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복지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회사에 취직하거나 자영업으로 먹고 산다. 근래 일자리의 절반이 비정규직이고 골목상권마다 대자본이 침입해 노동자, 영세상인 모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노동시장 안정화가 시급한 과제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괜찮은 일자리를 가지더라도 우리 생활은 항상 여러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만약 이것을 개인에게 맡겨버린다면 상위계층은 그나마 생활을 꾸려가겠지만, 그 이하 계층은 비용 부담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예를 들어, 노동시장에서 일자리를 가지고 있더라도 언제 질병에 걸릴지 모른다. 만약 중병에 걸리면 일을 할 수 없을뿐만 아니라 상당한 병원비 부담에 고통을 받게 된다. 당사자가 질병 치료에 따른 비용을 모두 책임지게 된다면 가계에 큰 부담이고 종종 파산의 원인으로도 작용한다. 이에 질병 비용 위험을 사회가 공유할 필요가 있다. 이 때 개인별 경제적 능력을 감안해 비용은 소득에 따라 부담하고 혜택(진료)은 아픈만큼 제공하는 게 의료복지이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질병 위험을 사회가 책임지자는 것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실업 위험, 산재 위험, 노령 위험에 대비하는 사회보험이 존재한다.
이렇게 생애 기간중에 제기되는 필수 요구와 위험을 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게 복지이다. 아이에게 보육서비스, 학생에겐 교육서비스, 실업자에게 실업급여, 아픈 사람에게 의료 서비스, 주거빈곤층에겐 주거서비스, 노인에게 노후복지 등이다. 이렇게 생애별 필수 서비스를 사회가 제공하되 비용은 국가재정으로 충당하므로 소득재분배 효과가 발생한다. 즉, 자본주의 시장체제에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소득재분배 방식으로 국가가 책임지는 게 복지이다.
민간보험 역시 위험을 전체 가입자가 분산 공유하나 소득재분배가 발생하지 않기에 복지라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장하준 교수가 제안하는 ‘복지는 우리 모두를 위한 공동 구매’라는 설명은 복지의 사회성을 강조하는 말로서, ‘능력에 따른 부담, 필요에 따른 급여’라는 재분배 원리가 함께 담긴 주장으로 이해하는 게 적절하다.
복지로 충당되는 생활 영역이 클수록 사람들은 노동시장의 위험으로부터 완충지대를 가지게 된다. 복지가 실업, 노후, 의료, 주거, 보육 등 인간의 기본적 생활 필요를 충족하는 것이기에 사회적 안전판의 성격을 지닌다. 한국에서 구조조정을 둘러싸고 왜 격렬한 갈등이 발생하는가? 다양한 사회정치적 이유들이 존재하지만, 취약한 복지도 중요한 요인이다. 가계가 전적으로 시장임금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회사에서 내쫓기면 당장 생계가 막막한 게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시장임금으로만 살아가야 하는 한국에서 구조조정은 곧 가족 생존의 위기를 의미하고 그 만큼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킨다. 또한 빈약한 복지는 우리나라에서 만연하고 있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초과노동 현상도 설명해 준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그토록 무리하게 초과노동에 몰입하는 이유는 노동시장의 위기를 완화해 줄 복지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일감이 있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자본주의에서 기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괜찮은 일자리와 적절한 복지가 동시에 확보돼야 한다. 괜찮은 일자리는 전체 복지 수요를 줄여 복지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고 강한 복지는 노동자들이 노동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준다.
2. 복지제도에는 어떤 종류가 있나?
복지 제도는 나라마다 다르고 종류도 다양하지만,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기초생활보장급여·의료급여·자활 지원 등 빈곤 계층에만 제공되는 공공부조이다. 애초 공공부조는 자본주의 초기 영국에서 교회나 지역사회가 빈민들을 위해 벌인 구빈사업에서 시작되었는데, 점차 그 역할이 정부로 넘어오면서 국가의 복지사업이 되었다. 당연히 공공부조는 경제적 능력을 기준으로 제공 여부가 결정되므로 선별 복지에 해당한다.
둘째, 고용보험·국민건강보험·산재보험·국민연금 등 사회보험이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살아가지만 노동력이 항상 제대로 행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고, 아프거나 다칠 수도 있으며, 언젠가는 노동시장에서 은퇴해야 한다. 이렇게 노동시장에서 피할 수 없는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 사회보험이다. 모두가 이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하므로 보편 복지 방식으로 설계되는 게 바람직하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자라면 4대 사회보험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고, 자영업자도 국민건강보험과 국민연금에 가입해야 한다.
셋째, 사회서비스와 사회수당이다. 이 복지들은 사회보험과 비교해 주로 노동시장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대상이고, 재정이 주로 세금으로 조달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이전인 유아와 학생, 그리고 장애인이나 노인에게 제공되는 복지인데, 급식과 보육처럼 사회서비스 방식으로 지급되기도 하고, 아동수당, 장애인연금, 기초노령연금 등 사회수당 방식으로 제공되기도 한다(학자에 따라 사회서비스와 사회수당을 구분해 복지 유형을 네 가지로 정리하기도 한다).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공공부조는 원래 저소득 계층을 대상으로 지급되는 선별 복지 성격을 지니기에 보편/선별 복지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대신 공공부조에서 제기되는 논점은 급여 수준이 적절한지,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는 사각지대 계층은 없는지 등이다. 반면 사회보험과 사회서비스·사회수당은 제도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보편/선별 논쟁이 벌어질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논쟁이 벌어진 곳도 급식, 보육 등 사회서비스 영역이다.
각 복지는 자신이 지향하는 유형에 맞게 자리를 잡아야 한다. 기초생활보장급여는 선별 복지로서 저소득 계층의 최저 생활을 보장해야 하고, 사회보험과 사회서비스·사회수당은 사회구성원의 필수품으로 보편 복지로 뿌리내리는 게 옳다. 그리고 각각이 선별, 보편 복지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 만큼 적절한 급여 수준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나라 논쟁 과정을 보면 선별 복지는 악이라는 기조가 깔려 있는데, 선별 복지가 항상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공공부조는 애초 선별 복지 특성을 지닌 복지이기에 이것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 보편/선별 논쟁의 대상은 공공부조가 아니라 사회보험, 사회서비스·사회수당이다. 보편 복지로 발전할 수 있는 이 복지들이 선별 방식으로 제공될 때 논쟁이 생기게 된다.
3. 보편/선별 복지 논쟁의 성과와 한계는?
보편/선별 복지 논쟁에서 보편복지 담론이 부상하고 무상급식·무상보육이 확대되면서 사람들이 복지를 적극적인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2010년에 경기도 교육청 예산 갈등과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무상급식은 국민적 지지를 얻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보편 복지’ 주장도 확산되었다. 보편 복지라는, 대학 강단에서나 들을법한 용어가 일반시민의 이야기거리로 등장했다. 보편 복지가 한국사회에서 멀리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이제 시민들의 가질 수 있는 꿈으로 다가오고 있다. 복지국가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보편복지 담론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보편/선별 복지 논쟁이 이룬 가장 귀중한 성과이다.
하지만 한계도 드러났다. 복지 논쟁이 급식, 보육 등 사회서비스를 중심으로 진행된 탓에 공공부조, 사회보험 영역이 주변화되었다. 공공부조는 어려운 사람에게 절실한 복지라는 점에서, 사회보험은 사각지대가 하위계층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과 개혁이 필요한 영역이다(사회서비스의 사각지대는 상위계층).
우선 공공부조의 대표 격인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제구실을 하는 게 중요하다. 보편/선별 복지 논쟁 과정에서 선별 복지가 부정적으로 다루어지면서 공공부조가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 급식, 보육은 늘어나지만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홀대당하고 있다. 튼튼한 공공부조는 보편 복지 논의의 전제 조건이다. 현재 기초생활보장급여를 정하는 기준인 최저생계비 금액이 너무 낮은 데다, 현실성이 결여된 부양의무자 제도 탓에 사실상 절대 빈곤선 아래에 있는 상당수가 급여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최저생계비 결정 기준, 부양의무자 설정 등 제도 개선이 필요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예산 배정’이 절실하다.
사회보험에 존재하는 광범위한 사각지대도 줄여 나가야 한다. 사실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이 사회보험 제도 자체보다는 불안정한 노동시장에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해법을 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래서 완전 고용시장을 전제로 모든 노동자가 보험료를 내도록 설계된 사회보험이 현재와 같은 노동시장에서 보편 복지로서 실효성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커지고 있다. 이에 점차 사회보험도 국가재정 몫을 늘려 조세 중심의 복지로 전환하는 것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단기적으로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사회보험료를 지원하여 사회보험 제도 내부로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공공부조, 사회보험이 논의에서 배제되면서 이와 관련된 주체들도 논의과정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핵심적인 대중적 복지주체들이 세력으로 나서는 계기가 만들어지지 못한 것이다. 우선 공공부조의 주변화는 당연히 복지 현장에 종사하는 사회복지사들을 복지 논쟁의 주체로 초대하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전국적으로 사회복지 전달 체계가 나름 갖추어져 있는 편이다. 보편 복지 담론이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서 부상했지만 이들은 정작 자신이 일하는 복지 현장에서 다루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의료급여제도, 노인복지 현실을 개탄할 뿐 사회적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사회보험 사각지대도 그러하다. 오히려 노동시장에서 어려운 사람인 불안정 노동자일수록 사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역진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건만 보편 복지 논쟁에서 이들의 복지 문제는 다루어지지 못했다. 노동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불안정 노동자 역시 보편 복지 논쟁에 나서기 어려웠다.
4. 박근혜대통령과 보편복지 세력의 공약과 유사한가?
박근혜대통령은 일찍이 ‘아버지의 꿈이 복지국가’였다며 자신의 미래 비전으로 ‘한국형 복지국가’를 주창했고, 보편복지에 맞서 ‘생애주기 맞춤형 복지’라는 담론까지 만들어 냈다. 이에 시민사회 일부에서는 박근혜 당선인의 대선 승리의 원천이 ‘중도 보수의 복지국가 정치 노선’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박당선인의 복지 공약이 새누리당의 흐름에서 벗어나 보편복지의 수용 선언으로 볼만큼 의미를 지닌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지난 선거 기간에 복지 공약 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지 않은 탓에 복지공약의 ‘수렴’이라는 착시 현상이 생겨 났다.
물론 박근혜 복지공약에 일부 전향적인 내용이 있다. 무상보육, 반값등록금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는 이명박정부도 사실상 수용한 복지이다. 2012년에는 이명박정부가 여야 논의 수준을 더 넘어 0~2세 무상보육을 전격 실시하기도 했다. 왜 이런 일이 진행되고 있을까? 누구도 쉽게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구이기 때문이다. 기초노령연금 공약 20만원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현행 법에 2028년에 20만원(현재 가격, 급여율 10%) 지급이 명시되어 있다. 급여율 10% 도달 시기를 앞당긴 것이다. 이마저도 국민연금 가입과 연동해 차등지급할 예정이다.
반면 대다수 복지에서는 여전히 차이가 크다. 우선 복지 논쟁을 촉발했던 무상급식은 박근혜 복지에 포함되지 않았다. 무상급식이 초등학생 생애주기에 해당되는 복지고, 권리로서 제공되는 보편급식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음에도 박근혜 대통령은 여전히 소득계층을 따지는 선별복지 방식으로 급식을 이해한다. 이보다 훨씬 큰 재정이 소요되는 무상보육을 수용하면서도 무상급식을 지지하지 않는 데에는 복지 논쟁 원조 의제에 대한 ‘자존심’이 작동한 결과로 해석된다. 보통 복지국가에서 아동 복지는 무상보육과 아동수당으로 구성되는데,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아직 보편적 아동수당은 없다.
복지 영역에서 지출 규모가 가장 큰 의료복지가 특히 취약하다. 보편복지 세력은 모든 질환에 100만원 상한제를 도입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고액진료 환자의 15%에 불과한 4대 중증질환만 책임진다. 박근혜정부가 이 공약을 성실히 이행하면, 암·심혈관·뇌혈관·희귀난치성 환자는 병원비 부담에서 벗어나겠지만, 간·척추·안과 등 85%의 다른 고액진료 환자는 계속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 게다가 이마저도 선택진료, 상급병실, 간병비 등 핵심 3대 비급여 비용이 제외된 것이다.
근래와 같이 노동시장 불안정성이 항상화되어 있는 시대에는 실업복지가 무척 중요하다. 보편복지 세력이 현행 고용보험 가입자에게는 실업급여 강화, 사각지대에 있는 청년·영세자영업자를 위해 실업부조를 도입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이와 관련한 공약이 없다. ‘복지 수급의 조건으로 일을 강조하는’ 근로연계 복지, 시장중심주의 복지 철학이 반영된 결과다. 일을 잃어 생활이 어려운 당사자에겐 가혹한 일이다.
주거 공약의 핵심은 집없는 서민을 위한 공공임대주택 확충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철도부지 상부 인공대지 조성하는 새로운 임대주택정책인 ‘행복주택 프로젝트’를 공약으로 발표했으나 공공임대비율 조성 목표를 밝히지 않았다. 지난 총선에서 2018년까지 공공임대주택 비중을 10~12%로 늘리겠다는 공약은 사라졌다.
이처럼 박근혜 대통령의 복지 공약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보편 복지 원리를 담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미 시대적 대세로 자리잡은 무상보육, 반값등록금, 기초연금 등을 제외하면 대다수 복지는 여전히 복지 대상을 계층별로 지급하고 급여 수준도 제한적인 ‘선별 복지’ 체제에 머무른다.
그럼에도 복지 공약이 비슷하게 보인다는 것은 새누리당의 변신작업이 유효했음을 의미한다. 기존의 선별복지를 생애주기별 맞춤복지로 개명했다. 차별 이미지 대신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연상케 하는 용어다. 이는 보편복지 세력이 박근혜 대통령의 복지공약을 제대로 검증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5. 국민연금, 문제점과 해법은?
우리나라 국민연금은 가입자에게 후한 노후복지제도이다. 올해 국민연금에 가입한 사람의 경우 노후에 받을 국민연금 총액은 현재가치 기준으로 자신이 낸 보험료와 비교하면 1.8배에 달한다(소득계층별로 하후상박 원리의 수익비가 적용되나 여기서는 평균소득 가입자를 사례로 함). 100원을 내고 180원을 받는다는 이야기다. 직장가입자의 경우 보험료의 절반을 기업이 책임지니 본인은 50원을 내고 무려 3.6배인 180원을 돌려받는 셈이다. 돌려받는 연금액이 자기가 낸 보험료의 0.7~0.8배에 불과한 민간생명보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후하다. 그래서 국민연금 보험료를 전액 자신이 내야하는 지역가입자조차도 국민연금이 훨씬 유리하다. 몇 해 전부터 이 비밀을 알아챈 사람들이 있다. 전업주부여서 의무가입 대상자가 아님에도 스스로 연금보험료를 납부하는 사람들, 즉 임의가입자들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미래를 두고 논란이 많다. 그만큼 현행 제도 내부에 불안정한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국민연금의 문제는 국민연금의 후한 급여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낸 것보다 더 받는 제도의 특성이 세대내 형평성과 세대간 형평성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낳는다.
우선 세대내 형평성 문제. 국민연금 가입자는 나중에 괜찮은 연금을 받지만, 국민연금에 보험료를 내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런 급여도 받지 못한다. 이렇게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못하거나 생활이 어려워 보험료를 체납하거나 납부 면제받은 사람들은 국민연금 보험료 납부자에 비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다. 젊어서는 노동시장에 격차를 겪고 노후에는 국민연금 혜택에서 차별을 받게 된다. 국민연금 내부자, 즉 가입자의 눈으로 보면 국민연금이 괜찮은 급여를 제공하는 복지제도이지만, 국민 전체의 눈으로 보면 노동시장의 격차를 노후에 확대 재생산하는 反복지라고도 비판받을 수 있다.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선 국민연금 사각지대를 없애야 한다. 현재 국민연금 보험료가 부담스러운 저소득계층에게 국가가 보험료를 지원하는 제도가 있다. 월급 125만원 미민 노동자는 보험료의 1/3~1/2를 지원받는다. 이 제도가 더욱 실효성을 지니기 위해선 수혜 대상을 늘리고 지원액도 본인부담 보험료 전액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기초연금 인상도 중요한 세대내 형평성 해소 방안이다. 기초연금은 노인들에게 정액으로 지급되기에 소득재분배 효과가 크고 국민연금 사각지대 노인들에겐 더욱 그렇다. 그런데 보험료 지원, 기초연금 인상 모두 국가 세금을 필요로 한다. 결국 얼마나 복지 재원을 늘릴 수 있는 지가 관건이다.
또 하나의 문제인 세대간 형평성 문제. 현재 세대가 나중에 1.8배의 연금을 받는다는 건 미래 세대에게 0.8배 만큼을 의존한다는 이야기이다. 만약 지금 9%인 국민연금 보험료율이 그대로 이어진다면 현재 가입자들이 1을 내고 1.8배를 받으니 국민연금 수령자가 많지 않은 초기에는 국민연금기금이 쌓이지만 연금수령자가 많아지는 어느 시점(2060년 예상)에는 소진되고, 이때부터 후세대가 무거운 재정 책임을 지게 된다(2060년 필요보험료율 약 20% 예상).
세대간 형평성 확보를 위해서는 두개 길이 있다. 하나는 연금보험료를 점진적으로 올리는 방안이다. 주류 연금학자들이 선호하는 해법이다. 그런데 지금 가입자들에게 보험료 인상을 설득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넘어야 한다. 이 방안이 순조롭게 진행되려면 보험료 인상을 받아들일 만큼 국민연금 신뢰가 조성돼야 한다. 지난 몇 년간 국민연금 급여 체험이 알려지면서 연금 신뢰가 생겨나는 추세였는데, 최근 박근혜정부의 연금공약 수정 논란으로 다시 불신이 깊어지고 있다. 게다가 보험료를 인상하면 국민연금기금이 더 커져 기금운용에 어려움이 가중되는 부작용이 커지고, 중하위계층의 보험료 압박감도 더 증대된다.
또 하나의 길은 기초연금 금액을 더 올리는 방안이다. 기초연금이 10만원에서 20만원으로 인상될 예정인데, 만약 30만원까지 더 올릴 수 있다면, 국민연금 급여율은 40%에서 30%로 낮출 수 있다. 기초연금은 당세대의 세금으로, 국민연금은 후세대의 보험료로 충당되는데, 당세대가 책임지는 기초연금을 늘리고 후세대가 부담하는 국민연금 급여 몫을 줄이면 세대간 형평성 문제는 상당히 해소될 수 있다.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을 받는 국민 입장에서는 합계에서 비슷한 급여를 받게 되는데, 이 경우에도 역시 관건은 기초연금 추가 인상 재원을 당세대가 마련할 수 있느냐에 있다.
요약하면, 주류 학자들은 보험료 이상을 주창하지만 진보적 입장에서 낼 수 있는 답안은 증세를 통한 기초연금 인상이다. 기초연금 강화는 현세대 사각지대 문제와 미래 세대 재정 부담의 급격한 증가를 동시에 완화할 수 있는 방안이다. 국민연금기금 규모도 더 늘리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세금이 더 필요하다. 과연 우리 사회가 증세 장벽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지만 고령화시대에 우리 세대와 자식 세대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해결해야할 숙제이다.
6. 우리나라 국가재정 체계의 핵심어를 꼽는다면?: ‘전략’
2006년까지 우리나라 예산편성은 각 부처가 구체적인 예산계획을 수립하여 예산당국에 제출하면 예산당국이 전체 세입규모 수준에서 이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각 부처 세부사업들을 모은 것이 사실상 다음해 정부예산안의 기본 골격을 이루었다. 이러한 예산편성을 상향식(Bottom-up) 혹은 ‘부처요구·중앙편성방식’이라고 부른다. 나름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올해 지출체계가 다음해에 그대로 반복된다는 한계를 지닌다. 재정에 ‘국정전략’이 개입하기 어려운 예산편성체계다. 이에 노무현정부에서 예산편성 방식의 획기적인 변화를 담은 국가재정법이 제정되었다.
2006년 국가재정법 제정을 계기로 한국의 재정 구조에 일대 전환이 이루어졌다. 국가재정에 ‘전략’이 등장한 것이다. 과거처럼 수천개의 세부사업들을 아래로부터 모아 정부 지출체계를 짜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위로부터 전략적으로 분야별 지출규모를 정하고 이 범위 내에서 세부사업들을 조정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전략적 예산편성을 하향식(Top-down) 혹은 ‘총액배분·자율편성방식’이라고 부른다. 국가재정이 종래 ‘행정 관리’의 역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국정 전략’의 추진자로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현재 정부의 국가재정 편성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 ‘전략적 재정 배분’이다. 전략적 재정 배분은 정부가 자신의 국정전략에 의거해 분야별(복지, 교육, SOC, 국방 등 16개 분야)?부처별 지출 규모를 정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다음해 정부총지출 규모, 복지 분야 지출 비중, 보건복지가족부 예산 한도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적 재정 배분을 5년 기간으로 설정하면 중기재정운용계획이 된다. 복지지출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싶은가? 그렇다면 특정 사업 몇 개를 강조하는 것 보다는 재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복지 분야 전체 증가 총액을 먼저 배정하고 이 한도 내에서 세부 복지사업 지출을 조정하라는 것이다. 현재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 매년 봄에 열리는 재정전략회의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이 도입한 이 제도를 충분히 활용했을까? 그의 말로 대신하자.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거 없이 색연필 들고 쫙 그어버렸으면 되는 건데…. 무슨 소리야 이거. 복지비 그냥 올해까지 30프로, 내년까지 40프로, 내후년까지 50프로 올려... 그냥 쫙 그어버렸어야 되는데… 그래 무식하게 했어야 되는데 바보같이 해서….” (노무현의 [진보의 미래] 234쪽)
한편 행정부의 전략적 예산편성에 조응하는 국회의 심의체계 정비도 중요하다. 지금은 국회의 예산안 심사가 여전히 단년도 및 부처별 상향식 방식대로 이루어지고 있어, 예산안 중 전략적 재정 배분을 검토하지 못하고 있다. 예산편성은 행정권력이 ‘전략’적으로 행하는 데 반해, 의회권력의 예산 심의는 과거 부처 방식에 머무르고 있다. 이제부터 국회 예산 심의체계가 크게 바뀌어야 한다. 정부가 예산안을 제출하면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예결특위)가 먼저 분야별 예산한도를 심사하고, 그것을 토대로 상임위원회가 부처별 예산안을 심사하며, 이것을 다시 취합하여 국회예결특위가 분야별, 부처별, 총액 예산안을 심의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7. 우리나라 복지 재정의 현주소는?
2013년 우리나라 중앙정부 복지예산은 약 100조원에 이른다. 이는 중앙정부 총지출의 28.5%에 해당한다. 정부와 언론이 대대적으로 ‘100조원 예산’ 시대를 강조한다. 과연 100조원 복지예산은 어느 정도 수준일까?
2013년 중앙정부 복지분야 지출은 정확히 97.1조원이다. 이 중 1/3에 해당하는 33.1조원이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군인연금,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 지출이다. 아직까진 공적연금의 수혜 대상은 대부분이 중상위계층이다. 게다가 17.5조원에 달하는 주거복지 지출도 거의가 주택융자금이다. 이것은 나중에 회수하는 돈이어서 OECD 복지 기준에선 제외되는 지출이다. 이 두 항목을 감안하면 100조원이라 불리는 복지예산에서 소득재분배 효과를 지닌 돈은 절반에 불과하다.
한편 정부 복지예산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국제 기준에서 복지로 계산되는 것이 국민건강보험 지출이다. 올해 국민건강보험 지출 46조원 중 정부 예산에 이미 포함된(국고지원액, 정부 사용자 보험료 등) 8조원을 제외한 38조원은 사실상 복지 재정으로 간주돼야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복지재정의 현주소를 객관적으로 진단하기 위해서는 OECD 기준으로 재구성된 재정 수치를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 우리나라도 매년 국내 복지예산 수치를 국제 기준에 맞게 재계산해 OECD에 보고하고 있다. 이 경우 중앙정부 복지예산에서 주택융자금은 제외되고 국민건강보험 지출은 포함되며 지방정부가 자체 부담한 복지지출 예산이 합산된다.
그러면 OECD 기준으로 재구성된 우리나라 복지 재정의 현주소를 OECD 국가 평균 수치와 비교해 보자. 우선 정부재정에서 복지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OECD 국가들은 대부분 정부지출의 약 절반을 복지 분야에 사용한다. 가장 복지가 취약한 나라에 속하는 멕시코조차도 재정의 37%를 복지에 지출한다. 복지 비중이 20대%인 나라는 OECD 회원국 중 한국이 유일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2011년 보건복지부 업무보고를 받으며 밝힌 명언이 있다. "우리나라 복지 비중이 재정의 28%로 역대 최고를 기록하므로 이제 대한민국이 복지국가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재정 규모에서 100조원 복지지출, 재정의 28%는 결코 자랑할 수치가 아니라 거꾸로 부끄러운 수치이다.
절대 규모는 어떤가? 2012년 기준 우리나라 복지재정 규모는 GDP 9.3%로 OECD 평균 21.7%에 무려 12.4% 포인트 부족하다(지방정부 복지지출 포함한 수치). 금액으로 따지면 158조원이다(2012년 GDP 1273조원 기준). 만약 다른 회원국만큼 복지를 지출한다면 지금보다 무려 158조원을 더 늘려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앞으로도 갈 길이 매우 멀다.
8. 우리나라는 복지국가에 필요한 재정 능력을 지니고 있는가?
우리나라가 복지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선 경제력이 아직 부족한 걸까?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만달러인 우리나라와 5만달러(스웨덴)·4만달러(OECD 평균)인 나라들을 어떻게 단순 비교하는가?’ 아직 우리나라 경제력이 선진국 복지국가 수준에 따라갈만큼은 이루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곤 한다. 과연 그럴까?
의료비를 보자. 우리나라 국민이 2012년 청구받은 의료비가 64조원으로 추정된다(비급여 포함). 이 중 국민건강보험이 지불한 금액이 약 40조원이다. 그래서 지금 국민건강보험 보장성이 60%대에 머물고 있다. 만약 완전 무상의료를 구현하려면 국민건강보험이 나머지 부족분 24조원을 더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1원까지 무상의료일 필요는 없다. 사실상의 무상의료인 ‘모든 병원비를 100만원 상한제’를 실현하는 데 약 연 14조원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이 돈이 없는가?
2009년 우리나라 국민이 민간 의료보험에 납부하는 보험료가 가구 평균 18만원이다(연금, 특약 몫을 제외한 금액. 총액으로 연구에 따라 13~34조원 추정). 가구당 월평균 7만원인 국민건강보험료보다 두 배가 넘는 금액이다. 이미 우리는 무상의료에 필요한 돈 보다 더 많이 의료비에 지출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병원비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국민건강보험 대신 민간의료보험, 본인부담금 체제가 강력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후 대비 비용을 보자. 현재 우리나라 국민연금 급여가 충분치 않다. 20년 가입하면 자기 소득의 20%를 지급받는데, 월 200만원 소득자라면 노후에 40만원을 받게 된다(40년 가입하면 소득의 40%이므로 월 80만원). 우리나라 국민연금 보험요율은 소득의 9%(노사 절반씩)이다. 우리나라사 사회보험 중 가장 보험료가 세지만 선진국에 비하면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OECD 국가들의 공적연금 평균 보험요율이 19.6%(노 8.4%, 사 11.2%)로서 우리의 2배가 넘는다.
그러면 실제로 우리나라 국민들은 서구에 비해 연금보험료를 작게 내고 있는 것일까? 2012년 국민연금이 거둔 연금보험료 수입이 사용자 몫을 합해 총 28조원이다. 그런데 국민이 민간 생명보험회사에 낸 보험료 총액이 무려 90조원에 육박한다. 국민연금에 납부하는 노후 대비 금액보다 3배 이상 많은 돈이다. 의료비처럼, 우리는 노후연금에도 상당한 돈을 사용하고 있다. 다만 대부분을 공공복지가 아니라 시장복지에 지출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의료·노후·보육·교육 등 기본 복지에 사용되는 돈의 총액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복지국가에 견줄 만큼의 돈을 지출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 시장을 통해 이루어지기에 공공복지 몫이 작다. 결국 우리나라에서 보편복지가 미흡한 이유는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시장복지로 지출되는 비용이 공공복지로 ‘전환’되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것을 수행할 사회적 힘이 약한 탓이다. 실제 서구 국가들이 오래전에 우리나라 정도의 경제력에서 복지국가를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진보 정당, 노동조합, 시민사회 등 강력한 복지 주체가 있었다. 복지국가 건설, 이것은 결국 ‘비용 전환’의 문제이다. 우리나라에서 부족한 것은 복지국가를 위한 ‘경제력’이 아니라 ‘정치력’이다.
9. 우리나라에서 조세제도의 실태와 증세 과제는?
우리나라는 다른 OECD 국가에 비해 조세부담률, 국민부담률이 낮다. 2010년 우리나라 국민부담률이 25.1%로 OECD 평균 33.8%에 비해 8.7% 포인트 작다. 2012년 기준으로 보면(GDP 1273조원) 무려 110조원에 해당하는 부족액이다. 그만큼 국가재정 규모가 작고, 복지지출에 투입할 재정 여력도 부족하다. 한국이 온전한 나라로 자리를 잡으려면 지하경제 양성화, 대기업과 상위계층에게 집중되는 비과세 감면 축소 등에 강력히 나서야겠지만, 세율인상 이나 세목 신설 등 ‘직접 증세’도 불가피하다. 세목별 실태와 과제를 살펴보자.
첫째, 우리나라가 OECD 국가들에 비해 가장 빈약한 세목은 소득세이다. 우리나라 2010년 소득세 세입은 GDP 3.6%으로 OECD 평균 8.4%에 비해 무려 4.8% 포인트나 작다. 2012년 기준으로 부족액이 61조원에 달한다. 우리나라 소득세 최고세율이 OECD 평균 수준임에도 소득세 세입이 작은 이유는 무엇보다 소득세 부과과정에서 공제 금액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2009년 근로소득자의 경우 급여총계가 370조원이지만 실제 소득세가 부과되는 과세표준은 121조원으로 줄어들고, 최종 결정세액은 12.8조원이다. 그래서 실효세율을 계산하면, 과세표준 기준으로 10.6%이지만, 애초 급여총계 기준으로 3.4%에 불과하다. 또한 주식, 부동산 자산의 양도소득에서도 과세 틈새가 크다. 이에 우선 상위계층에게 제공되는 소득공제를 축소하고 금융, 부동산 양도소득도 강화해 가야 한다.
둘째, 진보진영에서 대표적 증세 세목으로 강조되는 것이 법인세이다. 우리나라 법인세의 세입 비중, 명목세율과 실효세율 등은 OECD 수준과 엇비슷하다. 문제는 일부 대기업에 집중되는 세금 감면이다. 고용창출투자세액공제, 연구인력개발세액공제 등 사실상의 상시 감면제도로 전락한 조세특례항목으로 인해 설비투자가 많거나 연구인력개발 비용이 큰 삼성전자와 같은 첨단산업 대기업들이 혜택을 입고 있다. 이에 대기업을 중심으로 제공되는 비과세 감면을 줄이고, 현행 법인세 대기업 최저한세율 상향시켜야 한다.
셋째, 사회보장기여금이 작다. 2010년 우리나라 사회보장기여금 비중이 GDP 5.7%로 OECD 평균 9.1%에 비해 3.4%포인트 작다. 2012년 GDP 금액으로 환산하면 43조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이 중 고용주의 사회보장기여금 비중은 2.5%로 OECD 평균 5.3%의 절반에도 못미친다. 우리나라는 노사 모두 사회보장기여금 부담이 작은데, 특히 고용주의 몫이 크게 모자란다.
넷째, 우리나라는 보유세는 낮은 대신 거래세는 높은 편이다. 재산세 보유세율을 인상할 경우 거래세 인하 요구가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은 종합부동산세 강화에 초점을 둘 필요가 있다. 고질적인 부동산 투기와 불로소득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크다. 우리나라 부동산자산의 소유 편중, 부동산을 통한 불로소득 증가 등을 감안할 때 종합부동산세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
다섯째, 소비세의 경우 보통 우리나라가 높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직접세가 작아 상대적 비중이 크게 보이는 것으로, 소비세 세입 비중은 2010년 GDP 8.5%로 다른 나라에 비해 오히려 작다. 부가가치세율도 2012년 한국은 10%이지만 OECD 평균은 18.7%이다.이에 북유럽 복지국가처럼 보편복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소비세 인상도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지만, 여전히 직접세가 취약한 상황에서 소비세는 진보진영의 증세 대상으로는 적합지 않다. 서구 복지국가에서도 직접세가 상당한 비중을 확보한 상태에서, 증가하는 복지재정을 충당하는 2차적 수단으로 소비세 확대가 추진되었다. 이에 한국에서 소비세 인상 논의도 직접세가 상당히 강화된 이후에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지막으로, 복지목적세로서 사회복지세의 도입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무엇보다 사회복지세는 증세가 대중운동으로 진행되는 데 유리하다. 소득세, 법인세, 종합부동산세 등 개별 세목을 복잡하게 다루기보다는 상징적 단일 세목으로 대중과 만날 수 있다.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세,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세에 이어 지금은 함께 사는 대한민국을 위한 복지세의 시대이다.
10. 증세를 둘러싼 논점은?: 부가가치세 vs. 직접세
박근혜 정부가 복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분주하다. 지하경제 양성화라는 용어까지 유명해졌다. 세율 인상이나 세목 신설 같은 ‘직접 증세’ 없이 복지 재정을 마련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이 작업을 통해 조달할 수 있는 돈이 얼마나 될까? 아무도 그 규모를 예단할 수 없지만 한계는 예상된다. 지출 구조조정의 경우 애초 우리나라 국가재정의 절대 크기가 작아 축소 여지가 좁다. 올해 유럽 국가들의 재정 규모는 평균 GDP 49.5%인데 한국은 31.5%에 불과하다. 지하경제 양성화로 불리는 탈루소득 색출도 과세 인프라 개혁을 수반해야 하는 일이기에 단기간에 큰 성과를 내기 어렵다. 한 해 30조원에 이르는 비과세 감면이 구체적으로 조달 규모를 계산할 수 있는 영역인데 이 중 60%가 서민·중산층, 중소기업 몫이어서 제약이 있다.
그래서 다수 전문가들은 기존 세율을 상향하는 증세가 불가피하리라 전망한다. 보건복지부 장관과 새누리당 국회의원들도 담배세 대폭 인상을 주장하거나 입법 발의한 상태이고, 기획재정부 내부에선 부가가치세·개별소비세·주세 등에 부과하는 ‘건강세’ 논의도 진행된 모양이다. 본격적인 논란은 정부가 구성한 조세개혁추진위원회가 중장기 세입 확충 방안을 발표하는 올해 여름부터 시작될 것이다. 8월은 정부가 내년 예산안에 담을 구체적 세입 수치를 계산하고 세법 개정안을 확정해야 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크게 보면, 두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하나는 박근혜 정부가 호언장담한 대로 필요한 재정을 증세 없이 모두 확보하는 경우이다. 박근혜 정부가 재정정책에서 확실한 주도권을 쥐게 될 것이다. 이때는 재정 조달 방안과 필요재정 규모에 대한 엄밀한 검증이 꼭 필요하다. ‘모든 어르신에게 기초연금 20만원’ 공약을 차등지급 방식으로 수정하고, 지급 시기도 ‘2013년 추진’에서 ‘2014년 7월’로 미루었듯이 복지 공약 조정이 또 추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시나리오는 복지 재정이 부족하니 증세가 불가피하다고 밝히는 경우이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 대선 공약에서 국민 합의로 조세 부담 수준을 정하는 일과 같이 사회적 갈등이 큰 국가 현안을 논의하는 기구로 국민대타협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제시한 바 있다. 증세에서 핵심 논점은 과세 대상이다. 정부·여당이나 국책 연구기관은 간접세를 통한 증세를 선호한다. 담배세와 건강세 모두 소비자가 동일한 금액을 납부하는 간접세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원장과 OECD가 권고한 증세 방안도 현행 부가가치세율을 올리는 내용이다. 반면 보편복지 세력이 주창하는 증세는 당연히 직접세가 대상이다. 보통 소득세, 법인세, 부동산·금융 자산세에서 상위 계층, 대기업의 과세 책임을 강화하자는 부자 증세가 주요 내용이다.
간접세 증세를 주창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낮은 부가가치세율을 근거로 제시한다. 실제 우리나라 부가가치세율 10%는 OECD 평균 18.7%에 비해 크게 낮다. 직접세에 비해 조세 저항이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라는 정치적 판단도 감안했을 것이다. 반면 부자 증세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사회양극화가 심각한 우리나라에서 상위 계층과 대기업의 조세 부담이 절대적 수준에서 낮다는 걸 중요한 근거로 삼는다. 부자 증세에 보편 증세를 결합한 ‘누진적 보편 증세’ 원리를 지닌 사회복지세 도입도 제안되고 있다. 특히 이 제안은 중간 계층 이상 사회 구성원이 조금씩이라도 세금을 더 내야 부자 증세를 향한 실질적 압박이 생겨날 수 있다는 ‘증세 정치’를 주목한다.■■
<교육용 학습 계획안>
1. 복지국가에 대한 이해: 사회임금과 잠정적 유토피아
<강의 초점>
복지국가의 필요성을 시장체제의 구조적 한계와 보편적 사회권으로 설명하고, 복지국가를 대중적 용어로 접근하기 위해 사회임금을 소개하며, 복지국가의 역사적 위상을 ‘잠정적 유토피아’ 개념으로 정리한다.
<참고문헌>
오건호(2012), [나도 복지국가에서 살고 싶다] (레디앙) 중 “2장 복지국가의 쉬운 이름, 사회임금”, “3장 복지국가, 우리의 잠정적 유토피아”
→ 한국에서 진행된 복지 논쟁의 성과와 한계를 살펴보고, 한국도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는 경제력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며,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복지민심이 관람자에서 직접 참여자로 나서는 복지정치가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 이를 위한 사업 프로그램으로 건강보험 하나로, 사회복지세 도입 등 소득별 (누진) 보편 증세 운동을 복지국가 재정주권운동의 맥락에서 제안.
홍기빈(2011),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책세상)
→ 스웨덴 복지국가 형성과정을 비그포르스의 역할을 중심으로 구성. 이 과정에서 복지국가를 향한 총괄적 전략으로 나라살림계획을 강조하고, 복지국가의 역사적 전망을 잠정적 유토피아로 개념화.
2. 보편/선별 복지 논쟁: 성과와 한계
<강의 초점>
2010년 이후 보편/선별 복지 논쟁의 성과와 한계를 통해 현단계 복지운동이 지닌 과제를 점검한다. 성과는 대한민국에도 복지를 적극적으로 인식하는 보편복지 담론이 형성되었다는 점, 한계는 정치권 중심으로 논쟁이 진행돼 공공부조, 사회보험 사각지대가 주변화되고 핵심 복지당사자들의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즉 대중적 복지주체 형성이라는 과제가 계속 남는다.
<참고문헌>
오건호(2012), [나도 복지국가에서 살고 싶다] (레디앙) 중 “1장 보편/선별 복지 논쟁 들여다보기”
3. 고령화 시대 복지 1: 의료
<강의초점>
고령화시대 복지 지출의 급속한 증가가 예상되고 복지국가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가장 지출 규모가 큰 의료와 연금을 차례로 살펴본다. 우선 우리나라 의료체제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재정확충, 지불체계 개편, 공공의료 강화 등의 과제를 살펴본다. 특히 이 과제들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재정확충이 지니는 실마리 효과를 강조한다.
<참고문헌>
오건호(2012), [나도 복지국가에서 살고 싶다] (레디앙) 중 “제3부: 병원비 걱정 없는 사회”
김종명(2012), [의료보험 절대로 들지 마라!] (이아소)
→ 민간의료보험의 실태와 폐해를 설명. 또한 민간의료보험과 국민건강보험을 비교해 국민건강보험을 중심으로 병원비 해결에 나서야 함을 역설.
4. 고령화 시대 복지 2: 연금
<강의초점>
우리나라 복지제도 중 가장 해법 찾기가 어려운 주제가 국민연금이다. 미래 재정 불안을 안고 있는 국민연금을 어떻게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할 것인가? 국민연금이 지닌 두가지 형평성(세대내 사각지대, 세대간 재정부담 형평성)을 제기하고, 이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방안으로 기초연금의 강화를 제안한다.
<참고문헌>
오건호(2012), [나도 복지국가에서 살고 싶다] (레디앙) 중 “제4부: 노후걱정 없는 사회”
오건호(2012), “국민연금 현황과 개혁 방향” (미출간 교안.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블로그 자료실에서 다운 가능).
김연명/오건호(2013), “대담: 국민연금, 현 세대 vs 미래 세대 누구 부담 올려야 하나?” (프레시안 2013. 3. 22).
5. 국가재정 체계와 복지재정: 재정운용 체계, 복지재정 규모와 구조
<강의초점>
노무현정부에서 국가재정체계의 획기적인 변화, 즉 전략 개념이 도입되었다. 이를 중심으로 재정체계, 복지재정 구조를 이해하고, 향후 필요한 개혁 과제를 정리한다.
오건호(2010), [대한민국 금고를 열다](레디앙) 중 “제2부: 대한민국 국가재정 운용체계 이해하기”
→ 진보의 시각에서 우리나라 국가재정 체계를 설명하고 복지, 조세, 민간자사업, 국가채무, 지방재정 등 주제별로 실태와 과제를 정리.
김태일(2013), [국가는 내 돈을 어떻게 쓰는가] (웅진지식하우스)
→ 우리나라 재정 지출 구조와 변화를 체계적으로 살펴봄. 또한 복지 재정 확충을 위해선 수직적ㆍ수평적 공평성과 효율성이 확보되어야 함을 강조.
6. 유럽 복지국가 재정구조의 특징
<강의초점>
유럽 복지국가들은 어떤 과정으로 복지를 확대해 왔는가? 그리고 고령화에 따른 구조개혁 압력을 맞아 어떻게 복지재정 증가 수요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OECD 국가들의 복지 재정의 구조와 특징을 살펴본다.
<참고문헌>
오건호(2013) “OECD 국가들의 복지지출 변화와 함의: 외국, 한국 모두 복지 확대 위한 증세 절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이슈페이퍼 2013. 1. 17).
→ 2차대전 이후 자본주의 위기 시기마다 선진국에서 복지지출 확대가 진행되어 왔음.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복지지출 비중이 한단계 올라감. 하지만 이번에는 국민부담률이 거꾸로 하향하는 일이 처음으로 벌어짐. 이로 인해 재정위기가 심화되고 있음. 복지지출 확대에 따른 국민부담률 상향(증세) 노력이 필요함.
고경환 외(2012), [복지정책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재정정책: 스웨덴, 프랑스, 영국을 중심으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 유럽 복지국가들의 복지재정 현황과 개혁과정을 복지국가 대표 유형 국가별로 정리한 보고서. 복지국가 태동 시기부터 현재까지를 담고 있음.
7. 복지국가 재정 사례 검토: 스웨덴
<강의초점>
근래 가장 모범적인 복지국가로 스웨덴이 꼽힌다. 스웨덴의 재정(복지지출, 세금)의 기본 체계를 알아보고, 20세기 전반부터 어떤 과정으로 복지와 재정을 마련해 갔으며, 1990년대 위기 이후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스웨덴 사례가 한국에 주는 함의를 정리해 본다.
오건호(2013) “1990년대 이후 스웨덴 재정·복지개혁 내용과 평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워킹페이퍼 2013. 5. 7)
→ 복지국가 모델로 꼽히는 스웨덴에서 진행된 1990년대 강력한 재정안정화 조치가 추진되고 복지가 축소된 개혁과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신자유주의 기조와 다른 스웨덴식 재정개혁, 복지개혁으로 정리.
오건호(2013) “스웨덴 세금의 구조, 특징, 변화” (2013. 6)
→ 스웨덴 조세구조와 특징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보편증세/보편증세의 효과, 1990년 경제 위기 이후 변화/적용 과정을 정리.
한국보건사회연구원(2012) [주요국의 사회보장제도: 스웨덴]
→ 스웨덴의 복지, 재정, 조세 등의 변천과정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음. 국내에서 접할 수 있는 스웨덴 복지, 재정에 관한 가장 종합적인 서적.
8. 우리나라 조세구조의 특징과 증세전략
<강의초점>
대한민국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한 복지재정전략은 무엇인가? 지출개혁, 간접증세(비과세감면 축소, 탈루소득 양성화), 직접 증세 등을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 증세가 불가피하다면 국민이 지닌 조세 저항을 감안할 때 어떠한 증세전략이 필요한가? 이에 법인세, 자산세, 소득세, 사회보장기여금 등의 실태를 살펴보고, 우리의 조건에서 적합한 증세전략을 모색한다. 특히 복지민심이 대중적 주체로 나설 수 있는 복지국가 재정주권운동서 ‘소득별 (누진) 보편증세’를 강조하며 복지목적세의 사회복지세 도입의 필요성을 검토한다.
<참고문헌>
오건호(2013), “우리나라 조세 실태와 과제” (미출간 교안.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블로그 자료실에서 다운 가능).
오건호(2012), [나도 복지국가에서 살고 싶다] (레디앙) 중 “제2부: 복지국가 재정과 시민참여”
박원석의원(2013), “사회복지세 도입 설명자료”
김영순(2011), “보편적 복지국가를 위한 복지동맹” <시민과 세계> 제19호.
→ 복지국가를 이루는 복지동맹의 동학을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한국처럼 노동운동, 진보정당 세력이 약한 곳에서는 의제별 네트워크 성격의 연성권력자원을 활용한 복지동맹의 가능성을 강조.■■
출처: http://www.justicei.or.kr/14?category=637807 [정의정책연구소]