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연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MB의 << 대통령의 시간 2008-2013 >>과 레트콘(Retcon)
<< 대통령의 시간 2008-2013 >>. 이명박 전대통령이 퇴임 후 회고록 집필에 착수하여 1년 10개월의 집필 기간을 거쳐 얼마 전에 출간한, 총 12개장 800쪽으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 정책 위주의 회고록 성격을 띤 이 책의 내용을 두고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지만, 그 기본 성격은 자화자찬과 교언영색이라는 두 개의 사자성어로 요약가능하다. 즉 자기합리화를 위해 사실관계까지 왜곡한 속된 말로 ‘자뻑’이자, 결국은 사리사욕을 위한 ‘사탕발림’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책 목차나 집필에 참여한 참모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명박은 많은 업적을 쌓은 참으로 ‘대단한’ 대통령이었다. 그래서일까 2013년 2월, 대통령의 무거운 책임과 의무를 내려놓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온 이명박은 지난 5년을 되돌아보며 스스로를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일꾼이었다”고 자평한다. 문제는 ‘가장 행복한 일꾼’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 5년은 대한민국 대다수의 보통사람들에겐 ‘불행과 고통의 시간’ 그 자체였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양자 간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서민들의 불행은 더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노회찬 전 정의당 대표가 공짜로 보내준 << 대통령의 시간 >> 파일의 내용을 읽어가면서 문득 떠오른 건 ‘레트콘’(Retcon, Retroactive continuity의 줄임말)이라는 말이었다. 그것은 ‘과거는 현재의 수요에 의해 수정된다’는 것으로, 어떤 작품의 설정을 바꾸는 방식 중 하나로, 예컨대 작품 속에서 그간 벌어졌던 과거의 일을 현재의 필요성에 따라 수정하고 다시금 현재를 끼워맞추는 식이다. 만화연구가 김낙호는 ?슈퍼맨의 팬티는 어떻게 푸른색으로 바뀌었나?(<< 한겨레21 >> 제888호, 2011.12.5.)라는 글에서 레트콘을 하는 이유에 대해, “계속 이어지는 시리즈의 인기를 오랜 세월 유지하려고 당대의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맥락을 계속 넣는 것이다. 특히 만화는 주인공이 늙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늘 오늘날을 배경으로 에피소드를 무한히 연장하고 싶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 다만 현재를 오늘날에 새롭게 맞추기 때문에, 과거 또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레트콘이야말로 기득권층이 역사를 다루는 기본틀과 대단히 비슷하다. 개인적 경험과 기억을 넘어선 영역에서는, 역사란 구성된 기록 속의 설정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기록 속 설정의 과정에서 현재의 필요에 따라 특정 부분을 부각시키거나 삭제함으로써 과거를 각색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미약한 근거로 아주 거창한 이야기를 새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꽤 오래전부터 레트콘이 한국 현대사, 특히 인물 평가 작업 과정에서 작동되면서 역사의 진실을 파괴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국부 이승만’, ‘근대화의 아버지 박정희’라는 일종의 ‘우상’ 만들기 작업이다. 오랜 독재 끝에 국민들의 손에 의해 쫓겨난 정치인을 ‘건국의 아버지’로 치켜세우는 것은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뒤 18년간 민주주의를 유린했던 박정희를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것으로 곧바로 연결된다. 한 사람은 4?19혁명 과정에서 국민의 힘에 의해 최고권좌에서 강제로 쫓겨났고, 다른 한 사람은 철권을 앞세운 오랜 독재통치 끝에 쿠데타 동지의 총에 비명횡사했는데도 굳이 이들을 영웅으로 만들려는 작업을 지속하려는 이유가 뭘까? 이유야 어찌됐건 그것은 반역의 역사를 재현하려는,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퇴행적 역사의식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를 지배하는 사람은 현재를, 나아가 미래를 지배한다고 한다. 한 때의 과거를 지배했던 개인들과 집단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물학적으로 쇠퇴하거나 사멸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개인과 집단이 자신들의 지배를 합법화?정당화하고 도덕적으로 승인받기 위해 날조했던 역사의 해악적 유산들은 그들의 후예들에 의해 현재를 지배하는 역사적 근거로 악용되기 일쑤이다. 기억들은 단순히 담론의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정치화되고 물질화되어 오늘을 살아가는 생활 속 깊숙이 침투하여 우리의 삶까지도 지배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기억과의 투쟁이자 망각과의 투쟁이기도 하다. 진실을 가장한 허위의 껍질들을 벗겨내야 할 필연성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짓을 거짓으로, 진실을 진실로 정직하게 기억해내고, 그 기억을 역사 속에 생환시켜내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바로 반면교사를 통해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희망의 근거를 찾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명박 정부와 정치부패: ‘권불5년(權不五年)의 반면교사’>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이런 문제의식 아래 기획되고 집필되었다. 정치부패를 주제로 잡은 것은 MB의 자화자찬식 업적은 그 자체로도 문제투성이지만, 업적이란 걸 하나하나 뜯어보면 대부분 정치부패의 범주에 속하거나 또는 그 의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올해의 사자성어’로 본 이명박 권불5년
우선 교수신문의 ‘올해의 사자성어’를 통해 기억을 환기해내면서 이명박 정부 권불오년의 큰 가닥을 잡아보자. 지난 2001년부터 연말만 되면, 대학교수들은 새해의 희망을 함축적으로 담은 사자성어를 발표해 왔다. 이 풍속도는 교수신문이 국내 일간지에 칼럼을 쓰는 일정 수의 교수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후 투표로 순위를 결정, 발표하면서 등장했다. 그리고 2006년부터 새해 희망의 사자성어 발표 직전에 한 해를 뒤돌아보는 ‘올해의 사자성어’도 함께 선정·발표해 왔다.
이명박 정부 출범 첫 해인 2008년의 경우 교수신문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호질기의’(護疾忌醫)를 선정했다. 2008년은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파문, 촛불시위, 4대강 사업 등을 놓고 국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비판이 많았다. 호질기의는 중국 북송시대 유학자 주돈이가 << 통서(通書 >>)에서 남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는 세태를 비판하면서 “요즘 사람들은 잘못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바로잡아 주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병을 감싸 안아 숨기면서 의원을 기피해 자신의 몸을 망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 데서 비롯되었다. 집권 1년차인 이명박 정부와 대통령에게 딱 맞는 사자성어였다.
2009년의 경우는 ‘방기곡경’(旁岐曲逕·사람이 많이 다니는 큰길이 아닌 샛길과 굽은 길)이 선정됐는데, 일을 정당한 방법이 아닌 그릇된 수단을 써서 억지로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그것은 세종시 수정, 4대강 사업추진, 미디어법 처리 등 굵직한 현안들이 처리되는 과정에서 타협과 합의를 이루지 못한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방기곡경은 율곡 이이가 왕도정치의 이상을 다룬 저서 <<동호문답>>에서 “제왕이 사리사욕을 채우고 도학을 싫어하거나, 직언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구태를 묵수하며 망령되게 시도해 복을 구하려 한다면 소인배들이 그 틈을 타 갖가지 방기곡경의 행태를 자행한다.”고 말한 데서 비롯됐다.
2010년은 ‘장두노미’(藏頭露尾)로 선정되었는데 중국 원나라의 장가구(張可久)가 지은 <<산곡(散曲)>>에서 유래한 것이다. 본뜻은 쫓기던 타조가 덤불 속에 머리를 처박고 숨으려 하지만 몸 전체를 가리지는 못하고 꼬리를 드러낸 모습을 형용하는 말로서, 진실을 숨기려 하지만 거짓의 실마리가 이미 드러나 보임을 비유하거나 진실을 감추려는 태도를 비유하는 말이다. 교수들은 4대강 개발 논란과 천안함 침몰 등 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현 정부가 국민을 설득하고 의혹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진실을 감추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2011년에는 자기 귀를 막고 종을 훔친다는 뜻의 ‘엄이도종’(掩耳盜鐘)이 선정되었다. 자기가 나쁜 일을 하고도 잘못됐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비난을 듣기 싫어 귀를 막지만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선정 이유는 각종 사건과 중요한 정책의 처리 과정에서 이명박 정부의 소통 부족과 독단적인 정책 강행을 비판한 것이다. 엄이도종이란 사자성어는 중국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의 승상 여불위(呂不韋)가 만든 우화집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 유래하였다. 춘추시대에 범씨가 다스리던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한 백성이 혼란을 틈타 범씨 집안의 종을 훔치려 했다. 도둑은 종이 너무 커서 쪼개려고 망치로 종을 깼는데 종소리가 크게 울려 퍼져 다른 사람이 올까 봐 두려워 자신의 귀를 막았다는 것이다.
2012년에는 ‘거세개탁’(擧世皆濁)이 선정되었다. 정권 말기에 온갖 부정부패, 비리가 드러나기 시작해 온 나라가 진흙탕물 같다는 게 선정 이유였으며, 혼탁한 한국사회에서 위정자와 지식인들의 자성을 요구한 것이라고 분석을 했다. 거세개탁은 온 세상이 모두 탁해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바르지 않아 홀로 깨어 있기 힘들다는 뜻으로 초나라의 충신 굴원(屈原)이 지은 ?어부사(漁父辭)?에 실린 고사성어다. 굴원이 간신들의 모함으로 벼슬에서 쫓겨나 강가를 거닐면서 시를 읊고 있는데 고기잡이 노인이 그 까닭을 물어보니 굴원은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한다. “온 세상이 흐린데 나만 홀로 맑고 뭇 사람이 다 취해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있어서 쫓겨났다.”
“호질기의-방기곡경-장두노미-엄이도종-거세개탁.” 이 다섯 개의 사자성어가 뜻하는 건 뭘까? 그것은 <<대통령의 시간>>에 수록된 내용과는 달리, 이명박 정부가 불통과 무책임, 민생 파탄으로 상징되는 정부였다는 것이다. 필자는 대한민국을 불행하게 만들고 대다수 보통사람들의 삶을 고통의 나락으로 빠뜨린 근저에는 ‘권불5년’의 정치부패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고 본다.
출처: http://www.justicei.or.kr/225?category=553328 [정의정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