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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를 위한 경제성장' 포럼 1차 자료집(김상조 외)

1. 서론: 보수의 진화와 진보의 위기

 

 이 글의 목적은 우연 또는 필연의 과정을 거쳐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현안 과제들에 대한 단기 정책 프로그램을 마련하는데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의 제약조건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30년 후의 바람직한 경제질서에 대한 장기 청사진을 그리는데 있지도 않다. 즉, 5~10년 정도의 중기적 시계(time horizon)를 염두에 두면서, 광의의 진보진영이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과제들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진보진영이 발을 딛고 있는 작금의 엄혹한 제약조건을 잊지는 않되, 우리 사회의 변화 추세에 대한 필자의 ‘주관적 판단’을 기초로 현실진단과 대안제시에 주력하고자 한다.

 이러한 목적에 비추어 볼 때, 무엇보다 먼저, 2012년 18대 대선 결과에 대한 필자의 평가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이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2007년 대선에서 민주당 정동영 후보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게 530만 표 차이로 무기력하게 패배했을 때 진보진영에서는 위기감이 팽배했었다. 진실로 ‘진보의 위기’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2012년 대선에서 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110만 표 차이로 졌을 때에는 ‘이길 수도 있었는데…’라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그래서 민주당의 혁신을 외치는 목소리도 있지만, 벌써부터 5년 후를 도모하는 다양한 움직임들이 나타나고 있다.
 2007년과 2012년 대선 패배 직후의 이러한 분위기 차이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가. 물론 그 밑바탕에는 530만 표(22.6%p)라는 대선 사상 최대 표 차이의 패배와 110만 표(3.6%p)라는 박빙의 아쉬운 패배로 대비되는 선거 결과의 정치적 함의가 깔려 있을 것이다. 이는 진보진영의 후보 단일화 과정 및 그 이후의 대선 캠페인 과정을 끊임없이 반추하면서, 향후 정계 재편의 방향을 가늠할 수밖에 없는 정치 현실과도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가 제도 정치권 내부의 움직임에 대해 평가할 능력은 없다. 다만,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지난 18대 대선에서 부상한 주요 정책적 의제들이 향후 한국경제와 한국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요컨대,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로 요약되는 진보적 의제가 2012년 대선의 전 과정을 지배했던 것은 분명하며, 이것이 진보진영에게는 선거 패배의 상실감을 일부나마 보상해주는 유일한 위안거리가 되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이는 이명박 후보의 경제살리기 구호에 눌려 진보적 의제를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했던 2007년 대선 과정과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래서 2012년 대선은 비록 “진보 정치의 패배였지만 진보적 정책노선은 승리”한 선거였다는 평가(홍장표⋅전강수(2013.5.21), p.14)가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지리멸렬했던 정당조직을 혁신하여 리더십을 바로 세우고, 50⋅60세대의 민심을 놓쳐버린 선거 전략상의 오류를 바로 잡는다면, 5년 후 선거에서 진보적 정책노선은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결과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된다.

 과연 그런가. 과연 진보적 정책노선은 지난 18대 대선에서 승리했고, 과연 5년 후에도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낙관적 평가와 전망에 필자는 동의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질적인 차이를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2년 대선을 경과하면서 한국사회 전체가 질적인 변화를 경험하였다. 여전히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의 의미 및 수단에 대해 보수⋅진보 진영 간에 뜨거운 논란이 진행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한국사회 전체가 결코 과거로 되돌아가지 못할 일정한 선을 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속에서 한국사회의 보수진영도 진화하였다. 그 차이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돌이켜 보자. 2007년 대선 패배 직후 팽배했던 진보진영의 위기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촛불집회를 통해 확인된 대중의 폭발적 에너지, 강만수⋅최중경 경제팀의 시대착오적 정책 실패, 그리고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세계경제질서의 대전환 속에서 이명박 정부의 실체가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박정희식 낙수효과 모델과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가 혼합된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로는 양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경제위기를 자초할 뿐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확인되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조차도 공정사회⋅동반성장⋅공생발전 등의 어색한 구호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그 속에서 한국의 보수진영도 진화하기 시작했고, 박근혜 정부는 그 결과물이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의 외연 및 내포는 그야말로 가치판단의 문제다. 그런데 서구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적 의제였으며, 보수정당이 이를 현실화하는데 주된 역할을 자임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다만, 한국사회에서는 보수진영에 내재한 천민성⋅기형성 때문에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가 진보진영의 전통적 의제로 자리 잡고 있었을 뿐이다. 필자는 지난 10여 년 동안 재벌개혁 운동에 매진해 왔지만, 법치주의 확립을 통한 재벌개혁이 서구적 관점에서는 부르주아의 과제일 뿐이라는 일부 진보학자들의 비판을 거부한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자칭타칭 보수진영 인사들 대부분이 법치주의의 확립을 자신의 역사적 책무로 인식하지도 못하는 현실에서, 밑으로부터의 대중적 요구에 의해 법치주의를 실현해나가는 것이야말로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진보적 과제라고 주장했을 뿐이다(김상조(2012.3), pp.212-213).

 그런데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요구를 박근혜 후보가 끌어안았고, 이를 통해 한국 보수진영이 정상화의 길로 들어섰다. 박근혜 정부가 단순히 진보적 의제를 ‘선수치고, 베끼고, 물타기’한 것으로 평가할 수만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2012년 대선은 한국 보수진영이 질적인 변화를 경험한 계기가 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2012년 패배가 2007년 패배보다 진보진영에게는 더 심각한 위기로 다가오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두 가지 의미다.
 첫째, 보수진영의 천민성⋅기형성을 전제로 형성되었던 진보진영의 전통적 정책대안들이 가지는 논리적 정합성 및 대중적 호소력이 크게 퇴조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재벌총수도 불법을 저지르면 예외 없이 감옥 간다.’는 간명한 원칙이 점차 현실적 힘을 얻게 된다면, 출총제 부활⋅순환출자 해소⋅금산분리 강화 등 기존의 재벌 소유구조 개혁 대책들은 반비례적으로 설득력을 잃어갈 것이다. 물론 ‘재벌개혁이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의 출발점’이라는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나, 보수진영의 변화에 상응하는 새로운 진보적 정책 수단의 개발을 위한 치열한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공약은 짝퉁이다.’는 자기기만적 해석에 기초하여 과거의 주장을 관성적으로 되풀이한다면, 이는 진보진영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또한, 박근혜 정부가 6월 4일 발표한 「고용률 70% 로드맵」은 1990년대 이후의 ‘고용 없는 성장’의 원인으로서 “수출⋅제조업 중심의 경제구조는 고용창출력을 약화시켜 왔고, 고용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중소기업과 서비스업의 낮은 생산성, 남성 가장의 장시간 근로에 의존한 근로 문화는 고용창출에 큰 저해 요인이 되고 있다.”(관계부처합동(2013.6.4), p.2)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6월 5일 발표한 「창조경제 실천 계획」은 “지난 40년간 한국경제의 성장을 이끈 추격형 전략은 글로벌 경제위기와 신흥 산업국가의 추격 등에 따라 한계에 봉착”(관계부처합동(2013.6.5), p.1)했음을 명확히 지적했다. 이상의 문건들이 박근혜 정부의 공식 보도자료임을 가리고 선입견 없이 읽어 본다면, 어느 진보적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서로 착각할 만하지 않은가. 이제는 구체적인 정책영역에서조차도 진보진영의 논리적⋅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진보진영의 위기다.
 둘째, 보수진영의 변화에 대응하는 새로운 진보적 가치는 여전히 모호하며, 이를 생산⋅전달하는 작업은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형식적⋅절차적 차원을 넘어 내용적⋅실질적 경제민주화가 필요하고, 그 기초는 참여⋅연대의 공동체적 가치가 되어야 한다는 원론적 주장에는 모두가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고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여전히 해답의 실마리도 찾지 못하고 있다.
 또한, 세계경제질서의 대전환 및 이에 따른 한국경제의 불안정성을 감안하면, 그 해답을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세계경제질서의 안정을 주도할 헤게모니 국가가 사라진 오늘날의 환경에서, 미국⋅중국⋅EU⋅일본 등 주요 국가들은 모두 자국의 단기적 이익 위주로 경제정책을 운용할 것이며, 이는 한국에게는 사실상 외생변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질서는 재편될 수밖에 없으나, 언제 어떻게 변화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예측 불가능하지만 결코 피해갈 수 없는 대외환경의 변화에 따라 한국경제의 안정성이 위협받는 상황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진보진영이 선택한 일국적 차원의 진보적 대안은 지속불가능의 근원적 한계에 봉착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진보진영의 위기다.

 물론 박근혜 정부 5년간 진행될 한국 보수진영의 정상화는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다. 윤창중 대변인 사건이 상징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리더십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반복⋅확대될 소지가 다분하다. 또한 최근 엔저 현상(아베노믹스)에 대한 보수언론들의 공포 마케팅 및 경제민주화 입법에 대한 전경련의 ‘경제 엑소더스’ 위협 등의 예에서 보듯이, 보수진영의 정상화를 저지하려는 기득권 세력의 저항도 더욱 강화될 것이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도 이명박 정부처럼 자멸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현 시점에서 박근혜 정부의 성패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성공의 가능성만큼이나 실패의 가능성도 안고 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공약으로 표출된 보수진영의 진화의 의미를 과소평가하고, 박근혜 정부의 실패에 따른 반사이익만을 기대하는 태도야말로, 진보진영의 위기를 심화시키고 5년 후의 또 다른 패배를 부르는 요인이 될 것임을 강조한다. 보수진영의 진화를 넘어서는 진보진영의 혁신이 필요하다. 이것이 이 글의 골간을 형성하는 필자의 주관적 판단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음 2절에서는 한국경제의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기존 성장 모델(추격형 낙수효과 모델)의 한계를 확인하고 대안의 방향을 가늠하고자 한다. 이어 3절에서는 미래의 선택을 제약하는 국내외의 잠재적 위험 요인들을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4절에서는, 대안의 방향과 위험 요인들을 함께 고려하면서, 진보적 경제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전략적⋅정책적 진로를 모색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5절은 결론이다....(이하 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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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justicei.or.kr/24?category=568440 [정의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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