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연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역사는 당대의 역사다.” 이탈리아 역사가 베네데토 크로체의 말이다. 모든 역사는 현재로 통한다는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과거가 현재를 규정하는 준거가 아니라 현재가 역사를 말하는 준거”로, 따라서 오늘의 문제로부터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런 생각으로 정의당 부설 진보정의연구소 블로그에 <작은 역사 이야기 ‘오늘’>이라는 제목으로 가능하면 주 1회 한 편의 칼럼을 연재할 예정이다. ‘어제 있었던 오늘’의 사건과 인물을 통해 다가오는 ‘내일’을 조금이나마 더 낫게 만들어가는 실마리를 찾는 시간여행을 함께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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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달라도 너무 다른, 루스벨트?오바마의 ‘노동’과 이승만?박정희의 ‘노동’
1) 82년 전 오늘인 1933년 3월 10일 미국 백악관.
제32대 대통령에 당선된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재임 1933~45)는 남북전쟁 이래 최악의 위기인 대공황 타개책으로 ‘뉴딜정책’을 발표한다. 매일 수천명이 굶어죽을 위기에 처하고 기업들은 줄줄이 부도가 났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어갔으며 은행 80%가 더 심한 금융공황을 막기 위해 문을 닫았다. 불안과 공포가 세상을 휩쓸고 있었다. “우리가 두려워할 유일한 대상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취임사에서 행한 루스벨트의 일성이었다.
그는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뉴딜정책을 실시한다. 뉴딜 하면 많은 사람들은 테네시계곡 개발공사(TVA)를 떠올리며 대규모 공공사업에 의한 실업자 대책 및 사회보장 정책을 떠올린다. 흔히 ‘3R 정책’이라 불리는 뉴딜정책은 산업과 농업 활성화를 위한 부흥정책(Recovery), 실업자 해결을 위한 구제정책(Relief), 그리고 노동기본권 및 사회보장제 확립을 위한 개혁정책(Reform)을 그 핵심 내용으로 했다. 이 가운데 뉴딜을 지탱한 한 축이 노동자의 권익 향상 대책이었다는 것,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최저임금제도가 도입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로부터 수십년이 흐른 2008년의 미국.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로 월가의 위기가 중심가로 불어닥치면서 ‘뚱뚱한 고양이들의 잘못을 왜 우리가 떠안아야 하는가’하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실패한 전쟁과 금융위기의 수출로 초일류 국가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은 땅에 떨어졌다. 사회 전반에 깔려있던 이같은 불신, 패배주의는 실패로 점철된 정부를 향해 폭발하며 오바마의 압승을 이끌었다.
‘갈등과 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통합의 시대’를 열자, 월가와 정가의 ‘그들만의 잔치’에 휘둘리지 않는 ‘우리의 국가’를 만들자, 200년전 주창했던 독립선언문에 기초한 일류국가로서의 자긍심, 그 ‘초심’을 되찾자고 오바마는 역설했다. 이것이 오마바가 주창한 ‘변화’의 핵심이었고, ‘선거혁명’의 불을 당긴 배경이었다. 오바마는 “마천루의 웅장함, 군사력, 경제 규모 때문에 미국이 위대한 것이 아니다”라면서 “200년전 독립선언문에 명시된 진리―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 행복의 추구가 있다―가 우리 자긍심의 기초”라고 역설했다.
“우리는 경제의 힘을, 억만장자들이 몇 명이고 포춘지 500대 기업들의 이익이 얼마인지로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이디어를 가진 누군가가 새로운 사업에 도전할 수 있는지, 손님에게 받은 팁으로 살아가는 웨이트리스가 일자리 잃을 걱정을 하지 않고도 아픈 아이를 돌보기 위해 하루 휴가를 낼 수 있는지를 가지고 평가한다. 우리는 노동의 가치와 존엄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경제를 만들려 한다.” 노동의 가치와 존엄성을 기반으로 한 오바마의 ‘담대한 희망’은 그렇게 미국 시민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2) 1959년 3월 10일 서울운동장.
제1회 노동절 기념식이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소속 노동자 2만 여명과 정부 각 부처 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대한노총은 “존경하옵는 각하, 오늘은 글자 그대로 각하가 평소에 누구보다도 아껴 주시던 노동자의 명절날입니다.…오늘 우리 노동자 동지들이 다같이 한 자리에 모여…기쁨을 나누게 되었음은 오로지 각하가 베푸신 어진 정치의 보람임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며 독재자 이승만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대통령 이승만은 “공산당들의 노동절인 5월 1일 대신 3월 10일을 노동절로 정했으니 노동자들은 공산주의에 빠지지 말라”는 당부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엄혹한 일제 치하에서도 진행해온 5월 1일 메이데이(May Day) 행사가 이승만에 의해 ‘빼앗긴 노동절’로 된 것이다.
2년 전인 1957년 5월 22일, 이승만은 메이데이에 대해 “공산도당들이 세계 적화를 위한 선전 도구로 이용하고 있는 5월 1일을 택할 필요가 없이, 이와 구별하여 우리 한국의 자유노동자들이 경축할 수 있는 참된 명절이 제정되기를 바란다”라며 사실상 지시를 내린다. 이에 대한노총에서는 상무집행위원의 결의로써 5월 1일이 아닌 다른 노동절을 제정하기로 하고 3월 10일을 ‘노동절’로 정했다. 3월 10일은 1946년 대한노총의 전신인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라는 어용노조가 위로부터 만들어진 날이다.
박정희는 노동절이라는 이름마저도 못마땅했는지 ‘근로자의 날’로 명칭을 바꾼다. 이는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등장한 군사정권이 민정으로 이양하기 위한 체제를 정비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1963년 4월 17일 박정희 군사정권은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의 개정을 통해 노동통제의 기반을 마련하고 ‘근로자의날제정에관한법률’도 공포했다.
박정희에게 노동자나 노동절은 사회주의적 냄새, 계급의식이 강하게 나는 불온한 단어이자 ‘빨갱이’ 용어였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는” 이른바 ‘혁명공약’을 내걸면서 자신의 과거를 세탁하려 했던 자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노동자의 단결권?단체교섭권?파업권은 온전히 부정되었고 오로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만 하라는 강요였다. 자본은 온갖 ‘자유’를 누렸지만, 노동자는 자유와 권리를 부정당한 것이다. 이제 노동, 노동자라는 말만 꺼내도 빨갱이로 몰리는 세상이 되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한국노총의 창설일인 3월 10일이 근로자의 날로 제정된 후 1993년까지 5월 1일 노동절을 기념하는 집회는 불법으로 규정되어 탄압받았다. 1994년 노동계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5월 1일 근로자의 날이라는 기념일로 돌아온 것이다.
1994년 마흔 여덟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고 김남주 시인은 <깃발>이라는 시를 통해 “거스름돈을 긁어모아 자본가가 근로자에게 상 하나 큼직하게 내려주는 날”인 3월 10일 근로자의 날과, “인간이 인간에게 이리인 세계를 끝장내기 위해 노동자들이 민주의 깃발을 치켜든 날”이자 “노동삼권 보장을 위하여 자주노조 결성을 위하여 형제의 결속과 투쟁을 개시한 날”인 5월 1일 메이데이 날을 비교하면서 ‘빼앗긴 노동절’의 시대를 노래한다.
3) 노동자가 ‘꽃’이 되는 세상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2012년 어느날. 통합진보당 국회의원이었던 심상정(현 정의당 원내대표)은 근로자의 날 명칭을 ‘노동절’로 바꾸는 내용의 ‘근로자의날제정에관한법률 개정안’을 국회에 대표 발의한다. 심상정은 “근로라는 용어는 일제시대부터 사용되다가 그 이후 냉전과 분단을 지나 ‘노동’이라는 용어가 불온시되면서 대체되어 온 것”이라며 “법률에 근로, 근로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국가는 모순되게 북한 이외에는 없다”고 밝혔다. 이어서 “근로라는 용어는 국가의 통제적 의미가 담긴 것으로 노동, 노동자라는 가치중립적 의미로 점진적으로 대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근로자의 날을 노동절로 바꾸려는 움직임은 노동계와 정치권에서 꾸준히 제기돼왔지만 번번이 정부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른바 ‘민주정부 10년’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근로자의 날과 노동절. 사실 이것은 단지 명칭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사고를 규정하고 사고의 변화는 현실의 변화를 추동한다. 그래서 김춘수는 <꽃>에서 이렇게 읊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5월 1일 메이데이가 누군가에게는 그저 쉬는 날일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의미 깊은 하루일 수도 있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하는 의미 없는 날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날의 의미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노동자가 ‘꽃’이 되는 세상은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쉽게 부를 수 있을 때, 헌정질서 파괴를 ‘구국의 결단’이나 ‘최선의 선택’으로 합리화하거나 옹호하는 사람을 정치지도자로 선택하지 않을 때 조금이나마 열리게 될 것이다.
2. ‘유신’의 기억을 찾아서
1) 1973년 3월 10일.
신문회관 강당에서 유정회 창립총회가 진행되고 있다. 유정회는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의 약칭으로 유신독재체제 하에서 사실상 박정희 1인의 입법부 장악을 위해 만들어진, 정권을 보위하기 위한 박정희의 사조직이자 준정당조직이었다. 유정회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암살 이후 활동 정지 상태에 들어갔고, 1980년 제5공화국 헌법의 발효 시점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와 함께 해체되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가 ‘유신’이라는 말을 썼을 때 40대 이하의 젊은 층은 이 낱말의 뜻을 선뜻 알아듣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동학 등 신생 민족종교에서 ‘유신개벽’사상이라는 표현으로 쓰인 적이 있었으나 낯선 용어였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과거 식민지 시절을 체험한 40대 이상은 10월유신이라는 말에서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떠올렸다.
10월유신이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가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한 비상조치를 말한다면,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은 일본 역사에서 마지막 막부 시대인 300년 도쿠가와 막부체제를 무너뜨리고 천황친정 형태의 중앙집권적 근대 국가를 이룬 정치·사회적 대변혁이었다. 양자 사이에는 관련성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박정희가 유신이란 용어를 끌어다 쓴 데에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투영된 박정희의 감정과 의욕이 깔려 있었다고 할 수 있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뒤 얼마 안돼서 출간된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저서에서 박정희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대해 ‘경이와 기적’을 낳게 한 혁명이었다고 극구 찬양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의 메이지혁명의 경우는 금후 우리의 혁명수행에 많은 참고가 될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본인은 이 방면에 앞으로도 관심을 계속해나갈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나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서구 문물의 도입에 의한 부국강병과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를 함께 꽃피웠던 반면, 한국의 유신체제는 경제성장, 안보강화와 함께 ‘박정희 영구집권’이라는 공포와 철권의 통치를 초래했다. 결국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박정희와 유신체제는 의도는 메이지 유신에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결과는 1930년대의 군국주의 하 일본의 ‘쇼와유신’과 크게 닮았던 것이다.
2) ‘쇼와(昭和)유신’이란 일본을 신국(神國)이라고 믿는 그릇된 국가주의 사상을 신봉하면서 다이쇼 민주주의에 반발한 일본육군 내의 파시스트집단이, 1932년의 5?15사건과 1936년의 2?26사건을 통해 일본의 민주주의를 유린하면서 군국주의의 길로 일본을 휘몰고 가고자 했던 군부지배체제를 말한다.
1936년 2월 26일 일본의 운명을 크게 바꿔 놓을만한 사건이 터진다. 도쿄 근위사단 보병 제3연대 및 미시마 야전중포병 제7연대 소속의 1,500명의 군인들이 갑자기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은 경제 공황과 전쟁으로 어수선했던 일본사회를 뜯어고치겠다며 정관계 고위인사들을 암살하고 정당을 무력화시킨 뒤 천황에게 1인 독재를 해달라고 요구한다. 2?26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지만 일본육군의 창설 이래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대사건으로 그 파장은 대단히 컸다. 이 사건은 일본 국민은 물론 정계와 군대에 전례없는 충격을 주었으며, 일본을 태평양전쟁으로 몰아넣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은 군국주의와 파시즘을 향해 돌진하게 된다.
주한 미대사관에서 문정관으로 오랫동안 근무한 적이 있는 그레고리 핸더슨은 ????한국, 소용돌이의 정치????라는 저서에서, “박정희의 정신적 선배는 쇼와시대 전전의 일본 청년장교들이었다”고 기술하면서, 박정희의 통치스타일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그들(5?16세력)은 그들의 사상적 선배인 1930년대초 일본의 청년장교들처럼 문관에 의한 정치를 경멸한 반면, 극단적인 직접행동만이 세계를 개혁시킬 수 있다고 믿는 그들 나름대로의 구세주의적 애국자였다.…요컨대 과거에 조선을 위해 일본이 들고 나온 방식, 즉 관료주의와 군대식 고능률, 비정치화, 그리고 엄격한 반공적 지배가 수정된 형태로 다시 시행되게 된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는 5?16쿠데타를 결행하기 이전 시절, 군부 내 동료들과 통음한 자리에서 “정치인, 경제계, 군부가 온통 부정으로 덮여 있어. 잘사는 사람은 부정으로 치부하고 다수의 못사는 사람들은 끼니를 잇기도 힘들다”면서, “2?26사건 때 일본의 젊은 우국군인들이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궐기했던 것처럼 우리도 일어나 확 뒤집어엎어야 할 것 아닌가”라고 자주 토로했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그의 생각과 꿈은 일본의 선배들이 실패했던 것과는 달리 5?16쿠데타로 실현되었고, 또 유신독재체제의 구축으로 맥을 이어갔다.
3) 1972년 5월 중순 어느날, 서울 궁정동의 중앙정보부 안가
정보부장 이후락은 판단기획국 부국장 김모를 만나고 있었다. “국가와 대통령 각하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사안이니 보안을 생명처럼 여겨 일하시오. 이 작업이 끝날 때까지 당신 팀은 여기서 숙식을 해야 합니다.” 코드네임은 ‘풍년사업’, 이른바 10월유신 작업이 구체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궁정동의 밀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작업의 결과는 거의 매주 박정희, 이후락, 비서실장 김정렴 3인회의에 넘겨졌다. 72년 8월경 유신의 마스터플랜이 마무리되면서 법무장관 신직수, 중정차장 김치열 등은 새 헌법의 골격을 짜기 시작했고 검사 김기춘 등이 실무 역할을 맡았다. 유신헌법과 새 법령정비 포고령 모두 이들 팀에 의해 준비되었다.
유신헌법의 산실인 궁정동 바로 그곳에서 박정희가 살해당함으로써 ‘유신의 명부(冥府)’가 되고 말았다는 것은 정녕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와 함께 위에 언급된 ‘검사 김기춘’은 5?16장학회의 첫 수혜자이자 1992년 ‘우리가 남이가!’로 상징되는 초원 복국집 사건의 주인공이며, 얼마 전까지 ‘1인지하 만인지상’이었던 청와대 비서실장 김기춘과 동일인물이다. 박정희 정권 하에서 유신헌법의 실무책임자가 40여년이 흐른 지금 박근혜 정부 하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것이다.
3.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콤플렉스’
1) “박근혜 대통령의 최대 목표는 선친의 명예회복”과 ‘아버지 컴플렉스’
“아버지가 매도당하는 세상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무엇을 얻더라도 저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1989년 10·26 후 처음으로 언론에 나와 한 박근혜의 말이었다. 그래서일까,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박근혜는 ‘아버지의 사람들’에 대한 한없는 믿음을 과시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정영사(正英舍) 출신 ‘박정희 키드(Kid)들’의 인수위 전면 배치 및 “정말 드물게 사심 없는 분” 김기춘 비서실장 발탁과 ‘왕실장’ 역할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꼽을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유독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에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컨대 주요 정치현안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제3자의 관점을 유지하는 이른바 ‘유체이탈 화법’을 종종 보여왔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등 정치권의 최대 이슈에도 차단막을 쳤다. “나는 모르는 일”이거나 “국회에서 논의할 일”이라는 책임 회피 발언이 고작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아버지만 비판하면 어김없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대단히 공격적으로 대응한다. 청와대는 물론, 여당 의원들까지도 총공세에 나선다.
‘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비판을 바라보는 박 대통령과 핵심측근들의 정서적 심리상태에 대해 ‘최고 존엄’을 모욕당한 북한 지도부와 유사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의 최대 목표는 선친의 명예회복”이라는 지적과 일맥상통한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국가와 세계에 대한 안목을 갖게 해준 자상한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과도 같은 존재”였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의 저서 <사람 VS 사람>(2005)을 보면 대통령의 딸로 18년을 산, “스스로 선택의 의미를 따져볼 능력이 없는 아홉 살 때부터 특별한 아버지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서 성장한”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에 대해 이런 내용을 적고 있다.
- “박근혜에게 국민은 (자신과 똑같이) 아버지의 훈육을 받아야 하는 자식이다.”
- “그녀에게 조국애란 거의 모태신앙과 흡사하다. 그녀에게는 아버지 박정희가 조국 그 자체인 것이다.”
- “영원한 소녀(Puella aetema)의 부성콤플렉스…박근혜는 아버지 박정희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신화적 부성원형으로서의
박정희를 기억하고 있다.…부성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여성의 첫 번째 특징은 극도의 자기절제를 보인다는 것…두 번째 특징은 개인적, 여성적 삶이 소멸되며 외부 세계에 몰입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2) “역사에 대한 인정은 진보를 향한 유일한 길”
박근혜 대통령은 얼마 전 제96주년 3·1절을 맞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참석, 기념사를 통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역사란 편한대로 취사선택해 필요한 것만 기억하는 게 아니며, 역사에 대한 인정은 진보를 향한 유일한 길”이며, “역사는 길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어려운 길을 피해갈 수도 있고, 적당히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길이 될 것입니다.…당장은 어렵더라도, 대한민국을 위한 길을 가겠습니다.”
정말 맞는 말이다. 스스로에게 자문해봤을 때, “당장은 어렵더라도, 대한민국을 위한 길”은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를 편한대로 취사선택해 필요한 것만 기억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5·16 쿠데타와 유신 관련 질문에 대해 “과거로 자꾸 가려고 하면 한이 없다. 이제 미래로 가자”며 말을 자른다. ‘과거 대 미래’의 이항대립 문법, ‘선과 악’의 대결 화법을 통해 논점을 회피하면서, 역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과거에 집착하는 몹쓸 부류로 만들고, 스스로는 미래지향적인 긍정의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이러한 문법이나 화법은 언어를 오염시키고 세상을 타락시키는 데 한몫을 거든다.
박근혜 대통령은 관념적으로는 아버지 시대의 공과를 구분해서 생각한다고 하지만, 실제는 공만 기억하고 잘못이 무엇인지 실감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국정운영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으로서 아버지 콤플렉스의 실체를 인지하고 ‘대통령 박정희의 통치 18년’의 전 시대를 왜곡됨 없이 투명하게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란다. 특히 유신독재 시대 질식된 자유와 인권, 억압된 민주주의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노동은 배제되어야 할 ‘붉은’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지탱시키는 궁극적인 힘이자 소중한 가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