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연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35년 전인 1980년 4월 15일. 이 날은 실존주의 문학의 거장이자 프랑스의 대문호인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그의 작품 가운데 자전적 체험으로 채색된 <벽>(1939)이라는 소설집이 있다. 서문에서 사르트르는 이 작품의 주제가 실존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일련의 시도들로서 결국에는 ‘벽’에 부딪혀 실패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벽이란 ‘죽음의 부조리’를 뜻하는 것으로, ‘벽’에 갇힌 사람에게도 자유는 존재하는 것인지, 극한적인 상황 속에서 자유 본연의 상태는 어떤 것인지 물음을 던진다.
4월 15일 ‘오늘’의 주제는 <‘벽’을 허물다>이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개인의 실존적 벽과는 다른 차원에서, ①노예제 폐지와 링컨 대통령 ②재키 로빈슨 데이 ③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 등 세 가지를 소재로 편견과 차별과 억압의 ‘사회적 벽’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1. 노예제 폐지와 링컨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은 1861년 3월부터 암살된 1865년 4월 15일까지 미국의 16번째 대통령으로 재직했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 임기 중에 암살된 링컨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혀 왔으며, 193cm라는 실제 키만큼 역사 속의 거인이었다.
그는 남북전쟁이라는 내부의 위기로부터 벗어나는 데 성공하여 연방을 지켜냈고, 미국 사회의 거대한 벽인 노예제를 폐지했다. 암살당하기 4년 전인 1861년 4월 15일 링컨은 3개월 계약 기간의 지원병 소집을 공고한다. 3개월이면 북부의 승리로 전쟁이 끝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1863년에는 노예해방선언을 공포했고, 미국 수정헌법 제13조―“노예제도는 합중국 및 합중국의 관할에 속하는 어떤 지역에서도 금지된다. 정당한 재판에 의한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의 처벌로서가 아닌 강제 노역의 경우도 동일하다.”―의 통과를 이루어냈다.
링컨은 뛰어난 수사학 사용과 연설을 통해 대중의 의견을 이끌었다. 한 예로 “만인은 평등하다”는 미국의 건국 신조로 시작되는 5분간의 게티스버그 연설―“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가 이 땅에서 사라지지지 않도록”(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은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이 인용되는 연설로 손꼽힐 뿐만 아니라 자유, 평등, 민주주의에 대한 상징이 되었다. 남북전쟁이 단순한 영토적 합체가 아니라 만인의 평등을 가져다 줄 ‘자유의 재탄생’을 위한 투쟁임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2. ‘재키 로빈슨 데이’와 인종차별의 벽
“베이브 루스가 야구를 바꿨다면, 재키 로빈슨은 미국을 바꿨다.”
“재키 로빈슨은 야구의 인종차별 벽을 부숨으로써 야구나 스포츠뿐 아니라 미국 사회 전체의 지형을 바꿔놓았다.”
잭 루스벨트 “재키” 로빈슨(Jack Roosevelt “Jackie” Robinson)은 메이저리그 야구(MLB) 역사상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선수로, 미국 내 인종차별의 편견을 없애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1947년부터 1956년까지 LA 다저스의 전신인 브루클린 다저스의 멤버로 활동하였으며, 1962년 77.5%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 회원이 되었다. 1997년 4월 15일 입단 5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등번호 42번은 LA 다저스를 포함한 전 구단 영구 결번이 되었고, 2004년부터 4월 15일은 ‘재키 로빈슨 데이’로 지정되었다.
1947년 4월 15일 브루클린 다저스의 재키 로빈슨은 에베츠 필드에서, 14,000명 이상의 흑인을 포함하여 26,623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와중에 메이저리그 데뷔를 했다. 1947년 그의 메이저리그 데뷔는 민권법 제정 16년 전, 선거 관련 법안 제정 18년 전, 그리고 미군에서 흑인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의한 것보다 1년 앞서서 일어난 일이었다.
로빈슨이 처음 경기에 뛰었을 때, 상대편은 물론 관중들과 일부 같은 팀 선수들조차 그와 뛰기를 거부했다. 팽배했던 인종차별주의 때문에 흑인들은 백인들에게 사람으로조차 취급당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지만, 구단주와 감독의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다. 브루클린 다저스의 레오 듀로셔 감독은 로빈슨을 거부한 팀원들을 향해 “난 저 친구가 검둥이든 외계인이든 상관 안 해. 중요한 건 저 녀석이 잘해야 니들 연봉도 오른다는 거야, 멍청이들아.”라며 인종차별을 일축했다. 또 그의 동료 선수인 피위 리즈는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이 사람을 미워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이유가 피부색이어서는 안 된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데뷔 첫해 로빈슨은 12개 홈런과 29개의 도루, 125타점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로빈슨은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메이저리그에 유색 인종이 활약할 수 있는 문을 열었다. 그는 1947년 신인상, 1949년에는 내셔널리그 MVP를 차지했으며, 6번의 올스타 게임 출전기록을 가지고 있다. 또 팀의 내셔널리그 우승 및 월드시리즈 우승(1955년)에도 기여하며 다저스의 뉴욕 전성기를 이끌었다. 1947년부터 1956년까지 다저스에서만 뛰다가 마지막 시즌 뉴욕 자이언츠로 트레이드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트레이드 거부를 선언하고 은퇴를 선택했다. 그의 평균타율은 0.311, 통산 10시즌 1382경기에 출전해 총 안타수는 1518개였으며 137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은퇴 이후 로빈슨은 미국 내 흑인인권 향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지병인 당뇨병 때문에 비교적 이른 나이인 53세에 삶을 마감했다. 2013년 4월에는 그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다룬, ‘The true story of an American legend’라는 부제를 단 영화 <42>가 개봉되기도 했다.
“한 인생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 한 중요하지 않다.” 로빈슨이 남긴 말이라고 한다.
3.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과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
1) ‘중대선거’로서의 17대 총선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은 많은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킨 선거였다. 이전 총선과는 상당히 다른 정치환경과 경쟁의 구
도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적 모순의 첨예화에 따른 빈부격차 심화와 사회 양극화의 가속화, 3김의 정치적 퇴장 및 지역주의 투표 행태의 약화에 대한 기대감이, 다른 한편으로는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노무현 대통령의 새천년민주당 탈당과 열린우리당 창당, 한나라당의 불법 대선자금 수수 파동, 유권자의 선거참여 및 후보와의 직접 대면을 제약한 선거법 개악(일명 ‘오세훈법’), 최초로 총선에 도입한 1인2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의 기대효과 등이 그것이다.
2004년 17대 총선의 전 과정은 열린우리당의 ‘탄핵심판-거야 견제론’, 한나라당의 ‘노무현 정부 심판-거여 견제론’, 민주노동당의 ‘판갈이를 통한 보수정치 심판-진보야당론’이 맞붙은 대격전 속에서 치러졌다. 그리고 선거 결과 민주주의와 사회개혁에 대한 대중적 열망이 보수의 재편과 진보의 성장, 즉 열린우리당의 과반 의석 확보와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로 표출됨으로써 ‘거대한 변화’를 예감케 한 정치적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17대 총선의 결과는 다음 두 측면에서 정치지형의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중대선거(critical election)로서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행정부 권력과 의회권력이 일치하지 않는 분할정부(divided government)적 이중권력 상황, 즉 대통령의 소속 정당과 의회 다수당이 불일치하는 상황이 열린우리당의 과반의석 확보(152석)로 해소되었으며, 민주개혁 추진을 표방한 정치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 책임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일정한 조건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의 패턴인 정부 대 의회의 일상적 대결구조의 해소 가능성과 함께, 이제는 민주개혁의 실종과 실패를 과거처럼 거대야당에 의한 ‘포위된 개혁’ 탓으로 돌릴 수 없게 된 상황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2) 민주노동당 원내 진출의 쾌거와 그 의미
둘째, 특히 주목할 것은 오랫동안 진보정치의 전진을 가로막아온 단단한 벽을 허물고, 민주노동당이 마침내 원내에 진출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43년만에 이루어진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선 1950년대와 60년대 초반의 진보정당(진보당과 사회대중당 등)과는 달리, 민주노동당은 자본주의적 산업화에 따른 사회적 모순에 뿌리를 둔 정당이며, 전후 세대를 중심으로 한 제2세대 진보정당이라는 점, 그리고 급진적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되어 온 과거의 진보정당(민중의당과 통합민중당)과는 달리 민주노총과 전농 등 현장 대중조직의 조직적 역량에 기반한 진보정당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오랫동안 ‘진흙탕 속 소용돌이의 정치’ 속에서, 민주노동당은 단순히 진보정당이 아니라 한국전쟁으로 분단이 고착화된 이후 최초의 ‘정당다운 정당’의 출현이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근대적인 사회적 균열에 기초한 정당이자 역사적 비전과 대안을 제시하는 정책정당이며, 진성 당원 중심의 당내 민주화를 진행해 온 민주적 대중정당이라는 점에서 민주노동당은 기성 정당들과는 다른 색깔과 질감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을 계기로, 기성의 헤게모니 질서에 결착된 엘리트 중심의 특권적 폐쇄정치와 냉전분단반공체제 하에서 결빙되어 온 보수독점의 기득권 정당구조가 수구적 보수정당-자유주의적 보수(개혁적 보수)정당-진보주의 정당 간의 정상적인 정치경쟁 구조로 변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후진적인 3류 불량정치에 파열구를 내면서 ‘가능성의 정치’ 공간과 정치적 기회구조가 확장되는 가운데 새로운 전략 상황이 창출된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그것은 ‘기대-실망-좌절-거부 싸이클’의 반복적 악순환이라는 한국정치의 고질적인 특성을 해소시켜낼, 그리하여 기성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와 냉소를 ‘기대-희망-신뢰-참여 싸이클’의 선순환 구조로 바꿔낼 중요한 정치적 전기가 마련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체제를 위협하는 것은 독재의 정당성 붕괴 그 자체가 아니라 대항 헤게모니의 조직, 즉 미래의 대안을 위한 집합적 프로젝트”라는 A. 쉐보르스키의 말을 빌리자면, 17대 총선 결과는 진보정치 차원에서 설득력 있는 정치적 대안의 집합적 프로젝트가 만들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2004년 총선 직후 발표한 한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민주노동당은 성장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정당이다. 한 예로 17대 총선에서의 정당투표 관련 2순위 선호정당에 대한 물음에 대한 한 출구조사의 응답에서 민주노동당은 29.3%로 1위를 차지했다. 여기에 1순위로 선호하는 비율까지 합하면 민주노동당은 44.8%로 2위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또한 50세 이상에서 지지율이 낮은 반면,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이르는 연령층이 민주노동당의 주된 지지 기반으로, 특히 30대에서 가장 높은 지지를 보이는 등 전반적으로 젊은 층에서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어 미래에 대한 밝은 전망이 근거가 있음을 확인해 준다.”
“이처럼 민주노동당이 상당히 큰 규모의 잠재적 지지자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향후 민주노동당의 의회 안팎의 활동 여하에 따라 잠재적 지지를 적극적 지지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러한 성장 잠재력을 어떻게 현실의 힘으로 끌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민주노동당이 신생정당으로서의 한계를 여하히 극복하고 안팎의 견제 또는 충돌을 해결해내면서 기성 정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정치 모형을 창출할 수 있는, 또 대중적 환류(feedback)를 통해 참여의 공고화와 사회적 지지의 확산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을 확보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2004년 4월 15일의 시간은 ‘상처뿐인 영광’만을 남긴 채 짧은 감격과 환희의 순간으로 스쳐지나갔다. 10여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우리는 진보정치 1기의 실패와 종언을 넋두리처럼 이야기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진보정치의 성장과 발전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과거와는 달리 외부의 ‘벽’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옹성처럼 단단한, 진보정치 내부의 ‘벽’이었다.
이제 진보정치의 새로운 2기가 조금씩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이것이 흩어진 열정을 모으고 희망을 일구는 ‘참된 시작’의 길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더 나은 대한민국’을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링컨이 보여준 결단의 리더십, 재키 로빈슨처럼 출중한 실력을 갖추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 갖고서는 부족하다. 공동의 ‘일’을 통해 우리 내부의 단단한 ‘벽’을 허물어내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축적된 감정의 앙금과 심리적 거부감을 포함해서 말이다.
4. 맺음말 : ‘언론수호선언’과 ‘언론인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여전히 허물어야 할 수많은 벽들이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우리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언론의 벽이다.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사기범 아니면 바보일 것이다. 지금/여기 기성의 보수언론이야말로 불신과 편견과 분열을 조장하는, 더 나은 내일을 가로막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1) 과거로의 시간여행 속에서 우리는 1971년 4월 15일 ‘오늘’ 한 사건을 만나게 된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동아일보 기자들이 <언론수호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전개된 ‘언론자유수호운동’은 지방으로까지 확산된다.
역사적 배경은 이러했다. 박정희 정권은 박정희식 ‘돌진형 압축산업화’ 추진의 국민동원 수단으로 언론을 활용하기 위하여, 소위 ‘채찍과 당근 정책’으로 불리는 다양한 언론정책을 펼쳤다. ①부정부패 사이비 언론인 및 언론기관 정화를 명분으로 한 언론통폐합 단행, ②언론기업 육성방침에 의한 언론기업 특혜 지원, ③언론기관에 정부 기관원을 상주시키거나 언론인에게 구속과 테러를 가하는 등의 직접적인 언론 탄압, ④복합적 언론매체 경영의 확대, ⑤재벌의 언론 소유 허용 등이 그것이었다. 이로 인해 박정희 정권하의 언론은 자주성을 상실하고 국민적 신뢰를 점점 더 잃어 갔다.
당시 언론자유 수호운동을 자극한 것은 대학생들이었다. 즉 “개발독재의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짓밟히고 인권이 유린당해서 언론이 침묵하는 상황”에서 대학생들이 언론운동의 불을 지폈으며, 이에 “기자들이 언론자유수호운동으로 화답한 것”이다. 1971년 3월 24일 ‘언론화형식’을 시작으로, 3월 26일에는 동아일보 앞에서 ‘언론인에게 보내는 공개장’, ‘언론화형선언문’, ‘언론인에게 고한다’ 등의 유인물을 거리의 시민들에게 나눠주며 편파적인 언론 상황을 비판하고 나섰다.
4월 15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기자적 양심에 따라 진실을 진실대로 보도하고 외부의 부당한 압력을 배격한다”, “언론의 자유는 침해되어서는 안 되고, 기관원(중앙정보부 요원)의 상주나 출입은 허용될 수 없다”는 내용의 ‘언론자유선언문’을 발표한다. 곧바로 한국일보, 조선일보, 대한일보, 중앙일보 기자들의 선언이 이어졌으며, 5월 초까지 경향신문, 신아일보, 문화방송, 현대경제신문, 산업경제신문, 합동통신, 동화통신이 합류하는 등 운동의 불꽃은 전국 각 언론기관으로 확산되었다. 선언문에서 공통되는 점은 기관원들의 언론사 상주를 거부하는 내용이었다. 또 언론이 본래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원인은 외부에 있지만, 언론계 내부에도 문제가 있었던 사실을 시인했다.
40여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의 언론환경은 어떠한가? ‘곡학아세’와 ‘정론직필’이라는 두 가지 길 사이에 어디쯤 서 있는지 기자들 스스로 자문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2014년 한국대학신문의 ‘전국 대학생 의식조사’에 따르면 언론인은 부동의 1위인 정치인에 이어 한국 대학생들이 가장 불신하는 사회 집단 2위에 올랐다. 2012년 한국언론진흥재단의 ‘기자 의식조사’를 보면 언론의 신뢰도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편향적 보도’(50.1%)를 1위로 꼽았다. ‘권력에 대한 감시 및 비판 소홀’(19.8%), ‘회사 이익만 생각하는 자사이기주의’(12.3%), ‘선정주의적 보도’(10.5%)가 뒤를 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망가졌을까?
2)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 그리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 이것이 바로 언론의 기능이자 언론의 사명이다. 단순히 사실 보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도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고 억울한 일과 오해는 풀어주고, 잘잘못을 밝히는 일, 그것이 바로 언론의 존재 이유다.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또는 특정한 집단의 기득권을 위해 편파.왜곡 보도를 한다면 그 언론은 언론이라고 할 수 없다.
영국의 정치경제 평론가이자 유명 칼럼니스트인 조지 몬비오(George Monbiot)는 <가디언>지의 기고문에서 “오늘날 영국에서 가장 믿을 수 없고 가장 부패한 직업은 언론인”이라고 지적하면서 “언론인들에게도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명예, 자존감, 소명의식 같은 가치들은 더 이상 언론인과는 상관없는 단어가 됐고, 사주의 권력, 기업의 권력, 정치권력의 충실한 집행자로 고용된 집단이라는 치욕적인 이름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는 것이다.
몬비오가 제안한 언론인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초안에서 그는 “언론인 스스로 언론인으로서 행사하는 힘과 그 힘의 원천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언론인의 명예, 자존감, 소명의식을 복원하는 출발점이라고 강조한다. 민주주의의 요체가 참여의 정치이고, 민주주의를 위축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이 배제의 정치라면, 공적인 영역에서 시민 참여 또는 배제의 알파이자 오메가가 바로 언론이다. 언론인의 가장 중요한 소명은 시민의 기본적 권리를 안팎의 압력으로부터 지키려는 소신과 철학에서 나온다.
‘잊지 않겠습니다.’ ‘함께 하겠습니다.’ 4월 16일 내일은 세월호 참사 1주기다. 1년 전 “기레기라는 말 나오지 않도록 새롭게 태어나겠습니다.”라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던 5천623명의 현업 언론인들. 참사 1주기를 맞아 언론노조는 또다시 <부끄럽고 참담합니다. 참회하고 반성하겠습니다>라는 제목의 결의문을 발표했다. “한국 언론은 세월호와 함께 침몰했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에 대한 실체적 진실 규명에 가장 앞장서야 할 언론이 오히려 진상조사를 방해하고 진실을 덮는데 앞장섰다”고 회고하면서.
300여명의 무참한 죽음 앞에, 295명의 사망자와 9명의 실종자 이름 앞에 과연 언론인의 자존감과 소명의식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는 기자는 우리 사회에 과연 몇몇이나 될까? 특히 편향과 왜곡 보도의 상징인 조선과 동아와 대다수 종편의 기자들은 민주적 책임윤리에 역행하는, ‘하이에나’와 ‘카멜레온’의 못된 습성으로 완전 무장한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