독교, 문명화,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졌다. 타이노 원주민들은 문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착취당했고, 원주민 대부분이 잔인한 폭력, 과도한 노동, 질병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해버려, 종족이 전멸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2002년 우고 차베스(Hugo Rafael Chavez Frias)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대통령령으로 미국과 일부 남미 국가에서 제정한 ‘콜럼버스의 날’이라는 이름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바꾸었다. 차베스 대통령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칸 대륙을 발견한 후 스페인과 포르투갈, 영국이 침략하여 원주민 수백만명을 학살했다고 비난했다. 원주민들은 이 날을 차라리 “우리 인디언들이 백인을 처음 발견한 날”이라고 해야 맞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2. 법의 심판 :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징역 17년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면서 피고인 전두환에게는 무기징역과 2205억원의 추징금을, 피고인 노태우에게는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원을 선고했다. 세기적인 재판이라는 점에서 판결문이 좀 길긴 하지만 인용해보자.

 

“피고인 황영시, 차규헌, 최세창, 장세동,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박종규, 신윤희, 이희성, 주영복, 정호용의 각 상고와 검사의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 황영시, 차규헌, 박준병,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이희성, 주영복, 정호용에 대한 각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피고인 유학성은 공소 기각-필자 주). 우리나라는 제헌헌법의 제정을 통하여 국민주권주의, 자유민주주의, 국민의 기본권 보장, 법치주의 등을 국가의 근본이념 및 기본 원리로 하는 헌법질서를 수립한 이래, 여러 차례에 걸친 헌법 개정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한결같이 위 헌법질서를 그대로 유지하여 오고 있는 터이므로, 피고인들이 공소사실과 같이 이 사건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폭력으로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의 권능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을 개정하고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여 왔다고 하더라도, 피고인들이 이 사건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의 헌법질서 아래에서는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1997).

 

4. 17. 피고인 전두환 외 15인에 대한 사건번호 96도3376 대법원 판결)

 

검찰에 의해 기소된 전두환 외 15명에 대해 서울지방법원은 27차에 걸친 공판을 마친 뒤 1심 선고공판에서 내란과 군사반란에 의한 헌정파괴행위를 이유로 전두환에 대해서는 사형을, 노태우에 대해서는 징역 22년 6월을 선고하고 나머지 피고인들에 대해서도 유죄판결을 내렸다(1996. 8. 26.). 같은 해 12월 16일 항소심에서는 전두환은 무기징역으로, 노태우는 징역 17년으로 감형된 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의 상고기각으로 형이 최종 확정되었다.

이로써 재판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전직 대통령 두 명을 법정에 세워, 하나회 중심의 정치군부가 저지른 명백한 군사반란이자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이라는 범죄행위를 사법 단죄한 세기적인 재판이 마무리된 것이다. 헌정질서를 총칼로 짓밟고 죄없는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한 반인륜적 범죄행위가 발생한지 17년이 지난 뒤였다.

 

한편 1심 판결이 확정되면서부터 특히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내려지자 정치권은 물론 시민사회단체와 각계 인사, 일부 지역 간에까지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면을 둘러싼 찬.반논쟁이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1심 선고 직후 <한겨레21>의 여론조사 결과(1996. 8. 26.)를 보면, ‘만약 국민화합을 이유로 향후 전두환, 노태우 피고인에 대한 정치적 사면이 단행된다면 이에 동의하겠느냐’는 물음에 응답자의 74.2%가 동의할 수 없다(동의할 수 없다 34%,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40.2%)고 답했다. 반면 ‘결국 전.노 피고인이 정치적인 이유로 사면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응답에서 응답자의 절반이 넘는 69.1%가 사면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다수의 예상처럼 전.노에 대한 사면은 이루어졌다.

 

전.노 사면은 상식적으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또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대통령의 사면권이란 것이 헌정파괴행위를 저지른 범죄자에 대해서까지 행사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한이 아니고, 사면에는 가해자의 진실의 고백과 반성이 전제되어야 하며, 진상 규명과 희생자들에 대한 합당한 조치가 완료되기도 전이라서 사면할 내용이 무언지 아직까지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사면 반대의 상식적 논거들은 정치권의 부정한 야합 속에서 철저하게 훼손되고 말았다.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한 표가 아쉬운 각 후보진영은 서로 생색내기를 하면서 전.노에 대한 사면을 앞다투어 거론하고 나섰다. 그 빗장은 DJ가 먼저 연 측면이 있었다. 즉 그동안 전.노 사면의 전제로 내세웠던 ‘사과와 반성’이라는 조건을 철회하고 예의 ‘용서론’과 ‘대화합론’을 펼치면서 사면을 적극적으로 주창하고 나선 것이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신한국당과 이회창 후보 측은 ‘신중론’을 표방하고 있었다. 특히 선거가 끝난 직후인 1997년 12월 20일 김영삼과의 청와대 회동을 통해 김대중이 동의를 함으로써 12월 22일 마침내 전?노에 대한 사면?복권과 석방조치가 이루어지면서, 법적 책임을 둘러싼 공방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5.18 최후의 수배자’로 알려진 윤한봉의 말처럼, 전?노 사면은 “해방 후 친일부역자들에 대한 처벌을 하지 못한 것만큼이나 우리의 역사를 그르칠 것이다. 광주는 김대중씨를 위해 전?노 사면에 동의함으로써 광주와 5.18은 다시 한 번 김대중씨의 사유물이라는 혐의를 뒤집어쓰게” 되었으며, 결국 “천박한 정치논리에 역사를 팔아넘기고 만” 역사적 죄악행위이자 국민을 기만하고 사법정의를 유린한 행위였다.

 

이처럼 전.노에 대한 사면과 복권, 불철저한 진상 규명, 저항정신의 올바른 계승 등을 볼 때 5.18은 끝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구속에서 선고에 이르기까지 그 일련의 과정은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폭력으로 정권을 획득한 자들은 헌정질서를 파괴한 범죄자로 국민에 의해 응징될 수 있다는 생생한 교훈을 역사에 각인한 계기가 되었다.

 

3. ‘삼성왕국 실감나게 한 치욕의 특검’, 2008년 4월 17일 삼성특검 수사 발표

 

2007년 11월 23일 삼성그룹의 불법비자금 의혹을 수사하기 위한 ‘삼성 비자금 의혹관련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삼성 비자금 의혹 관련 특별검사(삼성 특검)는 이 법에 의해 실시되었다. 수사 결과 발표에 이르기까지의 진행 경과는 이러했다.

 

2007년 12월 20일 이진강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이 추천한 3명의 특검후보 중 조준웅 변호사를 노무현 대통령이 특별검사로 임명하였다. 또 다른 후보였던 고영주 변호사도 조준웅 변호사처럼 공안통 검사 출신이었다. 마지막 후보였던 정홍원 변호사도 검찰 출신으로서 소속 로펌이 삼성측 사건을 상당 부분 맡고 있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대한변협 회장 출신인 박재승 변호사를 강력 추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은 “특검후보 추천권에 관한 당초의 안은 국회의장이 특검후보추천위원회를 설치하고 거기서 추천하는 것이었으나 한나라당과 합의하는 과정에서 그만 특검후보 추천권을 변협에게 양보한 것이 큰 실수였다”고 주장했다.

 

2008년 4월 17일 조준웅 삼성특별검사가 삼성의 불법 상속에 면죄부를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 수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조준웅 삼성특검은 이건희 삼성회장을 불구속 기소하면서 이건희를 구속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조직 구성원의 개인적 탐욕에서 비롯된 전형적인 배임, 조세 포탈 범죄와는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평등한 법적용이 그 법의 적용을 받는 대상이 갖고 있는 개별적 특수성이나 시대적 상황 등 다른 요소는 전혀 외면한 채 기계적으로 똑같이 적용하라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2008년 4월 22일 이건희 회장이 퇴진하고 ‘삼성 경영 쇄신안’이 발표되었지만, 한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었다. 

 

조준웅 특검팀은 1199개의 차명 계좌와 324만주의 차명 주식 등 이건희 회장의 차명 재산 4조5000억원을 찾아냈지만, 비자금은 아니라고 발표했다. 선대 회장인 이병철 회장에게 물려받은 삼성생명 주식이 불어난 개인 재산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건희 회장에겐 횡령이 아닌 조세포탈 혐의만 적용됐고, 이건희 회장이야말로 삼성 특검의 최대 수혜자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양심선언을 한 삼성 출신 김용철 변호사는 “‘수사주체’가 ‘수사대상’을 두려워하는 사건”이라고 깔끔하게 정리했다. 진보신당은 삼성특검팀이 “끝내 유전무죄를 넘어 삼성무죄의 각본으로, 삼성비리를 낱낱이 밝혀내길 바랐던 국민의 기대를 무참히 즈려밟는 것이고, ‘삼성특별검사’가 아니라 ‘삼성특별변호사’였다는 불명예를 스스로 씻어내는 데도 실패한 것”이라고 논평하였다.

 

더군다나 이건희 회장이 비자금 사건에 대해 특별사면(2009.12.31)을 받은 지 보름 만에 조준웅 변호사의 아들이 삼성전자 과장으로 입사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사법시험 준비와 어학연수 경력만으로 삼성전자 중국법인 과장으로 발탁된 것이다. 삼성전자 신입사원이 과장으로 진급하기까지는 통상 10년 안팎이 걸린다고 한다. 삼성은 “조씨의 채용은 특검과 무관하다”고 밝혔지만 특검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강화됐다.

 

삼성 비자금 특검(2007~2008)이 잘 보여준 것처럼, 특검 임명에 실패하면 수사 결과는 뻔하다. ‘삼성왕국 실감나게 한 치욕의 특검’, ‘유전무죄, 무전유죄 실태를 스스로 폭로한 조준웅 특검’, ‘특검을 특검해야’ 등의 결론은 이미 특검 임명에서부터 예견될 일이기도 했다.

 

2008년 4월 17일 한국진보연대가 발표한 성명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의로 이렇게 엉터리 수사를 진행한 조준웅 특검을 추천한 대한변호사협회, 그리고 조준

웅 특검을 임명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역사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 이후 대한변호사협회가 정의에 반하게 김용철 변호사 징계 운운하며 명백한 진실왜곡의 의지를 보였으므로 특검후보 추천기관으로는 명백히 결격사유를 가진 대한변호사협회에서 특검후보를 추천토록 특검법을 제정한 17대 국회의 통합민주당과 한나라당 지도부와 국회의원들도 역사적 책임을 면치 못할 것임을 엄숙히 선언한다.”

 

4. ‘최초의 미국인’ 벤자민 프랭클린 vs. ‘국부’(?) 이승만

 

1) ‘최초의 미국인’ 벤자민 프랭클린

1790년 4월 17일 미국의 정치가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이 세상을 떠났다.  미국 100달러 지폐에 등장하는 모델이기도 한 프랭클린은 18세기 신대륙의 정신과 미국의 역사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오직 근면과 성실함을 무기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완벽한 성취를 이룬 그를 사람들은 ‘최초의 미국인’(The First American)이라 부르며 존경심을 표한다.

 

1732년 그는 자신의 인쇄소에서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Poor Richard's Almanac)>을 펴냈다. 그가 역설한 것은 겸손, 노력, 절약 등의 가치였다. 그는 “한가하면 나쁜 일을 도모한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수고 없이는 이득도 없다” “빈 가방은 똑바로 서지 못한다”, “경험은 훌륭한 학교지만 바보는 아무 곳에서도 배우지 못한다”, “좋은 전쟁이나 나쁜 평화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등의 명언들을 양산해내기도 했다.

 

엄청난 돈을 모은 프랭클린은 그것을 도서관, 학교, 병원, 소방서 같은 공공시설을 짓는 데 아낌없이 투자했다. 1736년 식민지 최초의 주민 자원봉사형 소방서인 유니언 소방사를 설립했고, 1751년에는 필라델피아 대학(오늘날의 펜실베이니아 대학) 설립을 주도하고 초대 총장으로 부임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기계와 과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열효율이 높은 난로, 사다리 의자, 다초점 안경, 피뢰침 같은 지금도 유용하게 쓰이는 수많은 물건들을 발명했고 질병, 곤충, 해류, 인구, 전기, 태양의 흑점 등을 연구해 명성을 쌓았다.

 

프랭클린은 식민지 독립운동의 열혈 지지자였다. 일찍부터 그는 독립을 위해 모든 식민지들이 단결할 것을 호소했으며, ‘최초의 미국인’이라는 영예로운 별명은 이때 얻은 것이다. 식민지 독립운동이 본격화되면서 그는 선봉에 서서 운동을 이끌었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이에 서명한 후 곧바로 신생 미합중국 대사로 프랑스에 파견되어 프랑스의 군사적 지원과 참전을 끌어냈다.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헌법 제정을 위한 제헌의회(Constitutional Convention)에 펜실베이니아 주지사로 참석했다. 이 제헌의회엔 로드아일랜드를 제외한 모든 주의 대표 55명이 참석했는데, 이들은 나중에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로 불린다. 프랭클린은 당시 81세로 ‘건국의 아버지들’ 가운데 최고령이었다.

 

장기간에 걸친 프랭클린의 막강한 영향력 덕분에 ‘미국 대통령이 되지 않은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만들어졌다. “미국의 대의가 곧 모든 인류의 대의다”라는 그의 발언은 금과옥조처럼 여겨지면서, 미국과 미국인들은 특별하다는 이른바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의 슬로건으로서 미국인들의 삶과 자긍심을 지탱시키는 중요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가 주목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원조가 있다면, 그 대표적 인물은 프랭클린이 아닐까 싶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근면과 성실함으로 인생의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를 이룬 그는 분명 신대륙의 이상에 걸맞는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했다. ‘미국 사회의 미래상을 제시한 인물’이라고 프랭클린을 평한 문필가 월터 아이작슨은 그의 수많은 발명과 다양한 업적을 열거하면서 “그러나 프랭클린이 발명한 것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끊임없이 재창조된 것은 바로 그 자신이다.”고 말한다.


2) ‘국부’(國父) 이승만? No!

우리나라에는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 같은, ‘최초의 한국인’, ‘한국 사회의 미래상을 제시한 인물’로 칭송할 만한 사람이 없을까? 없지 않다. 상식과 합리를 외면하는 수구의 시선으로, 맹목적 반공주의자의 눈으로 근현대사를 살펴보면 대한민국을 세운 위대한 ‘국부’(國父), ‘건국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이들에게는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그리고 아브라함 링컨을 모두 합친 만큼의 위인”(이화학당 이사장 김활란),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이시요, 세기의 영도자이신 국부, 건국의 아버지”(서울신문 2011. 9. 7), “공산당의 남침을 격퇴하여 자유를 수호하고, 자유민주주의를 기초로 한, 국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명실공히 대한민국의 국부로 불세출의 영웅”(금란교회 김홍도 목사)이 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바로 그 ‘불세출의 영웅’이다. 이들은 ‘국부 이승만을 부정하면 공산주의자’이고, 이승만을 비판하는 국민은 ‘패륜하는 국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과는 달리, <사상계> 발행인이었던 장준하는 ‘희대의 협잡꾼이자 정치적 악한’으로 이승만을 평한다. 정석희(한국전쟁유족회 총괄사업단장)는 “국제전범재판소에 회부돼야 할 학살자 이승만이 이명박 정권 들어서면서 ‘건국의 아버지’로 되살아나고 있다. 수구세력이 내세우는 이승만의 국부화나 미화작업은 이승만 독재와 학살을 희석시킴으로써 자신들의 달콤한 기득권을 계속 확보해 나가려는 반인륜적 술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국부 이승만’은 참으로 놀라운 비약이자 허구적 창작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 이승만이 “반만년 우리 민족사에 끼친 가장 위대한 업적은 역사 이래 왕조의 백성으로 살아오던 우리 민족을 국민 각자가 국가의 주인이 되게 한 주권재민의 자유민주공화국을 건국한 것”이란다.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해 치장하더라도 이승만 그가 민주적 헌정질서를 농단한, ‘주권재민의 자유민주공화국’을 파괴한 독재자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정적 살해와 개헌 파동 등 영구집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파렴치한 정치인이기도 했다. 바로 그 부패한 독재와 맞서 싸우다 많은 젊은 학생들이 꽃다운 나이에 희생됐다.

 

이런 인물을 놓고 국부 운운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승만을 살려내려고 4?19혁명과 민주주의를 죽일 수는 없다. 대통령의 권좌에서 오랫동안 독재권력을 누리다가 국민의 힘에 밀려 외국에 쫓겨나가 쓸쓸히 숨을 거둔 이승만. 그것은 그의 잘못된 통치행위에 대한 인과응보이자 사필귀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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